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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메로 가는 길 - 147 조회 : 1,547




산기슭으로 이어진 뒤뜰엔 검푸른 이끼가 가득 낀 돌들이 덥수룩하게 쌓여 엉성한 돌담을 이뤘다. 돌담 위로 담쟁이덩굴이 어지럽게 얽히고설켜 허물없는 오랜 벗처럼 서로 꼭 부둥켜안고 있었다.
담쟁이는 봄부터 여름까지 끈적끈적한 새하얀 진이 다 빠지도록 곱다랗게 키운 잎새들을 추위 속에 모두 떠나보냈다. 그리고 이별의 아쉬움에 눈물조차 메마른 푸석한 모습으로 찬 겨울을 애틋하게 버텨내려 했다.
이제 머지않아 윤회(輪廻) 속에 다시금 봄이 오면 연초록 여린 움 틔울 그들만의 밀어(密語)를 도란도란 속삭이고 있는 듯했다. 그런 속내를 아는 듯 기지개를 켜 몸 추스르던 아침 햇살도 한 줌 온기를 보태 주려는 듯 상생(相生)의 애잔함이 아리도록 묻어났다.

검은 연기로 잔뜩 그을린 추녀 밑 볏짚 둥우리에서 해묵은 누런 암탉이 ‘꼬꼬댁 꼭꼭. 꼬꼬댁 꼭꼭’ 소릴 내어 한참을 자발스럽게 울어댔다. 호기심에 얼른 둥우리 속을 들여다보았다.
따스한 온기 채 가시지 않은 뽀얀 달걀이 둥우리 안에 다소곳하게 놓여 있었다. 둥지에서 달걀을 꺼내 손 안에 드니 채 가시지 않은 온기가 손에 와 닿았다. 알이 서로 부딪쳐 깨어지지 않게 하려고 쌀을 가득 담아 놓으신 함지박 속에 조심스레 가져다 놓았다.
아침부터 아주머니는 무말랭이를 하시려는지 세월만큼 닳아 질이 잘난 도마 위에 무를 올려놓고 '딱딱' 소릴 내어 잘게 써셨다. 봉창 앞에 놓인 대소쿠리 안에는 일 년 중에 밤이 가장 길다고 하는 동짓날이라 팥죽을 쑤려고 내놓은 빨간 팥알들이 퍽 윤기 있게 보였다.
방바닥에 누워 있는 순덕이가 배가 부른지 오목한 입에 고무젖꼭지를 암팡지게 물고 기어갈 듯 말 듯 한 몸짓을 하고 있었다. 까만 두 눈을 깜빡이며 천진스럽게 놀고 있는 얼굴이 말그레하게 보였다.

겨울 하늘은 시린 만큼 드높아 공허하기만 했다. 소달구지 길에는 기현이와 기현이 할아버지가 함께 걸어가고 있었다. 점차 날이 추워지자 어린 손자에게 두툼한 겨울옷이라도 하나 사주려 읍내로 가시려는 것처럼 보였다. 기현이 손을 꼭 붙드시고 방죽가 밭둑길을 걸어가시는 기현이 할아버지의 새하얀 두루마기 자락이 싸한 들녘 바람에 나붓거렸다.

마을길로 접어들었다. 첫머리 우현이네 집에서는 메주를 쑤려는지 콩 삶는 냄새가 담장 너머로 달달하게 풍겨났다. 구수한 콩 냄새를 맡은 젖을 떼지도 않은 강아지들이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아장걸음으로 부엌문 앞으로 모여들었다.
우현이가 삶은 뜨거운 콩 한 주먹을 부엌에서 몰래 들고 나오다 아주머니에게 들켜 부지깽이를 들고 뛰어나오시며 냅다 소릴 지르셨다. 절구통에 절구질을 하시던 우현이 아버지는 ‘허’ 하고 웃고만 계셨다. 우현이가 손이 뜨거워 어쩔 줄 몰라 불에 굽는 오징어 발가락처럼 몸을 비비 틀며 대문 밖으로 도망치는 모습이 어찌나 우스웠는지 몰랐다.

김장이 조금 늦었는지 길모퉁이 상수네 집에선 식구들이 마당에 모여 앉아 찬물에 배추를 씻고 있어 무척이나 추워 보였다. 그리고 날이 동짓날인지라 집집마다 팥죽을 쑤려는지 팥 삶는 냄새가 좁다란 고샅길로 잔잔하게 퍼졌다.

