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구 밖 방죽가에는 두 그루 미루나무가 우뚝 서있었다. 그 우듬지에 머물던 아침 해는 끝 모르게 펼쳐진 빈 들녘으로 발걸음을 옮기려 했다. 계절이 늦가을인지라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크고 작은 산들이 누르끄름한 색깔로 둘러져 있어 그리도 황량하게 보였다.
제멋대로 얼기설기 엮어 둘러진 울타리엔 메마른 호박넝쿨 줄기 끝에 힘겹게 매달려 누렇게 빛바랜 호박잎이 바람에 마냥 대롱거렸다. 그런 모습이 마치 소리 없이 사라져가는 늦가을을 배웅하는 것만 같았다.
새털구름 한 자락 높이 떠 있는 주막집 정류장엔 차에 타고 내리는 사람들이 그리 적어 쓸쓸함만 더했다. 아주 멀리 금강 둑에는 색 바랜 낡은 화물차 한 대가 보였다. 부연 흙먼지 속에 읍내 입구로 들어서려는지 뒤뚱거리며 힘겹게 기어오르는 모습이 까마득하게 보였다.
건넛마을 화산리 교회의 종탑에선 주일 예배를 알리는 종소리가 온 산과 들녘에 은은하게 울려 퍼졌다. 그에 걸맞지 않게 뒷산 골짜기에서 불어온 냉량한 바람은 뒷산 언덕바지 왕 소나무 가지를 요란스레 뒤흔들었다. 그리고 빛바랜 오두막집 지붕을 세차게 스쳐 지나 ‘우우’ 소릴 내며 이내 앞들로 내달렸다.
마을 앞 달구지 길엔 준섭이 아버지가 면소재지에 가시려는지 나들목 벼랑바위 모퉁이를 혼자서 걷고 있었다. 심성이 무던하여 사람 좋기로 동네에 소문이 난 준섭이 아버지였다. 그러나 지난번 장날엔 준섭이 아버지께서 큰 손실을 보았다. 읍내 장터에 마른고추를 팔러 나갔다 주막거리에서 소매치기를 당해 도민증과 고추를 판돈이 들어 있던 지갑을 몽땅 잃어버렸다.
그 일로 망연자실해진 준섭이 아버지가 동네 연자방앗간 앞에서 동네 사람들에게 그리 억울하다고 떠들썩하게 큰소리를 치셨다. 그도 그럴 것이 일 년 내 죽도록 농사를 지어 겨우 목돈을 손에 거머쥐었는데 그리 변을 당하고 말았으니 그 서운함에 능히 그럴 만도 했다.
우리 집 만큼이나 마을로부터 외따로 떨어진 기현네 집 마당에선 기현이가 제 나이 또래쯤 되어 보이는 아이와 딱지치기를 하고 있었다. 툇마루에는 기현이 할아버지께서 뼈오징어의 뼈를 햇볕에 말리려고 노끈으로 꿰어 마루기둥에 매달고 계셨다. 그 오징어 뼈는 몸에 상처가 나 피를 흘릴 때 피를 멈추게 하는 효능이 있다고 했다.
바로 옆집 흥남이 아저씨는 엊그제 뒷산에 사각 철망으로 덫을 놓아 다람쥐를 한 마리 잡아 오셨다. 다람쥐 집을 지으시려는지 낡아버린 작은 둥근 채로 수레바퀴를 만들고 철사로 철망을 엮고 있었다.
방죽가에 오리들은 자맥질을 멈추고 양지바른 둔덕에 몸을 웅크려 해바라기를 하고 있었다. 동구 밖을 지나 마을로 들어서는 개울가 나무다리 밑 빨래터에서는 동네 아주머니 두 분의 모습이 보였다. 쌀겨와 양잿물을 섞어 만든 검정 빨랫비누를 옷에 벅벅 칠한 다음 빨래방망이로 두드려 두 손으로 문질러 허연 거품을 내며 빨래를 하고 있었다.
고샅길 첫들머리 우현이네 집 마당에선 우현이 아버지가 새끼를 꼬려 볏단을 물에 적셔 꺼낸 후 메겡이로 두드리시는 모습이 담 너머로 보였다.
종구네 집 마당 안에서는 용만이가 수송아지의 목덜미를 동여맨 밧줄을 위로 바싹 쳐들어 우악스럽게 움켜쥐고 있었다. 그리고 종구네 아버지는 송아지 꼬리를 손목에 잔뜩 휘어 감았다. 그러자 삼식이 아버지가 그 틈새를 놓치지 않고 둥그렇게 휘어진 나무 고리로 소의 코청을 꿰뚫어 코뚜레를 하고 있었다. 아픔을 견디지 못하는 송아지가 죽을 둥 살 둥 하며 발버둥 치고 있었다.
