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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메로 가는 길 - 99 조회 : 1,796




면소재지 화산리 마을은 그 규모가 여느 마을과 다를 바 없어 그리 크지는 못했지만 면내 각 부락민들의 행정과 치안을 유지하는 기관들이 들어서 있는 곳이었다. 더불어 군청 소재지인 논산읍을 비롯하여 강경 읍내로 출입을 연계할 수 있는 교통의 요지이기도 했다.
그 마을 한가운데쯤 높다랗게 솟은 교회의 종탑이 또렷하게 보였다. 일요일 아침 예배가 끝났는가 ‘땡가당 땡가당’ 종소리가 언덕배기를 넘어 마을까지 들려왔다.

철길을 건너 마주 바라다 보이는 방죽가엔 흥남이 아저씨네 집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 집 울타리 탱자나무 가지 사이로 작은 멧새 몇 마리가 촐싹대며 놀고 있었다.
기현네 집 앞 마당에서는 기현이 할아버지가 옆집 흥남이 아저씨와 함께 홀태질을 하고 계셨다.
일을 하시느라 목이 마르셨던 기현이 할아버지가 술심부름을 시키셨는지 기현이가 주전자를 들고 집 앞을 나서고 있었다.

첫서리가 내린 후에 캐는 고구마를 서둘러 캐려는 듯 종금이 누나네 밭에서는 종금이 누나와 종연이가 일을 하고 있었다. 갓 캐어낸 벌겋게 빛깔이 고운 고구마를 밭두렁 군데군데 모아놓았다.
나보다 한 살 아래인 종연이가 큼직한 고구마가 주렁주렁 매달린 채 뽑혀 나온 줄기를 높이 들어 보였다. 마치 자랑이라도 하는 듯 물지게를 지고 밭 앞을 지나려는 나를 바라보며 웃었다.

놀이거리가 별로 없던 그 시절 동네 아이들 모두는 연자방앗간 공터나 마을 앞 개울가 다리 위에서 놀았다. 가을 추수기를 맞아 동네 공터를 벼 타작마당으로 동네 어른들이 공동으로 사용하자 동네 아이들은 자연스레 개울가 다리 위로 몰려들었다.

가을 가뭄으로 상평 저수지에 물 수량이 적어지자 개울 바닥에 물이 겨우 차 있었다. 지난여름 장마로 모래가 퇴적되어 이루어진 낮은 모래언덕이 도톰하게 속살을 드러냈다.
낮은 곳에 놀던 작은 송사리들이 물줄기를 어렵게 타고 올라 물이 깊은 곳을 찾고 있었다. 냇가 바닥에 물이 모자라 큰 물고기들은 반쯤 누운 자세로 한쪽 배를 하얗게 드러내어 꼬리를 세차게 흔들며 물살을 타고 있었다.

장난기 많은 아이들이 물고기를 잡을 욕심에 물에 덥석 뛰어들었다. 한쪽 발이 진흙에 달라붙어 발이 빠지질 않자 발을 빼보려고 안간힘을 가해 몸에 균형을 잃어버렸다. 몇 번을 뒤뚱거리다가 그만 나뒹굴어져 온몸이 흙투성이가 되고 말았다.

언덕 위에서 그런 모습을 바라보던 아이들은 손뼉을 치며 천진난만한 얼굴로 큰소리쳐 웃고 있었다. 잠시 쉬고 있던 나도 덩달아 웃고 말았다.
그렇게 티 없이 맑은 동심의 아름다움이 켜켜이 묻어나고 있었다.

가을 햇살이 두 어깨에 따스하게 비치는 한낮 고샅길은 그저 한가롭게만 보였다. 채신머리없이 돌아가던 발동기 소리가 잠시 멈춰 조용해지는 듯했다.

그맘때쯤 마을 앞을 지나 남쪽으로 향하는 뚜껑 없는 화물 곳간차의 연기가 마을 초가지붕 위로 뭉클뭉클 솟구쳐 올랐다. 냇둑 길 건널목을 지나는지 기적소리를 울리며 달리는 열차의 진동이 물지게를 지고 걸어가는 땅 밑까지 울렸다.

