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동이 터오를 무렵 내 아버지의 장지를 마련하기 위해 산에 오르셨던 귀분이 아버지와 응수 아저씨 그리고 순태아저씨가 날이 밝아 올 무렵에서야 집으로 돌아 오셨다. 무척이나 힘에 겨우신지 제가끔 마루에 앉으셨다. 그런데 방앗간 순태아저씨가 어머니에게 말을 건네셨다.
“참 기나즈나 우리 기태동상이 억울하게 죽은 걸 저넘에 하늘두 알기는 아는 긋매냥 묫자리를 파보닌께 그리 흙이 보드랍구 좋던구먼유. 그런 복이라두 있으야 들 억울허것지유. 암튼 내사 요리조리 쫀쫀허게 잘 살펴서 했으닌께 묫자리 치구는 으디다가 내놓아두 꿀리지 않을 거구먼유”
대다수의 동네 사람들은 우리 집이‘반동분자의 집’이라고 낙인을 찍어 놓은 놈들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몇몇 분들은 나중에 각자에게 미치는 결과가 불이익하게 전개되더라도 그에 개의치 않고 아버지의 장례를 성심껏 도와주셨다.
한 부락에 살아오는 중에 칡넝쿨보다 더 질기게 지속되어 온 정에 이끌려 밤을 지새우셨다. 그리고 놈들의 눈을 피하려고 먼동이 터오를 무렵부터 산에 올라 묫자리를 파놓고 오셨다. 그중에 순태 아저씨의 고마움은 당연히 알겠지만 말의 끝머리에 자기 자랑을 꼭 내세우는 면면에서 그다지 달갑지 않했다. 더불어 그분의 가벼운 심성을 느낄 수도 있었다. 평소에 왜 동네 어른들이 순태 아저씨를 왜 그렇게 핀잔을 주었는지 어느 정도 가늠이 되었다.
너무도 예견치 못하게 당한 일이었다. 그리고 처해진 시대적 상황이 그렇다 보니 상갓집 아닌 상갓집이 되어 실로 초라하기 그지 없었다. 더욱 허전햇던 것은 고인이 집을 떠나 장지로 향할 때 상여 앞에 즐비하게 서 있는 그 흔한 만사 한장이 없었다. 그렇다 보니 또한 영정도 있을리 없었다. 그저 급하게 서둘러 장례를 치뤄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때의 상황이 놈들의 악랄하기 그지 없는 비인간성에 의해 경망되게 벌어진 일이었다. 그런 탓에 정신을 가다듬을 시간적 여유가 전혀 없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만장을 만드는데 필요한 천을 파는 포목점은 물론이었다. 영정을 만들기 위해서는 사진을 확대시켜야 하는데 그 사진관마져 난리 속에 모두 살기 위해 피난길에 나서 가계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그러니 제아무리 돈이 있다고 해도 그마져도 구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아버지의 장례에 몇몇 이웃들이 함께 힘을 모아주어 참으로 다행스럽게 생각했다. 마루에는 어른들이 부옄에서는 아주머니들이 비좁은 부엌 바닥에 보릿짚을 깔고 앉아 화기애애하게 이야기를 나누셨다. 평상시 보다는 조금은 이른 듯하게 아침 식사를 하였다. 마냥 침체되었던 집안 분위기가 조금은 완화되는 것 같이 보였다. 그렇게 모여 앉아 식사를 하시던 동네 어른들이 식사가 끝나자 서둘러 방안으로 들어 가셨다.
하얀 모시옷을 입으신 내 아버지의 시신을 조심스럽게 들어 방안에 깔려 있던 갈자리 위에 뉘였다. 그리고 갈자리로 아버지의 시신을 둘둘 말아 양쪽 가장자리를 새끼줄로 질끈 동여매고 있었다. 그렇게 아버지의 시신을 옮기는 모습을 방안에 앉으셔 묵묵히 바라만 보시던 어머니께서 또 다시 방바닥이 꺼지라고 있는 힘을 다해 내려치시며 통곡을 하셨다.
그러자 흙벽 하나 사이 옆방에 계시던 외조부께서 어머니의 비분에 가득찬 울부짖음을 들으셨는지 애꿋게 헛기침만 하시며 애끓는 마음을 애를 써 억누르시고 계셨다.
불과 하루밤 사이였지만 한 여름 더위에 아버지의 시신이 부패되었는지 온 방에 진동하는 악취가 코를 찔렀다. 자식된 도리로는 그런 극한 상황을 차마 볼 수 없을 정도 였다.