골목길 한가운데 종구네 집에서는 성탄절이 눈앞에 다가오자 성탄극 연습을 하려고 바삐 서둘러 갔는지 종구와 자전거가 보이질 않았다. 외양간에선 누런 암소가 입을 좌우로 쉴 새 없이 움직여 흔들리는 워낭소리만 잔잔하게 들려왔다. 정희누나가 서둘러 팥죽을 쑤려는지 햇볕이 잘 드는 마루에 앉아 삶은 팥을 채 속에 넣어 으깨고 있었다.

날이 싸늘한 탓인지 동네 고샅길은 물론 우물가에도 물을 깃는 한두 사람을 제외하고는 오가는 모습이 뵈질 않아 골목길이 썰렁하게 보였다.

그리 높지 않은 흙담 너머로 종기형네 집이 빤히 바라보였다. 칠순잔치를 앞두신 할머니가 꽤나 오랫동안 한약을 달여 드셨는데도 아직껏 별다른 차도가 없으신 듯했다. 담 너머로 어릴 적부터 그리 지긋하게 맡아 온 한약 달이는 냄새가 짜증스러울 정도로 퍼져 나왔다.

삼식이네 사랑방에서는 동네 어른들이 술내기 화투놀이 ‘육백’을 치시느라 방바닥이 뜨겁게 군불을 지피는지 야틈한 굴뚝에서 연기가 모락모락 퍼져 나왔다. 그와 더불어 방문 밖으로 흘러나오는 털털한 웃음소리가 우물가까지 들렸다.

그맘때쯤이면 늘 영택이네 집 축음기에서는 고샅길 가득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늦은 밤 서울역을 출발한 열차가 대전역에 도착하여 잠시 숨을 돌리고 다시 대전역에서 온 주위가 깊은 잠에 빠져드는 0시 50분에 출발을 했다.
호남선 철길을 따라 목포로 가는 비둘기호 완행열차의 애환을 담은 ‘대전발 0시 50분’의 노랫소리가 여가수의 애잔한 목소리에 담아 구슬피 울려 퍼졌다.

다음 달 초에 혼사 날짜를 잡았다는 종금이 누나의 혼사를 준비하느라 바쁘신지 종금이 누나 어머니께서 동네 어디론가 부지런히 잰걸음을 하셨다.

녹 슬은 양철 대문짝에 매달린 소방울이 바람에 흔들려 가느스름한 소리가 들릴 듯 말 듯 한 옥순네 집안으로 들어섰다. 발자국 소리에 안방 작은 창문에 붙여놓은 조각유리로 내 모습이 보였는지 문고리에 기다랗게 끈이 달린 안방 문을 열고 옥순이가 밖으로 나오며 말을 했다.

“엄니, 상민이 왔네. 우물가에 물 길러 왔는가벼. 상민아 추운디 밖에 서 있지 말구 빨랑 들어와. 니네 엄니두 여기 계시닌게.”

옥순이가 춥다고 얼른 방 안으로 들어오라고 재촉하여 안으로 들어서니 열린 방문 틈으로 팥 삶는 냄새가 풍겨 나왔다. 어머니는 몸뻬바지 앞자락에 동그란 털실몽당이를 놓고 뜨개질을 하고 계셨다.
옥순이 어머니는 어머니에게 뜨개질을 배우시는지 몇 가닥 코가 꿰어진 대바늘을 들고 느린 동작으로 뜨개질을 하고 있었다. 아직은 뜨개질 솜씨가 서투신 듯했다. 더듬더듬 뜨개질을 하시며 팥죽에 넣으려는 찹쌀 새알심을 동그랗게 손바닥으로 비비고 있는 옥순이를 바라보고 계셨다.

뜨개질을 하시던 옥순이 어머니가 자리에서 일어나서 뒷문을 여시고 뒷마루에서 잘 말려 하얀 분가루가 난 곶감을 몇 개 가져다주시면서 말씀하셨다.

“기나저나. 날은 자꾸만 추워지는디. 산모퉁이까지 물 지러 나를라면 보통 고생이 아닐 건디, 어쩐다냐? 상민이 니가 헐 일이 아니다. 여름에는 날이 따셔 별일 없다구 허드라두. 에휴. 어린 게 고생이지. 뭐.”

