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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메로 가는 길 - 144 조회 : 1,426




쪽마루에 발돋움한 아침 햇살이 방문을 가볍게 두드렸다. 지난밤 늦게 까지 아랫마을 옥순이네 집으로 김장배추를 뽑아 나르느라 몸이 좀 피곤했던 것 같았다.
잠자리에서 몇 차례 꿈지럭거리다 부스스한 얼굴로 일어나서 방 안을 살펴보았다. 머리맡에 두툼한 회색 털 스웨터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한 올 한 올 정성들여 떠주신 어머니의 손길에 마음이 마냥 포근하기만 했다.

방문을 열고 앞마당에 나서니 산골짝을 타고 내려오는 바람이 예법 매서웠다. 밤사이 내린 찬 서릿발이 아침햇살에 녹아내리는가? 싸리울 위로 허연 김이 아른아른 피어올랐다.
울타리엔 메마른 줄기 끝에 억척스레 매달려 채 익지도 못해 흉물스레 쪼그라든 늦둥이 애호박 한 개가 흉물스럽게 눈에 띄었다. 마른 줄기 끝에 매달려, 부는 바람 따라 바동대는 것이 마치 버거운 삶을 살아가는 우리네의 모습 같아 애틋하게 보였다.

마당을 거닐던 닭들도 추위가 싫은 듯 굴뚝 밑 양지쪽에 서로 몸을 붙이고 있었다. 마루 옆에 웅크린 검둥이는 이제나저제나 하고 아침밥을 주기만 기다리는 듯했다.
그저 밥만 주면 얼른 뚝딱 먹어치우고 제 짝을 찾아 우현네 집으로 가려는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텅 빈 밥그릇만 어물쩍하게 바라보며 자꾸만 부엌 쪽으로 귀를 기우리고 있었다.

서둘러 아침밥을 먹고 겨울 김장을 하려고 어머니와 그리고 순덕이를 등에 업으신 아주머니와 함께 옥순이네 집으로 향했다. 뾰족한 서릿발이 발밑에 밟혀 가는 소리를 내는 밭둑길을 지나 억새가 허연 목을 모다 세워 하늘바라기 하는 도랑가에 닿았다.
속삭이듯 졸졸 흐르는 시냇물 물결 위에 아침햇살 찬연하게 내리쪼여 반짝반짝 눈 시린 황금빛 물기둥을 이루고 있었다.

언덕배기 너머 방죽가에 있는 흥남이 아저씨네 집 울타리에 닿았다. 탱자나무 밑자락에는 떨어진 누런 잎들이 예법 흐트러져 있고 나뭇가지 틈새로 찬란한 햇살이 빠짐없이 비집고 들어섰다.
가지마다 거무스레하게 빛바랜 탱자 알이 의연하게 매달려 자연의 순리에 따르려는 듯 묵언(默言) 속에 다음 차례를 기다리는 것처럼 보였다.

허리 굽혀 마당을 쓸고 계시던 기현이 할아버지께서 내는 기침소리가 애잔스럽게 들렸다. 아마도 시름이 깊어 애를 써 잊으시려고 담배를 심하게 피우셔 그러시는 듯했다.

키가 작달막한 쪽파가 파릇파릇 돋아난 철로 변 갈밭에선 주현이 어머니도 김장을 하시려는지 잎사귀가 누렇게 처진 총각무를 뽑고 계셨다.

더없이 넓은 하늘엔 그 어느 한곳에도 매달림 없이 자유롭게 나는 새 한 마리가 높이 솟구쳐 들녘 어디쯤으로 욕심만큼 날고 있었다.

동네 고샅길로 들어서 첫들머리 우현이네 집 마당엔 어느새 지름길로 앞서 내달려 왔는지 검둥이가 꼬릴 세워 어정거렸다.

방앗간 공터에는 아이들이 추위도 아랑곳하질 않고 한두 명씩 모여들었다. 순아가 눌러쓴 털모자 끝에 달린 털실 방울이 앙증맞게 보였다. 목에는 끈 달린 털장갑을 두르고 검정 서리태 콩이 섞인 누룽지를 먹으며 나를 바라보며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무르팍에 자그맣게 구멍이 난 바지를 입은 민균이가 팽이와 팽이채를 들고 연자방앗간 공터로 걸어왔다.

