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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메로 가는 길 - 12 조회 : 2,128




새하얗게 옅은 운형(雲形)이 품새 좋게 눈부실만큼 피어 올랐다.
하늘은 그 구름을 반갑게 받아주려는 마음이었나 선명한 옥빛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어느 한곳인들 꼬집어 탓할 수 없어 시샘이 날 정도로 곱게 물들어 있었다.
그저 손끝에 닿기만 하면 이내 듬뿍 묻어날 것만 같은 충동감이 저절로 일어났다.
그러니 그저 고웁다는 표현만으론 턱없이 부족할 것 같았다.

탱자나무 그늘 밑 자리에 앉아 가볍게 턱을 들어 그런 하늘 아래를 바라보았다.
그 하늘 아래 천수답인 작달막한 다랭이 논 들이 사이좋게 층을 이루고 있었다.
논 두덕을 너머서면 크기가 거즘 같은 또 하나의 논배미가 보였다.
그리고 그 논 두덕을 넘어서도 또 다른 논배미가 보기에 좋을만큼 잇따라 층을 이루었다.
그런 서너 마지기 다랭이 논 너머로 펑퍼짐한 모습을 드러내는 크지도 작지도 않은 밭자락이 산기슭에 바싹 들붙어 있었다.

그 밭자락 위에 등메산이 여름다운 검푸른 빛으로 빈틈없이 뒤덮혀 있었다.
그날따라 다소는 칙칙하게 보여 왠지 모를 묵직함이 마음 속에 저절로 와닿았다.
산기슭 한부분에 하얀 자작나무들이 빼곡하게 들어차 일정 부분 자리를 잡아 숲을 이루고 있었다.
그런 모습이 내 눈 안에 확연하게 보여 그날따라 생경한 느낌을 듬뿍 주었다.
그런 생경함 속에 묻어나는 친근감이 슬퍼하는 마음에 작게나마 위안이 되였다.
어쩌면 그때부터 앞산 자작나무와 친숙함이 길들여지게 된 것 같았다.

동네 아이들이 내 아버지가 그리 억울하게 돌아가셔 내가 불쌍하다는 생각이 언뜻 들었는지 기현이네 집에 다들 모여 있었다.
등메산에 영면하실 내 아버지에 장지로 오르려는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찌보면 참으로 타산적인 마을 어른들의 마음씨와 지극히 천진난만한 동네 또래들의 순수한 마음씨가 실감나게 대조 되었다.

설령 그것이 놀잇거리가 그리 마땅치 않았던 터이라 그저 무료함을 달래 보려고 나를 기다렸다 해도 그리 크게 섭섭하지 않을 것 같았다.
아니 장례를 치루는 과정에 대한 궁금증과 호기심이 나를 기다리는 순수함 보다 앞선다 해도 굳이 탓하고 싶지 않았다.
어른들의 눈치를 조심스레 살피며 뒤를 따라 산에 올라 시신이 땅 속에 어떻게 묻히는지 먼발치서라도 눈구경을 해보려는 마음이 전부였다 해도 그마져도 이해가 될 듯 싶었다.

나로서는 냉혹하게 얼굴도 않 보이는 동네 어른들 보다는 그저 그렇게라도 곁에 있어주는 것이 고맙게 느껴질 수 밖에 없었다.
그만큼 정에 인색해진 동네 사람들로부터 받은 커다란 상심에 그 어느 것이라도 붙들어 의지하고 싶은 절박한 심리였는지도 모른다.

그럴 수 밖에 없었던 것이 물론 전쟁 중이라 서로가 연락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단 하나 뿐인 혈육 외삼촌마져도 오지를 않았다.
아니 설령 만에 하나 연락이 닿았다 하여도 올 수 없었다는 표현이 그 때의 상황으로는 더 적합할 듯 싶었다.

그저 바람에 등 떠 밀리듯 섭디섧게 떠나시는 내 아버지를 배웅 하는 사람이라고는 내 어머니와 나 오직 둘 뿐이였다.