땅속 깊이 박아놓은 펌프로 물을 끌어올려 채소거리를 씻고 있던 정희누나는 그런 모습이 못내 안쓰러운지 고개를 돌려 바라보지 않으려 했다. 마당 한쪽에서는 거위가 노란 부리를 길게 내밀어 두 날개를 퍼덕이며 텃세를 부리는 듯 다소 요란스레 울어댔다.
맞은편 구장님 댁 마루 위에는 나이가 지긋하신 방물장수 할머니가 키버들 나뭇가지를 잘 말려 엮어 만든 고리를 마루에 내려놓으셨다. 먼 길을 걸어오느라 목이 마르셨는지 이장댁 아주머니가 떠다 주는 찬물 한 그릇을 벌컥벌컥 마시고 있었다. 그리고 마루 위에 가져온 물건들을 펼치시고 구장님 댁 아주머니에게 이것저것 물건들을 권했다.
사립짝이 없는 경수 아저씨네 집에서는 경수 아저씨가 대여섯 살 난 아들에게 장난감으로 만들어주려는지 낫으로 소나무를 다듬고 있었다. 잘 마른 소나무 밑둥치 끝을 뾰족하게 깎아 팽이를 만들려는 것 같았다.
우물가 미나리꽝 옆의 인식이네 집엔 오늘밤에 인식이 아버지 제사가 있는지 나물을 볶는 기름 냄새가 낮은 담 너머로 향긋하게 풍겼다. 우물가 종기 형네 집에선 올 가실에 칠순잔치를 앞둔 할머니가 몸이 불편하신지 한약 달이는 지긋한 냄새가 토담 너머로 흘러나왔다.
“아니 벌건 대낮부터 저리 크게 노래를 틀어놓구 그러는가 몰러, 뭐 잘사는 거 자랑할라구 그러는가?”
옥순이가 좀 못마땅한 어투로 말을 하자 곁에 계시던 옥순이 엄마께서 말씀하셨다.
“아, 그 사람들이사, 등 따십구 배부른디 뭐가 걱정이것냐? 그러니 저리들 편케 살지. 허리띠 졸라매고 사는 우리네나 때 되면 끄니 걱정하지 저 사람들이사 뭔 놈에 걱정이 있것냐?” “그건 그렇구, 엄니 아까참에 밭에서 실파 뽑으면서 담 너머로 슬쩍 보닌께 기순이 언니네 집 텅 비어서 그런지 엄청나게 쓸쓸해 보이데.” “그래서 사람 훈김이 좋다는 거지. 에구, 기나저나 잘 도착들혀서, 짐이나 제대루 풀었는지 모르긋다. 아튼 잘들 살어야 할건디, 낯설구 물설은 디서 정붙이구 살라면 꽤나 힘들턴디.”
옥순이가 조막만한 얼굴로 자기 어머니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다시 말을 이었다.
“참, 그러구 보닌께 성균이 오빠가 그기 어디서 사진 찍는 일 한다는디 그럼 서루 만날 수두 있긋네?”
그러자 옥순이 어머니가 옥순이를 바라보시며 말씀을 하셨다.
“그기사 모를 일이지. 사는 바닥이 넓으면 서루 만나기가 쪼매 힘들기구, 안 그러면 오다가다 서루 만날 수두 있긋지 그렇게라두 만날 수만 있으면 무지허게 반가울 껀디, 에휴.”
녹슨 양철지붕 방앗간 뒤편에 잎사귀 하나 남기지 않은 가죽나무가 볼품없이 높다랗게 뻘쭘하게 서 있었다. 그 가죽나무 가지 사이로 한 자락 옅디옅은 구름이 흘러가고 있었다. 자발스럽게 출렁대는 물지게를 지고 고샅길을 홀가분하게 빠져나와 동구 밖으로 향했다.
한낮 햇살에 몸을 데우다 저녁녘 어스름 찾아드는 밤이슬에 생기를 되찾는 구절초가 모닥모닥 머릴 드는 언덕배기에 올랐다. 산릉선이 까마득하게 보이는 저 산들을 몇 번 넘어야 갈 수 있다는 그곳 까치마을로 이사를 간 기순이 누나 생각이 문득 떠올랐다.
그맘때면 마을 앞을 지나 남녘 어딘가로 향하는 뚜껑 없는 곳간차가 내지르는 기적소리가 날카롭게 들려왔다. 기차는 화산리 지서 앞 모퉁이를 휘어 돌며 검은 석탄 연기를 뭉실뭉실하게 하늘 위로 힘차게 내뿜었다. 그리고 풀어진 실타래처럼 점점 흩어지는 검은 연기가 마을을 향해 느실느실 퍼져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