종구네 집 우물에는 정희 누나가 종금이 누나와 함께 배추 포기를 두 쪽으로 잘라 소금에 절이고 있는 모습이 대문 틈사이로 보였다. 종구는 교회에 가려는가? 기름걸레로 자전거를 닦고 종구 아버지께서는 배추를 나르시려는지 지게를 지시고 밭으로 가셨다.

경수 아저씨네 집 앞에서는 지난밤에 둘째 아들이 실수로 이불에 오줌을 싼 것 같이 보였다. 다섯 살 난 둘째가 땅에 닿을 듯싶게 키를 머리에 둘러쓰고 이장댁 대문 앞에서 울먹이고 있어 어른들은 웃음을 참으며 바라보고 있었다.
이장댁 아주머니는 소금을 한 움큼 쥐고 나오셔 이제 이부자리에 오줌 싸지 말라고 하시며 몸에 뿌려주셨다.

우물가에는 겨울 김장을 하시는 듯 진수네 어머니가 품앗이로 일하러 오신 종금이 누나네 어머니와 함께 밤새 소금에 절여 놓았던 배추를 씻고 계셨다. 속이 노란 작은 속 이파리를 뚝 떼어 입에 넣고 깨물면서 배추를 씻고 물에 두 발이 젖은 진수는 두레박으로 열심히 물을 퍼 올리고 있었다.
그렇게 어렵고 힘들 때 서로 도와 더불어 살아가는 모습들이 퍽이나 보기에 좋았다.

옥순네 집에는 옥순이 어머니가 간밤에 소금에 절여 놓았던 배추를 통 안에서 꺼내시며 말씀하셨다.

“어여들 와. 그런디 상민 애미야, 절여 놓기 전에는 배추가 좀 많은 것 같더니 소금에 숨죽여 놓으니께 어쩌면 적을란가두 모르것다 해마다 김장을 허면서두 눈대중이 자꾸 흐려지는지 모르것네. 그건 그렇구 황세기 젓갈은 어제 온종일 달여서 짭짤허면서두 구수한 것이 잘된 거 같은디 고춧가루가 안 모질라야 헐 긴데 내가 쪼매 더 빻아올 걸 그랬나 봐.”

“넌 쓸디없이 다른디는 손이 크면서 이런디는 야박허드라. 좀 넉넉허게 빻아오질 않구, 뭐니 뭐니 혀두 없는 사람들 겨울 나는디는 김장거리보다 큰 양식은 없으닌께 일년에 한번씩 집집마다 큰일거리지 뭐. 막상 일헐때는 힘이 들더라두 그래두 해 놓구 나면 마음은 든든 허드라. 그리구 이따가 상민이한테 면소재지 엄씨네 푸줏간에서 돼지고기 좀 사오라구 혀서 즘슨때 뜨끈뜨근하게 비지찌개나 해 먹자.”

어머니께서 팔을 걷어 부치시고 소금에 절인 배추를 씻으시고 순덕이 어머니도 순덕이를 옥순이에게 맡겨놓고 일을 하셨다. 옥순이 어머니는 배춧속에 넣을 양념거리인 무를 채로 썰고 당근과 갓을 그리고 대파와 쪽파를 다듬으셨다.
그리고 옥순이는 방안에서 순덕이를 업고 마늘과 생강 껍질을 벗기려 끝이 잘 닳은 노란 밥숟갈로 생강 껍질을 긁고 있었다.

삼식이네 집 텃밭에서는 삼식이 아버지가 칼로 배추 밑동을 자르고 삼식이는 배추를 한 아름씩 끌어안아 집으로 옮기고 있었다.

진수와 나는 손끝이 조금 시려 왔지만 서로 얼굴을 쳐다보고 웃으며 두레박으로 물을 길어 양철통에 채웠다. 그렇게 몇 차례 물을 길어 나르고 나자 어머니가 돼지고기를 사오라고 하여 면소재지로 가려고 고샅길로 들어섰다.
둥구나무 앞으로 걸어가는데 병수네 아버지가 주막에 콧바람을 쐬러 가시나 자전거를 몰고 가시면서 나를 향해 말씀하셨다.

“상민아, 너 어디 갈려구 하냐? 혹시 면소재지라두 갈려거든 내 뒤에 올라타라 가는 김에 태워다 줄께.”

