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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메로 가는 길 - 14 조회 : 2,115




그리 억울하게 떠나야만 했고 어처구니 없이 보낼 수 밖에 없었던 내 아버지의 죽음이었다.
꿈에서도 단 한 차례 생각조차 해 본 적이 없는 일을 두 눈 똑바로 뜨고 당했기 때문에 그 충격이 더욱 컸었다.
더불어 그리 억울하게 떠나보내야만 했던 내 아버지에 대한 눈물겹도록 애절한 그리움은 세상 그 무엇에 견줄 수 없었다.

내 어머니께서는 돈득한 사랑을 타의적인 강압에 의해 잃어버린 비통함에서 오는 좌절감이 실로 컸을 것이다.
그토록 처절한 아픔에 밤을 함께 지새웠어도 어머니의 처절한 심경을 다는 헤아릴 수 없었다.

어머니께서 이따금씩 등메산을 바라보실 때 마다 못내 아쉬움을 감추지 못하시는 것 같이 보였다.
그런 가슴 아픈 이유가 또 하나 더 있다는 것을 나 자신도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일부러 발걸음을 늦추셨구나 하는 추측을 어렵지않게 할 수 있었다.

그 이유는 나보다 세 살 위였고 세상에 단 하나 뿐이였던 누이의 애석한 죽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제강점기 때였던 1946년 6월 온 대지가 태양의 열기로 서서히 달아올라 더위가 시작 될 무렵인 초여름이었다.
전국적으로 걷잡을 수 없이 번져나 대략 11,000 여 명에 달하는 수 많은 인명을 앗아가고만 콜레라(호열자)가 발생 하였다.

전국에 모든 학교에는 휴교령이 내려졌고 예방주사를 맞은 증명서가 없으면 타지로 일체 출입을 못하게 통제를 하였다.
그리고 콜레라가 발생한 마을은 아예 출입을 통제 시켜 외부와 철저하게 차단을 시켰다.

그런데 불행을 비켜서지 못한 내 누이가 그 전염병에 걸려 근 보름 동안을 사경을 헤메였다.
심한 고통에 몸부림을 치다 끝내는 하늘에 부름을 받고 말았다.
철딱서니 없게 마냥 재롱을 부리며 자라나야할 어린 나이에 애석하게 숨을 거두고만 것이었다.

그때 나는 갓 돌을 넘기지도 못한 나이었다.
그저 틈만나면 어머니의 젖꼭지를 입안에 악착같이 몰아 넣고 암팡지게 빨기만 하였다.
그런 탓에 누나의 얼굴은 물론이려니와 그 어떤 작은 기억 하나조차도 있을리가 만무했다.

내 누이는 어머니의 가슴 속에 커다란 아픔에 멍에를 남겨주고 먼저 세상을 떠나 등메산 산자락 어느 곳에 묻혔다.
그로 인하여 내 어머니의 비통함은 그 무엇에 견줄 수 없을 정도였다.
그렇게 지울 수 없는 커다란 상처를 가슴 속 깊이 남겼었는데 내 아버지에 대한 상처까지 겹치고 말았다.
그러니 내 어머니께서 받으신 마음에 고통을 어찌 어떻게 말로써 표현할 길이 전혀 없었다.

잠시 동안 내 어머니께서 발길을 멈추시고 앞산을 더듬어 바라보시며 이내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발길을 돌리신 곳은 도라지 밭 앞이었다.
여늬 밭들에 비교하여 그다지 크지도 않고 비옥하지도 못해 척박한 땅을 화전으로 개간한 밭이었다.
그 땅을 지난 세월이 흐르는 동안 어머니께서 피와 땀으로 일궈 놓으신 금쪽 같은 삶의 터였다.

그 다랭이 밭은 원래 외조부께서 아주 오래 전에 개간을 하셨다.
그런데 외조부님깨서 노쇠하신 몸에 여러 해를 두고 병고에 시달리시다 병세가 더욱 악화되셨다.
그러자 외삼촌과 어머니에게 재산을 분배해 주셨다.
그 때 외삼촌에게 앞 들녘 논배미와 함께 물려주신 우리 집안에 하나 뿐인 유일한 밭자락이었다.

