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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메로 가는 길 - 148 조회 : 1,444




잿빛 하늘에 무표정하게 머물고 있는 하얀 구름 한 점이 마치 커다란 붓으로 한 가닥 획을 그어놓은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하늘 맞닿은 들녘 끝자락에 가물가물하게 보이는 지평선은 의미 모를 그리움만 켜켜이 남긴 채 언제나 그 자리에 말없이 머물고 있었다.
그런 모습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마음이 더욱 고적하기만 했다. 그러나 그런 감정에 몰입되는 것도 한순간일 뿐이었다. 딱정벌레처럼 납작 엎드린 단아(端雅)한 작은 시골 역사가 그다지 멀지 않게 바라보였다.
그 작은 간이역을 버리듯이 세차게 밀쳐 떠나는 기차의 소음이 꽤나 요란스레 들려와 그런 감성을 여지없이 깨트려 놓고 말았다.

잔뜩 움츠러드는 몸을 풀어 주려나 오후 햇살이 초가지붕마다 다소곳하게 내리쬐었다. 따스한 햇살이 토담 위에 알맞을 만큼 머물자 양지바른 고샅길 담벼락 앞에 코흘리개 동네 아이들이 약속이나 한 듯 서서히 모여들었다.
밤사이 다복다복 모아 두었던 꼬맹이들만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나누는가? 아침나절 그리도 조용키만 하던 고샅길에 아이들의 재잘대는 소리가 또랑또랑하게 들려왔다.

뽕나무 울타리 너머로 바라보이는 영호네 집 마당에선 아이들 두서너 명이 모여 재기차기를 하고 있었다. ‘상평통보(常平通寶)’라고 문양이 새겨진 녹이 슨 오래된 옛날 엽전에 고서(古書)의 한지를 돌돌 말아 엽전의 한가운데 네모난 구멍에 끼워 종이의 결을 따라 쭉쭉 찢어 여러 갈래로 늘여 만든 제기를 발로 차면서 숫자를 세며 놀고 있었다.

양지바른 산 밑 동네 화산리에 다복다복 머릴 숙인 초가지붕 사이로 바라보이는 교회 십자가도 늘 보아 왔던 터인지 그리 성스럽게 보이질 않았다. 크리스마스의 느낌이 마음에 팍 와 닿지는 않았지만 ‘뗑그렁뗑그렁’ 울려 퍼지는 교회의 종소리가 산골짜기에 부딪쳐 이내 되돌아오는 잔잔한 여음이 귓속 깊이 포근하게 와 닿았다.

가을 가뭄으로 저수량이 적어 냇가의 물이 부쩍 줄어들었다. 경수 아저씨와 기성이 형이 냇둑 위에 모닥불을 피워 몸을 녹이면서 농한기(農閑期)에 소일거리로 냇가에 보막이를 하여 물고기를 잡고 있어 냇둑 가까이 다가서 바라보았다.
양철통 속에 갓 잡은 어른 손바닥만 한 붕어가 알이 실하게 들어찬 불룩한 배를 내밀고 숨이 가뿐지 아가미를 벌떡거렸다. 그리고 거무스레한 등껍질에 집게 발가락을 들어 허연 거품을 내고 있는 참게와 가늘게 하얀 긴 수염에 깨알 같은 작은 눈을 뜨고 미끈둥한 몸을 좌우로 마구 흔드는 메기 두 마리가 보였다.

바람 따라 물결이 잔잔하게 일렁이는 방죽가엔 몸을 잔뜩 웅크린 오리 떼가 다스하게 비추는 오후 햇살에 나른한 듯 눈들을 지그시 감아 한가롭게 졸고 있는 것 같았다.

