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스치는 듯싶었던 어린 아기와의 짧은 만남이었다. 그러나 그 것이 훗날 인연의 고리가 되려고 그랬는지 아기에 대한 아쉬움을 쉽사리 떨쳐내지 못했다. 아기와의 만남이 있은 후부터 가벼운 동정심보다는 더욱 짙은 애잔함이 온 마음에 가득 서리기 시작했다.
내 사는 작은 초가집은 마을로부터 조금 멀리 떨어진 산자락 끝머리에 외롭게 자릴 잡고 있었다. 그곳이 예전에는 상엿집 터였다. 종구네 집에서 얻어 쓴 빚에 쪼들려 살던 집을 남에게 내어주고 이곳으로 떠나올 때 우리의 처지를 가엽게 여긴 동네 사람들의 도움으로 군데군데 수리를 한 겨우 방 두 칸 딸린 오두막집이었다. 그 오두막집은 나이가 드신 노인 한 분이 홀로 외롭게 사시던 집이였다. 그러던 어느 날 노인이 숨을 거두셔 그 후로부터 텅 비워진 채 서너 해가 지나 비바람에 지붕 한쪽이 주저앉은 보기 흉한 모습으로 변해 버린 초라하기 그지없는 초옥이었다. 막상 종구네 집에 지은 빚을 갚고 나니 오랜 시달림에서 벗어나 홀가분하기는 했지만 어린 나이에 갑자기 변해 버린 생활환경에 적응하기가 퍽이나 어려웠다. 그래도 그토록 간고한 삶일지라도 사랑하는 내 어머니와 더불어 살아갈 수 있다는 것에 큰 의지를 하며 살았다.
언제나 땅거미 찾아드는 해질녘이면 나 홀로 사립문 앞에 앉아 더디 오는 어머니를 그리도 눈 빠지게 기다렸다. 그런 애틋한 외로움도 내가 간절하게 갈구하는 모정에 한몫을 하는 것 같았다.
조금 전에 어정쩡하게 헤어진 아주머니와 아기 때문에 신경을 쓰다 보니 여느 날보다 학교에 갈 시간이 좀 늦어졌다. 책보자기를 어께에 둘러메고 빠른 걸음으로 도랑을 건너 냇둑 길에 올라섰다. 내가 조금 지체하는 바람에 옥순이가 얼마동안 나를 기다리다 지쳐 먼저 앞서 간 것 같았다. 잠시 후 옥순이가 동네 아이들과 함께 비석골 앞을 지나는 모습이 보였다. 조금은 늦은 것 같아 숨이 차오르게 뛰어가 옥순이를 새터 나들목에서 겨우 만날 수 있었다. 그런 내 모습을 본 옥순이가 의아스러운 눈빛으로 나에게 물었다.
“야, 니네 집 오늘 무신 일 있냐? 내가 건널목에서 너를 을매나 기다렸는지 알어? 기다리구 기다리다가 하두 안 오길래 학교는 늦을 것만 같구해서 혼자 그냥 왔어. 그런디 뭔 일 있는 거냐 이렇게 늦게 오게.”
“아니, 먼 일은 먼 일이냐 아무 일두 없었어. 그냥 늦어 버린 거여. 얼른 가자.”
학교 교문 앞에 닿을 때까지도 마음은 온통 아기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다른 날과 달리 그리 오랫동안 아무런 말없이 걸어만 가는 내 모습이 다시 이상스러운지 작은 키의 옥순이가 위로 내 얼굴을 올려다보며 다시 물었다.
“참, 이상하지. 너 오늘은 말두 잘 안 허구, 뭐 잘못해서 니네 엄니헌티 혼났냐?” “아니여, 좀 그런 일이 있었는디, 나중에 내가 말해 줄틴께 그리 알어.” “야, 뭐시 나중에냐, 답답허게시리 지금 속 시원허게 말해 버리지.”
궁금한 마음에 계속 되묻는 말에도 내가 입을 굳게 다물고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옥순이가 더욱 궁금한 얼굴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교무실에서 교감 선생님이 치시는 종소리가 울려 아침 조회시간이 되었다. 선생님께서는 분필로 칠판 위에 ‘가을 수학여행’ 이라고 써놓으셨다. 그러자 선생님이 말씀을 하시기도 전에 교실은 온통 환호성으로 시끄러워졌다. 조용히 하라고 다그치시는 선생님의 말씀에 교실 안은 다시금 조용해졌다.
“이번에 가을 수학여행은 여러분이 졸업을 앞두고 가는 뜻 깊은 여행으로 여러분이 평생토록 간직할 추억에 남을 여행이니까 단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두들 참여하길 바란다. 목적지는 백제의 옛 수도 ‘부여’다.”
그렇게 선생님이 말씀 하시자 모두들 들뜬 기분에 교실이 또 다시 웅성거렸다. 그리고 이내 선생님께서 말씀을 이으셨다.
