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에워싸고 있는 그 모든 주위가 차분한 가운데 변화를 이루고 있었다. 한껏 기승을 부렸던 여름 불볕더위는 등껍질을 벗길 듯이 꽤나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러나 늦가을로 접어들자 추위가 일찍 찾아오려는지 이내 무서리가 내릴 것 같이 아침저녁으로는 날씨가 꽤나 싸늘했다.
산과 들녘에 뽀얀 안개가 차분하게 깔리기 시작하여 산릉선이 뿌옇게만 보였다. 언덕 아래 주막집 정류장 한 모퉁이에 우두커니 서 있는 버드나무가 멀리 떨어져 있는 만큼이나 거뭇거뭇하게 보였다. 그리고 주막집 초가지붕 위로 서둘러 초저녁 마실을 나온 보름달이 허연 목을 길게 빼어 내민 억새풀 위로 부유스름하게 몸체를 드러냈다.
어머니가 읍내로 장사를 나가셔 집안일을 살피지 못하자 그 빈틈을 아주머니께서 자상하게 메워 주셨다. 내가 어쩌다 마음이 내키면 한 번씩 쓸고 닦던 마루도 틈이 나는 대로 닦아 제법 반질반질하게 윤이 났다. 그렇듯 적막하기만 했던 내 집에 작은 것 하나에서부터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어느덧 하루해가 서편으로 기울자 온종일 마당에서 놀던 닭들이 잠자리를 찾으려 둥지에 오르려는지 토방 위에 모여들었다. 읍내에서 장사를 끝낸 후 저녁 막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시는 어머니를 마중하려고 나는 사립문 밖을 나섰다. 그러자 비록 말은 못하실지라도 눈치가 꽤나 빠르신 아주머니께서 어머니 마중을 함께 따라나서려 했다. 그래서 손짓발짓을 다해 겨우 집에 머무시게 하고 검둥이와 함께 벼랑바위 밑에 닿았다.
풀숲에서 우는 풀벌레 소리를 듣고 있는데 철길 건널목 너머로 귀에 익은 구성진 노랫소리 한 자락이 들려왔다.
“한 많은 이 세상 야속한 님아, 정을 두고 몸만 가니 눈물이 나네, 아무렴 그렇지 그렇고말고, 한 오백년 살자는데 웬 성화요.”
병수 아버지께서 오르막길 건널목을 건너오시며 노래를 불러 숨이 차셨던지 잠시 노랫소리가 멈췄다. 건널목에 오르자 급하게 철길 아래로 내려서 허리끈을 풀고 아랫도리를 내려 시원스레 소피(所避)를 보고 있었다. 그러면서 다시금 중얼거리시듯 노래를 이으셨다.
병수 아버지께서 주막집에서 술을 거나하게 드셨는지 취하신 모습이 달빛에 희미하게 보였다. 평소에 자신의 지론이 사리에 어긋나지 않아 옳다고 생각하면 끝까지 밀고 나가려는 결단력이 남보다 뛰어나신 분이었다. 그리고 동네 사람들로 부터 평판이 좋아 동네 주민들에게 큰 믿음을 주는 분이었다.
그 실례로 소작농들에게 거친 언행을 일삼는 종구 아버지의 심한 행동을 늘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그리고 언제나 약자의 입장에서 그 들과 아픔을 늘 함께 하려 했다. 그분의 심성이 그렇다보니 민심이 밑바닥을 치는 현 정권의 무능부패에 대하여 늘 불만을 갖고 살아오셨다. 그런 탓에 가슴속에 치솟는 울분을 노래로라도 풀어 보려 하시는 것 같았다. 그분의 속심을 잘 헤아리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저 술을 너무 좋아해서 아무런 생각도 없이 사시는 것 같이 가볍게 생각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혼탁한 시대를 바라보시는 그분의 시선은 그 누구보다도 예리했고 의지는 결연했다.
안개 가득하게 서려오는 읍내로 곧게 뻗은 신작로엔 오고 가는 자동차가 서둘러 불을 켜 안개 속에 누런 불기둥이 주위를 환하게 밝혔다. 샛강 다리 위를 건너오는 마지막 버스가 안개를 헤치며 마을 주막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언제나 끝머리 막차에는 장날을 제외하고는 내리는 사람들이 그리 많지 않았다. 오랜 세월을 두고 눈에 익은 사람들인지라 조금 멀리서 걸어와도 동네 사람 누가 누구인지를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건널목을 건너서 벼랑바위 앞에 다가서시는 어머니의 모습이 보였다. 반갑게 검둥이와 함께 힘차게 달려가 검둥이가 꼬리를 마구 흔들며 어머니를 반겼다.
“엄니, 아까 병수네 아버지가 술 취해서 노래 불르면서 지나갔어.” “에구! 또 술 먹었던감, 이 놈에 세상이 이렇게 어지럽다보니 술을 안 먹을 수 있는감. 겉으로 터놓고 속속들이 말은 안 해도 그 양반 나름대로는 다 생각이 있겠지, 뭐 원체 생각이 깊은 사람이닌께.” “참, 그리구 엄니! 아침에 왔던 그 아줌니 있지? 음 시방 우리 집에 와 있어.”
