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쪽하늘 끝닿은 곳 소릿재 마루턱에 불그레하게 아침 해가 떠올랐다. 당차게 떠오른 해는 산과 들은 물론 동구 밖에 있는 방죽가 백양나무 우듬지를 가볍게 어루만졌다. 그리고 마을 초가지붕 위에 머물러 상큼한 가을아침의 새로운 장을 펼치고 있었다.
윤기 있게 빛나는 햇살이 빗살무늬로 엮어진 봉창 틈새를 튼실하게 비집었다. 뒤뜰 높다란 밤나무 줄기 끝에 밤송이들이 입을 죄다 벌어져 쌀랑거리는 가을바람에 밤알들이 ‘툭툭’ 소릴 내며 떨어졌다. 검둥이가 조심스레 한쪽 앞발을 들이밀어 윤기가 도는 탐스런 밤알을 슬쩍 건드리고 있었다. 그러자 토방 위에 어정대던 늙은 수탉도 냉큼 달려와 괜스레 기웃거렸다.
철로 송전선 위에 뭉게구름 한 덩이가 저 혼자서 둥실둥실 목말을 타고 있었다. 둥구나무 너머로 바라보이는 동네 초가지붕들이 볏짚으로 이엉을 엮어 올려 새로운 모습으로 단장을 했다. 말끔한 모습으로 납작납작 엎드려 있는 초가지붕들이 산뜻하게 보였다. 그러나 우리 집만 사정이 여유롭지 않아 아직도 지붕을 새로 잇지 못했다. 가뜩이나 낡은 집이 빗물에 볏짚이 삭아 짙은 잿빛으로 변해 한층 더 낡고 초라하게 보였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은 아기의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려 조금은 덜 적적하게 느껴졌다.
등 뒤에 업힌 아기는 저 혼자만의 소리로 옹알거려 그런 모습 귀여우신지 엉덩이를 가볍게 두드리셨다. 아주머니는 어제 내가 선물한 염주를 손목에 끼고 있었다. 쪽마루 위엔 아주머니가 뒤뜰 밤나무 아래서 주워 모아놓으신 듯 노란 바가지 안에 토실토실한 밤알들이 한 움큼 들어 있었다. 아주머니가 마당에서 낫으로 나무 막대기 끝을 뾰족하게 깎으셨다. 그리고 손짓으로 밤나무를 가리키시며 어눌한 소리로 밤을 따자고 하셨다.
굴뚝 옆에 세워 놓았던 대나무 장대를 들고 밤나무 밑 풀숲으로 들어갔다. 검푸른 이끼 가득 낀 돌 위에 달팽이 한 마리가 붙어 있었다. 내 발자국 소리에 놀랐는지 더듬이를 등 껍데기 속으로 재빨리 쏙 오므려 넣은 채 웅크렸다.
그때 돌 틈 사이를 뛰쳐나온 작은 들쥐 한 마리가 낙엽 위로 ‘와사삭, 와사삭’ 소릴 내며 잽싸게 달아났다. 뒤늦게 뛰어온 검둥이가 두 발로 낙엽을 마구 파헤치며 들쥐를 잡으려 했지만 이미 멀리 달아난 후였다. 한동안 부산을 떨던 검둥이가 멋쩍게 한참 동안 주위를 살피고 있었다.
높다란 밤나무 가지 위에 매달린 밤송이를 털려고 고개를 뒤로 젖혀 두드리니 눈이 가득 시렸다. ‘후드득 후드득’ 소리를 내며 틈이 벌어진 밤송이에서 밤알들이 땅으로 떨어졌다.
햇살이 온통 얼굴에 비춰 코가 간지러워 참을 수 없었다. 장대를 떨어뜨린 채 재치기를 하니 밤을 줍던 아주머니가 나를 쳐다보시며 재미있다는 듯이 웃으셨다.
‘싸리재’ 라는 깊은 산속에 살아서 그런지 밤을 바르는 솜씨가 아주 능숙했다. 조금 덜 벌어진 밤송이를 발로 밟고 뾰족한 나뭇가지로 밤송이를 벌려 밤을 까셨다. 밤나무 가지를 몇 차례 두드려 밤송이를 떨어뜨린 후 아주머니와 함께 밤을 까고 있었다. 언덕배기엔 사이좋게 두 그루 서 있는 왕 소나무 머리 위로 뽀얀 구름덩이가 미끄러지듯이 밀려왔다.