고맙다고 머릴 숙여 인사를 드리고 자전거 뒤에 올라타 면 소재지로 향했다. 얼마 후 지서 앞에서 내렸다. 그리고 엄씨네 푸줏간에서 돼지고기를 두 근 사 가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방죽가 언덕 위에서 동네 아이들이 모여 저마다 연자새(얼레)를 돌리면서 하늘 높이 연을 날리고 있었다. 수박연을 가지고 있는 민균이는 바람에 연이 움직이는 방향 따라 몸을 기울이며 연을 맵시 있게 띄우고 있어 무척이나 평온하게 보였다.
어린 아이들은 꼬리연의 연줄을 잘못 맞췄는지 연이 떠오르질 않고 땅 위에서 뱅글뱅글 돌기만 해 바라보기에 우습기만 했다.

소달구지 길을 빠른 걸음으로 걸어 마을에 닿았다. 내가 면소재지에 다녀오는 동안 어머니와 아주머니가 배추를 열심히 씻어 널따란 싸리채반 위에 쌓아 올려 배추에서 물이 빠져 흘러내리고 있었다.
마루 위에는 배춧속에 넣을 양념을 버무려 담아 놓은 커다란 옹기그릇이 보였다.

옥순이 어머니께서 돼지고기를 받아 부엌으로 들어가셨다. 어머니께서는 점심에 밥반찬으로 하시려는지 씻어놓은 배추를 뒤척여 속이 여리고 노란 속 이파리를 떼어내셨다.
그리고 빨간 고춧가루를 섞은 양념에 버무리고 계셔 나도 모르게 군침이 돌았다. 그때 어머니께서 노란 속 이파리 한 장에 양념을 듬뿍 넣고 돌돌 말아 내 입에 넣어 주셔 입안이 얼얼하게 정말 맛있게 먹었다.

온 식구들이 둥그런 밥상에 둘러 앉아 뜨거운 비지찌개와 벌겋게 버무려져 간이 잘 배인 겉절이를 반찬으로 모처럼만에 윤기 자르르 흐르는 쌀밥을 먹었다. 매운 고추 맛에 입안이 얼얼하고 배는 더부룩하게 불러 그 포만함이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을 것 같았다.

점심식사가 끝나자 옥순이 어머니가 귀한 손님이 오면 준다고 담그신 수정과를 떠 오셨다. 단물에 알맞게 불어난 곶감과 수정과 물로 입을 가시니 얼얼했던 입이 단맛에 누그러져 기분이 한결 좋아졌다.
한참을 쉬고 나서 마루에 걸쳐 놓았던 물지게를 지고 물을 길러 우물가로 향했다. 오후로 접어들자 배추 씻는 일이 멈춰지고 세 분이 머릴 맞대고 배춧속을 넣으시며 정담을 나누셨다.

담근 김장 김치를 산 밑 집으로 나르려면 힘센 사람의 손이 필요했다. 그래서 미리 부탁을 해 놓은 기성이 형네 집으로 가려는데 삼식이네 마당에 기성이 형 모습이 보였다.
기성이 형도 같이 나를 바라보며 김장이 거의 끝날 쯤에 옥순네 집으로 온다고 나에게 말을 했다.

오후 내내 한동안 열심히 배추를 버무리시던 세 분이 손이 잘 맞았는지 총각김치까지 먹음직스럽게 담아 생각보다 일찍 김장을 끝냈다. 집으로 가져갈 배추를 널찍한 옹기동이에 가득 담아 어머니와 아주머니께서 머리에 똬리를 얹어 이시고 옥순이네 집 사랍짝을 나섰다.

잠시 후 기성이 형이 지게를 지고 와 마루에 있는 김치를 지고 오기로 하여 먼저 앞을 서 언덕 너머 집으로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오신 어머니가 땅에 묻어 놓은 빈 독에 정성스레 한 포기씩 넣으시고 맨 위에 바가지에 있는 소금을 뿌려 김칫독 뚜껑을 덮으셨다.
그리고 어머니께서는 남아 있는 김치와 우선 먹을 막 버무린 김치를 가지러 동네로 다시 내려가셨다.

비늘구름 잔잔하게 깔려 있는 하늘 아래 저녁 해는 이미 서편 끝머리 하늘가에 와 닿고 있었다. 가뭇가뭇 가느스름하게 선을 이은 지평선에 끝 모르게 번져나는 노을빛이 소록소록 진한 그리움 한 자락을 남겼다.
그 그리움을 어둠살이 무심코 지워버려 마음 더욱 허전해지기 전에 한데 모아 기억 속에 깊숙이 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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