아주머니께서 우리 집으로 되돌아오신 것에 대하여 어머니께서 못마땅하게 생각하실까 하는 노파심에 얼른 말을 해놓고 어머니의 눈치를 슬슬 살폈다.
“뭐? 시방 집에 있다구? 갈 디가 영 만만치 않었능감? 다시 되돌아오게. 에이구, 그 여자 팔자나 내 팔자나 서방 없이 사는 꼬라지 뻔헌디 그나저나 으쩐다냐? 야박시럽게 나가라구두 못허구 그렇다구 들여놀 입장두 못 되닌게 으쩌면 좋다냐? 암튼 큰일이네 그려.”
젓갈 동이와 똬리를 손에 드시고 검둥이를 앞세워 달빛 비치는 밭둑길을 걸으셨다.
“엄마 그냥 며칠 만이라두 있으라구 혀, 증말루 불쌍허드라, 동네 인심 박하지 않은디 밥두 못 얻어 먹구 아까 낮에두 둥구나무 밑에서 동네 애들이 흙덩어리로 때리구 그지라구 막 놀려대서 울고 있더라구. 그래서 내가 집에 데리구 왔어.”
아주머니의 각박하기만 한 입장을 애써 표현하려 하자 이내 어머니께서 난처하신 듯 말을 이으셨다.
“데리구 온 건 나쁘지 않은디, 잠자리두 그렇구, 암튼 걱정거리 하나 늘었다. 허긴 하기 좋은 말루 숟가락 하나 더 놓으면 된다구 허지만 그렇지만두 않은 것인디. 암튼 우리집하고 무신 인연이 될라구 이러는가 통 모르겄네, 그려.”
밤안개에 눅눅하게 젖은 소나무의 자잘한 솔잎들이 흐릿한 달빛에 희뜩희뜩하게 보였다. 발밑 잔디 풀숲에서 풀벌레 울음소리가 낭랑하게 들렸다. 아마도 가을을 서정적으로 읊는 귀뚜라미 소리인 듯싶었다. 그리고 마냥 어둑하게만 보이는 뒷산 물레치기 갈참나무 숲 어디쯤에서 부엉이 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려왔다.
구부러진 밭둑을 걸어 집에 닿아 마당 안으로 들어서니 방안에 아기를 재워 놓고 나오셨는지 옹색하게만 보이는 쪽마루에 아주머니가 홀로 앉아 계셨다. 어머니와 함께 울타리를 돌아서 마당 안으로 들어서자 어머니에게 머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그리고 아주머니게서 젓갈 동이와 똬리를 받아 내려놓으려 하시자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하는 행실을 보며는 막무가내로 자란 건 아닌 듯싶은디, 저리 젊디젊은 나이에 어찌다가 저리 됐을까? 참 안쓰럽기만 허네 에이구 모진 놈에 세상 공평허지두 못허구. 무신 죄를 졌다구 저리 내박쳤을까?”
호롱불빛이 흐릿한 방문을 열고 방안으로 들어서니 아주머니가 저녁 밥상을 차려 놓으셨다. 밥보자기로 덮어 차려놓은 밥상을 가리키며 어머니에게 어서 드시라고 손짓을 하셨다. 그러자 어머니가 웃으시면서 밥상을 당겨 놓고 같이 먹자고 손짓을 하시자 아주머니도 웃으시며 밥숟가락을 들으셨다.
온종일 아주머니 등에 업혀 햇살에 지쳤던지 넘실거리는 호롱불 밑에 아기가 새근새근 잠에 들어 있었다. 어머니께서는 그런 모습이 귀여우신지 아니면 측은했던지 아기의 얼굴을 한참동안 말없이 바라보시고 무엇인가 깊은 생각에 잠기시는 듯했다.
얼마 후 모두들 밥상에 밥숟가락을 내려놓자 아주머니는 밥상을 냉큼 들고 설거지를 하려고 부엌으로 나가셨다.
“암튼 잘은 모르것다마는 이것두 전생에 무신 인연인 듯허닌께 다만 며칠이라두 묵었다 가게 허는 게 좋것다, 내가 조개젓 한 사발 더 팔면 되지 뭐.” “그려, 엄마 잘 생각해부렀어. 좋은 일허면 다 우리 헌티루 복이 돌아오것지 뭐.” “참, 그리구 쬐금 있다가 애 에미 방에 들어오면 너는 잠시 밖에 나가야 헌다, 몸 씻는 건 그렇타치구 우선 단속곳이라두 갈아입혀야 허긋다.”
어머니는 반닫이 문을 여시고 속옷을 찾고 계셔 나는 그만 밖으로 나와 버렸다. 아주머니를 그리 따뜻하게 대해주시는 어머니의 배려에 한결 마음이 놓였다.
밤안개 가득 낀 윗마을 화산리의 전기불빛들이 띄엄띄엄 우윳빛처럼 부옇게 보였다. 산릉선으로부터 불어오는 밤바람이 솔잎을 스치는 소리가 스산스럽기만 했다.
부연(浮煙)에 가려진 산모퉁이에 한차례 굵고 밝은 불빛이 세차게 번뜩였다. 아마도 남녘으로 가는 밤 열차가 논산 읍내 외곽을 벗어나 등화동 산자락을 뒤로 밀치고 달려오는 성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