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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메로 가는 길 - 110 조회 : 1,548




부소산은 생각보다 그리 높지 않은 야산이었다. 산 정상까지 그리 멀지 않은 거리지만 오르막 산길인지라 숨이 차올랐다. 산마루턱에서 불어오는 한줄기 시원한 산바람이 온몸을 살갑게 스쳐 지났다.

그렇게 얼마쯤을 걸어 영일루에 닿았다. 산 밑 아래로 시원스레 펼쳐진 풍경을 내려다보았다. 단풍으로 곱게 물든 산자락이 포근히 감싸 안은 초가집들의 소담스런 모습에 가을 정취를 한껏 느낄 수 있었다.

백제의 국력이 막강하던 시절 영화로운 한때를 구가했던 사비성의 옛 모습을 머릿속에 나름대로 그려 보았다. 가을 풍경에 젖어 든 부여 읍내를 한참동안 바라본 후 누각에서 내려와 억새풀 가득 들어찬 산길 왼쪽으로 내려섰다.
그리고 얼마 후에 펑퍼짐하게 널따란 마당 같은 곳이 나왔는데 그곳이 바로 군창터였다. 군창터는 백제시대 군량미를 쌓아 놓았던 창고가 있던 곳이다. 나당연합군의 공격으로 사비성이 함락될 때 불에 탔다고 하는데 불에 타다 남은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
그 군창터의 땅을 뒤척여 보니 새까맣게 타버린 쌀알과 콩이 나왔다. 그리 오랜 세월이 지났는데도 그 흔적을 그대로 지니고 있으니 참으로 신기하기만 했다.

선생님 뒤를 따라 군창터를 벗어나 다시 왼편 길로 계속 걸었다. 그렇게 얼마쯤 걸으니 부소산의 정상 부근에 거의 다 올라온 듯싶었다.
길 양쪽으로 숱한 풍상을 겪은 듯 해묵은 거송들이 빼곡하게 들어서 있는 비스듬한 산길을 내려섰다. 길가 오른편에 허물어진 토성의 잔해가 억새풀 사이로 쓸쓸하게 보여 세월의 무상함을 말해주는 것만 같았다.

작은 멧새들이 재잘거리는 조릿대 숲이 키 작은 도토리나무와 어우러진 산길을 다시 얼마쯤 걸어 올랐다. 영일루와 모습이 거의 같은 검정 기와지붕의 누각이 모습을 드러냈다. 선생님이 그 누각의 이름이 반월루(半月樓)라고 가르쳐주셨다.

반월루 앞 잔디밭에 흩어져 있던 우리들은 다시 모여 인원점검을 한 후 잔디밭에 제가끔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리고 마음이 맞는 끼리끼리 모여 다정하게 점심식사를 시작했다.

반장과 부반장인 영선이는 우리들이 미리 조금씩 돈을 모아 준비한 음료수와 과일을 선생님께 드렸다. 그리고 석란이는 보자기로 싼 음식 찬합을 선생님들 앞에 놓아드렸다.
우리 반에서 늘 말썽만 부리던 성태도 자기 어머니가 해 주신 깨강정을 선생님께 드리고 있었다. 그런 부유한 친구들의 모습에 한가득 아쉬움을 느껴 마음을 달래려 산 밑을 바라보았다.
따스한 한낮 햇살이 마냥 포근하게 비추는 숲 사이로 산새소리 청량하게 들려왔다. 그리고 부여 읍내의 모습이 아담스럽게 눈 안에 들어왔다.

그렇게 선생님과 우리들은 점심식사를 마친 후 다시 선생님의 인솔에 따라 조금은 가파른 듯 산길을 좀 걸어갔다. 산 밑 아래로 금강의 지류인 백마강이 보여 약 5분 정도를 걸어가니 작은 세 갈래의 오솔길이 나왔다.
그곳에서 왼쪽으로 꺾어 돌아 낙화암과 고란사 방면으로 선생님과 우리들은 함께 내려갔다. 내리막길을 좀 내려가니 건물의 구조가 육각형인 정자가 보였다. 아마 신혼여행을 온 듯 부부가 다정하게 렌즈가 앞으로 툭 튀어나온 묵직한 카메라로 기념사진을 찍고 있었다.

담임선생님께서 이곳이 ‘백화정’ 이라고 말씀하시며 그에 얽혀 있는 슬픈 사연을 상세하게 가르쳐 주셨다. 백제가 멸망할 당시 삼천 궁녀들이 망국의 한을 간직한 채 침략자에게 몸을 더럽히지 않으려 수십 길 낭떠러지 백마강에 스스로 몸을 던졌다는 ‘낙화암’이 있었다.
가파르기 이를 데 없는 절벽인지라 얼핏 내려다보기에도 어지럽고 무척이나 겁이 날 정도였다. 낙화암 절벽 아래에는 망국의 한을 아는 듯 모르는 듯 백마강은 입을 굳게 다문 채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아주 위험스런 지역이니 절대로 개인행동을 금하라고 철저히 당부를 하셨다. 더불어 경사가 급한 백화정 아래로는 절대로 내려가지 말라는 선생님의 주의 말씀을 몇 번씩이나 반복해서 들었다. 백화정 정각 앞에서 교장선생님과 선생님들은 기념사진을 찍고 계셨다.

