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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메로 가는 길 - 142 조회 : 1,756




턱밑까지 차오르는 숨을 가누며 물레치기 언덕바지에 올랐다. 가쁜 숨을 몰아 내쉬며 발밑을 내려다보았다. 언덕 아래로 보이는 허름한 일본식 목조건물 한 편에 잇대어 자그맣게 달아낸 이발소가 단작스럽게 보였다.

언덕엔 누렇게 뻘쭘히 서 있는 억새들이 찬바람에 서로 부대껴 신음처럼 소릴 내고 있었다. 저녁 햇살 가득 찬 파리한 늦가을 하늘엔 꼬리 연들이 바람결에 꼬리를 쉴 새 없이 촐랑대며 방죽가 미루나무 우듬지쯤에 떠올랐다.
눈이 시리도록 번질거리는 철로 레일 위엔 장난기 가득한 동네 꼬마 녀석들의 모습이 보였다. 마치! 곡예를 하듯 좌우로 흔들리는 몸의 중심을 어렵게 잡고 누가 더 멀리 버텨 걸어가는가를 내기하는 것 같았다.

지서 앞 길가엔 짐을 가득 실어 뒤뚱대는 달구지를 끌고 가는 자홍색 조랑말 등 언저리가 유난스레 반질거렸다. 그리고 말방울소리가 또랑또랑하게 멀리까지 들려왔다.
면사무소에는 하루 일과를 끝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듯 면 직원들이 자전거를 타고 정문을 빠져나오고 있었다.

황토 흙내 끈끈한 솔향기 속에 묻어나는, 야트막한 성황당 모퉁이를 돌아 바람 시린 밭둑길로 내려섰다. 비알진 밭엔 땅 위로 불끈 솟아오른 무가 성글게 보였다.
더불어 햇살이 푸른 이파리 언저리에 넉넉하리만큼 내리쪼이고 있었다. 다랑이 밭 언저리에 서 있는 고종시 나뭇가지 끝에 까치밥으로 띄엄띄엄 남겨 놓은 감들이 고즈넉하게 보였다.

유리창을 뚫어 추녀 밑으로 뻗어 나온 연통 끝으로 장작이 타는 매캐한 연기가 퍼져 나오는 이발소의 문을 열고 들어섰다. 이발소 주인아저씨는 선천적으로 등이 굽은 장애를 딛고 살아오신 분이었다.
이발소 안으로 들어서는 나를 보고 아저씨가 반가운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셨다.

“응! 상민이 왔구나. 참 오랜만이다. 엄니는 잘 계시지? 어서 의자에 앉아라. 이제 니들 시험 보러 갈 날두 을매 안 남았구나. 날이 자꾸만 추워지닌께 빡빡머리루 깎지 말구 상고머리로 깎어 줄게.”

하얀 광목천을 의자에 앉은 내 목에 둘러 주시고 사각사각 가윗날이 가볍게 맞닿는 소리 따라 잘려진 머리카락이 목에 두른 흰 광목천 위로 소리 없이 떨어져 거울에 비친 서서히 변해 가는 내 얼굴 모습에 피식 웃었다.

머릴 빠작대고 가위질을 하시던 아저씨께서 내게 물으셨다.

“상민아. 니네 학교 앞에 이발소 새로 생긴 거 알지? 그기 손님들 많이 오더냐?”

거울을 바라보고 있던 내가 부자연스럽게 목을 약간 들며 대답을 했다.

“예, 며칠 전에 이발소 문 연다구 새터말 어른들이 모여서 풍물 치구 그러던디. 그리구 이발소 안으로다가 한번두 안 들어가 봐서 잘은 모르것는디유. 학교 가면서 어쩌다 슬쩍 보면 사람들은 별루 없는 거 같이 보이던디유.”
“암튼, 다른 사람은 몰러두 너는 우리 집으루 꼭 다녀야 혀. 왜냐면 니 아버지 살아계셨을 적부터 내가 머리 깎아줬구. 너 요만할 때 니 아버지가 널 업구 와서 머릴 깍어 줬는디 참, 그러구 보닌게 속절없이 흘러간 세월두 세월이지만, 너랑 나랑 보통 인연은 아닌 거 같다. 그러닌께 내가 이 짓을 헐 동안은 돈을 떠나서 서로지간에 정으로다가 딴디루 가지 말구. 꼭 나한티루 와야 헌다 알았지?”

가뜩이나 키가 작으신 분이 한쪽 다리를 뒤뚱거리며 내 옆으로 바짝 다가서시며 다짐을 하듯 말씀 하셨다. 그런 모습이 너무 우스워 그만 웃으려다 아저씨가 무안해 하실까 봐 웃음을 멈추고 말았다.
그리고 아무 일 없는 듯이 앞에 걸려 있는 커다란 거울만 그저 바라보고 말았다. 이발을 마치고 큰길가 밖으로 나서자 싸늘하게 부는 바람에 뒷머리를 바싹 추켜올려 깍은 탓인지 목둘레가 왠지 허전하고 차갑게만 느껴졌다.