그후 외삼촌께서 분가를 하시여 처가이자 외숙모님의 고향인 전라북도 운주 싸리재골로 이사를 하셨다.
원래는 고향을 떠나면서 그 밭자락도 남에게 팔려고 내놓았었다.
그러나 밭자락이 화전을 일구워 놓은 자리인지라 토질이 그다지 기름지지도 못했다.
그리고 마을로부터 조금 멀리 떨어져 있는 왕소나무 밑 으슥한 상여집 옆에 있어 누가 선뜻 나서질 않았다.
그래서 남겨 놓고 가신 밭을 어머니께서 대신 일궈 놓으셨다.

하루의 해는 오후 한나절을 벗어나 이른 저녁 무렵을 향하고 있어 구릿빛으로 농 익어 있었다.

등메산 산기슭에 바짝 달라붙어 있는 다랭이 밭에는 보랏빛 도라지가 그리 많이 피었다.
그도 모자란 듯 하얀 꽃들까지 꽃망울을 터트려 밭 전체에 꽉 들어차 실로 장관을 이루었다.

그 다랭이 밭에 도라지를 심게된 동기는 외조부께서 기관지가 아주 약하셔 해소병으로 오랜 세월을 고생하셨다. 그런데 어머니께서 도라지가 기관지 치료에 좋다는 말을 어디서 들으셨다.
그래서 외조부께 약을 해드릴려는 심사에서 심기 시작하셨다.

그런데 처음 몇 해에는 경작을 해 본 경험이 없어 숱한 시행착오를 일으키셨다.
그나마 다행히 씨앗의 발아가 잘 되어 그리 애지중지해서 이삼 년을 잘키우셨다.
그런데 제법 뿌리가 실팍하게 들만 하면 뿌리가 썩어문들어지는 괴사병이 생겼다.
그런 탓으로 도라지 농사를 두 해에 걸쳐 거듭 실패 하셨다.

그러자 외조부님은 물론 아버지까지도 차라리 밭떼기를 그냥 놀리더라도 도라지 농사를 포기하라고 극구 말리기 시작했다.
그와 더불어 마을 사람들도 다른 작물을 재배해 보라고 애써 말렸는데도 어머니께서 의지를 굳히지 않으시자 마을 사람들이 뒷전에서는 슬슬 비웃기 시작했었다.

밭에 나는 잡초만 잘 제거해 주면 비교적 다른 작물들에 비해 힘이 덜 들고 병충해를 그다지 타지 않아 경작이 수월하리라는 생각을 안이하게 하셨던 탓인 것 같았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이 있다.
그리 실패를 거듭하시는 동안에 도라지 농사에 대한 비법을 터득 하쎴는지 아니면 외조부에 대한 어머니의 효심에 하늘이 감동 하였는지 잘은 모를 일이었다.
아무튼 그 후 부터는 해마다 도라지를 풍성하게 수확하셨다.

그에 용기를 얻으셔 경작을 조금씩 늘리다 보니 오백여평의 밭 전체에 도라지를 심으셨다.
그러다 보니 입소문이 번져 읍내 한약방에 까지 도라지의 질이 좋다고 소문이 나서 구입을 원하였다.
어머니께서는 비가 온 다음날에는 마을 사람들을 놉으로 얻어 밭에 풀을 뽑아주시며 열심히 가꾸시었다.

제일 좋은 것으로 골라 외조부님 약재로 쓰시고 다수의 양질은 읍내 한약방에 판매를 하시였다.
그리고 남은 량은 하루의 격차를 두고 어김없이 오일마다 열리는 두 읍내 장에 내다 팔으셔 가계에 여법 보탬이 되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물론 면소재지와 다른 부락에 사는 사람들도 우리집을 일컬어 도라지밭 집이라고 불렀다.