얼마 후 백화정을 지나서 조금 비탈진 산모퉁이를 돌아 계속 내려가니 바로 앞에 백마강이 조금 더 가까이 보였다.
그리고 강가에 작은 절 하나가 눈 안에 들어왔다. 절 앞으로 백마강이 흐르고 뒤에는 깎아지른 것 같은 절벽이 있었다. 그리고 강가에 종루가 있는 조그마하면서도 운치가 있어 보이는 작은 절 ‘고란사’가 있었다.
종루를 둘러보고 고란사 뒤뜰로 돌아갔다. 그 유명한 고란초가 있다고 하는 약수터가 목에 갈증이 난 우리들을 맞이했다. 약수터에는 절벽 밑 암석 틈 사이에서 약수가 솟아나오는데 끝내 고란초는 보질 못했다.

고란사 약수는 백제시대 왕들의 전용식수였다고 했다. 약수 위에 고란초를 띄워 왕에게 올렸다는 말을 스님으로부터 전해 들었다.
물 있는 곳이 좀 깊어 짧은 우리들의 팔 길이로는 좀 힘이 들었지만 백제왕이 마실 정도로 좋은 물이라기에 애를 써 두어 번 정도 떠 마셔 보았다.
고란사 경내에 은행나무가 곱살한 모습으로 샛노랗게 물들어 있었다.

떨어진 잎사귀가 발밑에 밟히는 소리가 가을의 정취를 다시금 느끼게 했다. 약수를 마시고 고란사를 나와 앞을 바라보았다. 고란사 앞에는 푸른 백마강이 펼쳐져 있고 강물 위에는 돛단배 한 척이 외롭게 떠 있었다.
그리고 모래밭이 보이는 강가에 검은 바윗돌 하나가 보였다. 선생님께서 저 바위가 조룡대(釣龍臺)라고 하시며 그 바윗돌에 얽혀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를 들려 주셨다.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들이 사비성을 공격하던 여름날이었다. 백마강을 건너려고 하니 백마강에 앞을 볼 수 없을 정도로 안개가 자욱하게 끼어 있었다. 그리고 물살이 성낸 듯 소용돌이쳐서 도저히 강을 건널 수가 없었다. 그래서 당나라 장수 소정방은 부근 백성들에게 이유를 물어보았다.
그러자 나이가 지긋하신 어느 촌로 한 분이 백마강 안에 백제를 지켜주는 커다란 용이 한 마리 살고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 용이 백마의 생피를 좋아한다고 했다.
그래서 백마를 잡아 제물로 바치니 용이 물속에서 밖으로 나와 결국에는 용이 잡혀 죽고 말았다. 그러자 안개가 걷히고 물살이 가라앉아 당나라 군사는 뱃길을 무사히 건너 부여 사비성을 함락시킬 수 있었다.
그때 당나라 장수가 용을 낚으려고 두 무릎을 꿇고 온갖 힘을 써 무릎이 닿은 바위 부분이 푹 파였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고 자세하게 설명을 해주셨다.

소나무와 잡목들의 잎사귀에 가려진 파란 가을 하늘이 드문드문 보였다. 나뭇잎에 부딪힌 햇살이 성글게 빛나는 산길을 선생님의 뒤를 따라 걸었다. 백화정 앞을 지나 부소산 길을 따라 읍내를 향해 내려섰다.
그리고 우리들 모두는 부여 읍내 남쪽 외곽에 위치한 궁남지를 향해 줄을 맞춰 걸었다. 햇살이 영글게 얼굴에 마주 비춰 눈이 시렸다.

모두들 온종일 걸어서 다니느라 다리가 몹시 아픈지 발걸음들이 퍽이나 무겁게 보였다. 산에서 내려와 시내로 접어들어 두 줄로 간격을 두고 가로수 옆의 보도를 따라 얼마쯤 걸었다.
수학여행의 마지막 답사지인 궁궐의 남쪽에 있는 연못이라 하여 궁남지라고 불리는 곳에 도착하여 답사를 시작했다.

연못 주변에는 우물터와 주춧돌 위에 떨어진 낙엽이 쓸쓸하게 나뒹굴고 있었다. 한때나마 태평성대를 누렸던 그 시대의 모습이 떠올라 마음 한편 더없이 허무하기만 했다. 연못 안에는 작은 정자 하나가 세워져 있었다. 그곳 정자로 가려면 나무로 만들어 놓은 다리를 건너야만 했다.
연못은 물이 여법 깊어 보였다. 연못가에는 잎이 다 떨어져가는 버드나무들이 처연하게 가지들을 늘어뜨리고 있었다.

어느덧 저녁 해가 궁남지 정각 너머로 기울려 할 무렵이었다. 선생님께서 우리들에게 자유 시간을 주셨다. 유적지 앞에 있는 기념품 가게에서 저마다 필요한 기념품들을 샀다.
나는 어머니에게 드리려고 백마강을 배경으로 한 낙화암의 그림이 잘 인쇄된 기념수건 한 장을 샀다. 그리고 문득 아주머니 생각이 나서 앞으로 아기랑 좋은 일만 생기라고 손목에 끼는 염주를 샀다.

옥순이는 친할머니에게 드린다고 대나무 끝을 불에 구워 약간 구부린 등을 긁는 ‘효자손’을 샀다.
종구는 자기 아버지에게 선물을 하려는지 고란사 그림이 그려진 물부리를 사고 있었다. 쇠뿔을 잘라 갈고 닦아 만들었다는데 값이 여법 나가는 물건이었다.

그렇게 약 삼십여 분이 지난 후 우리들은 선생님의 지시에 따라 차례대로 버스에 올랐다. 흔들리는 차창 밖으로 가을 끝자락을 붙들려 하는 노을빛이 듬뿍 깃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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