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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메로 가는 길 - 123 조회 : 1,999




어정어정 머뭇대는 늦가을을 애써 떨치려는지 겨울을 재촉하는 산바람이 싸늘키만 했다. 금강 둑 너머로부터 아주 옅은 구름이 앞산 봉두(峯頭)쪽으로 느릿느릿 다가오고 있었다.

누릿하게 빛바랜 산릉선이 과묵하게 입 다물어 바라보이는 그 모습이 황량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욱 황량하게 느껴지는 것은 바로 가난에 찌든 내 모습이었다.

처절한 가난의 늪을 벗어나지도 못해 우매한 몸부림만 반복하니 메마른 삶의 마디마디가 자꾸만 시려왔다. 그러나 내 삶이 제아무리 고난스러워도 결코 좌절하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다. 더불어 켜켜이 조여 오는 외로움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충동이 시시때때로 들끓고 있었다.

마을로부터 멀찍하게 떨어진 서편 들녘 저만치 채운역이 자그맣게 바라보였다. 단출한 플랫폼에 면회객들을 가득 실은 연무대행 열차가 서서히 들어서고 있었다.
잠시 길을 비켜주려고 서운하지 않을 만큼 멈춰 서 있던 완행열차가 남행을 계속하려고 했다. 기차는 외마디 기적소리를 허허한 빈 들녘을 향해 세차게 내어질렀다.

으슬으슬한 날씨만큼이나 아름드리 왕 소나무 우듬지를 스쳐 지나는 산바람이 제법 으스스했다. 불길이 너울대는 부엌 아궁이 앞에 쪼그려 앉아 발그레 달아오르는 얼굴로 불속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리 떠나고만 내 아버지에 대한 미움 섞인 아쉬움과 억척스레 달라붙은 찌든 가난의 시름들이 타오르는 불길 속에 연소되어 함께 사라져 가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 어느메에 묻혔는지도 몰라 늘 나름대로 그려보는 내 누이의 얼굴도 발그레한 불길 속에 짙은 상념으로 오롯이 떠올랐다.

온갖 고뇌로부터 잠시라도 탈피하려는 내 심정을 헤아려주듯 아주머니의 등 뒤에 업혀 웅얼대는 아기의 티 없는 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점차 달아오르는 검정 가마솥은 둥그런 가장자리에 허연 김을 내뿜어 착 들러붙은 솥뚜껑을 힘차게 들썩였다.

부는 바람 스산한 원두막 밭둑길을 지나 언덕배기에 올랐다. 줄을 잇는 스산한 바람이 불어와 가을 들국화의 꽃잎들을 모두 훔치려 했다. 좁다란 길가에 무겁게 머릴 숙인 산국(山菊)들이 일그러져 남은 기억의 조각들을 말없이 쓸어안고 홀연(忽然)히 사라져 가려는 듯해 보였다.

마을과 면소재지를 잇는 소달구지 길에 군용 지프처럼 생긴 시발택시 한 대가 철로길 건널목을 건너 벼랑바위 앞 나들목을 지나고 있었다. 저렇게 비싼 차를 타고 오는 사람이 누구이며 또 누구네 집에 오는 손님인지 궁금한 마음에 달려오는 시발택시에 시선을 모아 보았다.

몸을 뒤뚱뒤뚱 흔들어 덜덜거리며 울퉁불퉁한 큰길을 달려온 시발택시가 마을 앞 나무다리를 건너려 했다. 그러자 둥구나무 밑에서 모여 놀던 고만고만한 동네 아이들이 무엇이 그리 신이 나는지 우르르 몰려 차 앞으로 달려왔다.

시발택시가 비좁은 고샅길로 더는 못 들어가는지 둥구나무 앞에 멈춰 섰다. 그리고 시발택시에서 곤색 양복에 흰 와이셔츠를 받쳐 입고 검정색 중절모를 쓴 영택이 아버지가 먼저 내리셨다. 그리고 그 뒤를 따라 영택이 아버지보다는 나이가 한참은 어려 보이는 젊은 여자 한 분이 차에서 내렸다.

보글보글 파마를 한 머리에 얼굴엔 화장을 아주 짙게 하여 입술이 그리도 새빨갛게 보였다. 그리고 움직일 때마다 몸에서 묻어나오는 향긋한 화장품 냄새가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맡아보는 냄새였다.
그래서 그랬는지 이상하리만큼 생소한 느낌으로 코끝에 스며들었다.

붉은색 공단 치마저고리를 곱게 차려입고 하얀 옥광목 버선에 앞코가 뾰족하게 올라온 꽃무늬 고무신을 신으셨다. 아주머니께서 느슨하게 내려오는 비단 치맛자락을 한쪽 손으로 추스르려 했다.
한쪽 손목엔 검정색 가죽 손가방을 걸친 채 영택이 아버지 뒤를 따라 조신한 발걸음으로 동네 고샅길 안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들녘 한가운데 외따로 떨어진 작은 마을에 낯선 사람의 방문은 온 동네 사람들의 시선을 한데 모을 수밖에 없었다. 사실 외부에서 동네로 찾아오는 사람이래야 겨우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였다. 삼일 간격으로 마을을 찾는 우편배달부 아저씨와 며칠에 한 번씩 들러 가는 보따리 행상을 하는 수다스런 장사꾼들이 있었다.
그리고 가끔씩 면사무소에서 나오는 면 직원과 마을 치안을 담당한 지서에 근무하는 키 작은 오순경 정도가 고작이었다.