그라도 가시는 길이 적적하지 말라고 친구 분이신 운수 아저씨 등에 업히셨다.
그리고 부락 이장 일 보시는 인석이 아버지께서는 훗날 자신에게 불이익이 오더라도 그마져 감수하려고 하셨다.
그와 더불어 친척보다 더 정을 주고 받으며 살아 온 옆집 귀분이 아버지를 비롯하여 방앗간 일을 보시는 순태아저씨도 참으로 많은 고생을 하셨다.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뒤늦게라도 장례에 참석해 주신 기현이 할아버지가 계셔 무척이나 정신적으로의지가 되였고 의지가 되는만큼 덜 외로웠다.

그리고 마을에 하나 밖에 없는 친구인 옥순이 어머니께서 장지로 향하는 어머니의 지치신 몸과 마음을 부축해 주셔 더욱 마음이 든든 했었다.

철로가에 있는 외딴 초가집인 기현이네 집은 마을 여느 집들과 다름없바 없이 소작농을 면치 못하며 살고 있었다.
마당 앞으로는 싸리나무로 엮어 둘러쳐진 싸리 울타리가 있었고 뒷켠에는 탱자나무 울타리가 아주 오래 전 부터 빼곡하게 둘러 있었다.
그리고 울타리 밑으로 나 있는 소롯길을 따라 얼마쯤 걸어가면 등메산으로 오르는 오솔길과 맡닿을 수 있었다.

훨출하게 키가 큰 해바라기가 낮은 싸리울타리 밖으로 뻘쯤하게 목을 내밀어 여름을 버텨내려는 것 같이 보였다.
사립문 밖에 머리가 허옇게 쇠신 기현이 할아버지가 서 계셨다.
아마도 산으로 오르려는 우리들 일행을 기다리고 계셨던 것 같았다

기현이 할아버지께서 산에 오르려는 우리들 모두에게 다 들으라는 듯이 말씀하셨다.

“참말루 미치구 환장헐 놈에 일을 당해번지구 말았으니 도태채 이를 으짜믄 좋단 말이여, 나사 아까 참에 산에서 내려오는 순태 아우님헌티 자사한 야그를 들어서, 뒤늦게서야 알게 돼분졌지만서두 이게 무신 날베락이랴. 광명천지 밝은 시상에 으찌 이런 일이 생겨분졌는지 참말루 모르긋구먼 그려. 글구 상민이 엄니 나가 진즉 알었으믄 마땅히 문상이라두 갔을 것이구, 나가 그 뭐시냐 염을 하기전에 이 사람 얼굴이라두 한번 들여다봤을 거인디, 아줌니두 아시다시피 부락허구는 설찬게 거리가 멀리 떨어진 외뜬 집이라 내 발루다가 직접 부락으루 내려가지 않으면 뭔 일이 터졌는지 알 턱두 읍는디다가 처죽일 놈에 난리까장 일어나서 동네 사람들이 죄다 피난을 가번져서 동네 소식두 모르고 산지가 오래됐구만유, 암튼 나두 얼렁 입성 가라입구 함께 산으루 따라 나설께유. 막말루다가 지눔들이사 그머시냐 반동이라구 허면서 절대루 가지말라구 헌다지만 막말루다가 나를 으쩌긋슈. 다 늙어 터졌는거 잡아가본들 뭐헐 것이구. 내사 그런 것 하나두 겁 안 나는구먼유 막 말루 일정시대 때 지 놈들 맨큼이나 지독한 일본 순사 놈 밑에서두 살아 남았는디 낸들 뭐시 그러콤사루 겁이 날 긋이며 지놈덜이 슬마허니 죽이기야 허긋남유."

마을에서 두 번째로 연로하신 기현이 할아버지께서 나이답지 않으시게 불의에 분연히 맞서시려는 것처럼 보였다.
결연한 의지에서 나오는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한동안 말씀을 하셨다.
그러자 그 자리에 있었던 모든 사람들이 마치 무언에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모두 숨을 낮추고 말씀 하시는 것을 경청하고 있었다.

그런 성품을 지니셨기에 비록 사시는 형편이 어려우셔도 남에 집 애경사에는 빠짐없이 참석을 하셨다.
밤을 지새우시며 돈득한 정을 주셨고 손 아랫 사람들을 그리도 알뜰 살뜰하게 챙겨주려고 하셨다.
그런 탓에 마을 사람들 모두에게 윗 어른으로 예우를 받고 사시는 분이셨다.

