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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메로 가는 길 - 112 조회 : 1,650




텅 비워진 들녘에 소슬바람만 까칠하게 스쳐지나니 참으로 적적하기 그지없었다. 종일토록 소걸음 하던 늦가을 저녁 해가 여유로운 모습으로 읍내 서편 하늘가에 차분하게 기울고 있었다.
마음 가득 들어찰 만큼 추색(秋色)이 완연(完然)해진 앞 산 산자락엔 어둠살이 어슬어슬 찾아들고 있었다.

저녁노을은 등뫼산에 소리 없이 찾아드는 어둠살에 슬며시 자릴 내어주려 했다. 그리고 분신처럼 남긴 주홍빛 푸석한 가루를 산릉선 자락에 곱살하게 흩뿌렸다. 들뜨는 마음 같아서는 금방이라도 달려가 고운 빛을 한 움큼 꼭 움켜쥐고 싶은 강한 충동을 느꼈다.

저녁 해 서둘러 까무러지는 그맘때쯤이면 핏기 잃은 초저녁달이 산릉선 오른쪽으로부터 슬며시 떠올랐다. 느긋하리만큼 주춤대는 창백한 초저녁달은 동구 밖 나들목 한 귀퉁이에 뻘쭘 선 벼랑바위를 빼꼼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읍내를 향해 시원스레 트여진 신작로 위를 달려 온 저녁 막차가 주막집 앞에 멈춰 섰다. 언제나 그랬듯이 어머니께서 버스에서 내리셨다.
젓갈동이를 머리에 이신 내 어머니가 어둑발이 두터워지는 어스름한 밭둑길을 잰걸음으로 걸어 오셨다. 벼락바위 앞에 닿으셔 잠시 쉬어 가시려는 듯 비릿한 젓갈 냄새 채 가시지 않은 동이를 머리에서 내려놓으셨다.

젓갈동이 속에서 검정색 여자 고무신 한 켤레와 볏짚으로 야무지게 묶은 자반 한 손을 젓갈동이 속에서 꺼내 내게 건네시며 말씀을 하셨다.

“내 깜냥에는 애 에미 발 치수를 잘 재 가지구 갔는디, 그놈에 골이 좁아 가지구 잘 맞질 않혀서 다시 바꿔 왔다. 근데 이번에는 잘 맞을란가 으짤랑가 모르긋다.”

막차가 지나가고 난 주막집 초가지붕엔 어둠살만 짙어 가고 있었다. 거뭇거뭇해 보이는 탱자나무 울타리 사이로 주막집 점방의 누런 불빛이 흐릿하게 새어 나오고 있었다. 스치는 바람결에 들국화 향기가 살갑게 배어났다.
풀숲에선 가을의 정취를 듬뿍 담아내는 선율인양 찌르륵거리는 풀벌레들의 울음소리가 애연(哀然)스럽게 들려왔다.

바로 그때 화산리 마을 어귀 건널목에 올라선 지프차같이 생긴 시발택시 한 대가 불빛 한줄기를 화산리 마을을 향해 환하게 번쩍였다. 그리고 시발택시는 몸을 기우뚱거리며 이내 건물 유리창 사이로 불빛이 새어 나오는 지서 앞을 지났다.
약방 모퉁이에서 오른쪽으로 머릴 돌려 건널목을 건너 벼랑바위 앞에 차가 멈춰 섰다. 그리고 차문을 열고 밖으로 내려서는 사람은 바로 기순이 누나였다.

어슴푸레한 달빛에 보인 기순이 누나의 모습은 동네 누나들의 치렁치렁한 긴 머리 모습과는 사뭇 판이하게 달랐다. 긴 머리를 짧게 잘라 고불고불하게 볶은 머리가 조금은 황당하게 보였다.
전에 보았던 그 아름답던 칠흑같이 긴 생머리는 어디로 가고 뽀글뽀글하게 볶아 놓은 머리가 그리 어울리게 보이질 않아 조금은 거리감을 느꼈다. 살결이 너무도 고와 목 아래의 피부가 그토록 희고 매끄럽기만 하였던 누나의 변해버린 모습이 생소한 이질감을 주었다.
새까맣게 그은 눈썹과 새빨갛게 칠을 한 입술에서 무엇이라고 형언키 어려운 묵직한 연민의 정을 또한 느꼈다. 서둘러 차에서 내린 기순이 누나가 어머니와 내 앞으로 다가서며 어머니에게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어머, 상민엄니 아니세유? 장사갔다 이제사 오시남유, 그리구 우리 상민이두 야물딱지게 많이 컸구나.”
“아니, 이게 누구랴, 기순이 아닌가벼, 참말루 오랫만이구나. 그래 그간 잘 있었구? 시방 집에 댕기러 오는감? 니 엄니가 좋아 하긋다. 근디 차는 왜 그냥 돌려 보냈냐, 쭉 타구 가지 않구서리.”
“동네 사람들 눈두 있구 해서 택시는 요기서 그냥 돌려 보내구 뒷길루 걸어서 들어갈라구 했어유.”
“아니, 누가 뭐라구 헌다구 그려, 기순이 맘씨 곱구 착한거 동네가 다 아는디 뭐.”
“그래두, 안 그렀지유, 어디 동네 사람들 맘이 아줌니처럼 똑같은감유, 겉으론 절대 안 그런 척 하면서두 뒤에선 다들 이 흉 저 흉 다 보는디, 별의별 말을 다 하겠지유.”
“사실 홀라당 까놓고 속 들여다 보면 다들 넘 말할 처지두 못 되면서 왜들 그러는지 몰라. 아, 말이사 바른 말이지만 쭈그러진 냄비나 땜질한 뚜껑이나 다 그게 그건디.”