“그날 우리가 타고 갈 버스를 대절하는 비용을 포함한 여행 경비는 삼일 후에 부모님들에게 드리는 가정통신문에 적어 놓을 테니 그리들 알고 오늘은 오전 수업만 하고 오후에는 실과 실습으로 학교 울안에 있는 밭에서 고구마 수확을 한다.”
선생님이 말씀을 끝내시고 교무실로 가시자 또다시 교실 안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가을 운동회 다음으로 손꼽아 기다렸던 수학여행에 대한 기대감에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들 마음이 고무풍선처럼 부풀어 올랐다. 그런 탓에 저마다 가을 여행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아 교실 분위기는 마냥 들떠 있었다.
운동장 끝까지 줄지어 늘어선 플라타너스 나무의 잎들이 짙은 담홍색을 발하고 있었다. 마른 잎사귀들이 서로 손바닥을 비벼 하나둘씩 너푼너푼 떨어지는 가을 교정은 더없이 숙연하기만 했다.
지금쯤 동네 누구네 집에서 아기가 따뜻한 밥물 한 숟가락이라도 잘 얻어먹고 있는가 하는 걱정스런 생각이 들었다. 그런 우려스러운 마음은 학교 밭에서 고구마를 캐면서도 계속 이어졌다.
포만하기만한 늦가을 다스한 햇살이 교실 유리창을 두드리고 있었다. 햇볕이 등 언저리를 포근하게 감싸는 오전 수업시간이 끝날 무렵 선생님께서 말씀을 하셨다.
“다들 잘 들어라, 오후에 교감 선생님과 내가 논산 읍내에 있는 버스회사에 너희들이 수학여행에 타고 갈 관광버스 계약 문제로 다녀올 테니 2반 선생님 말씀에 따라 열심히 작업을 하고 끝마치면 각자 집으로 돌아가기 바란다.”
학교 건물 뒤편에 있는 밭에는 2반 담임선생님의 지시에 따라 6학년 전체 아이들이 한데 어울려 고구마 수학을 했다. 학교 소사이신 양씨 아저씨와 함께 고구마 넝쿨을 제치고 쇠스랑으로 밭을 파헤쳐 고구마를 캤다. 한쪽 밭두렁에는 종구와 주현이의 모습도 보였다.
여자아이들은 캐놓은 고구마를 삼태기에 담아 한데 모았다. 높다란 오동나무 가지 위엔 뭉게구름이 사이좋게 한데 모여 놀고 있었다. 학교 울타리 풀밭에는 교장선생님이 키우시는 젖을 짜는 하얀 염소가 눈에 띄었다. 한가롭게 풀을 뜯고 어미 옆에 앙증맞게 생긴 어린 염소는 이리저리 덤벙거렸다.
열심히 작업을 일찍 끝마치면 얼른 집에 보내주신다는 선생님 말씀에 모두들 얼른 집에 가고 싶은 마음에 부지런히 일을 했다. 그런 탓인지 고구마 캐는 작업이 생각보다 일찍 끝났다.
높다란 측백나무 울타리 너머에서 기차의 기적소리가 우렁차게 울렸다. 전라도 광주에 있는 군부대로 군인들을 실으러 가는 군용 수송열차가 내뿜는 검은 연기가 담 너머로 모락모락 퍼져 날 즈음이었다.
선생님께서 작업이 끝났음을 알려주시며 모두들 수고했다고 칭찬해주셨다. 작업이 끝나자 모두 학교 우물가로 뛰어가 손과 발을 씻고 교실로 가서 책보자기를 챙겨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억새풀의 하얀 머리가 오후 햇살에 은빛으로 찰랑거렸다. 비석골 언덕배기를 넘어 산초나무 옆을 지나려니 불어오는 바람결에 냄새가 지긋이 풍겨왔다.
추수가 끝난 텅 빈 밭둑길을 내려서는데 뒤따라오던 종구가 자전거 뒤에 주현이를 태우고 달려왔다. 그리고 옆에 따라오던 옥순이를 아무런 이유 없이 툭하니 건드리며 잽싸게 달려갔다. 그러자 화가 잔뜩 난 옥순이가 종구를 향해 앙칼지게 소리를 쳤다.
“야, 왜 사람은 치구 지랄이냐? 빙신 같은 게 촌놈 티 내나, 자전거 타면 제일인감? 저 지랄 병 허구 다니닌께 지네 집이 재수 옴 붙어서 맨날 시끄럽지 에이구.” “야, 옥순아! 냅싸 둬, 다 나헌티 직접 못하닌께, 나보라구 괜히 너한티 찝적거리는 거여.” “그래두 그렇지 가만히 가는 사람 뭣 땀시 툭 건드리구 지랄을 헌다냐? 참 석란이두 눈이 뼛지 저런 걸 뭘 보고 좋다구 허는지 몰라.”
비록 작달막하지만 야무지게 생긴 옥순이가 화가 몹시 난 것 같았다. 동네를 항해 거들먹거리며 달려가는 종구의 모습을 못내 토심(吐心)스런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