그리고 기현이 할아버지께서 내 아버지의 죽음에 대하여 더욱 비분강개 하시는 숨은 이유가 따로 있었다.

그러니까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바로 일년 전에 기현이 아버지께서는 육군 하사관으로 입대를 하셨다.
그러다 전쟁이 돌발하자 일등중사로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악랄한 공산주의자들을 비롯하여 인민군들과 격렬하게 전투에 임하고 계셨다.

그랬기 때문에 내 아버지의 억울하신 죽음에 다하여 더욱 비분강계 하셨던 것이었다.

마을 사람들 모두는 기현이 아버지의 성씨가 석씨여서 그 분의 성씨를 따고 계급을 붙혀 그저 부르기 편하고 친근감이 있어 석중사라고 불렀다.

기현이 할아버지께서 우리들과 함께 아버지의 장례에 참석해 주시겠다는 말씀이 가뜩이나 외롭기만 했던 마음에 무척이나 큰 힘을 얻은 것 같았다.

계절을 찬미하듯 마냥 붉게 피어오른 봉선화가 싸리나무로 엮어 만들어 놓은 울타리 가장자리에 참하게 줄지어 있었다.
사립짝 안으로 기현이 할아버지께서 옷을 갈아 입으시려 집 안으로 들어 가셨다.

그러자 다리 쉬임을 하셨던 동네 어른들이 자리에서 한 사람 한 사람씩 거의 시차를 두지 않고 자리를 털고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런데 가뜩이나 수척해지신 어머니께서 자리에서 일어나시는데 무척이나 힘이 들어 하셨다.
그래서 혹여 쓰러지시기라도 하시면 어쩌나 하는 마음에 자뭇 걱정이 되었다.
그러자 옥순이 어머니께서 곁에서 부축해주셔 크게 안심이 되었다.

한 여름 뙤약볕에 잘 말라 단단해질대로 굳어진 맨 땅바닥에 주저 앉았다가 일어서려 하였다.
그런데 발바닥에 쥐가나 저려왔고 영덩이도 저릿저릿하였다.
그래서 내 어머니로 부터 배웠던 대로 얼른 오른 쪽 가운데 손가락에 침을 묻혀 코등에 대고 발랐다.

쨍쨍하게 내리쬐이는 강렬한 태양은 한낮을 향해 틈새를 주지 않고 치닫고 있었다.
그런 빛의 힘으로 탱자나무 울타리의 숲은 더욱 푸른 빛으로 짙어지려는 것처럼 보였다.
탱자나무 울타리 끝을 벗어나자 이내 호남선 철길과 마주 닿았다.

이윽고 기차의 바퀴와 마주 닿는 철로 레일의 윗부분 면이 뜨거운 햇살에 열이 달아 오를대로 달아 올라 봄날의 아지랑이처럼 이글거려 군대군데가 번쩍번쩍거렸다.

철로의 레일을 받치고 있는 침목이 비에 젖어 썩지 말라고 침목 전체에 코올타르가 그리도 잔뜩 발라져 있었다.

그 냄새가 콧속 깊숙하게 스며드는 철길을 건너고 있었다.

철길을 건너려는 사람들이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발밑에 밟히는 자갈들이 미끄러져 자그락자그락 소리를 내었다.
잘 달궈진 땅에서 뿜어내는 열기가 온몸으로 퍼져 여름 더위를 가일층 부추기고 있었다.

이쯤에서 산골짝 그 어디메에서 한차례 시원한 바람이 불어 왔으면 하는 기대가 더운만큼이나 컸었다.

증기기관차가 늘상 눈에 보였을 때에는 그리 소중한 느낌을 그다지 못 느꼈었다.
그러나 전쟁으로 막상 기차가 운행을 멈춰 그런 흔적조차도 찾을 수 없게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그래서인지 서운해지는 마음에 철로길을 건너려던 발길이 나도 모르게 저절로 멈추고 말았다.