그렇게 말씀하시는 어머니의 생각이 옳으셨다. 마을에서 유족하게 살아가는 몇몇 집 그들은 그렇다 치더라도 삶의 질이 그리 우월하지도 못한 사람들이 오히려 더 큰소리를 냈다.
마을 안에 크고 작은 일이 생기면 그리도 여과 없이 남의 말들을 거침없이 했다.

“솔직히 지는유, 제 꼬락서니가 이리 된 거 좀 부끄럽기는 혀두, 지가 선택한 길이니께 후회는 없구만유, 지 한 몸 희생해서 하나 밖에 없는 지 동상 기남이 밥 안 굶기구 공부 시켜 잘만 되면 여한이 없을 꺼구만유.”

그렇게 말을 하는 기순이 누나가 감정이 벅차오르는 듯 애써 참으려 말을 잠시 멈추는 듯싶더니 이내 말을 이었다.

“글구 해마다 그 징그런 보릿고개 때만 되면 먹을 것이 없어 들루 산으루 풋나물 찾아 두 눈 부릅뜨구 안 다녔는감유? 배가 을매나 고팠으면 난중에는 목에서 쇳내가 다 나데유.”

그렇게 말하고 있는 기순이 누나가 애써 서러움을 참으려 하였지만 어스름한 달빛 아래서도 들먹이는 누나의 두 어깨가 보였다. 그리고 이내 가죽가방 안에서 손수건을 꺼내 눈언저리를 닦고 있었다. 그러자 어머니도 몸뻬 바지 속에서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훔치면서 말씀을 하셨다.

“그려 느그들이 무신 죄가 있긋냐! 느네 아버지 그리 세상 뜨시구 나서, 온갖 고생이란 고생 다 했지 뭐. 당장 끼닛거리 간곳없으니 배우구 싶었어두 못 배운거지. 그러닌께 추호(秋毫)두 부끄럽다는 생각 말구 더 힘내서 살어. 기순아 내 말 알아들었지?”
“지는유, 저한티는 무신 말을 혀두 좋은디, 아직 어리디 어린 지 동상이 남들헌티 뭔 말을 듣구 상처 받을까 봐, 그게 젤루 걱정이구만유, 그래서 이번 참에 동네를 떠날라구 지가 내려왔구만유.”
“에휴, 오직허면 부모 뼈 묻은 디를 버리려구서 갈려고 맘 먹었을까? 에이구, 그저 하나둘씩 고향을 저렇게 떠나구 마네 그려, 그럼 어디 갈디라두 정해 놓은 디는 있냐?”
“네, 엄니는 자꾸만 가까운디 강경이나 논산 읍내루 가자구만 허는디, 시방은 기남이가 어려서 뭘 모른다구 혀두 금방 클 건디, 읍내 살면서 어쩌다가 동네 사람들이라두 만나 내 얘기를 전해 들을까 무서워, 지는 차라리 멀리 떨어진 연무대라는디루 갈려구 집두 다 알아보았구만유.”
“암튼, 장하다 장혀, 이런 너를 누가 뭐라구 할끼여, 그 돈 만들라구 을매나 고생을 했을까? 안 봐두 뻔히 알겠다. 에휴, 기나저나 그럼 살고 있는 집일랑은 어쩔려구?”
“그건, 엄니가 기수오빠헌티 팔았는가 보더라구유, 을매 받었는가는 잘 모르겠구유, 기수 오빠가 이번 가실에 장가가는 모양인디. 자기 형네랑 같이 살기가 거북스러워서 이참에 따루 제급(齊給])을 날 모양인가 보더라구유,”
“음, 하여간에 어딜 가더라두 몸조심허구 엄니 잘 모시구 잘 살아야 혀, 고생한 만큼 행복하게 살아야 헌다구, 그럼 어여 가봐. 니 엄니 걱정 할라. 꼭 잘 살아야 혀 내말 알어들었지?”
“암튼, 아주머니 고맙구만유, 그럼 저 이만 가볼께우, 잘 살펴 들어가셔유”

그렇게 서로가 서로를 못내 아쉬워하며 촉촉이 젖어오는 눈언저리를 애써 감추려 했다. 그리고 서로를 향해 무겁게 손을 흔들며 석별에 정을 나눴다.

보름을 향해 몸 부풀려가는 상현달을 꿀꺽 삼키는 한 덩이 모난 검은 구름처럼 나도 가슴속 깊게 아려오는 아픔을 말없이 삼켜야만 했다. 그 어느 누구라도 가난을 피해갈 수 없기에 거친 세상에 죽지 않고 살아남으려면 있는 힘을 다해 발버둥을 쳐야만 했다.

그렇게라도 살아보려고 애를 쓰는 기순이 누나를 두고 동네 사람들은 뒤에서 ‘양갈보’라고 왜 그리 놀려댔는지 어린 나로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그저 어렴풋이 그 말이 지니고 있는 뜻이 아주 좋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세월이 흐른 훗날에서야 ‘양갈보’라는 말의 참뜻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참으로 형벌 같은 그 단어가 착하기 그지없는 기순이 누나에게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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