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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메로 가는 길 - 125 조회 : 2,244




온 주위가 더없이 평온한 가운데 하루의 해가 오후로 접어들었다. 남녘 끝머리 목포역을 출발하여 서울로 가는 완행열차가 긴 여정 속에 작은 간이역인 채운역사를 가뿐하게 벗어나고 있었다. 들녘 멀리 금강둑에서 떼를 지어 몰려드는 구름에 잠시 해가 가려져 한낮 고샅길이 어둑어둑해졌다. 하늘에 깔린 구름의 높이와 양으로 미루어 보아 비가 그리 쉽게 내릴 것 같지 않았다.

연자방앗간 앞 놀이터에는 나이가 지긋하신 노인 한 분이 땜질 일을 하고 있었다. 아침나절부터 동네 집집을 돌며 일거리로 맡아 오신 양은 솥단지와 세숫대야의 흠집난 부분을 부지런히 때우셨다. 그리 한동안 열심히 일을 하시던 노인이 다음 일거리가 없으신지 땅바닥에 앉아 곰방대를 비스듬히 입에 무시고 하얀 연기를 입 밖으로 내뿜으셨다.
그리고 얼마쯤 지나자 꽹과리를 한바탕 두들기며 다음 일거리를 모으려 했다. 그런 다음 사그라져 가는 불씨를 살리려 화덕에 풀무질을 하고 있었다.

좁다란 고샅길엔 우물가 미나리 밭 옆에 사는 인식이가 면소재지에 등잔불 호롱에 넣을 석유를 사러 가는지 됫병을 들고 저만큼 앞서 가고 있었다. 그리고 종금이 누나가 시집갈 준비에 마음이 들떴는지 동그란 수틀을 옆에 끼고 정희 누나네 집으로 발걸음 하는 것 같았다.

동네 안으로 들어서는 고샅길 입구에는 머리카락을 사러 다니는 아저씨가 들어서고 있었다. 본디 술을 너무 좋아해서 코끝에 주독이 잔뜩 올랐는지 딸기처럼 불그레했다. 마을로 들어서기 전에 이미 버스 정류장 주막집에서 낮술을 몇 잔 하신 것 같았다. 그래선지 벌써 대낮 부터 얼굴이 불그스름하게 달아올랐다.

“머리카락 삽니다, 머리카락, 머리카락 파세유.”

동네 고샅길 입구에서부터 커다랗게 소리를 지르며 터덜터덜 걸어오고 있었다.
흔들리는 물동이 안에서 촐랑거리는 물소리를 들으며 고샅길을 걸어 동구 밖 둥구나무 앞에 닿았다. 철로 변 외딴집에 사시는 기현이 할아버지와 예전에 동네 사랑방에서 구학문인 천자문을 가르치셨던 진식이 할아버지께서 이야기를 나누고 계셨다.

동구 밖 나무다리 위에 내일 잔치를 앞둔 기수 아저씨가 면소재지 이발소에서 이발을 하고 오시는지 둥구나무 앞으로 걸어오셨다. 진식이 할아버지께서 긴 장죽에 봉지 담배를 눌러 담으시면서 말씀을 하셨다.

“아니, 저기 오는 게 기수 아닌감? 뭐시냐 낼이 기수 장가 가는 잔칫날이라구 허든디. 우리 집 아들 녀석이 부조라두 쪼매 했는가 어쨌는가 모르것네. 암튼 좋은 때다, 좋은 때여.”

집에 홀로 두고 온 손주 녀석 기현이가 생각나시는지 방죽가 쪽으로 눈을 모으시던 기현이 할아버지가 말씀을 이으셨다.

“암, 좋은 때구 말구 논밭 곡식 다 걷어 들여 구석구석에 모아 싸 놓았으닌께 안 먹구 쳐다보기만 혀두 배불를 꺼구 때 되어 제가끔 짝을 찾으니 세상에 그 이상 좋은 게 있을라구.”

기수 아저씨가 둥구나무 앞으로 다가서며 두 어른님들께 허리를 굽혀 공손하게 절을 하셨다.

“안녕하셨어유? 낼 지가 성례를 올리는디 두 분 여르신님께서두 꼭 오셔서 축하를 해주세유그리구 차려 놓은 건 변변치 못할꺼지만 준비한 음식 많이 드시구 즐겁게 하루 노시다 가세유 그럼 전 이만 가볼께유.”

