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십 여 가구가 옹기종기 모여 사는 들메마을은 예부터 배산임수(背山臨水)의 터라고 전해 내려왔다. 봉긋하게 솟아오른 형제봉의 두 봉우리가 실살갑게 눈웃음을 띄우고 포근하여 더욱 넉넉하기만 느껴지는 어미의 품처럼 온유롭게 보이는 매화산이 온 마을을 한 점 빠트림 없이 끌어 안으려했다. 그에 힘입어 기스락 양지 바른 곳에 마을이 다소곳하게 자릴 잡고 있었다. 마을 앞으로 흐르는 시냇물은 논산천 지류인 샛강 개어귀로 흘러들어 금강 물과 조우를 이루고 그 강물은 세를 불려 서해 바다로 흘렀다. 일 년 내 상평 저수지로부터 풍족하게 흐르는 농업용수는 넓디넓은 논산들녘을 흠씬 적셔 기름진 옥토를 일궈냈다.
마을 앞에는 논산과 강경의 두 읍내를 잇는 신작로가 있었다. 신작로 가장자리 양쪽으로 민출하게 뻗은 미루나무에 노을빛이 깃들어 온통 불그레하게 물들어 혼자서만 바라보기엔 너무도 아까울 정도로 황홀함의 극치를 이루고 있었다. 할 수만 있다면 그런 모습 조금도 흐트리지 않고 오래도록 남겨 두고 싶은 분에 넘치는 욕심이 절로 생겼다.그리고 오가는 차바퀴에 눌려 흐트러지면서 튕기는 자갈들의 둔탁한 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려와 무릇 시골 비포장도로의 면모를 보여 주고 있었다.
서쪽 머리 강경읍내 샛강 둑 너머 향나무 숲 사이로 붉은 벽돌로 지은 상업고등학교 건물이 퍽이나 예스럽게 보였다. 다소 차갑게만 보이는 연청색 겨울 하늘 아래 하루해는 제 할일을 다한 듯 그렇게 저물고 있었다. 개울둑에는 저녁 늦게까지 정신없이 놀다 보니 조금은 추웠던지 동네 아이들이 잔디에 불을 질러 화르르 불길이 타올랐다. 그런 모습을 담 너머로 바라보시던 우현이 아버지가 걱정이 되시는지 둥구나무 앞까지 뛰어나오셔 큰소리로 야단을 치셨다. 그러자 까까머리 어린 동생들이 발로 비벼 서둘러 불을 끄고 각자 집을 향해 줄행랑을 쳤다.
손때가 반질반질하게 묻어난 문고리를 잡아 열고 방 안으로 들어섰다. 아주머니께서 순덕이에게 입힐 털옷을 짜시는 듯 어머니에게 어렵사리 배운 뜨개질을 하고 계셨다. 처음으로 어머니에게 뜨개질을 배울 때는 영 어설프기만 하더니 이제는 그 솜씨가 늘어 여법 보기에 좋았다. 천장에 나지막하게 매달아 놓은 풍선을 아직은 몸 가눔이 서투른 순덕이가 신기한 눈초리로 바라보며 웅얼거렸다. 그러자 뜨개질을 하시던 아주머니가 그런 천진난만하게 노는 순덕이를 가볍게 아울러 주셨다. 그리고 아주머니께서 어릴 적 추억을 더듬으시듯 꽈리를 입으로 데굴데굴 굴리며 부시는 평온한 모습이 그리 보기에 좋았다. 꽈리가 붉게 익을 무렵에 따서 손가락으로 살살 주물러 누글누글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바늘이나 옷핀으로 꼭지 끝을 건드려 뭉클한 씨앗을 빼낸 후 꽈리를 만들어 불었다. 그렇게 만든 꽈리를 입으로 가볍게 불어 윗니로 아랫입술에 대고 누르면 ‘뽀드득 뽀드득’ 하는 소리가 들렸다. 내년 봄에는 뒤뜰 장독대 가에 꽈리를 좀 넉넉하게 심으려 마음먹었다. 아마 그때쯤이면 순덕이가 앙증맞게 작은 꽃고무신을 신고 서툰 걸음마를 할 것 같았다. 그런 순덕이의 모습이 떠올라 마냥 귀여울 것만 같아 빙그레 웃고 말았다.
야트막한 둔덕에 흐드러지게 들어찬 억새는 어스름한 어둠을 몰고 가는 산바람이 야속해 가볍게 우는 듯싶었다. 이제 머지않아 하얀 달빛이 얼굴을 창백하게 내미는 밤이 오면 또 한 차례 울음을 터트릴 것만 같았다. 허옇게 나붓거리는 억새는 짧은 생이 각박(刻薄)할지라도 느긋함으로 한 조각 그리움을 꺼내려 안간힘을 쓰는 듯했다.
절기가 동짓달로 접어들자 해가 점점 짧아졌다. 어둠살이 온 들녘을 꿀꺽 삼킨 듯 온 주위가 어둑해진 들녘 길에 홀로 서니 고적한 마음에 괜스레 울먹여졌다. 그리고 산 밑을 휘어드는 찬바람에 가칠해진 손등과 눅눅한 땅에 닿은 발끝이 시렸다.