철길 한복판에 우두커니 선채로 면소재지 쪽인 앞을 바라보아도 기차가 오지를 않았다.
다시 고개를 가볍게 돌려 원목다리 쪽으로 돌아다 보아도 역시나 은연 중에 기다리는 기차는 끝내 모습을 보이질 않았다.
그런 탓으로 마치 무엇인가를 잃어버린 듯한 아쉬운 마음에 잠시인들 그자리에 멍하니 서 있고 말았다.

내가 그토록 내 시야에 기차가 나타나주길 요원하는 이유는 단 하나 뿐이였다.

그저 늘상 보였던 기차가 어느 닐부터인가 아무런 예고도 없이 갑자기 멈춰버린 것에 대한 궁금증이 아니였다.

그렇다고 감당키 어려운 시련에 아픔들이 자꾸만 중첩 되어 그 모든 시름들에 대한 생각을 잊어버리려고 기차에 모두 실어 지향없이 떠나보내고 싶은 마음도 아니였다.

살아 오는 동안 늘상 함께 하고 싶은 마음에 나는 기차를 기다려 주었다.
기차는 그런 나를 기억하여 오르내리며 내 어머니의 포근한 품속처럼 안아 주려고 달려왔었다.
하지만 그런 믿음이 서로간에 있었기에 기다리는 것도 아니였다.

푸르러 넓디 너른 들녘을 좌,우 양쪽으로 가르며 질주해 오는 활기찬 모습에서 살아가는 과정에 필요한 활력을 답습코저함도 결코 아니었다.

내가 그토록 내 시야에 기차가 단 한번만이라도 나타나주길 원하는 이유가 딱 한가지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난 이른 봄 어느 날쯤으로 기억된다.
그 날도 아버지와 나는 마을 앞 둠벙에서 민물낚시를 하고 있었다.

아버지께서는 그 날따라 여늬 날에 비해 물고기들의 입질이 좋아 꽤나 많은 민물고기들을 건져 올리셨다. 그래서인지 기분이 상쾌해지신 아버지께서 서편 들녘 끝자락에 저녘 해가 기울어갈 때까지 낚시대를 놓으시려 하질 않으셨다.

아버지가 좋은만큼 함께 있는 것이 왠지 의지가 되였다. 그저 좋다는 막연한 생각에 막상 집에서 부터 따라는 나셨다.
그렇지만 수 많은 시간이 흐르도록 아무런 변화 없이 그저 묵묵히 곁에만 있는 것이 슬슬 답답해지기 시작할 무렵이였다.

그래서 낚어 올린 물고기들이 담겨 있는 함석으로 만든 양철통을 몇 번씩 드려다 보면서 나 혼자만의 생각을 했었다.
이제 몇 마리만 더 잡으시면 자리에서 일어나 집으로 가시겠지 하면서 그 몇마리가 빨리 채워지길 바라고 있을 때였다.

아침 나절에 서울을 출발한 증기기관차가 목포를 향해 원행을 계속하며 면소재 옆 등화동 산모롱이를 휘어 돌아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혹여 방심하고 철길을 걷는 사람들에게 경고를 하려는지 두서너 차례 기적을 힘차게 울렸다.

그리고 지서 앞 건널목을 지나 마을 앞으로 세차게 달려오면서 이제는 다음 정차역인 강경역에 도착을 알리려나 더욱 힘차게 기적소리를 내질렀다.

철로와 둠벙의 거리가 아주 가까워 굉음처럼 들려오는 세찬 기적소리에 귀가 따가웠다.
더는 참기 힘들어 얼른 두 손으로 양쪽 귓구멍을 틀어 막고 있었다.

그러자 아버지께서는 그런 내 모습이 그도 애틋하셨는지 물고기 비린내가 물씬나는 손으로 꼭 끌어 안아 주시면서 나에게 이런 약속을 해주셨다.