두 어른에게 다시 머리를 숙여 인사를 드리고 서두는 발걸음으로 동네 안으로 가고 있었다.

물지게를 내려놓고 잠시 쉬려는데 기현이 할아버지가 옆에 계시던 진식이 할아버지에게 손가락으로 냇둑을 가리키시며 말씀하셨다.

“어! 자네 ,저기 좀 보게나 저놈들 참 죽을 둥 살둥 모르구 서로 머리를 치받구 난리네 쪼매 커 보이는 놈은 순아네 집 염소 같구 지금 막 죽을둥 살 둥 모르구 달겨드는 저놈은 우현이네 염소 같아 보이는디 허 그놈들 무신 원수 척졌다구 대가리를 저리두 쎄게 받구 난리를 떠나 모르것네 아무래두 내가 가서 말겨야 쓰것구먼 그려.”

그러자 진식이 할아버지께서 입에 물고 계시던 장죽을 빼어 장죽 끝으로 염소들을 가리키시며 말씀하셨다.

“아 달리 그러것는가 꼴에 저것덜두 수놈이라구 암놈 한 마리 가운디다 놓구서 서루 차지헐려구 저리 머리빡이 터져라구 쌈질 허는거 아닌감 어여가 말리기나 혀.”

그러자 기현이 할아버지께서 냇가로 뛰어가셨다. 서로 멈출 줄 모르고 싸우는 두 마리 염소 중에 순아네 염소의 목에 묶어 놓은 느슨한 밧줄을 바싹 끓어 당겨 떼어놓으려 하셨다.
그러자 순아네 염소가 분이 덜 풀렸는지 두 앞발을 땅에 버텨 끌려가지 않으려 하여 기현이 할아버지가 밧줄을 손목에 감아쥐시고 두 손으로 끌고 가셨다. 그리고 조금 떨어져 있는 미루나무에 힘을 주어 밧줄을 묶으시고 두 손을 터시며 둥구나무로 되돌아오셨다.

마을 옆 신작로에 부연 흙먼지를 일으키며 달려가는 화물차의 경적소리가 들려 눈을 돌려 보았다. 벼랑바위 앞에 종구네 아버지와 종구가 다정스레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문득 종구 아버지가 아버지의 분묘를 자기네 산에서 이장해 가라고 하였던 말이 떠올랐다. 그래서 서로 눈이라도 마주치면 그 일에 대해 혹시나 무슨 말이라도 나올까 하는 조바심에 서둘러 피하려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러자 양쪽 물동이에 담긴 물이 더욱 흔들리려 몸에 균형을 잡으려 무척이나 힘이 들었지만 꾹 참고 버텼다.

물지게를 지고 빠른 걸음으로 걸어 종구 아버지 눈에 내 모습이 보이지 않을만큼 떨어진 방죽가에 닿았다.

방죽가엔 흥남이 아저씨의 모습이 보였다. 지난 공일날 논산읍내 중국음식점에 선을 보러 가시느라 이발을 하셨는지 흥남이 아저씨의 모습이 예전과는 달리 확 변해버렸다.
흥남이 아저씨가 먹고 남긴 음식물 찌꺼기와 쌀겨를 한데 섞어 버무린 먹이를 오리들 밥그릇에 부어 주었다. 그러자 오리들이 노란 주둥이들을 서로 내밀며 밥그릇을 둥그렇게 둘러싸고 정신없이 먹고 있었다.

텃마당에는 기현이가 할아버지가 만들어 주신 고무줄로 만든 새총을 들고 있었다. 제 깜냥에는 새를 잡아 볼 요량으로 가죽집에 작은 공깃돌을 담아 탱자나무 울타리로 다가서고 있었다.
나뭇가지 사이에서 놀고 있는 멧새들을 향해 고무줄 총을 쏘아댔다. 날아오는 돌멩이에 놀란 새들이 우르르 떼를 지어 날아갔다.
그나마 한 마리도 잡질 못하자 머쓱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웃었다.