그 도라지 밭 가장자리 야트막한 둔덕에는 숱한 해를 넘긴 커다란 미루나무 한 그루가 우뚝 서 있었다.
해마다 이른 봄이되면 까치가 어김없이 제 집처럼 찾아들어 둥지를 틀었다.
어쩌다 선들바람이 불어와 둥지를 가볍게 흔들면 깜짝 놀란 아기 새들이 어미를 찾느라 애처로이 울어대었다. 그럴쯤이면 앞 들녘 논배미에서 뜸부기도 함께 울어 주어 짙어가는 녹음이 절정을 이루니 마치 여름을 예찬하는 듯 하였다.

어머니께서 밭에 풀을 뽑으시다 더위에 지치시면 나무 그늘 밑에 앉으셔 땀을 훔치셨다.
그리고 나와 함께 마을 앞을 오르고 내리는 기관차의 역동적인 모습을 바라보셨다.
우렁차게 울러주는 기적소리를 들으시며 잠시 동안이라도 피로를 푸셨다.
때론 눈 시리도록 파란 하늘과 그 하늘 아래 떠도는 구름들을 바라보며 우리 집 식구들의 건강과 행복도 빌었었다.

그리고 어떤 날에는 이따금씩 어린 내가 알아드을락 말락하게 혼자만의 소리도 내셨다.
농삿일을 내 팽겨치시고 밖으로만 유유자적하게 나도시는 아버지을 향해 가벼운 원망을 하셨다.
그럴라치면 너무 많이 들어서 대충은 그 뜻을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괜시리 어머니에게 한 번이라도 더 말붙힘을 하고 싶어 늘상 툭명스럽게 말을 하였다.

" 엄니 시방 누구들으라구 허는 말이여 유, 내가 귓구멍이 멀은건지 우째 통 못알아 먹긋네 유, 그러닌게 말을 헐려거든 크게 말을 혀 보셔 유, 듣는 사람 답답허게 허들 말구 유."

그렇게 쏘아부치듯이 말을 하면 어머니께서는 가볍게 눈쌀을 찌프리시면서 말씀을 하셨다.

" 야가 왜 이리 사증읍시 다구치구 난리라냐, 않그려두 허구 헌날 혼자서 돼져라 이 짓거리 허는 긋두 넌덜증 나서 시방 내 맴이 맴이 아닌디 뭣 땀시 너 까장 그러냐 말이여.참 느그 애비사 천하 태평이지 즈그 여편내 이 뙤약볕에 숨 할딱 거리면서 진땀 빼는지나 알랑가 모르긋다, 에이구.더 이상 말해봤짜 뭐허긋냐, 그러닌께 니눔이라두 내 속 태우지 말라구 아라써."

그러면 언제나 나는 디들방아 처럼 대답이 한결 같이 짧고 간단해 조금은 쌀쌀맞게 들으셨을 것 같았다.

" 예 그럴께유"

그 당시 마을 어른들께서 하시던 말씀 중에 이런 말이 있었다.

" 아들 딸 자식 놈덜 혓바닥 빠지게 키우 놓아 제가끔 짝을 찾아 여의느라고 있는것 없는 것 다 끌어 모아 잔치를 치루고 나면 집안 기둥 뿌리 하나가 소리 없이 빠지고, 병드신 노부모님 삼년 병 수발 하다보면 안방 아랫목 구들장이 모두 주저 앉는다" 는 말이었다.

막상 농사라고 해봐야 앞 들녘에 논 서마지기에서 네 식구 끼니를 이를 양식을 겨우 구할 수는 있었다. 그러나 날로 불어 나는 외조부의 병환으로 강경 읍내 한약방에 갚아야 할 외상값이 만만치 않았다,

그런데 그 외상 값 문제가 더욱 중요했던 것은 그 한약방과 외상 거래를 할 수 있게 된 주 요인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한약방 근처에서 젓갈 도매상을 크게 하시는 어머니의 고향 친구 분이신 재숙이 어머니의 보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정이 그렇다 보니 어머니께서 더욱 실수를 하지말아야 된다는 강박감이 머릿 속에 항시 상존해 있었던 것처럼 느껴졌다.