탱자나무 울타리가 둘러 처진 그 방죽가 외딴집엔 한국전쟁 때 반공포로로 북송을 거부하고 남쪽으로 전향을 하신 흥남이 아저씨가 살고 있었다. 바라볼수록 정감이 묻어나는 아담한 초옥의 마루 흙벽엔 내년 봄에 심을 씨로 남긴 잘 마른 누런 옥수수가 넉넉하게 매달려 있었다.
바로 엊그제 저녁 해질 무렵이었다. 늘 홀로 외롭게 사시던 아저씨네 집에 낯선 아주머니가 달랑 옷 보퉁이 하나를 머리에 이고 들어섰다. 아마도 흥남이 아저씨와 새살림을 차리시려는 것 같았다. 아주머니께서 팥죽을 쑤시려는지 부엌을 들락날락하시고 방안에서는 아저씨의 헛기침 소리가 울타리 밖으로 들려왔다.

냉기 서린 산바람 머릴 들어 혼자서 길손을 맞이하는 언덕마루에 오르려니 물지게 고리를 붙든 두 손이 참기 힘들 정도로 아리도록 시렸다.

사립짝 안으로 들어서니 아주머니가 부엌에서 팥을 삶고 계신지 지붕 위로 검은 연기 모락모락 올라 바람에 실실이 흩어지고 있었다.
추위에 곱은 손을 번갈라 호호 불며 집안으로 들어서 부엌 물두멍에 물을 부었다. 그리고 얼른 방안으로 들어가 방벽에 걸려 있는 방패연과 연자새(얼레)를 들고 언덕 위에 올랐다.
바람 따라 몸짓하는 방패연에 가슴 속에 늘 담아 놓았던 작은 바램들을 어디론가 활짝 펼쳐 보고 싶은 마음에 연자새에 두툼하게 감겨 있는 연실을 풀었다. 바람이 센지 연자새가 ‘삐걱삐걱’ 소리를 내며 줄이 풀리는 속도가 너무 빨라 다루기 힘들었다.
생각 끝에 연자새의 머리가 위쪽으로 가게 비스듬히 세우자 연실이 아주 수월하게 풀려 나갔다. 방죽가를 지나 동구 밖 나무다리 위까지 하늘 높이 연을 띄워 놓았다.
높다랗게 떠 있는 연을 바라보니 폐 속 깊이 파고드는 찬 공기와 더불어 정신이 맑아지고 잔뜩 움츠렸던 가슴이 확 트이는 것만 같았다.

빈 들녘에 이삭을 줍듯 해는 읍내 쪽으로 느릿느릿 황소걸음 하고 저 멀리 바라보이는 강경 읍내에 붉은색 벽돌로 지어 놓은 건물들이 고풍스럽게 보였다.

이제 국민학교를 졸업하게 되면 어린 나이 탓으로 깊은 의미를 다는 알 수 없었지만 어머니가 늘 입버릇처럼 말씀하시는 더 나은 삶을 위하여 내 사는 이곳보다 넓은 읍내의 생소한 삶의 굴레 속으로 들어가야만 할 것 같았다.
그리고 좀 더 세월이 흐른 먼 훗날엔 더 넓은 이 세상 그 어딘가로 삶의 구심점(求心點)에 가까이 근접하기 위해 꼭 가야할 것만 같은 생각이 어린 뇌리 속에 어렴풋이 떠올랐다.

벼랑바위 앞에는 아침나절 읍내로 갈 때처럼 기현이가 할아버지의 손을 잡고 새 옷을 입어 신이 났는지 길 위를 팔짝팔짝 뛰면서 언덕배기 앞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종구는 이틀 앞으로 다가온 성탄절 연극 연습에 치중하느라 귀가가 늦는지 큰길가에 모습이 보이질 않았다.

하늘 높이 떠 있는 연이 보기에 좋았던지 기현이가 바로 집으로 들어가지 않고 언덕배기 위로 올라왔다. 읍내 장터에서 사 입은 듯한 빨간색 솜옷이 따스하고 곱살하여 보였다.
그리고 모처럼 읍내 나들이에 짜장면을 먹었는지 입 가장자리에 검게 묻어난 자욱이 눈에 띄었다. 기현이의 그런 모습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언젠가 읍내에서 어머니가 사 주신 짜장면을 정신없이 먹었던 기억이 떠올라 빙그레 웃었다.

