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어오는 바람이 쌀쌀하게 피부에 와 닿아 이제 겨울이 그리 멀지 않은 듯 느껴졌다. 아침부터 늦가을 비가 성이 차지 않게 질금질금 내리는 듯싶더니 이내 흐지부지하게 멈추고 말았다. 다소 스산해 보이는 날씨에 구름과 구름 사이로 아침 해가 단작스럽게 얼굴을 내밀었다. 그런 탓인지 그리 따습지 않은 햇볕이 쪽마루에 어렵사리 찾아들었다.
비가 갠 후 바라보이는 산과 들은 그 모습이 더욱 또렷하게 보여 조금은 차갑게만 느껴졌다. 텅 빈 늦가을 들녘엔 이따금씩 냉기서린 바람 소리만 달갑지 않게 들려와 온 주위가 그저 숙연해질 정도로 적적하기만 했다.
산세가 그리 가파르지 않은 산기슭 아래로 펼쳐진 너른 들녘에 소쿠리처럼 오목하게 자릴 잡은 작은 마을. 그곳이 바로 하늘로부터 축복받은 땅 들메였다.
날마다 붉게 타오르는 아침 해는 멀리 대둔산 산머리로부터 장엄하게 떠올랐다. 마을 뒤로는 금강 물이 유유히 흘러 자혜롭게 온 들녘을 고루 적셔 삶의 근간을 이루었다. 서쪽 하늘가에 말없이 스러져가는 저녁 해 또한 넉넉하리만큼 가슴 활짝 열어 품안에 가득가득 그 모두를 끌어안고 다소곳하게 기울려 했다.
들메 땅, 이 자리엔 우리들보다 앞서 살았던 분들이 남겨 놓은 삶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그 터 위에 다음 세대인 우리들이 자리를 이어가야 하는 필연적인 삶에 이치를 다시금 느꼈다. 각자 처해진 삶의 여건이 때론 힘에 겨워 어려울지라도 그 또한 하늘이 준 숙명으로 받아들여 겸허한 마음으로 부지런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눈을 모아 앞을 바라보니 울타리 너머로 아랫마을의 모습이 여느 날보다는 상큼한 모습으로 바라보였다. 마을로 이어지는 동구 밖 길가엔 기현네 집이 외따로 서 있었다. 기현이 할아버지가 잠시 내렸던 비에 땅이 알맞게 젖어 땅을 파기에 적합했는지 뒤뜰 둔덕에서 뚱딴지(돼지감자)를 캐고 있었다. 기현이는 캐놓은 감자를 삼태기에 부지런히 주워 담고 있었다. 뚜렷하게 기억은 못하지만 나도 언젠가 그 뚱딴지를 한번쯤은 먹어본 적이 있었다. 감자처럼 푸근푸근하지는 않았지만 설컹거리는 것이 그런대로 진득거리고 쌉싸래한 맛이 있어 먹을 만했다.
조금 멀리 철로 너머 큰길가엔 보름 후에 장가를 가는 기수 아저씨의 모습이 보였다. 기순이 누나가 살던 집을 사들여 입맛에 맞게 요목조목 수리를 했다. 아마도 읍내 목공소에 새로 맞춰 놓았다는 문짝들을 찾으러 가는 것 같았다. 기수아저씨가 뒤뚱뒤뚱 덜컹거리는 순아네 소달구지를 타고 벼랑바위 앞을 지나고 있었다.
더 멀리 화산리 지서 앞 건널목에는 젓갈동이 머리에 이시고 철로 길을 건너려 하시는 어머니의 모습도 눈에 띄었다. 그리고 읍내로 가는 첫차를 타려고 주막집 정류장으로 가는 면내에 사는 선배 형들과 누나들의 검정 교복을 입은 말쑥한 모습이 띄엄띄엄 보였다.
아주머니께서 학교에 가는 나를 배웅해주시려고 텃마당으로 나오셨다. 등에 업혀 옹알거리는 아기의 볼이 너무 탐스럽기만 하여 손끝으로 가볍게 매만져주었다. 책보자기를 어깨에 둘러메고 녹색 짙은 배추밭을 지나 도랑가 디딤돌을 건너 건널목 수문 앞에 닿았다. 검은 머리를 두 갈래로 예쁘고 정갈하게 빗어 땋은 작달막한 내 친구 옥순이가 작은 손을 흔들어 빨리 오라고 손짓을 했다.