바깥 나들이를 하시는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이 유일하게 '대한청년단' 단원이라는 것 빼놓고는 그다지 남들 앞에 버젓하게 내세울 만한 것이 없었다.
그 대한청년단 단원으로 가입을 하게된 것도 순수 자발적이였다.
보수가 전혀 없는 헌신적인 일인지라 오히려 크던 작던 간에 소요되는 경비를 자비로 쓸 수 밖에 없는 실정이었다.

논농사를 제외 하고는 부수적인 수입원이 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이 삼년이 지나야 수확이 되는 도라지 농사 뿐이었다.
그렇다 보니 벌써 근 십년 가까운 세월 동안에 걸쳐 마을에서 나름 형편이 좀 나은 집을 골라 혀 짧은 소리를 하면서 돈을 빌려 썼으니 개개인에게 갚아야할 돈은 얼마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러나 시쳇말로 '가랑비에 옷이 젖는다'는 말처럼 마을 전체적으로 갚아야할 돈의 액수를 합산하면 결코 만만치 않했다.

그래서 그 때부터 어머니께서는 아버지를 일컬어 '빛 좋은 개살구' 또는 '허풍선이'라는 말을 입버릇 처럼 쓰시기 시작하셨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했던 것이 아버지가 계실 때는 절대로 입 밖에 한마디도 꺼내지 않으셨다.
꼭 외조부님과 내 앞에서만 그런 말씀을 하셨다.

사실 도라지 농사라는 것이 그랬다.
벼농사 처럼 해마다 늦가을에 일정한 수확을 가져다 주는 것은 아니었다,
최소 이삼 년을 기다려야 도라지 뿌리가 틈실하게 굵어져 약효가 생겨야 비로써 상품으로 가치를 인정 받을 수 있었다.
그렇다 보니 그간 투자되었던 비료 값과 인건비 등을 제외하고 나면 그다지 실팍한 수입을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그런 제반 사정을 아시면서도 그래도 어머니께서는 마음에 흡족하지는 못해도 그저 작은 돈이나마 목돈으로 거머쥐는 재미로 도라지 농사에 대한 미련을 쉽게 버리지 못하셨던 것 같았다.

채 하루를 채우지도 못하고 끝난 장례였지만 나와 내 어머니께서 영적으로나 육적으로 받은 고통이 너무도 컸기에 극한 피로감을 우리 두 사람에게 고루 안겨주었다.

그런 피로는 비단 우리 두 모자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그 금수만도 못한 악랄한 놈들에게 부당한 처우를 받을 수 있는 위험을 무릅쓰고 아버지의 장례를 무사히 끝마치게 도아주신 어른님들의 은공이 실로 컸다.

초췌해진 얼굴의 표정과 지친 모습이 무거운 발걸음들에서 역력하게 드러나 보였다.
무척이나 피로감에 쌓이신 것 같아 그지없이 고마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미안함을 금할 수 없었다.

오지랍이 넓으신 분이라 그랬는지 방앗간 일을 보시는 순태 아저씨는 둥구나무 밑에서 어머니와 짧게 인사를 나누시고 헤어졌다.
그리고 맨 먼저 마을 안 고샅길로 들어 가셔 동네 어디론가로 가셨다.

참으로 모두 다 고맙기 이를데 없는 분들이기에 앞으로 살아나가는 동안 꼭 잊지 않고 기억을 하여 그 은혜에 보답을 하리라 굳게 마음 먹었다.

온 종일 장례를 치루고 집에 돌아와 너무 지쳐 잠시 앞마루에 누워 쉬는데 사립문 쪽에서 웅성거리는 사람소리가 들려 얼른 마루에서 일어나 보았다.

아침나절 산에 오를 때 뽕나무밭 두덕에서 어머니와 약속을 하셨던 영호네 어머님께서 오셨다.
상갓집에 뒤늦은 문상이지만 그래도 빈손으로는 오실 수 없으셨던 모양이었다.
그 귀한 쌀을 한 말 정도 밀가루 푸대 자루 속에 넣어 머리에 이고 오셨다.
그리고 귀분이 어머니와 이야기를 나누시며 마당 안으로 들어오셨다.