연날리기를 끝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것은 저녁 해가 불그레하게 몸을 부풀려 금강 둑 위에 장엄한 자태로 오르려 할 때였다. 그리고 어머니가 옥순이네 집에서 뜨개질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신 것은 그 후 약 한 식경이 지난 후였다.
불그스름한 노을빛 속에 해가 기울락 말락 하자 온종일 마당가에 놀던 닭들이 둥우리에 오르려는지 한데 모여 ‘꼭꼭꼭꼭’ 소릴 내고 스멀대는 어둠살에 주위가 어둑어둑해졌다.

찹쌀이 귀해 비록 새알심을 넣지 못한 팥죽이지만 그래도 식구들이 머릴 한데 모아 숟가락을 들 수 있는 뿌듯함에 풍족한 겨울밤을 느낄 수 있었다. 다정스레 저녁식사를 하고 있는데 낯선 사람을 보았는지 검둥이가 요란스레 짖어 방문을 열고 문밖을 바라보았다.

낮은 싸리 울타리 너머로 어두워 얼굴을 알아볼 수는 없지만 키가 좀 커 보이는 남자 한 분이 집안을 훑어보고 있었다. 내 뒤를 따라 나오신 어머니께서 궁금하신 듯 말씀을 하셨다.

“누구세유?”

울타리 밖에 서 있던 남자가 주위를 경계하는 것처럼 자꾸만 두리번거리더니 조심스레 사립짝 안으로 얼른 들어서며 낮은 소리로 말을 했다.

“아줌니 저에유. 끝머리 집 사는 종열이에유.”

나도 갑작스레 나타난 종열이 형이 놀랍기도 했지만 나보다 어머니가 더 놀래신 듯했다.

“아니, 이게 누구랴 종금이 오라비 종열이 아닌감. 그새 어디 가서 있느라구 그렇게 깜깜 무소식이었데 참 추운디 요기서 말헐 거시 아니라 어여. 방안으로 들어가자구 들어가서 찬찬히 얘기를 허자구.”

어머니께서 서두시는 듯 앞을 서 방문을 여셨다. 그러자 밖으로부터 불어오는 바람에 등잔불의 불꽃이 꺼질 듯이 까막거렸다. 그렇게 반가우신지 어머니는 밥을 먹다 만 밥상을 윗목으로 밀쳐놓으셨다. 그리고 방안으로 들어 선 종열이 형이 자리에 앉기 무섭게 말을 재촉하셨다.

“그래, 그동안 어디가 있었는감? 집 나가서 타관 객지 생활하는 것이 어디 그리 쉬운 일인감 에이구 엄니는 엄니대루 을매나 걱정을 했는지나 알어? 늘 입에다 한숨 달구서 살았는디참 기나저나 밥 안 먹었지? 순덕이 에미야. 팥죽이라두 한 그릇 데워서 차려 와라 어쩌것냐? 우선간에 그거라두 먹어야지 몸이 좀 녹을 건디 그리구 우리 집으로 온 거 보닌게 필시 동네 사람들 눈을 피할라구 그런 모양인디 엄니한티는 내가 가든지 아님 우리 상민이를 슬쩍 보내서 만나게 해 줄틴께 그리 알구 맘 놓구 밥부터 천천히 먹구 기다려 봐.”

어머니께서 불빛이 흐릿한 등잔불 밑에 우두커니 앉아서 이야기를 듣고 있는 나를 바라보시며 말씀을 하셨다.

“어쩔래? 니가 담박질혀서 싸게 댕겨 올래 아니면 내가 갔다 올까?”
“아녀 엄니 내가 그냥 싸게 댕겨올틴께 그리 알어.”

동네 끄트머리쯤에 있는 종열이 형님네 집에 가려고 사립문을 나섰다. 텃밭 감나무 가지엔 일그러진 조각달이 창백한 얼굴로 처연하게 걸쳐 있었다. 조각달을 바라보며 바람 찬 사립짝을 조급하게 나서려니 검둥이가 꼬리를 흔들며 앞을 서 함께 뛰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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