그래도 그런 상뢍에서도 얼굴 한번 찌푸리시지 않고 아버지의 시신을 정성껏 아주 조심스럽게 다루셨다. 귀분이 아버지와 아버지의 친구이신 응수 아저씨와 부락 구장님의 헌신적인 행동이 눈 안으로 가득 들어왔다. 더불어 인간의 정이 그리도 소중하다는 것을 그날 바로 그 장소에서 내 두 눈으로 목격하여 절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아버지의 시신이 둘러 쌀여진 갈자리 양쪽 끝에 넉넉하게 매달린 새끼줄을 두 분께서 손에 감아쥐시고 나오시려할 때였다.
바로 방문 앞에서 서 계시던 순태아저씨가 박아지를 방문 앞에 놓자 시신을 옮기시던 귀분이 아버지께서 그 박아지를 발로 밟아 깨트리면서 마루에서 토방으로 내려셨다. 그런 후 바로 힘이 좋으신 아버지의 친구 분이신 응수 아저씨가 지고 계시는 등지게 바작 위에 아버지의 시신을 두 분이 번쩍 들어 올려 놓으셨다.
이제 사립문을 벗어나면 내 아버지의 혼백마져도 이제는 정말로 영원한 이별을 하게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순간 가슴 속에서 뜨거운 피가 끓어 올라 목구멍을 치고 오를 것 같은 아픔을 온몸으로 억누르고 말았다.
그때 방안에 계시는 줄만 알았던 외조부님께서 언제 밖으로 나오셨는지 짙은 가래를 힘들게 밖으로 내밷으시면서 동네 어른들을 향해 말씀을 하셨다.
"어이 다덜 내 말 좀 들어보라구, 이자는 참말루 우리 강서방이 구만이 저승길로 들어 설 모냥인디 으찌됐든지 간에 이리 그냥은 못 보내는 법이닌께, 응수 자네가 우리 사우허구 친구지간 아닌감 그런닌께 쪼매 힘이 들드라두 집안 안안팍으루 한바꾸 돌고 가소 그래야 언지 죽을지두 모르는 이 늙은이 맴이 쪼까 편헐긋 같구먼 그려"
" 야 그러지라우,지두 쪼까 전에 포도시 생각을 혔구만유,남들이사 뮈니뭐니혀두 기태란 넘이 지 깨부랄 친군디 아 으찌 요로콤시루 기냥 보내긋는가 허구 생각을 했구만유 그러닌께 으르신님께서는 극정일랑 붙들어 매세유, 지가 껄막 벗으나기 전에 시방부터 기태네 집 구석구석쟁이 뒤꺼티까장 한군디두 빼먹지 않구 찬찬히 죄다 돌아 볼란께유,그리 아시구 극정일랑 하지를 마세유,"
참으로 절대 일어나서는 않될 일이 너무도 황망하게 일어났기 때문이지만 그래도 두 분께서 주고 받으시는 말씀이 듣기에 그리도 애절할 뿐이었다. 그런 감정은 그자리에 함께 있었던 이웃사람들 모두가 똑 같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두 분께서 주고 받으신 말들 속에 함축되어 있는 의미가 너무 깊고 애뜻한 진솔함이 묻어나 있었다. 우리들 모두의 눈길이 등지게를 지고 집안 뒤곁으로 느린 걸음 하시는 응수 아저씨의 행동거지 하나에 자연스럽게 몰입되고 있었다.
응수 아저씨께서는 막상 둘도 없는 향리 친구를 그리 허망하게 보내야 했기에 서글퍼지는 마음 때문인지 느릿 걸음을 하셨다. 응수아저씨의 발걸음이 뒷마당 굴뚝을 지나 치깐 옆에 서 있는 무화과 나무 앞에 잠시 발걸음을 멈추려하였다. 그러자 나무가지 사이사이에 앉아 있던 참새들이 발자국 소리에 놀랜 듯 우루루 떼를 지어 하늘 높이 날아 올라 어디론가 향하고 있었다.
아침나절을 벗어나려는 햇살이 여름 더위를 한껏 부추기려는 듯이 본격적으로 내리 쬐이고 있었다. 응수 아저씨께서는 서로 앞다퉈 번득이는 장독들이 모여 있는 장독대로 향하셨다.
장독대 가장자리에는 땅에 납작납작하게 뿌리를 내린 채송화가 앙증맞게 빨깐 꽃을 피우고 있었다. 뒤따라 분꽃도 햇살에 꽃봉우리를 움추렸다 해 질 녘에 피어 올라 달이 떠오르면 함께 놀려하였다, 바로 그 옆자리엔 동네 누이들이 손톱에 물들리는 봉선화가 즐비하게 피었다. 그 중에서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붉은 맨드라미 였다. 한 여름의 뜨거운 햇살에 온몸이 아주 붉게 타올라 있었다. 이제 마지막 떠나시는 아버지와 석별의 정을 나누려 붉게 태운 온몸을 송두리째 드러내었다.
