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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메로 가는 길 - 108 조회 : 1,560




해마다 초여름이 되면 울안의 석류나무에 빨간 꽃이 탐스럽게 피어 그 자태가 유난스레 돋보였다. 그런 탓에 산길을 오르내리는 동네 사람들이 시나브로 눈길을 주었다.
그러나 꽃이 지고 난 뒤로는 어느 누구 하나도 눈여겨보질 않았다. 그런 가벼운 인간들의 속성이 못내 못마땅한지 석류나무는 부루퉁하게 토라진 얼굴로 긴 여름을 혼자서 보내고 있었다.

그러다 가을로 접어들자 등껍질이 붉다 못해 거무추레한 빛으로 변한 석류가 결실의 계절인 가을에 풍요를 양껏 누리려는 것 같이 보였다. 탱탱한 가을 햇살에 새하얀 구슬을 쏟아내려는 듯이 입을 힘껏 벌려 속살을 드러냈다.
그에 뒤질 새라 두엄 가에 서있는 무화과나무도 잘 익은 등껍질을 터트려 옆으로 비스듬히 삐져나온 속 알맹이가 먹음직스럽게 보였다.

안마당엔 한낮 햇살이 자글자글하게 내리쪼였다. 푸르디푸른 하늘 아래 몸뚱이가 온통 붉은 고추잠자리가 깊어가는 가을을 만끽하듯 떼를 지어 날고 있었다.
이제는 여법 모양새를 갖춰 가는 어린 병아리들도 어미 뒤를 따라 마당 안을 한가롭게 거닐고 있었다. 마루 기둥에서 대추나무 가지로 이어진 축 늘어진 빨랫줄엔 아침에 빨은 아주머니 옷 한 벌과 아기 기저귀가 즐비하게 널려 있었다.
가늠한 자태를 드리운 실구름 한 자락이 아주 차분하게 빨랫줄 사이를 넘나들고 있었다.

부엌문 앞 벽엔 시래기를 만들려는지 비스듬히 세워놓은 대나무 소쿠리 안에 삶은 배추 겉잎이 보기 좋게 널려 있었다. 쪽마루에는 아주머니께서 밥상 위에 콩을 헤쳐 놓으시고 티를 고르고 계셨다.
등 뒤에 업힌 아기가 따스한 한 줌 햇볕에 졸음이 오는 듯 작은 입을 앙증맞게 벌려 하품을 하고 있었다.
그런 모습들이 한데 어울려 적절한 균형을 이루니 초라한 내 집이 비록 단출하게 보일지라도 사람 사는 것 같이 훈훈하게 보였다

옥순이네 집에서부터 어깨에 둘러메고 온 포대자루를 마루에 내려놓고 펼쳐 보았다. 장루 안에는 식탐이 절로 날 정도로 잘 익은 고봉시와 불그레한 햇고구마가 예법 들어 있었다. 포대자루 속에서 감을 하나 꺼내어 아주머니에게 드렸다.

오전 내 방죽가 회양목 머리 위에 주춤대던 가을 해가 서편 읍내로 머릴 돌려 발걸음을 했다. 하늘에는 구름은커녕 티 한 점도 보이지 않아 더없이 쾌청했다.

철로길 너머로 바라보이는 달구지 길에는 동네 가을 벼 수매와 공출 때 쓰일 가마니를 가득 실은 순아네 소달구지가 보였다. 벼랑바위 앞을 지나 마을로 향해 느릿느릿 여유롭게 다가오고 한낮 햇볕에 누런 암소 등 언저리가 반득반득하게 보였다.

언제나 그때쯤이면 텅 빈 집에 늘 혼자서 점심밥을 먹었다. 그러나 이제는 아주머니가 옆에 계셔 같이 머릴 마주하고 밥을 먹으려니 덜 외로웠다. 그런 기분 때문인지 밥맛도 한결 좋았다.

거무튀튀하게 보이는 보리밥이라도 고추장에 석석 비벼먹고 싶었다. 종지를 들고 장독대로 가 고추장 항아리 뚜껑을 열고 고추장을 조심스레 한 숟갈 떠 가지고 왔다.
그리고 널따란 국그릇에 배추 생절이와 고구마 줄기 말려 볶은 것을 넣어 끓인 된장찌개를 조금 넣고 석석 비볐다. 모처럼 만에 배부르게 밥을 먹고 나니 포만해져 마루에 앉아 있었다.

뒤뜰에서 푸드득거리는 소리가 들려 집 모퉁이를 돌아가 바라보았다. 늙은 수탉이 나이 어린 수탉과 날개를 퍼덕거리며 아주 격하게 싸움질을 하고 있었다. 날카로운 부리로 서로 볏과 목덜미를 쪼아 벼슬 군데군데에 피가 흐르고 있었다.

검둥이는 별로 신경이 쓰이질 않는지 멀찌감치 떨어져 고개만 갸웃거렸다. 닭들을 서로 떼어 싸움을 말리려 했다 그러나 늙은 수탉이 분이 덜 풀렸는지 다시 싸움을 하려 해 수탉을 텃밭으로 세차게 몰아붙였다.

