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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메로 가는 길 - 120 조회 : 1,659




지축을 뒤흔드는 기차의 진동음이 울타리너머로 들려와 버릇처럼 눈을 들어 철로 쪽을 바라보았다. 빈 들녘을 두 쪽으로 가르듯 꿰뚫고 가는 열차는 남행을 계속하고 있었다.

이른 아침이라서 그런지 열차의 객실 안은 눈에 쉽게 띌 만큼 자리가 비어 있었다. 기차가 남긴 검은 연기가 언덕배기에 있는 갈참나무 위로 너울너울 흐트러지고 있었다.
언덕배기엔 삼식이 어머니가 머리에 술동이를 이고 바삐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꽤나 성질이 급하신 삼식이 아버지한테 술을 늦게 가져왔다고 한소리 들을까봐 꽤나 걱정이 되었던 모양 같았다.

이엉을 엮고 계시는 삼식이 아버지 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문득 돌아가신 아버지 생각이 났다. 지금쯤 내 아버지가 살아 계셔서 이분들과 함께 정담을 나누시며 일을 하고 계시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 차올랐다.
어드메에서 불어오는 스산한 바람만 이따금씩 스쳐가는 뒷산머리 함박골 쪽을 바라보았다. 그곳에 홀로 누워 계신 아버지의 얼굴이 또렷하게 떠올랐다.
왠지 허전함에 마음 한쪽 다시 시려와 묻어나는 외로움이 절절했다.

부엌에서는 평소 성격이 소탈하시고 인정이 많으신 삼식이 어머니가 아주머니와 손짓 발짓을 다하시고 아기를 들여다보시며 함께 웃고 계셨다.
마당에서는 병수네 아버지가 밑 부분이 검게 그을린 양은 냄비 속에 밥숟가락을 넣으시고 돼지고기를 고르시나 이리저리 뒤척이셨다.
그리고 돼지고기 한 점을 골라 입에 넣으시며 기현이 할아버지에게 말을 건네셨다.

“그나저나 아래께 큰길가로 지나다가 보닌게 깨 타작을 하시는 것 같던디. 어떻게 금년 깨농사 재미 좀 보셨어유? 아래께 장날에 미곡상에서 말들 하는거 들어 보닌게 금년에 참깨 값이 무지허게 좋다구 허든디. 참깨 두 말이면 쌀 한 가마니 들여놓은 모양이더라구유.”

싸리나무를 땅바닥에 펼쳐 놓고 굵은 순서대로 갈라서 고르고 계시던 기현이 할아버지가 병수 아버지 말씀에 답을 해주셨다.

“금년에 첨으루 깨농사를 혀 봤는디. 그게 생각보다는 꽤나 잔손이 많이 가는 일이더구먼. 타작을 허는디 어찌나 흙먼지가 나던지 콧속은 새까맣게 차올라 오구 목천장은 따끔따끔한 것이 보통 힘든 일이 아니더라구. 뭐 그럭저럭 두어 말이나 될란가 모르것네 그려.”
“기나저나 어르신님은 참 부지런하기도 하셔 젊은 저희들이 따라 배울 점이 많더라구유.”
“아이구, 이 사람! 아침나절부터 나를 소쿠리 뱅기 태우는구먼 그려. 그러다 떨어지면 으짤라구 그러는가? 그건 그렇구 아래께 아침나절에 동섭이가 보냈다구 허면서, 용만이가 뭘 가지구 와서 자꾸만 손도장을 찍어 달라는디. 내가 까막눈이라서 뭘 알아야지. 그래서 이럴까 저럴까 한참을 망서리다가 동섭이 체면을 봐서 그냥 찍어주기는 혓네만.”

기현이 할아버지가 병수 아버지의 칭송에 한껏 고무되셔 얼굴이 불그레해지셨다. 그리고 한쪽에서 이엉을 엮고 계시던 삼식이 아버지가 말을 꺼내셨다.

“아, 어르신님헌티두 갔던감유? 그게 뭐냐 하면유. 왜 그 대전 형무소에 들어가 있는 동섭이 동생 정섭이 안 있는감유? 그 정섭이가 징역살이 하는 거 쪼매라두 깎아 볼라구 진정서에다가 동네 사람들헌티 손도장 받는 거에유. 그건 그렇구 어르신님이 어린 손자 기현이를 키우시느라 증말루 욕 보시네유.”

말씀을 마치신 삼식이 아버지가 무척이나 안타까운 듯이 옆 사람이 다 들을 정도로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러자 기현이 할아버지께서 하고 계시던 일손을 잠시 놓으시고 이내 말씀을 하셨다.