석유 병을 손에 들고 석유 기름을 사려고 눅눅한 오징어 냄새가 가득 풍겨오는 염씨네 점방으로 들어섰다. 방안에 계시던 아저씨가 밖으로 나오셔 석유통에서 석유를 빈병에 가득 담으셨다.
그리고 병 가장자리로 흘러내린 기름을 헝겊으로 닦으셔 헌신문지를 꼬깃꼬깃 접어 병목을 막아 건네주셨다. 내가 기름 값을 드리자 어디서 구해 오셨는지 군인들이 실탄을 넣어 두는데 사용하는 푸른색 실탄 통에서 거스름돈을 꺼내주셨다.
거스름돈으로 방 천장에 대롱대롱 매달아 집에 있는 순덕이가 쳐다보고 놀게 해 주려고 빨간색과 파란색 풍선 두 개를 샀다. 그리고 아주머니가 꽈리처럼 불던 생각이나 껌을 한 통 사 가지고 밖으로 나왔다.

의식적으로 거리감이 느껴지는 서먹서먹한 지서 앞을 지나려할 때였다. 소나무 판자 조각을 대패로 매끄럽게 다듬어 검정 색칠을 하여 만들어 놓은 나무 게시판이 유독 눈에 띄었다.
붉고 검은 색 글씨를 섞어 ‘병역 기피자 특별 자수 기간’ 이라고 써 놓은 종이가 붙어 있어 문득 동네 종열이 형 생각이 났다.
‘썩을 놈’ 이라고 하시던 종열이 형 어머니의 애처로운 모습도 함께 떠올라 마음 한 편이 무거워졌다.

그때 등 뒤에서 자전거의 방울소리가 요란스럽게 들려 뒤를 돌아보았다. 자전거 타는 것을 언제부터 배웠는지 쌍갈래 머리를 하고 두툼한 검정색 ‘비로드’ 천으로 만든 원피스를 입은 석란이가 자전거를 몰고 왔다.
아마 교회를 가려다 나를 보았는지 잠시 길가에 자전거를 멈춰 세웠다.

"상민아. 너 언제 왔냐? 어! 머리 보닌게 이발두 했네. 참, 깔금하게 보인다. 시방 집에 갈라구 그러냐?"

전부터 느껴왔던 그런 감정들이 잠재하고 있어 의식적으로 퉁명스럽게 말을 했다.

“응. 쫌 전에 와서 이발하구 시방 집으로 갈라구 하는 중이여.”
“상민아, 너두 교회에 나왔으면 좋것는디. 크리스마스도 을매 남지 않았구. 성탄절에 성탄극두 할라면, 사람들두 부족해서 너처럼 노래두 잘 부르구. 표현두 잘하는 사람이 꼭 필요헌디. 한번 생각해 봐. 너만 교회에 나오면 우리 교회사람들이랑 나는 말헐 것두 없구 전도사님두 그렇구 다덜 좋아헐 껀디.”

말끝을 흐리며 나를 바라보고 있어 그런 분위기가 부담스러워져 다시 얼른 쏘아붙였다.

“뭐시 그러냐, 나보다 더 잘허는 아이들 무지허게 많을 건디 뭐. 종구두 연극을 잘 헐거구 명식이랑 주현이두 있는디, 나는 내년에 중학교에 들어가면 읍내에 있는 큰 교회루 다닐라구 생각을 혀보구는 있는디. 어찌 될란가는 모르것다. 그때 가 봐야 알지 암튼 얼른 집에 가야 허닌께 낼 학교에서 보자.”

서둘러 약방 앞 골목길로 들어서며 머릴 슬쩍 돌려 바라보니 석란이는 그 자리에서 내 뒷모습을 바라보더니 자전거를 타고 교회로 향했다.

골목길 끄트머리쯤에 새로 생긴 솜틀집에서는 겨울 이불에 끼워 넣을 새 솜을 타려고 솜틀기계를 돌리고 있었다.

서편 금강 둑 너머 지평선엔 저녁 해가 불그레한 빛을 양껏 펼치고 동네 초가지붕 위로 듬성듬성 저녁연기가 피어올랐다.

뭉그적거리는 저녁햇살이 둥구나무 가지 사이로 비추는 동네 고샅길 입구에는 순아 할아버지가 소달구지를 몰고 가시는 모습이 보였다.

며칠 전부터 연무대에 있는 군부대에 납품을 하는 두부공장에서 두부를 만들고 남은 찌꺼기인 비지를 가져오셨다. 저마다 살기가 어려운 집들은 밥에 섞어 먹기도 하고 찌개를 끓여 양식 걱정을 조금이라도 덜어 보려고 애를 썼다.
비지에 배추김치나 무김치 가닥을 숭숭 썰어 넣고 국물이 적어 톡톡하게 끓인 뜨거운 비지찌개는 좋은 밥반찬이 되었다.

높다란 철로 전신주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우는 건널목에 오르자 들녘으로부터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이 앙칼지게 옷깃에 스며들었다. 들녘 논배미에 겨울 철새들도 이젠 잠자리를 찾아가려는 듯 노을빛 속으로 높이 솟구쳐 날아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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