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날보다 조금은 이른 듯싶게 잠에서 깨어났다. 부스스한 눈으로 봉창 밖을 바라보니 아침햇살이 느슨하게 어른거렸다. 뜨락에 나서 울 너머로 텃밭을 바라보았다. 새벽녘에 내린 물안개에 촉촉하게 젖은 감나무 표피와 나뭇가지가 햇빛에 반사되어 영롱한 운치를 남기고 있었다.
머무적거리는 늦가을이 그리 길지도 않은 듯했다.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나지막한 산들이 운무의 끝자락을 헤치고 저마다 또렷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울 너머로 보이는 신작로에 군용 지프차 한 대가 흙먼지를 일으키며 읍내를 향해 홀가분하게 달려가고 있었다.
뜰 안 나뭇가지에 놀던 참새 몇 마리 겨울 준비를 하려는 듯 마냥 분주해 보였다. 추녀 밑을 파고들어 볏짚 틈 사이에 둥지를 틀려는지 꼬리를 촐싹이며 자주 들락거렸다.
이른 아침부터 마을에는 종구네 집에서 머슴 일을 하는 용만이가 이집 저집을 꽤나 분주하게 들락날락했다. 그리고 얼마 후 용만이가 방죽가를 지나 기현네 집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마당 한가운데에서 기현이 할아버지와 무엇인지 열심히 이야기를 하는 있는 모습이 보였다. 기현이 할아버지는 긴 장죽을 입에 무시고 연기를 내뿜으시며 용만이 형이 하는 이야기를 듣고 있는 듯했다.
부엌에선 어머니와 아주머니가 아침밥을 지으려 불을 지피고 있었다. ‘딱딱’ 무릎으로 삭정이를 꺾는 소리가 부엌문 밖까지 들려왔다. 쌀과 고구마를 섞어 넣은 밥이 조금 누른 듯 밥내가 코끝으로 구수하게 풍겨났다.
“엄니, 시방 용만이가 종이때기를 들구 이 집 저 집 다니는디, 뭣 땀시 그러는가 몰루겄네, 쪼끔 전에는 기현네 집에서 기현이 할아버지랑 뭐시라구 얘기를 허든디.”
용만이형 행동이 자못 궁금하여 부엌으로 들어서며 어머니에게 여쭤보았다.
“그야 보나마나 뻔하지 뭐, 또 그 일 할려구 그러는구먼, 종구 애비가 하나밖에 없는 동생이니까 어떻게든 허는디까정은 혀볼라구 그렇게 팔 걷어붙이구 나서긋지.” “그럼, 종구네 삼촌 땜시 그러는구먼 그런디 용만이가 뭐 헐려구 종이는 가지구 다니는가 모르것네.” “아, 그건 나라에 높으신 분한티 종구 삼촌이 저질른 죄를 쪼끔이라두 용서혀 달라구 진정서에다가 동네 사람들헌티 손도장을 받을라구 허는거구, 그렇게라두 혀서 징역살이를 쪼매라두 깎아 볼려구 허는 기여,” “그럼 동네 사람들헌티 도장 많이 받아 가면 종구 삼촌이 저질러놓은 죄는 많이 깎아지는 거여.” “ 어이구 언감생심이지, 인간에 탈을 쓰구 그리 못되게 여러 사람들 가슴 팍에다가 대못질을 혔는디, 깎아지기는 뭐시 그리 깎아지긋냐, 참 그나저마 그 양반두 큰일이다, 그 나이에 징역을 그리 엄청스레 많이 받았으니, 그거 다 살구 나오면 다 늙어서 기집 자식새끼 하나두 없이 늘그막에 어떻게 살라구 그러는지 모르긋다 에이구.” “와! 엄니 그럼 종구네 삼촌이 늙어서 꼬부랑 할아버지가 돼야 나올 수 있는감?” “그려 그렇타닌께, 죄를 지었으닌께 죄 값을 달게 받아야지, 그리 멀쩡한 사람들을 뭔 놈에 죄가 있다구 잡아다 반빙신이 되게 두둘겨 패고, 어떤 사람은 나랏일 좀 했다구 밤에 산골짜기루 끌구가서 총으로 쏴 죽여 개골창에 내다 번졌으니 그 죄를 어찌 헐 것이여, 에이구 징그런 놈들.”
어머니께서는 얼굴을 온통 찡그리셨다. 그 시절 진절머리 나게 끔찍했던 기억들을 두 번 다시 되뇌기가 역겨워 떨쳐내시려는 듯해 보였다. 그리고 부엌문 밖으로 나오셔 머리에 쓰고 계시던 수건을 벗어 힘껏 훌훌 털고 계셨다.