이윽고 장독대에서 발걸음을 옮기신 응수 아저씨가 닭장 앞에 발길을 멈추셨다. 그리고 알아들을리 만무한 내 아버지를 향해 애가 타시는 듯 한말씀 하셨다.
그리 애타게 몇 번을 반복하여 다그쳐 물으셔도 아버지는 끝내 단 한 마디 말이 없으셨다. 그러니 옆에서 듣는 이들로 하여금 더욱 애간장을 태우게 하였다.
마을 한복판에 아구뚱하게 자리를 잡고 버텨선 해가 이제 한 서너 시경이 지나면 본격적인 더위를 몰고 올 것 같았다. 올곧게 내리쬐는 햇살이 걸막 앞에 서 있는 대추나무를 현란하게 비추었다. 그리고 알알이 붉어져 가는 대추알들과 짙푸러지는 잎과 잎 사이를 오르내리며 번득거렸다.
이제 떠나야 할 사람은 끝내 애석하더라도 떠나야 하고 남아야 할 사람은 그 자리에 멍청스레 남아 있어야 할 시간이 마지막으로 도래되는 것 같았다.
그 대추나무 앞에 응수 아저씨가 다시금 발길을 멈춰 서고 말았다. 그리고 잠시인들 굳게 다물었던 입을 열고 끝내 그토록 말이 없는 내 아버지에게 다시금 애가 끓는 듯한 말씀을 하셨다.
“야, 기태야. 니는 잊어번졌는가는 몰라두 나는 시방까장 죄 생각이 이러콤시로 떠오른다. 나사 몇 년이 됐는지 자상허게는 모르긋지만 그날 읍내 선지국집에서 기태 니눔이 비료푸대지에 뿌랭이가 싸인 이 대추낭구를 나헌티 보여줌서 니눔이 나헌티 이런 말을 혀찌. 나는 재주한질라 읍써가지구 덜커덩 딸래미만 둘씩이나 까질렀다구 허면서 니눔은 부랄 두 쪽이 탱탱허게 잘생겨번진 느구 아들래미 상민이를 낳았다구 자랑질을 혀싸쿠 이 대추낭구를 내 얼굴이다 바짝 디밀믄서 울 아들헌티 물려줄 것이라구 그리 자랑을 혔는디 우짠다냐. 물려주기는커녕 올 가실에 불긋케 익은 대추 한 개두 따먹어 보지두 못허구 이리 허망허게 저승길로 들어섰으니 이를 으짜믄 좋단 말이여. 야, 지발 뭐시라구 말 한자리 혀봐라. 왜 도통 말이 읍냐. 니눔이 시방 내 애간장 다 타 내리는 것을 알기나 허는지 모르긋다.”
그러자 마루 위에 앉으셔 그 말을 듣고 계시던 어머니께서 지난 날들의 아기자기했던 기억이 다시금 떠올라 가슴이 메어오는 것 처럼 보였다. 이내 마루 기둥을 부둥켜안고 다시금 소리 내어 울부짖으셨다. 그러자 옆에 계시던 귀분이 어머니와 옥순이 어머니가 내 어머니의 등을 다독거려 주시면서 함께 눈물을 흘리셨다. 그러자 마당 가운데 우두커니 서 계시던 외할아버지께서도 내 아버지를 향해 애끓는 심정을 쏟아부으시려는 듯 마지막으로 작별 인사처럼 말씀을 남기셨다.
“강서방. 이자 우짜긋는가. 가기 싫어두 가야만 헐 길인디. 그 멀구 먼 구만리 길을 갈라믄 을매나 발바닥이 아프긋는가. 내사 자네를 이리 보내려구 허니께 참말로 구곡간장이 다 찢어지는 긋 같구먼. 아무튼지간에 지 에미허구 상민이란 놈은 내 명줄이 다헐 때까정은 사력을 다혀서 챙겨볼 티니께 마음 놓구 수더분허게 가시게나. 글구 그곳에 가거들랑은 원체 바깥나들이를 좋아허는 자네니께 그곳에서라두 좋은 말동무들 많이 삼어 이승에서 못 다한 한일랑은 그기 극락이 가서라두 싫컨 하게나, 나사 그저 살다살다 자네 생각이 불쑥 떠오르면 그때나 자네 묫동에 찾아갈 틴께 그리 알구, 자네가 음청 좋아하는 친구 등에 업혔으니께 어여 슬퍼 말구 가게나.”
참으로 그런 모습을 지켜보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은 무엇이라고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침통하기만 했다.
이윽고 더 이상은 감정을 추스를 수 없었는지 응수 아저씨가 걸막 앞에서 등을 돌리셨다. 내 아버지께서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정이 서렸던 집안을 살펴보시라고 배려를 해주시는 것 같았다. 그러자 마루에 앉아 계시던 어머니께서 귀분이 어머니의 부축을 받으시며 일어나셨다. 장지를 향해 떠나는 운수 아저씨의 등지게 뒤를 따라 가시려고 토방을 내려서 걸막 앞으로 다가오셨다.