"상민아 맹년 봄엘랑 뭐시냐 서울 창경원에 사쿠라 꽃 피면 느그 에미허구 니 놈 손 잡구서 요래조래 싸묵싸묵 댕김서 별나버린 짐승이랑 흐블나게 펴뻔진 꽃구 경 갈랑께?그리 알구 시방부터라두 니 엄니 말 잘들어야혀 알긋지"

"예 알겠써유 아부지"

막상 얼른 대답을 해 놓고도 내 귀를 의심할 정도로 실감이 나지 않았다.
아버지 말씀을 잘못 들은 것 같기도 하여 너무도 기쁜 마음에 아버지에게 얼른 되물어 보았다.

" 아부지 조까 전에 흐신 말이 참말이당가요."
" 으음, 그려 근데 왜 그러는디"
" 아니 기냥 혀본 소리구먼 유."

사실 그때는 그랬었다.
동네 어른들로 부터 서울이라는 곳을 귀동냥 했을 뿐이였다. 도대체 그 곳이 어디 쯤에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 곳인지 알 수도 없었기에 굳이 알려 하지도 않 했었다.

그저 귀동냥 하여 막연하게나마 알고는 있었다.
어쩌다 운이 좋아 오일장에 가시는 어머니 뒤를 따라 이 골목 저 골목으로 장 구경을 발이 아프도록 하였다. 그리고 좋아 하는 짜장면도 실컷 먹고 온 논산 읍내나 강경 읍내 보다 몇 십 배나 더 크고 엄청나게 좋은 곳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제일 높은 대통령이 살고 있는 곳이며 전차가 앞으로 갔다 뒤로도 가는 곳이라는 정도였다.

그래도 실감이 나질 않아 정말로 미지의 세계 정도로 어물쩍하게 생각할 뿐이었다.

더욱이 동네에서 내놓라 하는 부잣집인 영택이 아버지는 물론 그집 보다 더 잘 사는 종구네 아버지도 단 한 번 못 가본 곳이였다.
그런데 내 아버지께서 가신다고 하니 선뜻 이해가 되질 않아 반신반의 할 정도였다.

그러면서도 다들 꿈에서나 그리는 그 곳 서울에 어머니와 함께 가신다고 약속을 하셨기에 혹시나 하는 기대심리에 마음이 두근 거렸고 은근히 기달려졌었다.
그래서 날이 새기만 하면 어머니에게 얼마나 남았냐고 지겨울 정도로 묻고 또 되물었다.

그리고 내 도래들은 물론 나보다 위에 형들과 그리고 손 아래 동생들에게도 빠짐없이 '나 내년 봄에 벗꽃이 피기만 하면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 손을 잡고 서울 창경원이라는 데로 구경 간다' 고 그리 자랑을 했었다.

그런 기대와 우쭐함 속에 손꼽아 기다린지 겨우 사 개월이 지나려할 즈음이었다.

그런데 그 약속을 하셨고 또 약속을 지켜주셔야 할 내 아버지께서 이제 영면을 하시고 말았다.
그러니 마음으로 철썩 같이 믿었던 기대가 여지없이 깨여져 버리고 말았다.

그 때문에 얻어진 상실감과 허전함도 적지 않았다.
이제 동네에서 거짓말 쟁이가 되여 버리고 말았으니 그 또한 가볍게 넘길 일은 아닌 듯싶었다.

물론 내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을 저마다 알고 있는지라 어느 정도 이해가 될 수는 있다고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내 자신을 합리화 시키기 위해 생각만 해도 가슴이 터져내릴 듯한 내 아버지의 죽음을 다시금 들먹여 고인을 욕보이기는 정말 죽기 보다 싫었다.

기차는 모습을 드러내지도 않아 끝내 오지 않했다.

그 지긋지긋한 전쟁 때문에 이제는 기차도 오지 않을 뿐더러 올 수조차 없었기에 처음부터 내가 갈망했던 기차를 기다리는 것은 무모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 기차를 꼭 기다렸으며 아직도 기다리고 싶고 앞으로도 기다릴 것임에 틀림이 없을 것이다.

비록 지금은 내 아버지와 그때 그날 바로 저 방죽에서 함께 들었던 우렁찬 기적소리를 이제는 더 이상 듣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언젠가는 함께 들을 수 있는 그날이 도래될 것이라는 나만의 생각을 자꾸만 하고 싶었다.