간헐적으로 스산하기만 한 바람이 불어오는 언덕배기에 올라 다리쉬임을 하며 동네 앞 둥구나무 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종구네 집과 우리 집 사이에 얽혀 있는 일들을 하나하나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아버지 묘를 자기네 산에서 옮겨 가라고 그리도 재촉하던 종구 아버지가 오랫동안 침묵을 하고 있는 이유를 나름대로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종구네에게 지은 쌀빚을 갚으려고 생명줄 같은 들녘 논 서마지기를 팔아서 이자까지 갚았다. 그래서 땅 한 평도 없는 어려운 사정이 되고 말았다.
그런 우리에게 아버지 묘를 이장하라고 하였을 때 동네 사람들이 자기를 바라보는 이목이 곱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여 더는 심하게 다그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리고 갑작스런 종구 어머니의 죽음으로 홀로 몸이 되어 외롭게 지내시다 보니 평소 좀 거칠기만 했던 성격이 조금은 자연적으로 순화되신 듯해 보였다.

그리고 어떠한 계기에 어떤 이유였는지는 모르지만 동네 모든 사람들이 전혀 생각치도 못한 교회를 다니게 되었다. 아직까지 투철한 신앙심은 없지만 살기가 어려운 사람들을 심하게 괴롭혀서는 안 되는 것을 조금은 느끼신 것 같았다.

그런 연유인지 종구네 아버지가 두 노인들께 공손히 인사를 드리는 모습이 먼발치로 보였다. 그리고 두 부자가 오순도순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 듯이 다정스레 동네 입구로 들어서는 모습이 그리 부러울 수가 없어 왠지 모를 외로움이 온몸으로 번졌다.
저 뒷산에 그저 말없이 누워 계신 아버지가 자꾸만 원망스러워 지기 시작했다. 자꾸만 울먹여져 더는 생각을 하지 않으려 이를 꽉 깨물고 애꿎게 물지게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런 마음이 가득 차올라 그랬는지 텅 빈 다랭이밭에 우두커니 서 있는 원두막의 모습이 그날따라 더욱 처연하게 보였다. 밭길까지 뛰어온 검둥이가 꼬리를 흔들며 반기는 모습도 다른 날보다는 그리 반갑지 않게 느껴졌다.

사립짝을 지나 마당으로 들어서자 마루에 서 계시던 아주머니가 반갑게 뛰어나오셨다. 그리고 배를 가리키시며 배가 고프지 않느냐고 물으시기에 고개를 끄덕이니 아주머니가 밥상을 차리려 부엌으로 들어가셨다.
물지게를 벗고 물두멍에 물을 부으려 하자 아주머니가 내 손을 뿌리치시며 양철통을 번쩍 들어 물두멍에 물을 부으셨다. 그리고 방으로 들어가라고 손짓을 하셔 방으로 들어가려는데 쪽마루 위에 수수깡으로 만든 장난감 안경이 있어 그제서야 슬쩍 웃고 말았다.

아주머니께서 나에게 주려고 만들어 놓으신 것 같았다. 안경을 들고 부엌으로가 아주머니에게 보여드렸더니 아주머니께서 웃으셨다.
그리고 내 앞으로 다가서 안경을 달라고 하셔 내 얼굴에 안경을 씌워 주셨다. 안경을 쓰고 있는 내 모습이 그리 우스웠던지 몸을 구부리시며 웃으셨고 나도 엉겁결에 따라서 같이 웃고 말았다.

삼식이네 집에 돼지 잡는 구경을 하느라 조금은 점심식사 시간이 늦었다. 그래도 내가 오기를 기다리셨는지 밥상을 방안으로 들고 오셔 함께 서둘러 식사를 했다.
식사를 하느라 잠시 방바닥에 뉘어 놓았던 아기가 몸을 스스로 뒤척여 처음으로 방바닥에 엎드렸다. 그런 모습이 너무도 신기하여 아기에 얼굴을 바라보았다.
‘깍꿍’ 하며 소리를 내자 아기가 나를 바라보고 빙긋이 웃고 있어 너무도 보기에 귀엽기만 했다.
아주머니도 그런 자기 자식의 모습이 그리도 좋으신지 서로 입을 대고 부비고 있었다. 그런 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나도 어머니가 저렇게 키우셨구나 하는 생각을 새삼스럽게 해보았다.

스산한 날씨에도 우리 세 식구들을 먹여 살리려고 이 동네 저 동네로 발 아프시게 다니실 어머니 생각에 목이 메었다.
그런 슬픈 생각이 떠올라 얼른 밖으로 나가 마음을 가다듬고 마당가에서 화산리 쪽을 바라보았다. 어느 집에서 잔치를 하는지 장구 소리와 노랫가락이 둔덕 너머로 구성지게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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