구름 한가롭게 무늬를 이어가는 하늘 아래 마을 놀이터 연자방앗간 공터에서는 동근이 아버지가 동네 어른 두 분과 벼 타작을 하고 계셨다.
종구네 집 대문은 역시 굳게 닫혀 있었다. 대문 밖에서 나는 발자국 소리를 들었는지 거위가 ‘꺼어억, 꺼어억!’ 울어댔다.
너무도 조용한 집안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보였다.

키가 작달막한 향나무 두 그루가 서로 다정스레 이마를 마주하고 서 있는 우물가에 닿았다. 우물가 아래 미나리 밭에는 듬성듬성 미나리가 베어져 있었다.

동네 아주머니 몇 분이 모여서 옥순이 어머니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계셨다.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가 싶어 물을 길으며 귀를 기울였다. 그때 입심 좋은 삼식이 어머니께서 말씀하셨다.

“아, 어젯밤에 종구네 집에 기성이가 찾어가 한바탕 되게 시끄러웠던 모양이대, 뭐 말이사 바른 말이지 따지구 보면 딸 가진 집에서 그럴 필요 하나두 없는디. 종구네 아버지가 무신 맘을 먹었는지 그놈에 똥고집을 부리구 난리를 피는지 몰르겄구먼 그려.”
“아따, 그럼 기성이 총각이 머리 숙이구 찾어갔는감유?”

옆에서 김칫거리를 헹구고 계시던 두일이 어머니가 자못 궁금하신 듯 물으셨다.

“아따, 이 사람! 넘 말할 때는 강경 읍내 장터에 갔다 왔는감? 어젯밤에 기성이가 찾어갔었다구 쫌전에 말 안 하던감? 귀는 뒀다 뭐 한뎌.”

삼식이 어머니가 핀잔을 주듯이 말씀을 하셨다. 그러자 그 옆에서 빨래를 하시던 옥순이가 어머니가 말을 거들고 나섰다.

“그리 머리 숙이구 빌어두 안 되면 별 수 없네 그려! 자기 딸자식 자기가 알아서 처리하는 수밖에 뭐, 별다른 방법 있는감? 내가 알기로두 동네 사람들두 그리 애를 썼는디 뭔 놈에 고집을 그리 부리는지”
“어제두 기성이가 우리 집 일하러 와서 내가 슬쩍 떠볼라구 물어 보닌게 빌기는 허는디, 만약에 끝까장 안 받어주면 지두 생각이 있다구 하면서 정희랑 어디루 도망갈라구 까지 생각 허는 모양이던디, 그렇게 되면 종구 애비만 닭 쫏던 개 지붕 쳐다보는 꼴 되는 거지 뭐, 안 그런감?”

삼식이 어머니가 말씀을 하시자 혹시라도 지나가는 종구나 용만이 눈에라도 띌까 싶어 저마다 은근히 주위를 살피며 웃음을 터뜨리셨다.


누군가 나보다 먼저 물지게를 지고 앞서갔는지 물이 흘러넘친 자국이 길바닥에 군데군데 나 있었다.
동네 고샅길을 막 벗어나려할 때였다. 둥구나무 밑에 잠시 다리쉬임을 하려는지 화산리 교회 전도사님이 화산리에 사는 교인들과 함께 머물고 있었다.
그중에 석란이와 정숙이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자전거를 붙들고 서 있는 종구와 주현이 모습도 눈에 띄었다.
아마도 정희누나 일로 바깥출입을 하지 않고 교회에도 안 나가고 있는 종구 아버지에게 심방을 하러 가는 것 같았다.

추석빔으로 받은 코르덴바지는 학교에 갈 때만 입었다. 그냥 집에 있을 때나 동네로 올때는 무릎 부분을 덧대어 꿰맨 헌 바지를 스스럼없이 입고 나왔다.
그런데 하필이면 뜻하지 않게 석란이와 그런 남루한 옷차림으로 마주치게 되어 제발 그냥 지나가 주길 바랐다.
그러나 기어코 석란이가 나를 향해 말을 건네고 말았다.

