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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메로 가는 길 - 129 조회 : 2,069




지난 밤사이 늦가을 비가 추적추적 내렸으나 날이 밝아오자 비는 멈추고 말았다. 그러나 구름이 잔뜩 낀 날씨는 여전히 찌푸려져 있었다.
비에 젖은 산자락의 잔솔나무들이 다붓다붓하게 보였다. 그리고 산자락을 가벼이 감싸 안고 도는 엷은 우윳빛 물안개 자락이 끝 모를 외로움을 남겼다.
동편 하늘 밑 소릿재를 넘어선 아침 해가 구름 속에 갇혀 좀처럼 제 모습을 드러내질 못했다. 도랑가에 내려서는 고무신 밑바닥에 바알간 황토 흙이 옴팡지게 묻어나고 으슬으슬한 찬 기운에 몸이 저절로 움츠려졌다.

둔덕머리 감나무 가지 위에 까치 한 마리가 저도 소리 없이 사라져 가는 늦가을 끝자락이 못내 아쉬운지 ‘까악까악’ 울고 있었다. 동네 앞 달구지 길엔 논산 읍내 오일장에 가려나 소달구지를 몰고 가는 우직스런 용만이 형의 모습이 보였다. 모처럼만에 콧바람을 쐬려 읍내에 나들이를 하는지라 마냥 신바람이 난 듯싶었다.
우마차 위에 덜렁 올라타 덜컹대며 벼랑바위 앞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 뒤를 종기형이 엉덩이를 조금씩 들썩거리며 자전거를 타고 소달구지 뒤를 따라가고 있었다.

산기슭에 물기 서린 잔솔나무 잎들이 햇살에 반득거리는 둔덕 아래에 있는 텃밭을 지나 집 앞에 닿았다. 구수한 청국장 냄새가 사립문 앞까지 풍겨났다.
무엇이 그리들 급한지 대나무 둥구리 안에서는 닭들이 서로 먼저 빠져 나오려고 문 쪽으로 머리들을 디밀고 푸덕이고 있었다. 그래서 얼른 문을 열어주니 저마다 앞 다퉈 비좁은 문틈으로 몸을 비집고 나와 날갯짓을 하며 마당 위로 뛰어내렸다.
어머니께서 아주머니가 차려 오신 밥상 앞에 아기를 품안에 보듬으시고 아침밥을 드시며 나에게 말씀하셨다.

“옥순네 집에서 쌀 한 가마니 허구 기성이 총각네 집에서 고구마 한 가마니를 사들여 우선 숨은 돌렸지만서루, 그것 가지구는 우리 네 식구 시한 나기엔 조금 모자랄 것 같아 쌀을 더 사들여야 쓰것는디 어쩐다냐, 죽으라구 버는 수 밖에 없으닌게, 그래야 우리 새끼랑 알콩달콩 살아가지 순덕아 큰 에미 말이 맞지?”

비록 생활이 고달플지라도 잠시나마 그 고통을 잊어 보려고 순덕이 얼굴을 바라보며 웃고 계신 어머니의 모습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마치 희끄무레한 바깥 날씨처럼 기분이 침울해져 답답하기만 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어머니의 은혜에 대한 고마움에 고개가 절로 숙여졌다. 마당으로 나서 동구 밖으로 눈을 모았다.
동네 어른들이 오일장에 가시려는지 나무다리를 건너 띄엄띄엄 큰길 위를 걷고 있었다. 종구가 자전거를 타고 학교에 가는 모습이 철길 건널목 너머로 보였다.
그런데 자전거 뒷자리에 늘 함께 타고 가던 주현이 모습이 보이질 않아 자못 궁금해졌다. 나보다 먼저 읍내로 장사를 하러 발걸음하신 어머니께서 키 작은 고염나무 두 그루가 서 있는 벼랑바위 앞 나들목에 닿으셨다.
아주머니가 싸 주신 따뜻한 도시락을 챙겨 책보자기를 들고 사립문 밖을 나섰다. 아주머니와 아기에게 인사를 하고 언덕배기를 넘어 철길 건널목 앞에 닿았다.