“옥순아, 아까참에 보닌게 큰길 가로 기수 아저씨가 순아네 소달구지 타구 가던디 집수리는 얼쭉 다 되 가는 모양이더라.” “음, 지붕을 새로 해서 올렸구, 쪽마루 마루짝을 더 크구 널따랗게 만들구 방문짝도 다 뜯어내서 문틀하구 문짝을 새거로 바꿨어, 그리고 이 참에 부엌두 더 넓힌다나 봐, 암튼 흔집을 새집으로 확 바꿔 버려서, 증말루 보기좋게 만들었더라.” “그럼 이번에 돈두 많이 들어 갔긋다. 야, 옥순아 그런디 기수 아저씨 장가가는 날이 언제라구 그러데 떡하구 고기라두 실컨 얻어먹게 빨랑 했으면 좋긋다.” “음, 우리 엄니가 기수 아저씨 엄니헌티 들었다는디, 한 보름이나 남은 거 같이 얘기 허든디 뭐 때 되면 하긋지. 그리구 넌 맨날 그렇게 먹을 것만 밝히냐 뱃속에 그지가 들어 있나, 먹는 타령만 허게.” “야, 너 자꾸 나 놀리면 이따가 밤중에 집으루 올 때 너 떼어 놓구 도망칠 틴게 그리 알아라.” “야, 비겁하게 남자가 혼자서 도망가냐? 갈라면 가라 뭐, 나 혼자서는 못 올 줄 알구 그러냐 인정머리 없게시리.” “아녀, 그냥 혀본 소린디 뭘 그렇게 삐지구 그런다냐, 미안허게시리.”
수문을 지나 새터 나들목에 이르렀다. 나들목 넓적바위에 남산리에 사시는 대나무 소쿠리 장사를 하시는 엄씨 아저씨와 아주머니가 바윗돌 위에 걸터앉아 잠시 쉬고 있었다.
엊그제 산에 올라서 내려다 본 학교 울타리에 측백나무는 그리도 작게만 보였다. 그런데 아침에 학교 가는 길에서 다시 바라보니 역시 산에서 본 것과는 달리 엄청스레 높다랗게 보였다. 우리들보다 먼저 학교에 온 아이들이 운동장에서 떠드는 소리가 멀리까지 들려왔다.
가지 끝에 겨우 몇 잎을 힘겹게 매달고 부는 바람에 대롱대롱하는 학교 운동장가에 늘어선 플라타너스 나무가 더없이 쓸쓸하게 보였다. 그나마 운동장을 가득 메워 놀고 있는 아이들의 떠드는 소리가 고적함을 덜어주는 듯했다. 운동장에서는 군데군데 모여 제기차기와 구슬치기를 그리고 팽이싸움을 하며 놀고 있었다. 그리고 선생님들 눈을 피하여 한쪽에서는 대못을 뾰족하게 갈아 못치기를 하는 아이들도 보였다. 교실 화단 앞에서는 여자아이들이 노랫소리에 맞춰 ‘팔짝팔짝’ 고무줄 위를 건너뛰면서 고무줄놀이를 하고 있었다.
교무실 앞에는 나이가 지긋하신 할아버지 한 분이 돋보기를 쓰시고 두꺼운 군용 천막 쪼가리를 무릎 위를 덮으시고 앉아 있었다. 그리고 학교 소사 일 하시는 양씨 아저씨가 가져다주시는 축구공과 배구공 겉껍질의 낡은 부위를 손질하시려고 바늘구멍을 찾아 실을 꿰시려고 애를 쓰셨다.
그늘이 잔뜩 드리워진 교실에 들어서자 아직은 햇볕이 덜 들어와 그러는지 싸늘하기만 했다. 초칠을 하여 미끄러운 마룻바닥의 작은 틈사이로 올라오는 찬바람이 발바닥에 닿아 조금은 발이 시렸다. 여자 아이들은 발바닥이 차가워서 그러는지 나뭇가지에 웅크려 앉아 있는 참새 떼처럼 걸상 위에 발들을 올려놓고 군데군데 모여앉아 재잘거리고 있었다.