마을에 첫발을 딛는 그 아주머니가 바로 영택이 아버지가 새로 맞아들이는 부인이자 영택이 남매의 새로운 어머니가 될 사람이었다.
그러했기에 더욱 마을 사람들의 관심을 끌 수밖에 없었다. 땀에 찌든 일상생활 속에서는 쉽게 접할 수 없는 그런 도시풍 신세대 젊은 여자의 등장은 모든 동네 사람들의 이목과 관심을 집중시킬 수밖에 없었다.

동네 고샅길을 영택이 아버지가 앞서 걸으시고 두어 걸음 정도 떨어져 젊으신 아주머니가 뒤를 따라 걷고 있었다. 빗자루로 마당을 쓸고 계시던 첫들머리 집 우현이 아버지가 담 너머로 쳐다보시자 영택이 아버지가 조금은 멋쩍으신지 머리를 끄덕여 인사를 하는 척하셨다.
그런 모습을 보려고 부엌일을 하시던 우현이 어머니가 부엌문 밖으로 나섰다. 앞치마로 손을 훔치시며 고샅길을 걸어가는 두 분의 모습을 바라보며 우현이 아버지에게 귓속말 비슷하게 무엇이라 말을 건네셨다.

사립문 밖을 나서던 진식이 아버지는 영택이 아버지가 눈에 띄자 반갑다는 듯이 스스럼없이 말을 걸었다.

“아니! 읍내서 인제사 오는 건가, 난 자네가 아예 그 기서 푹 눌러 사는 줄 알았네 그려, 그리구 옆에 계시는 분은 제수씨 될 분인감?”

유들유들하게 말씀 하시는 진식이 아버지 얼굴을 바라보시며 영택이 아버지가 조금은 난감한 어투로 말씀을 하셨다.

“예끼 이사람아 제수라니, 자네는 촌수두 모르는가 형수님이라구 혀야지 안 그런가, 암튼 이따가 보더라구.”

진식이 아버지가 그저 허물없이 하는 말에 뒤를 따라가시던 아주머니가 쑥스러운지 머리를 숙여 걷기 시작했다. 그러자 진식이 아버지가 걸어가시는 영택이 아버지한테 들으라고 말씀을 하셨다.

“암튼 동네 한 식구 더 늘었으닌게 빠른 시일내루 날 잡아서 국시라두 한턱내야 쓰지 않것남.”

동네 고샅길 양쪽 담 너머로 집중되는 동네 사람들의 시선들이 부담스러웠는지 두 분이 더욱 발걸음을 서두르셨다. 걸음걸이가 짧은 아주머니는 자기를 바라보는 동네 분들의 시선이 몹시도 부담스러운지 걸음걸이가 부자연스러웠다.
그래선지 자꾸만 아래로 내려오는 긴 치맛자락을 추슬러 올리려고 신경을 쓰느라 조금은 곤욕스러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앞을 서 걸어가시던 영택이 아버지가 고샅길 중간쯤에 있는 종구네 집 앞에 이르렀다. 어김없이 텃세를 부리려 드는 거위가 비스듬히 열려진 대문 틈새로 울음소리를 드높이며 달려 나오려고 했다.

교회에 가려고 두툼한 찬송가와 성경책을 옆에 끼시고 대문을 나서던 종구 아버지가 영택이 아버지와 서로 얼굴이 마주쳤다. 그러나 평소 그다지 절친한 사이가 아니어서 그런지 서로 가벼운 눈인사 정도만 나누고 영택이 아버지가 대문 앞을 스쳐 지나가셨다.

종구네 아버지께서 영택이 아버지 뒤를 따라 걸어가는 젊은 아주머니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나름대로 무슨 생각을 하시는 듯해 보였다.

마당가에서 소잔등에 털을 빗겨주고 있던 용만이가 부산을 떠는 거위 소리에 신경이 쓰였나 대문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는 조금 멀리 걸어가는 영택이 아버지를 바라보며 실없이 말 한마디를 툭 내뱉었다.

“참 그 우라질 놈에 돈이 좋은 건지? 아니면 능력이 좋은 건지? 그 나이에 귀때기 시퍼런 지집을 훌떡 데리구 들어오는 거 보면 재주두 용하구먼유?”

조금은 부러운 눈빛으로 말을 마친 용만이가 종구 아버지 얼굴을 멋쩍게 바라보았다. 그 말을 듣고 있던 종구 아버지가 조금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얼굴을 찡그리셨다. 그리고 용만이 얼굴을 바라보시며 말씀하셨다.

“아침부터 그 쓰잘떼기없는 소릴랑은 작작허구 어여 들어가 소잔등에 털이나 골고루 문질러 줘라.”

종구네 아버지도 그런 모습이 좀 떨떠름한지 큰기침을 한번 하시고 좁다란 고샅길을 걸어가셨다. 그러자 머쓱하게 서 있던 용만이가 혼잣말처럼 지껄였다.

“뭐 내가 틀린 말했는감 말이사 바른 말이지 자기네들이사 맘만 먹으면 뭘 못허겄어. 가진 게 넘쳐나는 돈뿐인디 나같이 지질히두 못사는 놈이야 이러지도 저러지두 못하구 넘집 살이나 허면서 괄세나 받고 살지만서루.”

용만이 형은 무엇이 그리 못마땅한지 애꿎게 대문 밖에 대고 ‘휭’ 소리를 여법 크게 내어 코를 힘껏 풀어 아랫도리 바지에 손을 쓱쓱 문질렀다. 그리고 ‘한강에서 뺨 맞고 종로 와서 화풀이를 한다.’ 는 말처럼 마당가에 매여 있는 누런 황소에게 걸어가 애매한 소잔등을 우악스런 손바닥으로 세차게 후려쳤다.
그러자 어떨결에 한 대 얻어맞은 황소가 깜짝 놀라 껑충 뛰며 ‘음머’ 하고 소리를 내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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