부듯한 마음으로 밤을 까고 있는데 갑자기 검둥이가 세차게 짖어댔다. 밤을 따려고 손에 들고 있던 긴 대나무 장대를 땅에 내려놓고 집 모퉁이를 돌아 앞마당으로 나왔다. 얼굴에 여드름이 그리도 많이 돋아난 우직하게 생긴 종구네 집 용만이의 모습이 보였다. 쇠죽을 끓이려는 고구마넝쿨을 바지게에 한 짐 가득 지고 내려와 사립짝 앞에 지게를 받쳐놓고 다리쉬임을 하고 있었다.
땅위에 덥석 앉아 아랫주머니에서 쭈그러진 건설 담뱃갑을 꺼내 궐연 한 개비를 붙여 물고 나에게 객쩍게 말을 걸어왔다.
“야, 상민아. 저 양반이 이번에 니네 집에 살려고 들어왔다는 그 아줌니냐?”
용만이가 말을 하면서 밤을 까고 계신 아주머니를 곁눈질로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나는 용만이의 그런 얼굴 표정이 싫었다. 더욱이 지난봄에 비석골에서 종구와 싸웠을 때 내 멱살을 인정머리 없게 움켜쥐고 끌고 갔던 일이 떠올랐다. 그런 좋지 않은 감정이 남아 있어 쏘아붙이는 듯 말을 했다.
“왜 그러는디유? 그리구 사람한티 들어온다가 뭐람유? 사람이 무신 물건인감유, 들어왔다 나갔다 하게, 안 그런감유?” “응, 그건 니 말이 맞는디, 너는 뭔 말을 찢어진 문구멍으로 찬바람 쑥 들어오는 것처럼 쌀쌀맞게 허냐, 너 아직두 지난봄에 그 일 땜시 그러냐? 아직두 서운허면 풀어라, 나두 넘집살이를 허다 보닌게 종구 아버지가 널 잡아오라구 해서 어쩔 수 없이 그랬던 기여.”
무슨 이유가 있어 그러는지 여느 날에 비해 아주 고운 말투로 그렇게 대하는 용만이형이 한편으로는 좀 이상스럽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목소리를 낮춰 대답을 했다.
“아니유, 그 일은 진즉에 끝나버리지 않았는감유? 이제 와서 뭘 새삼스럽게 들먹이남유, 별루 좋지두 않은 일인디.” “암튼 지금두 내가 보기엔 종구하구 너랑 서로 말두 않구서 지내는가 본디 한 동리 살면서 그럼 못쓴다.서루 좋게 지내거라, 그래두 고향 까마귀가 제일루 반가운 기여.”
아주머니가 계셔서 그런지 용만이형이 좀 유식한 척하며 말을 하려는 것 같았다. 그때 ‘쿵쿵 쿵쿵’ 땅을 울리며 화산리 지서 앞 산모퉁이를 돌아 나오는 화물열차가 우렁차게 기적소리를 내어 말 이음이 끊어졌다. 그러자 용만이형이 손에 들었던 담배를 냅다 땅바닥에 던져 발로 비벼 담뱃불을 껐다. 그리고 한쪽 손으로 힘차게 코를 풀어 풀숲에 쓱쓱 문대고 일어서 지게를 걸머지고 밭둑길을 내려섰다. 동네를 향하여 걸어가던 용만이 형이 앉아 있던 자리에 무엇을 두고 온 것처럼 자꾸만 뒤를 돌아보았다.
얼마동안 아주머니와 함께 밤을 까 모아 놓으니 작년보다는 양이 많이 나온 듯했다. 어림짐작을 해보니 족히 서너 말은 넘게 보였다. 지난번 옥순이가 우리 집에 준 고봉시와 고구마가 생각이 나서 같이 나눠 먹으려고 두어 됫박을 챙겼다. 보자기로 싸 함석 물통 속에 넣어 물지게를 지었다. 그리고는 우물가에 가려고 언덕배기 너머 철길 건널목을 건넜다.
울타리에서 아주 노랗게 잘 익은 탱자를 따시던 흥남이 아저씨가 나를 보고 말씀을 하셨다.
“상민이 아닌게비. 니 지금 우물에 물 길러가나?” “예, 안녕하셨어유?” “거, 니기 집에 온 아주마이가 니기 친척이라?” “아닌디유, 그냥 우리 집에 한 식구처럼 살기루 한 아주머닌디유, 왜 그러남유?” “아니다, 아니 보이던 사람이 보이길래 내리 기냥 물어 본기야, 어여 가보라우.” “예, 안녕히 계시유.”
