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경 읍내를 벗어나 나룻배로 금강을 건너면 세도면으로 이어지는 나루터가 나온다. 금강 둑 너머로 모래밭을 끼고 있는 세도 나루터가 멀찍하게 떨어져 있는 만큼이나 아스라이 바라보였다. 그 나루터는 나루터 인근 마을에 사는 사람들이 읍내로 볼 일을 보러 갈 때나 마을에 거주하는 학생들이 읍내 학교로 통학을 하는 곳이었다. 갯벌 모래밭엔 풍치림(風致林)으로 심어 놓은 미루나무가 빼곡하게 들어서 있어 바라보기에 좋은 풍광을 이루었다. 미루나무 우듬지 위에 떠 있는 옅은 구름사이로 얼굴을 내민 저녁 해가 지평선에 이내 닿을 것 같이 보였다. 종일토록 무르익은 햇살은 짙은 자홍색 여운(餘韻)을 나루터 주변에 보기 좋을 만큼 남겼다. 그렇게 노을은 각박(刻薄)한 인간사(人間事)를 다독이며 스스럼없이 선혈(鮮血)처럼 불그스레하게 물들고 있었다.
눈을 돌려 마을 쪽을 바라보았다. 매정스레 부는 바람이 그도 싫은지 입을 꾹 다문 마을 앞산이 눈앞에 듬직하게 다가섰다. 동지(冬至)를 며칠 앞두고 한차례 짓궂은 한파가 몰아치려는지 늦저녁 얼굴을 스치는 바람이 한결 싸늘키만 했다. 다시금 앞산을 더듬듯 훑어보니 덤불숲에 반쯤 가린 주인 잃은 무덤이 시름처럼 졸고 있어 마냥 적적하기만 했다. 문득 산중턱에 홀로 누워 계신 내 아버지 생각이 떠올랐다. 마음이 울먹여져 무거운 발길이 설움만큼이나 더디기만 했다. 그런 아린 마음을 헤아려 주는 듯이 개오동 나뭇가지에 앉아 있던 산새 한 마리가 석양빛을 듬뿍 받으며 그리 섧디섧게 우짖고 있었다.
동지(冬至)가 지난 뒤에 곧 바로 닥쳐올 성탄절이지만 마음은 그다지 즐겁지 못했다. 동화 속에 나오는 루돌프 사슴이 설원 속에 썰매를 끌고, 수염 기다랗게 하얀 산타 할아버지가 굴뚝을 타고 들어와, 잠자는 아이들 머리맡 목 긴 양말 속에 예쁜 선물을 놓고 간다는 말은, 귀동냥으로만 들어온 터라, 그저 스치는 정도의 이야기였다. 더욱이 열악한 환경의 탓으로 제대로 된 캐럴도 한번 제대로 들을 수 없었던 그런 시절이었다.
그나마 궁색하게라도 성탄절의 기분을 느낄 수 있는 것은 화산리 교회의 모습뿐이었다. 교회 지붕 위의 십자가에서 마당으로 형형색색의 만국기가 내려 걸렸다. 현관문 앞엔 빨간색 물감으로 ‘축성탄’ 이라고 쓰여 있는 두꺼운 종이가 검푸른 측백나무 이파리와 하얀 목화솜에 둘러싸여 있었다. 그리고 이른 새벽녘 성가대들이 십자가 모양으로 만들어 문창호지를 바른 등불을 받쳐 들고 마을마다 두루 돌며 찬송가를 불렀다. 그런 것들에서 크리스마스의 정취를 겨우 찾을 수밖에 없었다.
그때쯤이면 기다리던 겨울방학이 시작되었다. 그동안 제대로 하지 못하였던 연날리기와 팽이치기를 마음 놓고 할 수 있어 그도 좋았다. 그리고 꽁꽁 얼어붙은 샛강 빙판 위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달리는 썰매타기는 배고픔을 참고 넘길 수 있는 크나 큰 놀이거리였다. 또한 이슥한 밤에는 지붕 위애 사다리를 걸쳐 놓고 추녀 밑에 둥지를 튼 새집을 향해 ‘ㄱ’자 모양의 군용 플래시를 눈 시리게 비춰 둥지에서 참새를 꺼내 잡으며 느끼는 재미가 쏠쏠할 것만 같았다. 그리고 때때로 밤하늘에 불티가 폭죽처럼 번져 나가 곱게 수를 놓을 깡통 불놀이를 할 수 있어 마음속으로 은근히 기다려졌다. 허나 한편으로는 얼마 남지 않은 중학교 입학시험에 합격하는 일과 어느 정도의 좋은 성적을 낼 수 있을까 하는 강박감도 머릿속에 늘 떠나질 않았다.
동네 초가집에 등 시린 달빛이 짧은 처마 밑에 아슬아슬하게 등을 붙이고 방 문밖으로 새어 나오는 등잔불이 하나둘씩 아련하게 눈을 뜨기 시작했다. 마른 잎새가 땅바닥에 나뒹구는 사립짝을 지나 달빛 받아 흐릿하게 윤이 도는 쪽마루 앞에 닿았다. 순덕이 어머니께서 김장을 하고 남은 무 줄기와 배추 겉껍질로 시래기를 하시려나? 볏짚으로 잘 엮어 벽에 가지런히 매달아 놓으셨다. 맵시 있게 엮어 놓은 모습에서 깔끔한 그분의 성품이 배어났다.