“야, 상민아! 너 물 길어 가지구 가냐? 힘들 건디 좀 쉬었다 가라.”

나는 그런 내 모습이 초라하게 보일 것 같아 고개를 숙여 앞만 보고 아무런 대답 없이 서둘러 걸어갔다. 부끄러워하면서도 시무룩하게 걸어가는 내 모습이 보기에 좀 그랬던지 주현이가 내 옆으로 뛰어와 말을 건넸다.

“상민아, 석란이가 한 말 너무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말구 그냥 넘겨 버려. 너 기분 안 좋을 꺼 같아서 뛰어온 거닌께, 그러케 알구 가!”
“아냐, 내가 그냥 온 건디, 뭐!”
“시방 모두덜 종구네 집에 갈 건디, 나두 가야될 거 같아서 간다구. 그럼 담에 보자.”
“응, 그려 빨랑 가 봐!”

한나절 햇볕이 잘 드는 방죽 가장자리에는 흰 오리들이 모여 앉아 노란 부리를 이리저리 돌리며 한가롭게 몸을 다듬고 있었다. 우묵하게 파인 흙구덩이에는 낳은지 얼마 안 된 노란 오리 알 두서너 개가 햇빛에 발그레하게 보였다.

철길 건널목을 지나 언덕배기로 오르려 했다. 멀리서 나를 보았는지 검둥이가 뛰어와 매달리려 하여 물지게의 중심을 잡기가 매우 힘이 들었다.

파란 하늘 위로 참새 떼가 시커멓게 무리를 지어 세차게 날아갔다. 철로 송전선 위엔 나를 보고 경계하는 듯 까치 한 마리가 홀로 앉아 울고 있었다.

널따란 밭들로 둘러싸여 외떨어져 있는 작은 우리 집은 더없이 쓸쓸하게만 보였다. 산자락 밭들에 가을걷이가 끝나자 사람들 발걸음이 뜸해졌다. 이따금 산새소리만 간혹 들려올 뿐 그저 더없이 고요하기만 했다.

자연의 섭리에 순응하듯 뒷산은 발그스름하게 단풍이 물들기 시작했다. 밭머리에 서 있는 벚나무는 유난스레 가을을 빨리 타는지 어느새 잎들이 누렇게 물들었다.
나무 밑 주위엔 나뭇잎이 떨어져 있어 고적하기만 했다.

그나마 늘 함께하는 검둥이와 앞마당에 노는 어미 닭과 병아리들이 있어 조금은 덜 적적했다.

가을 해가 동네 방앗간 지붕 위에 머물려할 때 심방을 마치고 화산리로 돌아가려는지 동구 밖에 교인들의 모습이 보였다. 배웅을 하는 종구와 주현이의 모습이 함께 보였다.

강경 읍내로 이어지는 신작로는 부연 모습으로 길게 뻗어 있었다.
늦은 오후 햇살 속에 노랗게 잎이 물든 가로수가 길 따라 곱살하게 늘어 서 있어 빼어난 솜씨로 잘 그려진 한 폭의 그림 같았다.

그 찬란하고 아름다운 자연의 조화를 바라보고 있으려니 동네 앞 나무다리를 건너는 교인들의 모습이 보였다.
벼 바심 일을 치르려 찬거리를 준비하러 읍내에 다녀오는지 마을 아낙네들이 걸어오고 있었다.
무엇이 그리 우스웠는지 시끄러운 웃음소리가 철길 아래 달구지 길까지 들려왔다.

마루에 앉아 있으려니 배가 좀 출출하여 부엌으로 갔다. 아침에 엄마가 만들어 놓은 해콩을 듬뿍 넣은 호박죽을 한 그릇 떠와 먹고 있었다.

검둥이란 놈이 머리를 치켜 올려다보며 작은 눈을 커다랗게 뜨고 조금 주었으면 하는 듯이 측은하게 바라보았다. 검둥이 밥그릇에 호박죽 몇 숟가락 담아주니 기다렸다는 듯이 뚝딱 먹어치웠다.
그리고 넉살스럽게 다시금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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