조금은 이상스럽게 그날은 아주머니에 대해 물어보는 사람이 많은 듯싶었다. 그런저런 생각을 하며 동네 어귀 나무다리를 건너 둥구나무 앞에 닿았다. 둥구나무 아래에는 부는 바람에 이따금씩 마른 나뭇잎이 떨어지고 있었다. 그 둥구나무에 기대어 동네 아이들이 뒤꽁무니에 머리를 박고 다른 아이는 말 위에 올라타서 서로 가위 바위 보를 하며 말타기 놀이를 하고 있었다.
동네 고샅길을 들어서 종구네 집 앞에 이르자 그 육중한 대문이 빼꼼히 열려 있었다. 그 틈사이로 정희누나가 펌프질을 하는 모습이 보였다. 내 발자욱 소리에 거위가 시끄럽게 울어대자 정희누나가 대문 밖을 내다보았다. 그리고 나와 눈이 마주치자 생긋하게 웃어 주었다.
가을 추수가 끝났는지 그리 촐랑거리며 돌아가던 발동기 소리도 멈춰 더없이 한적하기만 했다. 우물가에도 동네사람 겨우 한두 사람 정도 보였다. 옥순이네 녹슨 함석 대문 앞 높다란 감나무 꼭대기엔 까치밥 줄려는지 홍시 몇 개가 달려 있었다.
추녀 끝에 주렁주렁 매달아 말리는 곶감이 퍽이나 먹음직스러워 풍요롭게 보였다. 내 발자욱 소리에 부엌에서 나오던 옥순이가 말을 했다.
“상민아 니가 왠일루 왔냐? 으응, 오늘 학교 않 가고 쉬는 날이라 물 길러 왔구나, 요기 마루에 앉자서 쉬어 가라.” “이거, 오늘 우리집 밤나무 털었는디. 니네 엄니허구 너 먹으라구 가져 왔은께 어여 받으라구, 먼저번에두 니네헌티 신세진 일두 있는디.”
보자기를 건네주며 마루에 앉아 옥순이에게 말을 건넸다.
“야, 옥순아 아까 짬시(짬) 우리 집에서 아줌머니랑 밤 따구 있는데, 종구네 집 용만이가 지게에다가 고구마줄기 지고 가다가 우리 집 앞에 잠깐 쉬면서 아주머니가 누구냐구 묻더라.” “용만이가 묻더라구? 지가 뭐 할라구 묻는다냐? 지가 뭐 동네 구장(區長)이라두 되는감? 하나두 도와주지도 못하는 주제에 푼수를 떨게.” “그러닌께 말이다.” “그러닌께 동네 방네 그리 소문이 났지, 넌 모르지? 야 글쎄 용만이가 종금이 언니헌티 연애편지 보냈다가 종금이 언니가 냅다 화가 나서 글쎄 그 편지를 동네 사람들헌티 죄다 보여줘서 소문이 났는디두 챙피한 줄두 모르구, 넉살 좋게 얼굴 빤히 들구 다닌다닌께," “얼레 그랬었구나,증말루 웃기네.” “야 상민아 더군다나 난중에 알게 되었지만 정희언니가 그러는디. 용만이가 글씨를 쓸 줄 몰라서 그 연애편지두 기성이 오빠헌티 그리 매당구치며 사정을 혀서 써 준거래. 그러니 을매나 웃기냐?” “허긴 아까두 보닌께 운동회 끝난지가 언제라구 지금까장 그 선수복 입고 다니드라.” “아이구, 그러닌께 눈치 머리가 없지. 종금언니가 읍내 베틀공장 댕기는 기술자라는 사람이랑 혼삿말 오구 가는 것두 모르구 혼자서 헛물만 키구 댕기지.” “그럼, 종금이누나가 이번 가실에 시집가긋네.” “나두, 자세히는 몰르는디 아래께 울 엄니가 그러는디 중매쟁이가 몇 번 오고간 모양이드라구. 그리구 서루 사진두 주구 받았데.” “암튼 잘 됐으면 좋겠다, 올 가실에 떡이나 실컷 얻어먹게끔.” “하여간 상민이 너는 못 말린다닌께,우찌 그리 먹을 걸 밝히는지 몰르긋다” “아이구 사둔 넘 말하구 있네 그럼 너는 그떡 안 먹을 거냐?”
그다지 얄밉지 않게 보이는 옥순이 얼굴을 슬며시 바라보며 말을 하자 옥순이도 이내 속내를 들켜버린 듯 배시시 웃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