둔덕에 올라 내려다본 나지막한 초가집 봉창문 너머로 가느스름하게 새어 나오는 불빛이 흐린 달빛 속에 애처롭게 바라보였다.
야트막한 둔덕을 넘으시던 어머니께서 말씀하셨다.
“내일은 순아네 소달구지로 황석어하고 새우젓 통을 실고 와서 옥순이네 집에 내려놓아야 쓰것다. 그래야 동네 사람들헌티 필요헌만큼 나눠서 팔 건께. 그나저나 추워질 때도 됐지만, 저녁부터 날이 갑작스럽게 추워지는 걸 보닌게 겨울은 겨울인가 부다. 낼일랑은 스웨터 꺼내 놀테니 학교 갈 때 따십게 입구 가그라.”
앞서 가시던 어머니께서 싸리나무 껍질로 코를 꿰어놓은 생태 두 마리를 건네주셨다. 골짜기에서 불어오는 밤바람이 온몸을 세차게 스쳐지나 두 볼이 시려 자연스레 몸을 움츠리고 걸었다.
“엄니 아까 보닌게 순아네 할아버지가 두부공장에서 가지고 온 비지를 팔구, 동네 사람들이 통에 담아 사 가지구 가던디.”
머리에 인 젓갈동이의 손잡이를 붙드신 손이 시리신지 자꾸만 양손을 번갈아 바꾸시며 앞을 서 걸어가던 어머니께서 다시 말씀을 이으셨다.
“참, 그 양반 오지랖이 넓기두 허지. 어찌 그기까장 알구서 그걸 다 갖구 와서 판다냐? 비지찌개 잘 끓여 놓으면 밥 한 그릇 뚝딱 해치우는 디는 그만인디. 이번 김장헐 때 돼지고기 좀 사다가 넣구 뜨끈뜨근허게 끓여서 먹자. 그럼 추위에 오그라들던 몸두 녹을 틴께.”
창백한 만큼이나 차갑게만 보이는 조각달이 뒤뜰 왕 소나무 가지 숲 사이로 이지러진 얼굴을 내어 밀고 있는 울타리 모퉁이를 돌아섰다. 그리고 몇 걸음 앞서 가시던 어머니께서 차분하게 말씀하셨다.
“그리고 이번 공일날에 김장을 할 꺼닌게 그리 알구, 그날은 부지런히 물 좀 길어 날라야 헌다. 기나저나 김치독두 묻을라면, 땅이 얼기 전에 미리 파 놔야 헐 긴디 으쩐다냐? 니놈은 공부땜시 맨날 늦게 오닌게 그렇다 치구, 날랑은 장사땜시 밤에나 오닌께 내가 팔 수두 없구. 헐 수 없이 기성이 총각헌티 답배값이라두 좀 주구 파 달라구 허야쓰겄다.”
“에이 내가 시간만 있으면 그까짓 거 삽 들고 파면 될 껀데, 맨날 학교에서 늦게 오닌께 어쩔 수가 없네.” “아이구 니 놈보구 구덩이 파라구 안 할테니께 제발 하는 공부나 열심히 혀. 그게 이 에미 도와주는 일인께 알았냐?” “엄니는 입만 열면 그 놈에 공부 공부허는디 제발 걱정일랑 하지마 내가 엄니 보라는 듯이 내 년에 중학교에 꼭 합격하고 말틴께 두고보라구.”
흐린 달빛이 눅눅한 땅 위에 반질거리는 사립짝 앞에 다가섰다. 하얀 문풍지 사이로 너울대는 등잔불의 모습이 더없이 정겨워 마음이 포근해졌다. 그리고 밤이슬이 살포시 내려앉은 초가지붕 머리가 달빛에 비춰 은은하게 고운 빛을 띄웠다.
등잔불에서 기름 냄새가 솔솔 나는 방 안에 들어서신 어머니께서 방바닥에 엎드려 있던 순덕이를 품안으로 끌안으셨다. 그리고 순덕이 두 손을 붙잡아 ‘짝짜꿍짝짜꿍’ 손뼉을 치시며 말씀하셨다.
“그나저나 날이 자꾸만 추워지면, 바깥 장사 나댕기기두 어려울 껀디 어쩐다냐? 긴 겨울 양식 걱정 않고 날려면 내가 팔 걷어붙이구, 밤늦게까지장 뜨게질이라두 부지런히 허야 될란가 보다. 그래야 니 놈 내년에 중학교 보낼려고 논 팔아 빚 갚구 남겨 놓은 돈 안 까먹지 에휴.”
그렇게 말을 마치신 어머니께서 남아 있는 일들이 그리도 걱정스러운지 이내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러면서 윗목에 가지런하게 놓여 있는 쌀가마니와 고구마 자루 그리고 배급 타 온 밀가루 포대를 물끄러미 바라보셨다. 부엌으로 나가셨던 아주머니께서 밥상을 들고 오시느라 방문을 열자 바깥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등잔불이 이내 꺼질 듯 너풀거렸다. 그리고 어머니께서 아랫목에 수건으로 싸고 이불로 두툼하게 덮어 두었던 밥그릇을 꺼내셨다. 언제나 그랬듯이 흐린 등불 밑에 머릴 맞대고 오손도손하게 저녁밥을 먹었다. 투박한 밥그릇에 부딪히는 숟가락 소리가 좁은 방 안에 잔잔하게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