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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메로 가는 길 - 130 조회 : 2,112




희부연 모습을 드러낸 마을 앞산은 배부른 황소처럼 느슨하게 허릴 굽히고 있었다. 학교로 향하는 길이 이어진 새터 나들목을 지나 야트막한 언덕배기에 올랐다. 사람 하나 겨우 지나갈 정도로 비좁은 오솔길엔 약삭빠른 다람쥐에게 알맹이를 뺏겨 누렇게 빛바랜 밤송이가 발밑에 푸석하게 밟혔다. 오동나무 가지엔 힘겹게 매달린 마른 잎사귀가 스산스레 불어오는 바람에 ‘바스락’ 소릴 내며 한두 잎 떨어지고 있었다.

한 두 걸음 앞서 가던 주현이가 방금 전 자기가 한 말에 내가 버럭 화를 낼 줄 알았는데 반응은커녕 말 한마디조차 없자 다소는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옆에 있는 옥순이마저 마구 쏘아붙이기만 하자 아주 머쓱한 표정으로 부자연스러워했다. 주현이가 그런 분위기에 함께 머물러 있기가 어색했던지 어깨에 둘러맨 책보자기를 바짝 추켜올리고 멋쩍게 혼자서 앞으로 달려갔다.

면소재지 화산리로 이어지는 큰길가엔 쪽지게를 지고 읍내 오일장에 가는 어른들의 모습이 드문드문 보였다. 덜컹대는 달구지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걸어가는 어른들의 모습이 한동안 끊이질 않았다.

학교 울타리 모퉁이를 돌아 새터마을에 이르렀다.
마을 큰길가에 새로 생긴 대장간에선 턱밑에 검은 수염이 덥수룩하게 난 대장간 주인 아저씨의 우직스런 모습이 보였다.
아저씨께서 평행봉처럼 나무를 세워놓은 틀 안에 말을 야무지게 묶어놓고 한쪽 발목을 냅다 치켜들었다. 그리고 낫처럼 휘어진 잘 드는 칼로 발바닥을 깎은 다음 쇠줄로 매끈하게 다듬었다.
그런 다음 둥그렇고 납작하게 생긴 편자를 말굽에 대고 쇠못을 쇠망치로 두드려 야무지게 박고 계셨다. 그러자 매여 있던 말이 몹시도 아픈지 옴몸을 비틀며 한바탕 커다랗게 울어댔다.

대장간 옆에는 그리 크지도 작지도 않은 함석집이 한 채 있었다. 그 집 큰아들이 대전에 가서 이년 동안 이발하는 기술을 배워왔다고 소문이 나 있었다.
그래서 일꾼들이 길가로 나 있는 사랑채 벽을 헐어 버리고 그 곳에 이발소를 차리려고 흙벽돌을 쌓고 있었다. 그리고 한편에서는 미장일을 하시는 아저씨 한 분이 흙손으로 벽을 매끈하게 바르고 있었다.

새터 마을은 동네 규모가 작지만 우리들 모두의 배움에 터인 학교가 있고 지리적으로는 채화면의 중심부에 위치해 있었다. 그러나 면사무소와 지서가 화산리에 있어 늘 외진 곳으로 발전이 꽤나 더뎠다.

아이들의 떠드는 소리가 시끌벅적하게 들려오는 운동장에 들어섰다. 교무실 화단 앞에는 선생님들이 타고 오신 자전거들이 보기 좋게 줄을 맞춰 세워져 있었다. 운동장에서는 아이들이 제기차기와 기차놀이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 반 성태와 응선이가 이반 아이들과 축구시합을 하는지 상대방 골문을 향해 열심히 공을 차는 모습이 활발하게 보였다.

학교 창고 문 앞에는 논산 읍네 연탄공장에서 온 허름한 트럭 한대가 뒤꽁무니를 바짝 들이대고 멈춰 서 있었다.
트럭 적재함에는 검은 조개탄이 가득 실려 있었다. 그 적재함 위에 소사 일을 하시는 양씨 아저씨와 새터마을에 사시는 어른 두 분이 함께 널따란 사각 삽으로 조개탄을 퍼 내리고 있었다.