멜빵끈이 양쪽 어깨 위로 걸쳐진 검정색 골덴 치마를 입은 옥순이가 나를 향해 다가오는 모습이 보여 반가웠다. 그리고 조금 멀리 주현이가 뒤를 따라 걸어오고 있었다.
방죽가 기현이네 집에는 할아버지에게 인사를 마친 기현이가 책보자기를 어깨에 둘러매고 철로 받침목을 디뎌 뛰어오고 있었다. ‘딸랑딸랑’ 양철 필통 속에 몽당연필 나뒹구는 소리가 뛰어오는 발길에 부딪치는 자갈 소리와 함께 들려왔다.

냇둑 길에는 방앗간 뒷집에 사는 이 학년인 민균이가 걸어오고 있었다. 소매 끝에 콧물이 희끗하게 묻은 한쪽 손에 잔칫집에서 남겨 온 절편을 한입 베어 물고 깡충거리며 내 앞을 지나갔다.
여름에 비해 비다운 비가 그리 많이 오지 않아 가을 가뭄이 시작되는 것 같았다. 상평 저수지에 저수량이 적어 냇가에 흐르는 물의 양도 눈에 띄게 줄어들어 개울 밑바닥이 거의 보일 듯 했다.
한여름엔 물결 따라 파릇파릇하게 너울대던 물풀들도 누릿하게 색 바래 시들은 모습으로 힘없이 흔들거렸다. 그런 모습이 냇가로부터 풍겨오는 비릿한 냄새와 함께 쓸쓸하게만 보였다.

건널목을 건너서 걸어오는 주현이에게 내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주현아, 너 오늘은 왜 종구랑 같이 안 가구 혼자 가냐? 뭔 일 있었냐?”

내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옆에 걸어가던 옥순이가 주현이 얼굴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뭐 보나마나 뻔허지, 서로 싸웠구먼, 종구는 지 밑에다가 놓구서 막 부려 먹을라구 했을 꺼 같구, 주현이 넌 그런게 싫구 아니꼬우닌께 서로 편 갈라섰구먼, 뭐.”

주현이가 작달막하지만 경우에 맞도록 야무지게 말을 하는 옥순이 기세에 조금 눌린 것 같은 표정으로 대답을 했다.

“음, 그런 것두 있기는 허지만, 교회 댕기는 우리 학교 애들헌티 나는 가난해서 중학교에두 못들어가구 졸업하면 읍네 목공소에 넘 집 살이 하러 간다구 소문을 냈구, 우리 아버지는 서울 가서 남네 집 굴뚝 청소나 한다구 흉을 봐서 내가 앞으로는 절대루 안 만날라구 맘 먹었어, 그까짓 거 자전거 안 타면 어디 죽는 줄 알구 사람을 그렇게 무시허드라.”

그러자 옥순이가 기다렸다는 듯이 주현이에게 다시 말을 했다.

“니가 종구 자전거 뒤에 타구 다닌는 게 좋으닌게 종구 비위 다 맞추다가 그렇게 된 거지 누굴 탓하구 그런다냐, 다 니 탓인디 뭘”

그 말을 듣고 있던 주현이가 멋쩍은 얼굴로 말없이 걸어가는 나에게 말을 건넸다.

“먼젓번에 화산리 약방 앞에서 종구가 석란이랑 정숙이헌티 뭐라고 말한 줄 아냐? 느네 집 검둥이는 귀두 안스구 똥만 주서 먹구 댕기는 멍청한 똥개라구 했어, 음, 그리구 느네 집이 똥구멍이 짯어지게 가난한디 벙어리를 데리구 산다구 하면서 느네 아버지 묘두 파가야 허는디 느네 집이 불쌍혀서 봐주는 거리구 했어.”

갑작스레 듣는 말에 마음이 혼란스럽고 기분이 좋지를 않아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 그런 내 마음을 부추기는 듯이 주현이가 다시 말을 꺼냈다.

“야, 상민아. 그런 소리까장 들었는디 가만히 놔둘래? 나 같으면 한방 붙어버리구 말긋다. 그리구 쌈하면 너헌티 안 될 건디. 먼저번에두 되게 얻어 맞어서 가만히 보닌게 너를 슬슬 피할라구 허드라, 내 생각에는 니가 뭐라구 말만혀두 꼼짝 못할 꺼 같은디.”

갑자기 굳어진 내 얼굴 표정과 감정을 자꾸만 부추기는 주현이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며 옥순이 큰소리로 야물딱지게 말을 했다.

