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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메로 가는 길 - 106 조회 : 1,904




중학교 입시시험 준비로 하루의 일과가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기만 했다. 그리 분주하게 이어지는 학습에서 얻어지는 새로운 경험들이 한데 모아져 든든한 밑바탕이 되는 듯싶어 마음이 흡족했다.

정상수업에서 늘어난 과외학습까지 모두 끝마치고 나니 하루가 그리도 빨리 지났다. 서편에 해가 기운지도 이미 오래되어 주위가 온통 어둠에 잠겨 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깊어만 가는 밤은 온 누리를 고요 속에 잠재우려 했다.

어두운 밤길을 걸어 새터 마을 나들목을 지나 언덕위에 올라 한차례 숨을 가다듬었다. 어둠에 둘러싸여 다소곳이 머릴 숙인 마을의 초가지붕들이 높다란 둥구나무 뒤로 아슴푸레하게 보였다.

언덕 아래로 바라보이는 마을엔 한두 집 건너 띄엄띄엄 호롱불을 희미하게 밝히고 있었다. 더러는 그 가늠한 불빛이 왠지 힘들게 살아가는 여린 민초들의 한을 빛으로 밝히고 있는 것처럼 애처롭게 보이기도 했다.
크고 작은 숱한 별들이 저마다 앞을 다퉈 어여쁘게 빛을 발하는 밤하늘 아래 소담스럽게 바라보이는 마을엔 방문 에서 새어나오는 불빛만으로도 그쯤에 누구네 집이 들어서 있는지 쉽게 가늠할 수 있었다.

어찌 보면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그 모든 사물을 쉽사리 가늠할 수 있는 것은 내가 고향 땅에 몸 붙여 살아온 나날만큼이나 마을과 정이 깊이 든 것 같았다. 더불어 쉽사리 변색될 수 없는 고향에 대한 돈독한 믿음은 내 삶이 끝나는 날까지 지속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맘때쯤이면 하현달은 밤하늘에 홀로 떠 있어 더욱 쓸쓸하게 보였다. 늦은 시간까지 수업을 마치고 마을로 돌아오는 냇둑 길을 걷고 있는데 달빛에 은파를 이루며 흐르는 개울물 소리가 귓가에 시원스레 들려왔다.
그런 모든 것이 늘 내 곁에 다정하게 머물러 있는 고향 땅이 그지없이 좋았다. 더불어 고향은 마음에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삶에 또 하나의 생기 가득 찬 활력을 불어넣어주는 원천지였다.

거무레한 어둠살은 산자락 아래 오붓하게 자릴 잡은 내 작은 집에도 어김없이 찾아들었다. 방안이 어두워지자 아주머니께서 서둘러 불을 밝혀 놓았는지 흐릿한 불빛이 봉창 틈사이로 새어나와 더욱 고연하게 보였다.
그리고 깊어가는 밤에 정취를 더하는 듯 고요한 밤의 정적을 깨는 듯 앞산 골짜기 어드메에서 접동새 울음소리가 가냘프게 들려왔다.

개울 건너 둔덕진 곳에는 허연 목을 기다랗게 드러낸 억새풀이 밤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과중하게 늘어난 수업시간 때문에 저녁때를 넘긴지 한참이나 되었다.
홀쭉해진 배에 다소는 허기를 느끼면서 고즈넉하게 보이는 언덕배기를 내려섰다.

야트막하게 바라보이는 둔덕 너머 비석골 입구에는 조금은 허름해 보이는 상엿집이 음산스럽게 자릴 잡고 있었다. 허물어진 벽 틈사이로 붉고 파란 천 조각들이 흐린 달빛에 음산하게 반득거려 스산한 마음에 저절로 몸이 움츠러들고 머리끝이 쭈뼛쭈뼛해졌다.

짙은 어둠을 동반한 무거운 침묵 속에 옆에 있던 옥순이가 나보다 더 겁이 덜컥 났는지 본능적으로 내 옆으로 바짝 달라붙으며 말을 붙였다.

“상민아, 낮에는 날이 밝아서 괜찮았는디 밤만 되면 되게 무섭다. 나는 젤루 무서운 디가 요기 상엿집이랑께”

사실은 대낮에도 사람들이 그 근처를 지나려면 왠지 을씨년스러워 꺼려했다. 더욱이 밤인지라 내심 무섭기는 옥순이나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조금은 마음에 위안이 되는 것은 마을로부터 이십여 리쯤 떨어진 논산 훈련소 사격장이 있기 때문이었다.
비록 멀리 떨어져있지만 야간 사격을 하는지 ‘따다당 따다당 따다당 따다당’ 총소리가 요란스레 들려와 그나마 조금은 무서움이 덜했다.
그리고 꼴에 사내랍시고 달린 고추 값은 하려고 옥순이에게 말했다.

“야, 너는 빙신같이 맨날 무섭다구만 허냐, 너 시방 총 쏘는 소리 들었지? 근디 뭐가 무섭다구 그러냐! 귀신이 어딨어. 만일 있다구 혀두 총으로 한방 쏴 버리면 그만이지, 안 그러냐?”

어설프게 객기를 부리자 옥순이가 이내 말을 받아쳤다.

“야, 증말루 무서우닌께 그러지, 넌 괜찮을란가 몰라두 나는 되게 무서워 죽것구먼 그러네.”

옥순이가 두려움이 가득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흐릿한 달빛 아래 겨우 보일락 말락 한 개울 둑길을 걸어오려니 샛강 철교를 건넛마을 앞 건널목으로 달려오는 기차가 기적소리를 세차게 울렸다.