정말 꼭 그런 것을 받어서가 아니였다.
속된 말로 다들 이녁들 몸 사리느라고 강 건너 불구경 하듯 하는 어처구니 없는 실정이었다.
그런데 아무런 댓가성 없이 순수한 마음에서 고인이 되신 아버지는 물론이려니와 우리 모자를 위로해주시려 몸소 찾아오신 그 성의에 고마움을 느꼈다.
그로 인해 적막하기만 했던 집안이 외적인 기분상으로나마 서서히 안정을 찾아가는 듯 했었다.

거즘 저녁녘이 되자 집에서 첫번째 올리는 제사인 초우(初虞)를 치뤄야 했었다.
그런데 마루에 쌀자루를 내려 놓으신 영호 어머님께서 세상을 오래 사셔서 다 아시는 것 같았다.
삼베저고리의 양쪽 소매를 바짝 걷어 부치시고 부엌으로 들어가셔 귀분이 어머니와 함께 제사상 차림의 준비를 서둘러 하셨다.
영호네 어머님게서는 세상을 살아오신 년륜도 있으셨지만 음식 솜씨가 좋으셨다.
마을에 크고 작은 잔치가 있으면 모두 도움을 청할 정도로 정평이 나 있었다.

그쯤에 내 친구 옥순이 어머니께서는 하루 종일토록 빈집에 홀로 놔두고 온 옥순이가 무척이나 걱정이 되시는 것 같이 보였다.
서서히 어둠이 깃들자 옥순이의 늦어진 저녁 끼니가 걱정이 되셨는지 다른 분들보다 먼저 서둘러 사립짝을 나서 고샅길로 향하셨다.

사실 제사상이라고 해봐야 읍내 장에 나갈 정황도 없어서 막말로 육고기와 마른 북어 포에 과일 하나도 못 올리고 말았다.
그저 집에 있던 봄에 뜯어다 말려 놓았던 고사리 나물을 제외 하고는 모두가 풋내 나는 나물반찬으로 제사상을 조촐하게 차릴 수 밖에 없었다.

그래도 평소에 아버지께서 좋아시던 반찬을 한 가지라도 올릴 수 있어 그나마 마음이 덜 무거웠다.
싸리 울타리에 뻗어난 넝쿨의 줄기 끝에 달려있는 애 호박을 따서 계란 노른자를 뭍혀 기름에 지진 호박 전이었다.
그렇게 두 어른님들 께서 도와주셔 첫 번째 제사를 모실 수 있었다.
그 중 제일 마음에 걸렸던 것은 그 흔했던 막거리 한 잔을 올리지 못한 것이었다.
전쟁 통에 모두 피난을 떠난지라 독아집(양조장)은 물론 그 막걸리를 받아서 팔던 주막집들 마져 집을 비우고 피난을 떠난지 오래라 돈이 있어도 도저히 구할 수가 없었다.

제사상을 물리고 나자 그 때까지 함께 계셨던 아버지의 유일한 마을 친구 분이신 응수 아저씨께서도 자리에서 일어나셨다.
저녁식사를 하시고 가시라는 여러 사람들의 청을 정중하게 사양하셨다.
저녁 밥이라도 가족들과 함께 먹어야 된다고 하시면서 어머니에게 삼우제 날 다시 오시겠다는 말씀을 남기셨다.
그리고 부락 일을 보시는 구장님과 함께 각자의 집으로 돌아 가셨다.

아침에 내 아버지의 시신이 싸리문 밖을 나설 때 부터 이제는 정말로 우리들 식구 곁을 영원히 떠나시는구나 하는 생각을 갖었었다.
그리고 그런 허전한 마음이 아버지의 유택을 떠나 산을 내려 섰을 때에도 늘상 그랬었다.
그런데 이제 막상 밤이 깊어 각자의 집으로 한 분 한 분씩 우리집 싸리문 밖으로 나가시어 각자 자기들 집을 향해 돌아가셨다.
싸리문 밖에까지 따라나가 공손히 인사를 드리고 마당 안으로 들어섰다.
그런데 텅 빈집이 주는 처절한 고독감과 허무함이 중첩되어 나도 모르게 다시금 마음이 외로워지기 시작 했다.