앞이마가 벗겨진 허연 머리, 누런색 뿔테 안경을 코끝에 조금 내려 걸치신 교장 선생님이 뒷짐을 지시고 일하시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곁에 함께 서 있는 선생님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낮은 학년의 아이들은 나뭇가지에 몸 움츠리는 참새 떼처럼 양지바른 쪽 교실 벽에 몸을 기대고 옹기종기 모여 재잘대고 있었다.

한쪽 편 철봉대 밑에는 우리보다 한참을 앞서 학교에 온 종구가 자기 반 아이들과 무언가 열심히 말을 하고 있는 모습이 조금 멀리 보였다.

교문에는 검정색 위아래 골덴자켓에 하얀 블라우스를 받쳐 입은 석란이가 화산리에 사는 아이들과 한데 어울려 운동장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리고 몇 걸음 뒤에는 이번 일요일 날, 용꽃마을 양조장 큰아들에게 시집을 간다고 하시는 사학년 이반 담임이며 무용을 잘하시는 여자 선생님의 모습이 보였다.

그 뒤를 따라 우리 반 담임선생님이 자전거를 타시고 창고 쪽을 두어 번 바라보시며 교무실 쪽으로 오셨다.

차갑기만 한 마룻바닥에 발을 디디고 교실 문을 열고 들어섰다. 선생님 책상 위에 먼지를 닦고 있던 영선이가 손을 들어 반갑게 맞아주었다.

영선이가 손에 걸레를 들고 내 앞으로 다가와 아기 이름 지은 것에 대하여 말을 물었다. 그래서 내가 ‘쑥떡’ 이라고 말을 해 옥순이와 함께 또 한바탕 커다랗게 웃고 말았다.

‘덜그럭’ 교실 출입문을 여는 소리가 들려 머리를 돌려 보았다. 석란이가 교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때 영선이가 반갑다고 손을 흔들어 주는데도 쳐다보지도 않고 모른 척하며 자기 자리에 가 앉았다.
석란이가 영선이를 애써 못 본척하면서 옆자리 아이들과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아마도 지난 부반장 선거에서 영선이에게 떨어진 서운함이 꽤나 오래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영선이와 석란이의 대립적인 경쟁심은 쉽사리 사라질 것 같지 않아 보였다. 미루어 짐작해 볼 때 졸업을 할 때까지는 그런 어정쩡한 분위기가 계속 이어질 것 처럼 보였다.

싸늘하게 퍼져나가는 교실 안의 냉기를 피하려 아이들이 양지바른 교실 유리창가에 우하고 몰려 들었다. 그리고 얼마 후 ‘땡땡땡 땡땡땡’ 하는 종소리가 나자 우당탕 책상과 걸상이 몸에 부딪히는 소리들을 내며 서둘러 각자 자기 자리에 앉았다.
교실 문을 여시고 출석부 위에 매끈매끈하게 손때가 묻은 대나무 뿌리로 만든 매를 얹어 드신 선생님이 교단 위에 오르셔 말씀을 하셨다.

“이제 겨울로 들어서 날씨가 좀 싸늘하기는 하지만 춥다고 몸을 움츠리지들 말고 어깨를 쫙 펴라, 그리고 내일부터 교실에 난로를 피울 것이니 당번들은 아침에 창고에 가서 땔감을 타와 난롯불을 피우기 바란다.”

난롯불을 피운다는 선생님 말씀에 ‘와’ 하며 모두들 좋아서 소리를 질렀다. 선생님이 조용히 하라고 칠판을 치시며 잘 닦아 놓은 칠판 위에 ‘고려 충신 최영’ 이라고 하얀 분필로 글을 쓰셨다.

“오늘 너희들이 배울 최영 장군에 대한 노래를 음악시간에 배워서 알고 있으니 노래를 한번 부르기로 한다.”