언제나 영선이는 나를 보면 정답게 웃으면서 아기가 잘 있느냐고 물어보았다. 그런 모습이 참 마음속으로 고맙기만 했다. 우리 집에 아주머니와 아기가 새 식구가 되어 함께 사는 것을 반 아이들은 물론 담임선생님도 알게 되었다.
한번은 선생님께서 아주머니와 아기에 대하여 나에게 말씀해 주셨다.
“네 어머니가 나하고 같이 학교 다니던 어렸을 적부터 넘 불쌍한 모습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더니 어른이 되어서도 역시나 그렇구나, 참 좋은 일을 하신 거지.”
그리 싫지도 않은 도시락 반찬 냄새가 채 빠져나가지 못한 교실 안에서 오후 들어 첫 시간이 시작됐다. 습자시간 수업을 시작하기 전에 선생님께서 우리들에게 말씀 하셨다.
“이제 곧 추위가 닥쳐오면, 교실 안에 난로를 피워야 하는데, 학교 살림살이가 힘들어서 무연탄과 나무장작으로는 다 채울 수 없어 내일은 오전수업을 마치고 오후에는 사학년부터 육학년까지 남산리 뒷산에 솔방울을 주우러 갈 건데 각자 자루 하나씩 가져오기 바란다.”
그러자 교실 뒤쪽에서 성태와 응선이가 거의 같이 걸상에서 일어서 선생님께 질문을 했다.
“선생님 그럼 내일 솔방울 주우면서 토끼몰이도 하는감유?” “참, 저놈들 못 말리겠네, 야 이놈들아 솔방울 줍기도 바쁜데 무슨 토끼몰이를 하냐.”
선생님이 밉지 않은 눈초리로 바라보시고 서둘러 칠판 위에 커다랗게 붓글씨 제목들을 써놓으셨다.
“아름다운 금수강산, 민족소원 남북통일, 무궁화 삼천리”
선생님께서 우리들에게 각자 자기 마음에 드는 글귀를 습자지 위에 잘 써서 말린 다음 선생님께 제출하라고 하셨다. 그리고 다음시간에 실시할 산수시험 문제지를 등사하시려 테가 굵은 검정 뿔테 안경을 치켜 올리시며 철판에 등사원지를 올려놓으시고 철필로 긁어 글씨를 쓰셨다.
습자 붓도 가정 형편이 좀 부유한 몇몇 아이들은 자기 부모들이 읍내 문방구에서 모질이 좋은 붓을 사 주어 털이 잘 빠지질 않았다. 그런데 그 외에 대다수는 붓을 좀 쓰다보면 털끝이 빠져나와 습자지에 달라붙어 글씨에 묻어나지 않게 조심스럽게 떼어내느라 정말 힘이 들었다.
그리고 아이들은 울타리에 측백나무 잎을 따서 칼로 연필심을 깎듯이 아주 잘게 썰어 넣은 다음 먹으로 곱게 갈아 글씨를 썼다. 그렇게 쓴 글씨가 잘 마른 후에는 번득번득하고 예쁘게 빛이나 정말 보기에도 좋아 한편으로는 신기하기도 했다.
5교시 수업시간이 거의 끝나갈 무렵 각자 써 놓은 습자지를 선생님께 제출했다. 선생님의 평가를 기다리고 있는데 선생님께서 성태를 앞으로 나오라고 하셨다. 성태가 쓴 습자지를 높이 들어 우리들에게 보여 주셨다.
“자, 다들 여기에 주목! 성태가 쓴 이 글씨 정말 잘 썼다. 곰이 딩구는 재주는 있다고 붓글씨는 생각보다 잘 쓰네, 허 그놈!”
선생님이 칭찬을 해주시자 성태가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멋쩍게 웃으며 말을 했다.
“선생님, 지가유. 이래뵈두 학교 입학하기 전 까장은유. 서당방 글공부 삼년 넘게 했어유. 붓글씨를 을매나 많이 썼다구유.”
성태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교실에 한바탕 웃음소리가 퍼져나갔다.
교무실에서 ‘땡땡땡, 땡땡땡’ 수업을 끝마치는 종소리가 들려왔다. 그 종소리가 늦가을 어둠이 깔리는 교정의 적막감을 깨우려는 듯이 세차게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