“내 집 형편이사 자네들이 더 잘 알구 있지만서루. 즈그 애비 지난 난리 때 군대 가서 그렇게 죽어 가지구 상자 속에 담아서 허망하게 돌아오지 않았는감, 그 뒤로 지 할매 그 일루다가 속 끓이다가 이내 드러누워 그해 겨울에 세상 떠나 저 뒷산에 묻고 말았지.”

울컥 차오르시는 설움을 애써 참으시려는 듯 기현이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떨리는 것 같았다. 그러자 조금 들떠있던 분위기가 갑자기 숙연해졌다.
그리고 한숨을 길게 내쉰 기현이 할아버지께서 다음 말을 이으셨다.

“그러고 나서 기현이 지 애미가 읍내 나가 한 푼 벌이라두 헌다구 허길래 내 그리 말겼는디두 읍내 양말공장인가 뭐신가 하는디 쪼매 댕기는 척하다가, 그 강 건너 세도 나룻터 어딘가에 산다는 뱃일하는 놈허구 눈이 맞어가지구 저 어린거 놔두고 개가해서 갔구, 저거 하나 바라보구 사는디, 저놈, 사람 노릇이라두 하게 할라면 최소한 중학교라두 마쳐야 어디 가서 밥이라두 빌어먹고 살 건디, 내가 그때까장 살아 있을란가 모르겄네 그려.”

하늘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시며 애써 눈물을 참으시려는 듯했다. 땅바닥에 담배쌈지를 내려놓으시고 애꿎게 곰방대에 잎담배가루만 가득하게 눌러 담고 계셨다. 그리고 쭈글쭈글하신 손등이 파르르하게 떨려 바라보기에 무척이나 애처롭기만 했다.
그런 기현이 할아버지의 애태워 하시는 측은한 모습에 잠시 마당 안이 더욱 숙연해졌다.

한참동안 말이 없으시던 경수 아저씨가 분위기를 바꿔 보시려는 듯이 말을 이으셨다.

“그나저나 기수란 놈은 장가갈 재미에 푹 빠져서 기순이네 살던 집 뜯어고치느라 세월 가는 줄도 모르던디. 장가갈 날짜나 잡었는가 모르것네유.”

기현이 할아버지의 마음이 편치 못한 것 같아 부담스런 모습으로 애꿎게 막걸리 사발만 들고 계시던 삼식이 아버지가 기다렸다는 듯이 얼른 말을 받으셨다.

“음, 어젯밤에 기수네 엄니가 잔칫날 쓸 막걸리를 주문헐려구 왔는디, 다음 공일 날루 날짜를 잡었다구 허던구먼 그려, 아, 말이사 바른 말이지, 한참 좋을 나이지 뭐, 경수 동상 자네두 그맘때는 안 그랬는감?”
“아이구, 형님 지는 참말루 그런 것두 몰르구 지나가 버렸네유. 자구 나면 그놈에 때꺼리 걱정에 죈 종일 해 질 때까장 일을 해야 되닌께 몸이 고되서 그런저런 생각할 겨를두 없었구. 어쩌다 저쩌다 보닌께 어느새 애들만 둘씩이나 생겨 버리구 말아았네유.”

경수 아저씨가 능청스럽게 너스레를 떠시며 말씀 하시자 취기가 약간 오르신 병수 아버지가
씩 웃으시며 참견을 하셨다.

“아, 그래서 따신 봄날에 묵은 암탉 알 빠트리듯이 기술두 좋게 자식을 둘씩이나 그것두 아들만 쑥쑥 빠트려 놨구먼 그려. 예끼, 이 사람아!”

병수네 아버지가 껄껄대고 웃으시자 모두들 따라 웃으셨다. 그리고 한동안 말없이 싸리를 엮고 계시던 기현이 할아버지도 더는 참기 어려우셨던지 ‘허’ 하며 웃으셨다.

그렇게 잠시 동안 웃고 계시던 병수 아저씨가 열심히 일을 하고 있는 기성이형을 바라보며 다시 말을 이으셨다.

“아니 그나저나, 우리 기성이 도령은 언제쯤이나 국시를 먹게 해줄란가 모르것네 그려. 암튼, 이참에 동섭이 형님 그 똥고집두 꺾어야 헐 틴디 두루두루 애 꽤나 써야 쓰것네 그려.”

삼식이 아버지가 윗주머니에서 건설담배 한 개비를 빼어 무시면서 자못 심각하게 말씀하셨다.