이제 내 어머니의 말씀대로 겉만 번지르하게 커다란 집에 남아 있는 사람이라고는 몸이 불편하신 탓도 있으시지만 아픔을 혼자서 애를 써 달래시려 밖으로 나오시지 않으시는 외조부님이 계셨다
그리고 심신이 지칠대로 지치신 내 어머니를 비롯하여 영호네 어머니와 귀분이 어머니께서 남으셨다.
그리고 또 한 분이신 귀분이 아버지께서는 저녁식사를 끝내기 무섭게 앞 마루 끝머리쯤에 누우시자 마자 몹시 피곤 하셨던지 주위가 들썩일 정도로 코를 냅다 고시며 세상 모르시는 듯 주무시고 계셨다.
그래서 나까지 포함하여 여섯 사람들 뿐이었다.

그래도 영호 어머니께서는 천성적으로 타고난 수더분 하신 성격대로 계속 마루에 함께 앉아 계셨다.
그리고 귀분이 어머님과 함께 어떻게라도 어머니의 아픈 마음을 달래주시려고 이런저런 말씀을 이어가고 있어 그라도 덜 외롭게 보였다.

시간의 흐름은 이렇듯 한 가정에 중심축이 무너져 가슴이 송두리째 아려오는 아픔을 끝내 외면하는 듯했다. 그저 또 다른 내일을 향하고 있어 단 한 치의 오차도 없는 듯해 보였다.
고로 앞으로 도래 될 불투명한 삶의 여정에 홀로 남으신 어머니와 어찌 대처해나가야 좋을지 저윽히 걱정스럽기도 했었다.

이런 냉엄한 시간의 흐름에 정비례하듯 밤은 점점 이슥해져만 갔다.
그날 밤따라 너무도 밝아 더할 나위 없이 투명하게만 보이는 달이 왠지 그리 얄미웁게 보였다.

물론 아직까지 진정되지 못한 내 감정의 기폭이 심한 탓도 있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밝은 달이 하필이면 싸리문 밖에 서 있는 대추나무 우듬지 위에 떡하니 널직하게 자리를 잡고 있어 그 모습이 정말 머뜩치 않았다.

내 아버지께서 지난 날 내가 탯줄을 끊고 첫 울음을 터트렸을 때 그 기쁨을 영원히 기억하시려고 손 수 심어 놓으신 나무였다.
어찌보면 나에게 남겨주신 유일한 단 한 그루의 대추나무였기 때문이였다.

어두움이 짙어가는 우리집은 무지막지한 놈들에 의해 강요된 통한에 슬픔을 가누지도 못해 애통할 뿐이었다.
그런데 이저도 모른채 하는 저 달은 짙어가는 어둠에 젖어 든 우리집만 유심히 내려다 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더더욱 배안시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때 내 속 마음은 그랬었다.

" 이토록 밝은 달아 가뜩이나 서러워 죽것는데 불상한 우리집만 머물지 말고 그 악락한 놈들에 소굴인 그 곳 인공기 위에 철푸덕이 앉아 어떻게 몹쓸 짓들을 하는지 세밀하게 보았다가 하늘에 한 점 빠짐없이 고하여 어느 날 갑자기 천벌이라도 내려 모두 다 몰살시켜 주었으면 제발 좋겠다." 라고 붙들고 절절히 애원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어제 밤부터 오늘 하루 종일토록 애를 써 주신 탓에 피로가 몰려 오시는지 귀분이 어머니께서 몇 차례나 하품을 하셨다.
그러자 어머니께서 서둘러 집으로 가서 주무시라고 재촉을 하시자 두 눈을 부비시면서 자리에서 일어 나셨다.
마루 끄트머리에서 코를 그리도 요란스레 골으시며 주무시는 귀분이 아버지를 마구 흔들어 깨우셨다.
겨우 잠에서 깨어나신 귀분이 아버지께서 더듬더듬 신발을 찾아 신으셨다.
그리고 지난 장맛비에 거즘 허물어진 흙담장을 서스럼 없이 너머 귀분이네 집으로 향하셨다.