기현이네 집을 나선 용만이가 언덕배기로 올라서며 우리 집으로 오려는지 밭 자락 길로 들어서고 있었다. 낯선 사람이 나타나자 검둥이가 마구 짖어댔다. 그런 모습을 싸리 울 너머로 바라보시던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종구 애비가 하루도 빼놓지 않고 그리 급살맞게 볶아대고 재촉을 혀 싸서 논 팔아가지구 빗 다 갚았으닌게 이제는 별스레 헐말두 없을 건디. 이러쿵저러쿵 간에 한 번 가보라구는 혔구먼, 참 낯짝 한번 두껍지 우리 집까장 도장을 받으러 보내는 걸 보면.”
용만이형이 휘파람을 불어 덜렁거리며 도랑가를 거쳐 쓸쓸하게 텅 비어 있는 원두막을 지났다. 그리고 이내 텃밭 가장자리로 들어서며 사립짝 앞에서 어머니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이는 듯 인사를 하며 말을 건넸다.
“아줌니 안녕하셨서유?, 아직 읍내는 안 나가셨나 봐유, 저 다릉게 아니라 종구 삼촌일루다가 동네 분들 손도장 좀 받아 오라구 혀서 왔구만유, 지난 일이사 좀 껄끄럽긴 혀두 으찌것는 가유. 그러닌게 원만허면 도장 하나 꾹 눌러 주시면 고맙겠네유.”
용만이의 말이 끝나자 엄마가 용만이를 바라보며 말을 이으셨다.
“암튼, 어찌됐든 지간에 욕보구 다니네유, 어서 들어오기나 허시유.”
엄마의 말씀을 듣고 있던 용만이가 코를 씰룩거리면서 마당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무엇인가 조금은 불만스런 표정으로 말을 했다.
“그전에 두 번인가는 동근이 아버지가 해줬다구 허든구먼유. 근디 자꾸 부탁허기두 부담시럽다구 하면서 이번 참엔 나 보구 받아 오라구 허는디, 그게 어디 한두 집인감유 이것두 일이라구 이 사람 눈치 볼라 저 사람 눈치 볼라 무지허게 힘이 드네유.”
그러자 엄마가 잠시 무슨 생각을 하셨는지 차분하게 말씀하셨다.
“왜 아니것시유, 지난 난리 때 용만이 총각이 여기 안 살 때라 잘 모르긋지만, 서로 간에 얽히구설킨 사연들이 제가끔씩은 다 있으니 다덜 그리 선뜻선뜻 손도장을 찍어주지는 않을 꺼구만유. 참, 세상 살아가는 게 뭐시 이리 어려운지, 암튼 나는 찍어 줄란께 그리 아시유.”
어머니께서 진정서 종이에 이름을 쓰시고 오른손 엄지손가락을 도장밥에 대시고 꾹 눌러 손도장을 찍으셨다. 그런데 용만이형은 곁에 서 있는 내 눈치를 도둑고양이마냥 슬금슬금 보면서 자꾸만 눈길을 부엌 쪽으로 모으고 있었다.
어머니로부터 진정서 종이를 건네받은 용만이형이 오던 길을 되돌아 텃밭을 내려서자 내가 어머니에게 물었다.
“엄니 그런디 용만이가 자꾸만 내 눈치를 살피면서 아줌마를 힐끔힐끔 바라보구 그러는지 몰라, 종금이 누나 좋아헌다구 동네방네 소문 다 내놓구 왜 그러는지, 저번짬에두 누구냐구 나헌티 자꾸 물어보든디.”
그러자 어머니께서 슬쩍 웃으시며 말씀을 하셨다.
“아, 그기사 물어볼 수두 있는 거지 뭐. 혼기를 놓친 노총각이라 그런는가 부다. 나이가 벌써 서른이 넘었다구 허든디 어서 좋은 짝을 만나야 헐틴디. 기나저나 너는 쓰잘데기 없이 그런디 신경 쓰지 말구 어여 밥 먹구 학교 갈 준비나 혀.”
어머니한테서 수차례 들은 말씀에 의하면 우리 외삼촌과 종구네 삼촌 이정섭씨는 같은 나이의 국민학교 동창생이었다. 자기 형인 종구 아버지를 따라 멀리 전라도 김제 그 어드메에서 이곳 들메 마을로 이사를 와서 일본사람 밑에서 머슴살이를 했다.
종구네 삼촌은 그런 자기 형의 처지를 늘 비관했다. 그리고 겨우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형편이 여의치 못해 읍내에 있는 상급학교에 다니지도 못해 늘 사회에 대한 불만을 갖고 살아왔다.