정말 알지도 못해 전혀 격에 맞지도 않는 서울 창경원에 가보고 싶은 마음도 아니였다.
그렇다고 동네 아이들로부터 거짓말쟁이라는 소리가 두려워서도 아니였다.

내가 진실로 마지막 한번 더 바라고 싶은 것이 있었다.
그때 그 날처럼 기적소리 커다랗게 울리면 얼른 두 손으로 귀를 막고 물고기 비린내 물씬 풍기는 내 아버지의 품에 다시금 안겨보고 싶었다.
그리고 무참하게 잃어버린 정에 마음껏 온몸을 부벼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이젠 아무리 기차가 힘에 넘치게 달려오고 기적소리를 그날보다 몇배 더 크게 울려도 다시는 그런 끈끈한 사랑을 더는 받을 수 없음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리 애가 타도록 오지도 못할 기차를 기다렸었다.

철로변 양쪽에 있는 논배미들의 벼이삭들은 논 쥬인들이 전쟁에서 죽지 않으려고 모두 다 피난을 떠나 작별 인사도 없이 그냥 주인을 잃고 말았다.
그래서 서운했었는지 산에 오르는 우리들을 향해 가볍게 목을 숙여 애써 아는 척을 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홀로서기를 하는 것처럼 풍성하게 자라 목을 다소곳이 숙여 알알들이 틈실하게 영글어가고 있었다.
지난 해에 이어 또 다시 풍년이 들 것 같아 퍽이나 믿음직스럽게 보였다.

그 논배미 안에 온몸이 새하얀 왜가리 한마리가 짙푸른 벼이삭 사이를 헤집고 개구리와 미꾸라지 그리고 우렁까지 먹이로 삼으려 제 딴에는 열심히 사냥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산에 오르시는 어른들께서 주고 받으시는 말소리와 발자국 소리에 놀란 듯 하였다.
두 날개를 푸덕여 나래를 활짝펴고 하늘 높이 날아 올라 동쪽머리 등메산 자락의 우거진 솥밭을 향해 날아가고 말았다.

늘상 이맘 때 쯤이면 기관차가 기적소리 우렁차게 울리면서 온통 시커먼 육중한 모습을 과시하는 듯 드러내었다.
그러나 힘껏 질주해 오던 증기기관차의 모습이 보이질 않아 새삼스레 서운해졌다.
그런 내 마음이 참으로 변덕스럽게 느껴졌었다.

마을 고샅길을 벗어났을 때부터 마음속으로 생각했던 것인데 평상시에는 친구들 또는 한두 살 아래 동생들과 어울리다 보니 곧잘 등메산에 올랐었다.

그때는 마을과 등메산의 거리가 그리도 짧게만 보였었다.
그랬는데 더위 탓인지 아니면 아버지와 다 못 나누었던 정이 남아 있는 아쉬움 때문이었는지 그리도 등메산이 멀고 시간이 길게만 느껴졌다.

철길을 건너서자 순태 아저씨가 갑자기 지게를 받쳐놓고 어머니께 지게 바작 위에 올려놓았던 비단 요때기를 꺼내 드렸다.
그러자 어머니께서는 응수 아저씨께서 지고 계신 등지게 바작위에 이불을 가지런히 올려 아버지의 시신을 덮으셨다.

그런데 순태 아저씨가 걸머지신 바작지게에서 비단 요때기를 드러내자 내 아버지께서 평소에 입으셨던 바깥나들이용 신사복 두 벌이 맨먼저 보였다.
그리고 꿩의 속털을 뽑은 아름다운 깃털이 꼽혀 있는 밤색 중절모가 눈에 확 띄었다.
아버지께서 면소재지로 바깥나들이를 하실 때 콧등이 맨질맨질하게 닦아 신고 다니셨던 가죽 구두 한 켤레도 그 안에 놓여 있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저 값비싼 물건을 무엇 때문에 산으로 가지고 오는가 의아스럽게 생각했었다.

야트막한 언덕배기에 오르려니 그래도 경사가 있는 언덕이라고 예법 숨이 차올랐다.
맨 먼저 언덕 위에 오르신 순태 아저씨께서 동네 어른들에게 먼저 산에 오르라고 손짓을 하셨다.
그리고 빠른 걸음으로 언덕 아래 우묵 파인 곳으로 내려섰다.