나도 그 뒤를 따라가려고 걸막 앞에 다달았을 때였다. 걸막 옆 나무기둥에 꽂혀 있는 케케묵은 부고장 한 장이 눈에 띄었다. 지난 여름 장맛비에 흠뻑 젖어 겉봉에 쓰여 있던 붓글씨는 아예 오간데 없었다. 노란 편지 봉투가 희끄스름하게 색이 바래 있었다. 그 부고장을 보는 순간 다시금 가슴이 매어왔다. 세상사람 어느 누구라도 자기의 죽음을 알릴 수 있는 부고장 한 장은 보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마져도 못하시고 저리 애처롭게 마지막 발걸음을 하셔야만 하는 내 아버지가 너무도 안쓰러웠다. 한동안 잘 참았던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쏟아져 내렸다. 한여름 뙤약볕에 잘 말라 딴딴해진 대문 앞마당의 땅바닥이 눈물에 가려 마구 울룩불룩하게 보였다. 그리고 몸의 중심을 순간적이나마 제대로 가눌 수 없었다.
동네 고샅길로 막 들어서려고 하는 내 소꿉장난 짝꿍 귀분이가 담 밑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자꾸만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내 옆으로 슬그머니 다가왔다. 그리고 내 손을 꼭 붙잡고 울먹이면서 한마디 말을 건네주었다.
“상민아. 느네 아부지 증말루 불쌍혀서 죽긋다. 우짜믄 좋다냐. 그려두 상민아 니는 꾹 참구 울지 마 잉. 그라고 산에 얼른 댕겨와. 내가 그때까정 우디로 마실 안 가구 기둘리구 있을 팅께, 알었지?”
“그리여.”
참으로 고마웠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어린 귀분이에게까지 그런 마음의 고통을 분담시키는 것 같아 너무도 미안했다. 그래서 무거운 마음에 그리 짧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동네 어른들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그래도 친구라고 동네에 셋밖에 없었다. 여자 친구인 옥순이야 여자 몸으로 상가집에 온다는 것이 꺼림찍해서 그런가 하는 생각을 나름대로는 해보았다. 그래도 자기 어머니께서는 내 어머니와 같은 동네에 사는 둘도 없는 친구라고 어제 밤부터 일을 도와 주셔 옥순이에 대한 서운함은 덜했다. 그리고 곰보딱지 주현이는 차마 우리 집 마당 안 까지는 들어오지 못했다. 그래도 나를 위로해 주려고 걸막 앞 담벼락에서 나를 기다려 주어 말로 표현은 않했지만 고맙기만 했다.
그런데 자기 아버지처럼 인정머리라고는 가물치 콧구멍만큼도 없는 종구는 단 한 번도 내 집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았다.
그보다는 오히려 내가 친동생보다 더 아끼고 챙겨주었던 철로 가 외딴집에 사는 기현이와 동네 구장 아들인 인석이는 내 나이보다 겨우 한 살 아래인데도 동네 형이랍시고 찾아왔었다. 그러나 나이가 어렸기에 그저 막연하게 내가 불쌍하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어떻게 나를 위로할 줄 몰라 이저리도 못해 밖에서 어물쩡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마을에 무슨 일만 생기면 동네 아이들이 그리도 바글바글하게 많이 모였었다. 그런데 별로 눈에 띄지 않아 아마도 자기네 부모들을 따라 이미 멀리 피난을 떠난 것 같았다.
참으로 어린 동생들인 기현이와 인식이의 마음에서 우러나 온 그런 온정이 진정으로 고맙기만 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미덥기만 하여 듬직하게 보였다.
언제나 그랫듯이 그지없이 장엄한 저 태양이 마을 한복판에 우뚝 자릴잡고 위용을 한껏 떨치고 있었다. 그 테양이 내 아버지의 시신이 놓여진 등지게 뒤를 따르려는 것 같이 느껴졌다. 사립문 밖을 벗어나 동네 고삿길로 내려서는 내 얼굴과 마주 닿아 무척이나 눈이 시려와 똑바로 바라볼 수 없었다. 그날따라 태양은 더욱 찬연하게 보였다. 어둠 보다 더 깊고 짙은 통한의 늪을 헤쳐 나오려 안간 힘을 써 바둥대는 연약한 내 육신을 고운 빛깔로 감싸 안아주려 하였다. 그와 더불어 찟길대로 찟어진 내 모진 아픔까지도 기꺼이 보듬어 주려는 것같았다. 그런 믿음이 뒤늦게라도 서서히 싹트고 있어 나 또한 숨 한번 크게 내쉬어 함께 머물러 주길 내심 바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