그러던 중, 1950년 6월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여 불법 남침을 감행한 인민군에 의해 면소재지가 점령당하고 말았다. 평소에 사회적 불만이 가득했고 못된 쪽으로 혈기가 왕성했던 이정섭씨는 그 들과 쉽게 동요되었다. 그리고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지는 벼락감투를 쓰게 되었다. 채화면 인민위원회 핵심 간부가 되어 그들의 앞잡이 노릇을 했다. 붉은 완장을 팔에 두르고 끝을 뾰족하게 깎은 날카로운 죽창을 들고 온 마을이란 마을을 이 잡듯이 뒤집고 다니며 온갖 만행을 저질렀다. 그들의 만행을 견디다 못해 숱한 면민들이 보따리를 챙겨 멀리 깊은 산속으로 몸을 숨겼다. 그렇게 모진 고생을 하며 숨어 살아오다 북진하는 국군이 면소재지를 탈환했다. 그러자 종구 삼촌인 이정섭씨는 줄행랑을 쳤다. 퇴각하는 인민군 패잔병들과 인민위원회 간부였던 몇 사람들과 함께 한밤중에 소릿재 고개를 넘어 전라도 어느메 깊은 산속으로 도망쳐 숨었다.
전란으로 피신하였던 면내의 젊은이들이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전쟁으로 혼란해진 경찰의 임무를 임시적으로 대신하는 치안대라는 자발적인 기구를 조직했다.
그 치안대는 경찰이 다시 임무를 수행하러 올 때까지 면내 유지들과 합심하여 국군을 도왔다. 군에 필요한 전략적인 정보 제공과 군수물자를 운반하는 일도 열심히 했다. 한편으로는 북에 가담했던 핵심 인물은 물론이거니와 그 잔당인 불온사상을 갖고 숨은 자들을 색출하는 일에 큰 힘이 되었다. 그렇게 면내에서 치안의 공백으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처리했다. 그 치안대에 외삼촌이 대원으로 가담을 하여 활동을 하셨다. 그렇게 두 사람은 한 동네에 살던 친구이면서도 좌익과 우익으로 서로 갈라져 영원히 상생할 수 없는 두 갈래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종구네 외삼촌이 무슨 이유였는지 퇴각하여 북으로 도망치는 빨치산 대열에서 몰래 빠져나왔다. 그리고 월북을 포기하고 더 깊은 산속으로 피해 살았다.
한국전쟁의 정전을 위한 휴전협상이 이루어져 전쟁이 모두 끝났다. 치안이 서서히 확보되자 더 이상 산속에서 버티기가 어려웠던지 날이 몹시 어두웠던 어느 날 새벽녘에 종구네 외삼촌이 고향인 마을로 돌아왔다. 아주 허름하고 남루한 옷차림에 지칠 대로 지친 몸이었다. 그 모습에 놀란 종구 아버지가 뒤뜰 대나무 밭에 토굴을 파고 종구네 삼촌을 숨겼다.
그러던 어느 날 국군과 경찰들이 트럭을 타고 마을로 들어서 대밭 속에 숨에 있던 종구네 삼촌을 체포했다. 그 후 국가 보안법 위반으로 15년의 장기형을 선고 받고 대전형무소에 수감되어 수형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런 참혹한 전쟁이 남긴 상처는 우리 집인들 예외일 수는 없었다. 동네 원로라고 외조부께서 악랄한 그들의 손에 끌려가셔서 허름한 창고에 갇히셨다. 그들에게 강제로 의용군에 끌려가지 않으시려고 산속으로 피해 숨으신 외삼촌의 행방을 대지 않는다고 심한 욕설 속에 뭇매질을 수차례 당했다. 그로 인해 몇 해 동안을 병석에 누워 계셔 병 구환으로 가산이 거의 기울고 말았다. 좀처럼 회복될 기미를 보이지 않으시던 외조부께서 결국엔 그렇게 세상을 뜨시고 말았다.
그때 마을에 구장 일을 보시다 외조부와 함께 끌려가신 우물가 미나리꽝 옆에 사는 인식이네 아버지도 심한 매질을 당했다. 그리고 그것도 모자라 반동이란 허울 좋은 구실로 늦가을 새벽 비석골 골짜기에서 총살을 당해 원통하게 세상을 뜨셨다.
그 당시 종구네 삼촌이 인민군과 함께 몰려와서 인식이 아버지를 붙들어갔다. 그런 이유로 아직까지도 인식이네 집에서 종구네 집을 철천지원수처럼 여겨 등을 돌리고 살았다.
외조부께서 그리 허무하게 돌아가시자 외삼촌은 오랫동안 비통해 하셨다. 극도로 피폐해진 마을 인심과 여러 가지 유형의 크고 작은 상처에 여러 날을 두고 인간적인 고뇌와 빈민을 거듭하셨다.
그러던 중 외삼촌이 가슴 아린 상처로 얼룩진 고향을 떠나려고 서둘러 얼마 남지 않은 가산과 논을 정리하고 말았다. 그런 후에 고향을 떠나 전라북도 진안의 깊은 산골짜기 어디쯤으로 이사를 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