“그 말이 나왔으니 허는 말인디, 아래께 종구네 집 송아지 코뚜레를 해달구 해서 도와주고 나오면서 종구 아버지 기분이 좋은 거 같길레 맘을 은근슬쩍 한번 떠보았는디. 아이구, 바늘루 찔러두 피 한방울 안 나올 것 같이 칼로 생무 짤르는 거처럼 아예 딱 짤라서 반대를 허드라구. 뭔 놈의 고집이 그리두 센지, 그쯤 했으면 받어줄 때두 됐을 껀디.”

한쪽 손바닥에 침을 ‘탁’ 하고 두어 번 내뱉어 두 손으로 새끼를 꼬시던 경수 아저씨가 말을 이으셨다.

“산을 두고 뫼루 못 가더라구, 고집 부릴 걸 부려야지. 자꾸 날짜는 흘러가구 그러다 보면 처녀 배는 남산만큼 불러 나올 낀디, 어쩔려구 그런는지, 알다가두 모를 일이구먼.”

그러자 옆에서 조용히 듣고 있던 기성이형이 기분이 좀 언짢았는지 하던 일을 잠시 멈췄다. 그리고 개다리소반 위에 놓인 술 주전자를 들고 술잔에 막걸리가 넘쳐나도록 부으면서 무언가 작심한 듯이 말을 했다.

“어른님들 다 아실런지 모르지만, 저는 헐만큼은 다 혔구먼유. 밤늦게까장 무릎 꿇구 빌기두 해 봤구유. 뭐, 끝까장 안된다면 어쩔 수 없지유. 죽어두 같이 못살게 하면 암튼 지두 나름대루 다 생각이 있구만유.”

조금은 흥분된 어투로 말을 마쳤다. 그리고 옆에 계신 어른들의 눈을 의식했는지 이내 몸을 뒤로 돌려 술 한 사발을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그런 애 터지는 총각의 심정을 달래주려는 듯 한줄기 으슬으슬한 바람이 싸리울을 넘어 마당을 스치는 듯이 지나 들녘으로 향했다. 언제나 그맘때쯤이면 북쪽을 향해 무연탄을 실으러 가는 곳간차가 보였다.
‘타다당 타다당 타다당 타다당’ 차축에 매달려 굴러가는 쇠바퀴의 요란스런 금속성 소리를 내며 마을 앞을 지나 화산리 동네 앞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그렇게 한동안을 함께 계시던 병수 아버지가 자리를 털고 일어서시며 말씀하셨다.

“그럼 난 이만 가 봐야 쓰것네. 어르신님두 수고하시구유. 그리구 기성이 동상두 삼식이 애비가 헌 말 너무 서운하게 생각하지 말어. 뭐 때 되면 다 잘 풀리겠지.”

사립짝 앞에 세워 둔 자전거를 끌고 가시며 다른 분들보다 술을 많이 드셔서 기분이 좋으신지 노래를 부르셨다.

“신고산이 우루루 함흥차 떠나는 소리에 구고산 큰 애기 단봇짐만 싼다네. 어랑어랑 어허야 어허야 더어야 내 사랑아. 상수갑산 머루 다래는 얼컬어 설컬어 졌는데 나는 언제 님을 만나 얼컬어 설컬어 지느냐? 어랑어랑 어허야 어허야 더어야 내 사랑아.”

구성지게 노래를 부르시며 어깨를 들썩들썩하셔 도랑가를 스쳐 언덕배기로 오르셨다.

얼마쯤 뒤에 부엌에서 나오신 삼식이 어머니도 술동이를 머리에 이시고 밭둑을 내려서고 계셨다.
그때였다. 삼식이 아버지가 마당가 빈터에 코를 힘차게 푸시고 뒤를 돌아서면서 병수 아버지의 뒷모습을 바라보시며 한 말씀하셨다.

“아무튼 간에 세상 참 편허게는 사는 사람이여. 천하에 한량이지. 저러구 다녀두 경우에 절대루 안 빠지게 자기 실속은 다 차리구 다니는 사람이지. 어떻게 보면 그게 다 부모 잘 만나 땅섬지기라두 물려받아서 양식 걱정 없으닌께 저러구 다니지. 이놈에 팔자는 언제나 술장사 신세 면하구 살라나 에휴.”

씁쓰레 웃으시고 볏짚을 한 움큼 덥석 쥐어 이엉 엮는 매듭에 유난스레 힘을 더 주시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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