어머니께서는 엊그제 순아네 소달구지로 읍네 젓갈 도매상에서 실어 온 드럼통 속에 가득 들어 있는 젓갈을 동네 분들에게 나눠 파시려고 옥순이네 집으로 가신 것 같았다. 순덕이는 아주머니가 한 손으로 몸을 붙들어 앉혀 아주 작은 입으로 하얀 된죽을 한입 한 입 귀엽게 받아먹고 있었다. 방안 윗목 고구마 자루 위에 하얀 종이가 동그랗게 둘둘 말려 유난스레 눈에 띄었다. 궁금한 마음에 얼른 펼쳐 보았다. 자유당 소속 지역구 국회의원이 검정색 양복에 누런색 금테 안경을 쓰고 떡 버텨 앉아 있는 상반신 모습이 그럴듯하게 인쇄되어 조금은 거만스럽게 보였다. 그리고 종이 한 장 안에 열두 달이 모두 표기된 달력이었다. 선거 때에 협조를 잘하는 군내 열성 당원들에게 해마다 연말에 찾아와 인사를 나누며 전해 준 것이었다. 어머니께서는 그 달력을 신주단지 모시듯 방벽에 밀가루 풀로 착 달라붙게 붙여 놓으셨다. 그리고 일 년 동안 중요한 일이 있으면 연필에 침을 발라 날짜 옆에 알 듯 모를 표시를 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곳에는 어머니 혼자만 알아볼 수 있게 숫자 위에 빨간색 연필로 덧칠을 하셨다. 그런 탓으로 일 년이 다 되어갈 무렵이면 달력은 손때와 더불어 온통 얼룩져 조금은 추하게 보였다.
작은 시골이지만 자유당 소속 국회의원이면 군내 제반사에 미치는 영향력이 절대적이어서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권력을 손에 쥔 듯했다. 어쩌다 중요한 지방 행사에 그분이 나타나기만 하면 행사장 밖까지 나와 마치 돌아가신 자기 조상님께 절을 올리듯 깍듯이 허리를 있는 대로 굽혔다. 동네에서 제일가는 부자인 종구 아버지도 그분들의 힘을 빌리려고 온갖 애를 썼다. 그 이유는 대전 형무소에 반공법 위반으로 장기(長期)형을 받고 수감되어 있는 자기 동생을 어떻게라도 구해 보려는 속심이었다. 그런 탓에 선거철만 되면 열일을 제쳐두고 두 팔 걷어붙이면서 좁은 동네를 돌며 나름대로 애를 써 보았지만, 죄명이 반공법 위반 사범(事犯)이라 어쩔 수 없다는 말을 들은 뒤로는 내심 서운하셨던지 그분들과의 관계가 점점 소홀해지는 것 같았다.
속된 말로 서슬이 퍼런 경찰서에 붙잡혀 가도 반공법이나 사람을 죽인 일을 제외한 일반 형사사건에서는 그분이 손만 써 주면 거의 다 해결이 되던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어수룩했던 시절이었다. 그 권력의 자리에 오르려 선거 때만 되면 사돈의 팔촌까지 있는 돈 없는 돈 모두 끌어 모아 유권자들의 환심을 사 표를 끌어 모으려 혈안이 되었다. 그런 탁한 분위기 속에 한동안 남정네들은 동네 사랑방에서 때 아닌 공짜 막걸리에 젖어 살았고, 여자 어른들에게는 검정 고무신과 국수뭉치가 공공연하게 나돌았다. 그러나 참으로 이상한 일이 있었다. 자다가도 술이라면 벌떡 일어난다는 동네 ‘신고산 타령님’인 병수 아버지만은 술을 그리 좋아하면서도 유난스레 그런 술자리에는 참석을 꺼려하셨다. 그런 병수 아버지가 선거철이 되면 때때로 동네 사람들과 둥구나무 밑 너럭바위에 앉아 이야기를 진지하게 하시며 시국에 관한 자기주장을 피력(披瀝)하시려는 듯 꽤나 목소리를 높이셨다.
그 당시 선거 풍토는 혼탁의 도를 넘어섰다. 어느 해인가 들녘 논배미에서 개구리가 밤늦도록 청승맞게 울어대던 날 밤에 어머니가 보자기에 고무신 몇 켤레와 국수뭉치를 들고 오셔 내가 어디서 난 것이냐고 물었다. 그러자 어머니께서 말씀을 하셨다.
‘어린 네가 알 일이 아니라고.’ 그러시면서 나중에 커서 어른이 되면 차차 알게 된다고 하시며 자못 궁금하게 애써 말끝을 흐리셨다.
그 고무신과 국수에 대한 출처와 얽혀진 사연들을 정확히 알게 된 것은 중학교 이학년이 되던 해 봄이었으니, 바로 ‘4.19 학생 의거’가 일어난 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