그러자 영호네 어머니께서도 내일 아침 일찍 누에들 때문에 뽕잎을 따러가셔야 된다고 하면서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셔 마루 아래 토방으로 내려셨다.
어머니께서도 지치신 몸을 겨우 가누시며 일어나시려 하여 내가 얼른 부축을 해드려 영호 어머니의 뒤를 따라 싸립문 밖으로 나섰다.
그리고 영호 어머니께서 고삿길 끄트머리 쯤에서 꺽어 돌으셔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 까지 가볍게 손을 들어 흔드셨다.
비록 피가 다른 남남일지언정 참으로 정이라는 것이 무섭다는 생각을 다시금 해보았다.

그렇게 모든 분들이 각자의 보금자리로 돌아가시고 그 넓은 마루가 텅 비워졌다.
그러자 갑자기 되삭임질 하듯 허전함 속에 아픔의 강도가 더 심하게 몰려왔다.
의도적으로 어머니의 손을 더욱 세게 붙잡았다.
그런 내 모습과 어머니의 모습이 환한 달빛에 비춰 텅 빈 마당에 기다랗게 두 개의 그림자를 애틋하게 남겼다.
끝내는 달빛마저도 매정하게 보여 아물지도 못해 헝클어져 있는 상채기를 다시금 헤집는 것만 같았다.

그토록 애절한 속내도 모르는 저 달처럼 앞들녘 논배미에서 개구리들은 청승맞게 울어댔다.
참으로 느작머리라고는 반푼어치도 없는 개구리들은 잠도 않 자는지 계속 울어대어 가뜩이나 예민해진 신경을 더욱 날카롭게 하였다.

안방에는 아직도 그런 쾌쾌한 냄새가 덜 빠져 환기를 시키느라 계속 문짝들을 열어 놓아야만 했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작은 방으로 들어갔지만 피곤함이 몰려와 몸 가누기가 어려웠다.
서둘러 이부자리를 대충 깔고 모기장도 펼쳐내리고 얼른 모기장을 헤치고 안으로 들어가 잠자리에 들었다.

어림 짐작을 해보아도 얼마 동안은 잠에 들었던 것 같았다.
그런데 자꾸만 어디선가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기도 하고 잘못 들은 것 같기도 하여 조금은 혼동이 되었다.

그래서 자리에 누운 채로 잠시 눈을 뜨고 사방을 살펴보았다.
어머니께서 모로 누우셔 어슴한 방벽을 바라보시며 옆방에 계신 외조부님이 알아 들으시면 혹여 마음 아파하실까 봐 나지막하게 흐느끼고 계셨다.

그래서 의식적으로 얼른 자리에서 일어 나다보니 내가 몸을 움직여 부시럭거리는 소리가 나자 어머니께서도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셨다.

그리고는 더듬더듬 성냥통을 찾으셔 석유등잔에 불을 붙히시며 나를 향해 말씀을 건네셨다.

" 야,니가 무신 황우 장사냐, 진종일 뙤약볕에 그리 움적거렸는디 피곤허지두 않냐 도통 잠두 않자구 왜 느그 애비 죽구 엄쓰닌게 슬마 내가 니놈 밥 굶길가봐 극정이 되서 그러냐 암튼지간에 아무런 일 일랑 읍쓸테닌께 쓰잘데기 읍는 극정일랑 당췌 허지 말구 눈 딱 감구서 어여 자그라."

솔직한 마음 같아서는 왜? 우셨냐고 직설적으로 물오 보고 싶었다.
그러나 내가 그렇게 물으면 더욱 마음이 아프실까 하는 노파심에서 흐느끼신 그 소리를 차마 못 들은 것으로 하고만 싶었다.
얼른 시침을 뚝 떼고 어머니에게 들으시라고 말씀을 드렸다.