광주를 출발하여 서울역 밑에 있다고 하는 용산역으로 가는 군용열차였다. 기관차 앞머리에서 쏟아져 나오는 아주 밝은 불빛이 텅 빈 들녘을 대낮 같이 환하게 밝히며 달려가고 있었다.
그 불빛이 새터마을을 거쳐 멀리 용화리 동네 어귀까지 훤하게 비췄다. 더불어 건널목에 마중을 나오신 어머니와 옥순이 어머니의 모습도 뚜렷하게 보였다.
그리고 우리들보다 한참을 앞서 달려갔는지 동네 어귀엔 자전거를 타고 가는 종구와 뒤에 타고 가는 주현이의 모습도 불빛 따라 조금은 희미하게 보였다.

방금 전까지 내 옆에 달라붙어 있던 옥순이가 자기 어머니의 모습이 보이자 나를 밀쳐내고 앞을 서 줄달음질쳤다. 그리고 작달막한 몸으로 크게 소리를 질렀다.

“엄마, 엄마!”

건널목을 건너 걸어오는 자기 어머니의 치맛자락을 붙들고 어미 닭 품속에 몸을 숨기려는 병아리처럼 찰싹 달라붙었다. 오랜 긴장감 때문이었는지 쫓기는 노루처럼 숨이 가뿐지 말도 잘못하고 헐떡거렸다.
그렇게 건널목에 닿아 옥순이 어머니에게 인사를 드렸다.

“안녕하셨어유?”
“응, 중핵교 들어갈라구 고생들 헌다. 그리구 상민아, 내가 니네 집에 줄라구 감이란 고구마 좀 싸놨는디. 낼이 공일날이닌께 우리 집에 와서 가지구 가그라,”

옥순이 엄마가 말씀하시자 옆에서 듣고 계시던 어머니께서 말씀을 하셨다.

“뭐하러 그런 걸 자꾸 줄라구 그런다냐? 부담시럽게시리 니나 먹지 않구서리.”
“아녀, 그런 법이 아니여, 어디 우리가 남이냐, 콩 한 쪼가리라두 나눠 먹어야지, 그나저나 이번에 니가 큰맘을 먹었다. 암튼 불쌍한 사람 돕는 거시 좋은 일이기는 허지만 느네 두 식구 먹구 살기두 빠듯허구 날 한질라 자꾸만 추워지는디, 이 겨울 날라면 참말루 걱정이다.”
“그려, 그건 니 말이 다 맞는 말인디 그래두 저 어린 걸 데리구 으디루 갈꺼냐? 차마 할 소리는 아니지만 만에 하나 이 추운날 어린게 잘못이라두 되면 으짜것냐? 그냥 한 목숨 또 버리는거지, 음”
“내가 알지, 왜 모르것냐? 상민 에미야, 너두 니 어린 새끼 하나 약 한 첩 못써보구 그리 허망하게 죽어서 앞산에다 파묻고 지금까장 을매나 가슴 아파했냐? 넘 식구 데리구 있는거 힘든 줄 알지만서두 좋은 일 허는 건께 참구 있어 봐, 나두 형편 되는디까장은 도와 볼 틴께.”
“그려, 니 맴이 그렇다면 더 이상 할 말 읍지 뭐. 암튼 고맙다, 옥순 에미야, 옥순이란 년 배고풀라 얼른 들어가, 어여들!”

옥순이 어머니와 옥순이는 건널목을 건너 동네 어귀 둥구나무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어머니와 나는 논둑길을 지나 둔덕 너머 집으로 향했다.
몇 걸음 앞서가시던 어머니께서 말씀을 하셨다.

“애기 포대기가 넘 더러워서 오늘 하나 사다주닌께 그리두 좋아하드라, 정에 굶어서 그런지 막 울려구 혀서 겨우 달래 놓구 나온 기여, 그러닌께 바깥티다 내놓은 그 포대기랑은 불에 태워버리든지 혀라 어디 볼썽사나서 쓰겄더냐, 글구 내일랑은 애기 에미 발 치수를 지푸래기로 재가지구 가야 허긋다 그게 어디 신발이드냐, 에휴!”
“와, 울 엄니 최고다, 천사보다두 더 착한 사람인께, 앞으루 하늘이 많이 도와 줄 꺼여.”
“뭐, 복이라두 받을라구 그런다냐, 인지상정이라구 그저 어린 걸 보면 잃어버린 니 누이가 자꾸만 생각이나 눈에 밟히고 마음이 짠해서 더 그러는거여 그런께 너두 그저 있다가 가는 날까지라두 맴 편허게 해 줘라, 그게 사람 도리닌께.”
“응, 알았어 엄니. 나두 아줌니헌티 잘 할게”

밤하늘엔 초롱초롱한 별무리 한 자리가 오순도순하게 우리들 머리 위에 머물고 있었다. 그렇게 아주머니와 아기를 거두어주신 어머니의 심성이 그지없이 좋고 고맙기만 했다.
허나! 늘 양식 걱정에 시름에 가득 찬 어머니의 모습을 바라보면 마음이 무거웠다. 어머니 뒤를 따라 집으로 향하며 몇 차례나 생각을 거듭해보았다.

‘언제쯤이나 가난이 주는 힘든 멍에에서 훌훌 털고 벗어나 해맑음은 웃음을 지으며 살 수 있느 날이 올련지’

짙어가는 어둠이 그 모두를 삼켜버리듯 내 몸을 감싸고도는 숱한 번민도 어둠이 묻어 주길 바랐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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