우리들 모두는 아버지의 시신을 짊어지고 가시는 운수 아저씨의 뒤를 따라 조금 비알진 언덕을 내려서고 있었다.

언덕배기를 내려서는 길 옆에 구절초와 산국들이 후드러지게 들어차 있었다.
아직은 때가 이른 듯 짙푸른 줄기 끝에 당글당글하게 매달린 꽃몽우리들이 개화의 시점을 손꼽아 기다리며 잔뜩 부풀어 있었다.

그 틈사이를 비집고 생김새가 나팔꽃을 그리도 빼닯은 메꽃이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연한 분홍색 꽃을 은은하게 넝쿨 끝에 매달고 있어 그리 가냘프게만 보였다.
그리고 만추에 계절을 목이 메이게 기다리는 억새도 그에 뒤질새라 퉁퉁 부어오른 머리 끝을 이내 허옇게 터트릴 것 처럼 팽만하게 보였다.

불과 한 달 반 전에 있었던 일이었다. 아카시아 꽃이 봄의 훈풍을 타고 온 동네로 꽃향기가 퍼져났을 때였다. 옆집 내 짝꿍 귀분이와 그리고 동네 또래들과 함께 어울려 언덕배기에서 아카시아 꽃을 따면서 놀았던 생각이 떠올랐다.

그래서 얼마 전에 집을 나설 때 사립문짝 앞에서 내 손을 꽉 붙들고 울먹이며 나를 위로해 주었던 귀분이의 얼굴이 다시금 떠올랐다.

산기슭에 달라붙어 있는 밭들이 푸릇푸릇한 여름의 색으로 생동감 있게 물들어 있었다.
그 곳에 동균이네 수박밭이 있었다.
볏짚으로 초가지붕을 올려 높다랗게 만든 원두막이 있어 한 여름 속에 전원의 풍취를 자아내고 있었다.
아직은 덜 익어 풋기가 가시지 않은 수박과 개구리 참외들이 저마다 배를 쑥 내밀고 한 여름의 뜨거운 햇살에 속살을 열심히 채우고 있었다.

그리고 바로 옆에 길죽한 밭고랑들이 사이좋게 머리를 맞대고 있는 상수네 고구마 밭에서는 줄기와 잎들이 푸르고 푸르다 못해 거무스레 하게 보일 정도로 실하게 자라나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고구마 밭 두서너 군데에 마치 메꽃을 닮았지만 꽃의 크기가 아주 작은 좀처럼 보기 힘든 고구마 꽃이 피어 올라 있었다.
그 우환 중에도 어른들이 가시던 발걸음을 잠시 멈추시고 신기하시는 듯 다들 바라 보셨다.

구름은 그 위를 훨씬 지나서 산밑 오두막집 뒤에 있는 두 그루의 왕소나무 우듬지 위에 먼저 가 있어 또 다시 나를 보고 어여 오라고 서둘러 부르고 있었다.

그 때 앞산 어디에서 울고 있는지 알 수 없으나 내 아버지의 죽음을 저도 아는 양 뒷산 두견새도 섧디섧게 울고 있어 애탄하기 그지 없었다.

그리고 너른 목화밭 가장자리엔 하늘을 향해 기다란 목을 쭉쭉 빼어 내민 수수들이 붉은 빛을 띄우고 있었다.
계절은 여지없이 여름의 한가운데에서 엉거주춤하고 있는 듯싶었다.
들깨의 줄기와 잎들에서 퍼져나오는 고소한 내음새가 싫지 않게 풍겨왔다.
그리고 이름 모를 몸집이 작은 새들이 떼지어 채 영글지도 않은 콩밭 위에서 나름 열심히 노닐고 있었다.

이제 그다지 멀지 않은 거리에 있는 산중턱의 우묵골에 무성하게 욱어진 풀숲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제 내 아버지께서 영면하실 터가 가까워졌음을 무언 속에 눈빛으로 알려주고 있었다.