영글대로 영근 오후 해는 뒤뜰 왕 소나무 위에 머물러 빈 들녘을 아쉬운 양 내려다보고 있었다. 화산리 지서 앞 건널목을 건너 교회에서 돌아오는 종구네 아버지와 정희누나 그리고 뒤에서 자전거를 몰고 오는 종구의 모습이 보였다.
모처럼만에 온 가족들이 일요일 예배에 다녀오는 듯했다.

아기가 단잠에서 깨어난 듯 옹알거려 아주머니가 마루에 뉘여 놓았던 아기를 등에 업고 대문 밖 텃밭으로 나오셨다. 우리 집에 처음 보는 낮선 사람이 보여 이상스러웠던지 자전거를 끌고 가던 종구가 우리 집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함께 길을 걷던 정희누나와 우리 집에 대하여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처럼 보였다.

언제까지라고 단정을 할 수는 없지만 그렇게 우리 두 식구와 아주머니 그리고 아기가 한 지붕 밑에서 인연을 맺어 살아가게 되었다. 그러나 워낙이 좁은 동네다보니 그 소문이 금방 퍼져나갔다.
당장 끼니를 때울 양식 걱정을 하고 살면서 남에 식구까지 데리고 산다고 이러니저러니 말들이 많았다. 그러나 그런 소문도 각자 살기에 바빠 그랬는지 그리 얼마가지 못했다.

어젯밤에 호롱불이 덜 밝아 등잔 뚜껑을 열고 심지를 돋우려 살펴보니 등잔에 기름이 다 떨어졌다. 어머니가 기름이 떨어졌다하시며 석유를 사오라고 돈을 주셨다. 그래서 면소재지 털보 강씨 아저씨네 점방으로 가서 석유도 사고 아주머니와 함께 바람을 쐬려고 갔었다.

면소재지 화산리로 넘어가는 언덕배기엔 키 작은 소나무와 싸리나무가 다복하게 둘러싸여 있었다. 언덕배기 아래 임자 없는 분묘 하나 외로이 버텨 선 둔덕엔 아주머니 키만큼이나 무성하게 자란 억새풀이 허연 목을 내밀고 있었다.
기다란 허연 목이 한낮 햇볕에 온통 은빛으로 반득거렸다. 지나가는 발자국 소리에 놀란 멧새들이 ‘후루룩 후루루룩’ 소리를 내며 산 밑으로 떼를 지어 내닫았다.

구절초 향이 싱그럽게 퍼져나는 길섶을 걷노라니 아주머니 등 뒤에 업힌 아기가 마냥 파란 하늘을 바라보며 옹알거렸다.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 앞서 가던 길을 되돌려 아기 옆에 바싹 다가서 ‘까꿍’ 하며 소릴 내니 나를 보고 티 없이 웃고 있었다.
마을과 화산리로 이어지는 나들목 앞 벼랑바위 앞에 앉아 잠시 다리쉬임을 했다. 햇살 포근히 내리쬐는 바윗등에 다람쥐 한 마리 꼬리를 쳐들고 바라보다 냉큼 밤나무 위로 기어올라 달아났다.

털보 강씨 아저씨 점방에서 석유를 됫병으로 가득 담아 산 후 껌을 사서 아주머니에게 드렸다. 그리고 점방 문을 나서려는데 뒤에서 누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흰 블라우스에 멜빵이 달린 밤색 치마를 곱게 차려입은 석란이가 교회에 다녀오는지 내 앞으로 다가와 말을 건넸다.

“야, 상민아! 이분 누구시냐? 느네 일가냐?”
“응, 그런디 그건 니가 왜 묻고 그러는디? 친척이면 뭐 할꺼구 아니면 뭘 할래?”
“넌, 내가 뭔 말만 하면 그렇게 툭 쏴부치구 그러냐, 인정머리 없이.”
“나 인정머리 없는 줄 인제서야 알었냐? 할 말 다 했으면 갈 팅께 그리 알라구.”

석란이와 정순이 앞을 냉정하게 스쳐 지나 골목길로 발길을 서둘러 피하려 했다. 사실은 좀 심한 듯 쏘아붙인 이유가 따로 있었다. 종구나 석란이처럼 살기가 부유하고 윤택한 그들과 가난한 나 사이에서 오는 일종의 열등감 내지는 반항심이었다.
그리고 어떠한 형태라도 아주머니에 대한 이야기가 번잡스럽게 전개되기 전에 서둘러 자리를 피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점방 맞은편 회양목이 줄지어 서 있는 작은 길을 빠른 걸음으로 빠져나와 배추 밭을 거쳐 건널목에 닿았다. 뒤를 따라 오시던 아주머니가 입에서 씹으시던 껌을 꺼내셔 양쪽 손가락으로 길고 넓게 늘여 다시 입에 대시고 터트려 ‘딱, 딱, 딱, 딱, 딱.’ 소릴 내시며 웃으셨다.
그런 모습을 바라보며 나도 같이 웃었다. 철로 건널목을 건너 나들목 벼랑바위로 오면서 어쩜! 아주머니도 철없이 뛰어 놀았던 그 어린 시절 꽈리를 불던 생각이 나시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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