이야기를 듣고 계시며 뜨개질을 하시던 어머니가 옥순이 어머니의 말끝에 말을 이으셨다.

“고생은, 뭐. 그 정도두 안허구 밥먹구 살라구 허는 감? 어쩔 것이여, 지 놈두 부모 잘못 만나 고생허는 건디. 다 지 팔자지, 누굴 탓할 것이여. 그건 그렇구 너는 나한티두 안 주는 곶감을 뭔 일루다가 다 내오구 그러냐? 너 혹시, 우리 상민이란 놈 사위 삼을라구 그러냐?”

말씀을 마치신 어머니가 크게 웃으시자 곁에 앉아 계시던 옥순이 어머니도 함께 웃으셨다. 그 말이 부끄러워 갑자기 얼굴이 달아오르는데 옥순이는 자기 어머니에게 ‘몰라’ 하면서 소리를 버럭 지르고 도망치듯 윗방으로 숨듯이 들어갔다.

어머니는 그런 내 모습이 안쓰럽기는 하면서도 강하게 키우시려는지 겉으로는 일부러 냉정하게 대하는 것처럼 보였다. 옥순이가 불그레한 얼굴로 화를 내며 윗방으로 가자 조금 미안하셨는지 어머니께서 말씀을 하셨다.

“옥순아, 어여 건너 오너라. 아줌니가 그냥 웃을려구 헌 말이닌게 화 풀구 얼른 건너와. 새알심 만들던 거 끝내야 아줌니두 한 그릇 얻어먹구 가지.”

계속 웃으시던 옥순이 어머니가 아랫방 쪽을 바라보시며 말씀하셨다.

“아, 냅싸 둬. 가시내가 꼴에 소갈머리 허구는. 기냥 웃자구 헌 말 가지구 뭘 그러냐? 가만히 보면 저런 것들이 시집은 먼저 갈라구 머릴 디밀고 먼저 날뛰드라구.”

옥순이 어머니와 어머니가 다시 깔깔대며 웃으셨고, 그제서야 윗방에 있던 옥순이가 툭 쏘아 붙이듯이 말을 했다.

“누가 시집 같은 거 간다구나 했는감? 낸중에 보면 알꺼지만 나는 죽어두 시집 같은 거 안 갈꺼닌게, 그런 걱정이랑 아예 붙들어 매두라구.”

화가 덜 풀린 듯 못 이기는 척 머뭇대며 안방으로 들어와 새알심을 만들며 그래도 조금은 부끄러운지 나를 슬쩍 쳐다보고 있었다. 서로 눈이 마주쳐 그냥 웃고 말았더니 옥순이도 입에 손을 대고 웃음을 억지로 참는 듯했다.
그렇게 화기애애하게 두 분이 뜨개질을 하시는데 옥순이 어머니께서 이마에 흘러내린 앞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시며 말씀하셨다.

“야, 상민 에미야. 시집 얘기 나오닌 게 퍼뜩 생각이 났는디 이번에 말여. 종금이 치우는디 읍내 산다는 새신랑 집이 꽤나 먹구 살 만헌가? 하나 밖에 없는 외동딸 기 안 죽일라구 헐 건 다해서 보낼라구 허닌게 돈이 좀 많이 들어가서 종구네 애비헌티 논문서라두 잡히구 장리로 돈을 얻어다 쓸라는 모양이던디, 남에 돈이 우선 쓰기는 좋지만 그 돈 갚을려면 입에서 쓴내가 날껀디 으짤란가 모르긋다. 참 그 집두 아들이라구 겨우 하나 있는게 군대두 안 가구 피해 댕기며 사니 넘 일이지만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구먼.”

말을 마치신 옥순이 어머니께서 어머니를 바라보시자, 말을 듣고 계시던 어머니가 말을 이으셨다.

“에이구. 씻구 벗구 하나 밖에 없는 딸이닌게 그런다구는 허지만 넘에 돈 잘 알구 써야지. 우선 먹기는 곶감이 달다구 덜컹 갔다 쓸 건 아니더라구 글구. 난 그집 돈이라면 시방두 등골이 오싹허게 넌더리 나닌게.”

지난날 종구네한테 빚을 내어 당했던 그 험난했던 일들이 다시금 떠오르시는 듯 깊은 한숨을 크게 내쉬어 그 모든 일들을 애써 지우려 하시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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