산마루턱으로 이어져 희끄름하게 바라보이는 오솔길이 참 단조롭게 보였다.

그런데 부락 구장 일을 보시는 인식이 아버지께서 뒤를 돌아다보시다 말고 이내 황급하게 말씀을 하셨다.

“워매, 저 연기 나는 것 좀 봐. 그려, 순태 동상 허는 일이 죄 그렇지 뭐. 나가 아까참에 탱자나무 밑이서 쉴 때 내 그리 누누이 알어듣게 말을 혔는디두 저렇게 다들 보란 듯이 터놓구 불을 질러댔싸니 만에 하나 그 미친넘들 눈시깔에 띄기라두 허면 그 책음을 워치케 감당헐려구 그러는지 나사 알다가두 모르것네.”

그 연기를 바라보는 순간 좀 전에 내가 가졌었던 의문이 풀려 정확한 답을 얻을 수 있었다.

그땐 마을에 초상이 나면 장지로 가는 길에 후미진 적당한 자리를 골라 고인이 쓰시던 유품은 물론 깔고 덮고 잤던 이부자리까지 모두 태웠다.
그리고 밥그릇, 수저, 젓가락까지도 모두 태워 없애버리려고 하는 풍습이 전해 내려왔었다.

그래서 우리들은 왠지 꺼림칙한 생각이 들어 그 자리에 가까이 가지 않으려고 했었다.
마치 상엿집 앞을 지날 때에 느끼는 감정과 꼭 같았기 때문이었다.

오솔길 앞에 우리 일행들이 다다랐을 때 밭에 뽕나무에서 누에에게 줄 뽕잎을 따고 계시던 영호네 어머니 모습이 눈에 띄였다.
머리에 쓰고 계시던 광목 수건을 벗어 얼굴과 목에서 흘러내리는 땀을 훔치시면서 서둘러 밭둑길로 뛰어오셨다

그리고 급히 어머니를 불러 세웠다. 그러자 어머니께서도 몸을 돌리셔 영호 어머니를 만나시려고 그 자리에 주춤거리고 있었다.

“아이구, 내사 무신 말을 혀야 동상 맴이 사그라들련지는 모르긋지만 참말루 요로콤시루 어굴탕한 일이 생겨분져서 우짜믄 좋디야. 나두 통 몰르구 있었는디 오늘 아침이사 누에헌티 줄라구 뽕잎을 뜯으러 나오는디 그 무시냐 옥순이 엄니가 우물가로 물 길러 나오다가 만났는디 난 그제서야 소식을 들어분젔구먼. 아 글씨, 그 말을 듣고 나니께 눈앞이 컴컴혀지구 귀가 멍멍혀져서 절대루 믿을 수가 없던구먼 그려. 아, 엇그저끼까정만 혀두 내가 면소재지 염씨네 즘빵에 소고지름 살려구 가는디 지서 쪽에서 상민이 아부지가 맏바라보기루 걸어오길래 반갑다구 서루 치다보구 인사까장 자별허게 나눴는디 이르케 돼번지구 나닌께 참 흐무하네 그려, 암튼 동상이 맴 딴단히 먹구 잘 댕겨와. 날랑은 이따가 즈녘나절에 자네 집으루 꼭 들릴틴께 그리 알구 어여 가봐, 에이구 기나저나 상민이란 눔 저 어린거슬 우짜면 좋다냐, 암튼 저 엠병을 앓다 처죽을 놈들이라 호랭이두 않 물어 갈 긋이구먼 그려."

한 동안 자기에 감정을 여과 없이 진솔하게 표현하신 영호네 어머니께서 누에 뽕잎을 따시려고 다시금 밭으로 향하셨다.
그런 뒷모습을 바라보려니 그렇게라도 마음에 정을 나누시려 하는 그 분에 마음씨가 고맙기만 하였다.
그리고 그 어른님의 마음을 다는 모를지라도 어느 정도는 읽을 수 있었다.

그저 내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에 대한 동정어린 말이 더없이 고맙기도 하였다.
그러면서도 서로가 서로의 아픔을 헤아려 보듬어 줄려는 그런 참신한 인간의 정이 절실하게 그리웠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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