“야, 주현아. 너는 뭐 그러냐? 그런 얘기 들었으면 너 혼자만 알구 있어야지 모르면 약이구 알면 병이라구 넘 부야 질러 가지구 쌈만 붙일라구 허냐, 지난봄에 그 일 땜시 선생님이 몇 번씩이나 동네루 찾아오시구, 동네가 시끄러웠던 거 잘 알면서 그딴 소리혀서 또 쌈을 붙일라구 허냐?”

아무런 말이 없이 묵묵하게 듣고 있는 내 모습에 분위기가 어색하게 느껴졌던지 주현이가 얼버무리는 말투로 옥순이에게 말했다.

“그런 게 아니구, 난 상민이 생각혀서 말해 준 건디 뭘 그렇게 소리치구 그런다냐?”

그러자 옥순이가 때를 놓치지 않으려는 듯이 주현이를 쏘아보면서 더 큰소리로 말을 했다.

“야, 주현아. 내가 큰소리친다구 뭐라구 하지 말구 잘 생각을 혀봐. 니가 시방은 우리들헌티 이 말 저 말 다 허면서 종구 숭을 보구 있지만, 난중에 또 종구허구 다시 붙게 되면 우리가 종구 숭이라두 보면 그거 다 말할 건디 뭐, 아이구 그런 생각허닌께 니가 무지허게 겁난다, 야.”

옥순이가 그저 말없이 걸어만 가고 있는 나를 곁눈으로 바라보면서 나에게 말했다.

“그라구 상민아 니가 참어 버리구 말어, 뭐 똥이 무서워서 피하냐 더러워서 피하지 그렇게 헐 일들이 없는가 모이기만 허면 넘 숭이나 보구, 참 웃기지.”

복잡하게 생각하고 있는 내 심정을 이해하려는 눈빛으로 바라보는 옥순이의 눈빛이 고마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왠지 부담스러웠다. 미약한 나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무력함에 말 없는 작은 항거인양 길가에 버려진 돌멩이를 주워 애꿎게 냇가 물 위에 비스듬히 던져 물수제비를 떴다.
바람 싸늘하게 얼굴 스쳐 지나는 새터 나들목을 지나 학교 뒷산 오목한 언덕배기에 올랐다. 싸리나무 숲 사이에 아침을 즐기던 멧새들이 발자욱 소리에 놀란 듯 ‘후루루룩’ 소리를 내며 높다란 측백나무 울타리 쪽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종구가 한 말이 다 맞는 말이었다. 우리 집 검둥이는 정말로 두 귀가 쫑긋하게 다 서질 못하고 귀 끝이 구부러졌으니까 ‘똥개’ 라는 그런 말을 들을 수 있었다.
또한 먹고 살 양식도 없으면서 벙어리를 데리고 산다는 말도 너 나 할 것 없이 다 알고 있는 사실이기에 숨길 수도 없고 숨길 필요조차도 없었다. 그러나 다시금 냉정하게 되돌려 생각해 보았다.

먹고 살 양식이 남아돌면서도 남의 아픔을 모른 척하며 그리 모질게 냉혈적으로 살아가는 종구 아버지보다는 훨씬 인간답게 사는 것 같았다. 그러나 ‘아버지 분묘를 이장할 땅 한 평이 없는 가난한 집이라서 불쌍한 마음에 그냥 놔두고 있다.’ 라는 말에는 무엇이라 형언키 어려운 감정이 치밀었다.
하지만 그렇게라도 참고 버텨 나가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눈앞에 놓인 냉정한 현실이 한없이 원망스러웠다. 마냥 아쉬운 마음에 두 눈으로 버릇처럼 앞산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가칠한 산릉선에 떼를 지어 밀려오는 검은 구름들이 내 마음만큼이나 어둡고 무거워 보였다. 옥순이가 그런 생각에 젖어 한동안 말이 없는 내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지난봄처럼 또다시 종구와 크게 싸워 온 동네가 한바탕 시끄러워지고 여러 어른들을 걱정하게 만드는 일을 저지를까 봐 크게 걱정하는 것처럼 보였다.

가뜩이나 작은 얼굴에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보고만 있어 그런 모습에 갑자기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와 피식 웃고 말았다. 그제서야 마음이 놓이는 듯 옥순이가 가볍게 눈을 흘기며 작은 어깨로 내 옆구리를 가볍게 밀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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