" 참 엄니두 이상허네 그려 자다가 오줌이 마려서 두엄자리에 가서 소피를 볼라구 일어난걸 가지구 뭘 그래쌌는디야,그럼 내가 깐난애기 처럼 이불이다가 오줌이라두 싸면 엄니는 좋긋는감 유. 지발 엄니나 얼릉 주무시유,"

그렇게 서둘러 말을 하고 얼른 밖으로 나가고 싶었다.더 이상 말을 이어가면 내 자신이 감추고 있는 속내가 드러 날 것만 같았다.
그리되면 내 자신이 겸언쩍어 질 것만 같아 자꾸만 부자연스러워지는 그자리를 얼른 피해 보려는 마음이었다.
한편으로는 어머니께서 정말로 내가 소피를 보려고 일어났구나 하고 생각을 하시게끔 유도해 보려는 심사에 모기장을 헤치고 밖으로 나왔다.
댓돌 위에 벗어 놓은 신발을 찾아 신으면서 순간적으로 생각을 했다.

어차피 나오지도 않는 오줌을 억지로 싸는 시늉을 할 것이면 차라리 어머니를 철저하게 속이고 싶었다.
그래서 두엄자리로 가지말고 일부러 마당 구석에 소피를 보는 척 하려고 했다.
그러면 어스름한 모기장 밖으로 보이는 내 모습을 보시고 믿으시겠지 하는 마음에 그렇게 하고 싶었다.

평소에는 어머니가 보는 앞에서는 부끄럽다고 좀처럼 속옷도 않 갈아 입었다.
그런데 오늘 밤에는 이상하리만큼 아무런 꺼리낌 없이 소피를 보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졌다.

어머니께서 그런 내 모습을 보시고 짧게라도 웃으시며 천 갈래 먼 갈래 찟어지신 마음을 조금이라도 달래실 수만 있다면 그 보다 더한 부끄러움과 익살이라도 양껏 부리고 싶었다.

이제 머지 않아 찾아 올 가을을 느긋하게 기다리는 하늘은 여유를 부리는 만큼 조금은 높게 바라보였다.
그 하늘에 떠 있는 달이 분명 저리도 밝을진데 내 눈에는 자꾸만 답답하리만큼 어스름하게만 보였다.

그리 미워하려는 내 마음에 흐려지는 시야를 밝게 해주려나 천체에 가득 드리워진 저 별들이 초롱한 눈망울로 나를 또렷하게 내려다 보고 있었다.
작은 빛들이라도 가지런히 모아 조금이라도 밝게 비춰 줄 터이니, 겹겹이 쌓인 한 조금이라도 풀어 보라고 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저 달을 다시 한번만 더 바라보고 미워하는 마음을 버려달라고 부탁하는 듯해 보였다.

아직은 세상 그 어느 누구라도 속여 본 적이 없었다.
내가 내 어머니를 속인다는 그 자체가 아직은 그런 관능에 숙달되지도 못해 어쩌면 좋을까 하며 생각을 거듭하려니 자꾸만 작은 가슴이 먹먹해지려했다.

그래서 몇 번을 생각하다 결국에는 아랫도리를 힘껏 무릎 팍 아래까지 훌떡 내렸다.
그리고 고추와 부랄을 송두리째 내놓고 억지로 오줌을 누는 시늉을 하였다.
그러면서 어머니께서 보아주시길 내심 바라면서 슬쩍 방안으로 눈길을 돌려 보았다

허나 어머니께서는 끝내 단 한 번도 그런 내 모습을 보아주시지 않으셨다.
아마도 이미 내 속내룰 세세하게 꿰둟어 보고 계신 것 같았다.

못내 서운키는 했어도 비록 입을 열어 애써 말로 표현을 하지 않해도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려는 그런 돈득한 믿음이 내면에 존재하고 있었다.
나는 어머니로부터 그런 굳건한 믿음 속에 우러나는 사랑을 물려 받을 수 있는 행복을 갖을 수 있으니 그에 만족하며 살려고 마음 먹었다.

그리고 마음 속으로나마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 엄니 이런 부질없는 짓일지라도 너그러히 받아주시리라 믿습니다. 그러함으로 당신은 이 세상에 둘도 없는 저에 버팀목이자 영원한 영과 육의 피안처 입니다. 이제부터라도 저는 엄니도 아버지처럼 끝없이 사랑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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