선생님께서 지휘봉을 꺼내 드시고 지휘를 하셔 우리들은 노래를 불렀다.

“황금을 보기를 돌 같이 하라, 이르신 어버이 뜻을 받들어 한평생 나라 위해 바치셨으니, 겨레에 스승이라 최영 장군.”

우리들의 합창이 끝나자 선생님이 지휘봉을 굳게 쥐시고 말씀하셨다.

최영 장군은 고려 말기 우왕 때 청렴결백한 무장이자 충신으로써 나이 16살 때 아버지로부터 ‘황금을 보기를 돌 같이 하라’ 가르침을 받고 훗날 지위가 높은 재상에 올라 있었어도 일체의 뇌물과 청탁을 받질 않아, 그 청렴결백함이 그 시대 사람들에게는 물론 후세에 이르기까지 전해 내려오는 훌륭한 인물이셨다.

“명나라가 서북면 일대의 땅을 자기 나라에 바칠 것을 요구하자 최영 장군은 요동정벌을 강력하게 주장하여 요동정벌군 총사령관에 임명되어 출전을 했다. 그러나 쉴 새 없이 거세게 비가 내리는 장마로 압록강이 불어나 도저히 강을 건널 수 없게 되자 휘하 장군이었던 이성계가 우왕에게 회군명령을 내려줄 것을 간곡히 요청했다.
우왕은 이를 무시하고 진군할 것을 독촉하여 이에 반기를 든 이성계가 나라의 법을 어기며 회군을 하여 이성계가 최영 장군을 처단하려 하자 죽음을 앞둔 최영 장군이 ‘나에게 죄가 있다면 나라를 죽도록 사랑한 죄 뿐이다.’라고 말을 끝으로 원한을 품은 채 숨을 거두었다.
그 후 최영 장군의 묘에는 풀이 나질 않는다는 속설이 전해 내려올 정도로 곧고 강인한 성품을 지니신 장군으로서 온 겨레의 스승이 되었다.”

한동안 자세하게 설명하시느라 목이 마르셨던지 선생님 책상 위에 놓인 주전자의 물을 컵에 따라 마신 후 우리들을 향해 말씀을 하셨다.

“내 설명에 대하여 질문이 있는 사람은 손을 들고 말하기 바란다.”

유리창가 교실 맨 뒷줄에 앉아 있던 응선이가 손을 번쩍 들고 일어서 질문을 했다.

“선생님 그럼 사람들이 최씨들이 고집이 쎄다구 하는디, 그럼 최영 장군님 묘에 풀이 안 날 때부터 고집이 쎄다고 했는감유?”

교실 안이 웃음소리로 시끄러워지자, 선생님이 조금은 어이가 없으신 표정으로 우리들에게 조용히 하라고 하신 후 응선이에게 말씀하셨다.

“야, 이놈아. 그것을 질문이라고 하느냐? 음 그러고 보니 응선이 네 성씨가 최씨라서 그러는 모양인데, 최영 장군님은 그렇게 훌륭하신 분인데, 응선이 너는 사람들 앞에 자랑스럽게 내놓을 만한 것이 뭐가 있냐? 맨날 교실에서 써커스에서 보고 온 원숭이 흉내만 내며 시끄럽게 떠들기만 하는데, 그런 흉내를 잘 내듯이 앞으로는 공부를 열심히 하여 그런 어른의 훌륭한 모습을 본받아라.”

원숭이 흉내라는 선생님 말씀에 아이들은, 키 작은 응선이가 몸을 잔뜩 웅크리고 깨방정을 떨며 원숭이 흉내를 내던 모습을 떠올렸다.
선생님 눈치를 살피느라 소리를 크게 내질 못하고 한손으로 입을 가린 채 키득거리며 소리를 낮춰 웃고 있었다.
그러자 선생님이 콧등 아래로 내려온 안경 너머로 누가 웃고 있는지 찾아내시려는 듯했다. 그래서 눈을 커다랗게 뜨시고 교단 아래 교실 안을 두루 살펴 훑어보고 계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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