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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메로 가는 길 - 149 조회 : 1,426




길바닥에 떨어져 제멋대로 나뒹구는 빛바랜 나뭇잎사귀가 흐린 달빛에 거무튀튀하게 보였다. 그 모습이 마치 잃어버린 지난날에 있었던 청초(靑草)한 기억 하나쯤을 다시 들춰내려는 것 같았다.
더불어 오그라진 상흔(傷痕)에 버거움만 남았어도 그 어느 한곳에도 구차하게 얽매이지 않으려는 몸짓인 듯했다.

앞산 산마루엔 조각달이 호젓하게 웅크리고 있었다. 그리고 아랫마을 낮은 지붕 밑으로 새어 나오는 발그레한 불빛에 고개를 갸웃거리는 것처럼 보였다.
소리 없이 와 닿는 밤이슬에 온몸이 시려왔다. 비탈진 언덕에 거칠게 스쳐오는 산바람이 마냥 싸늘했다. 달빛을 온몸으로 받으며 언덕마루를 내려서니 산기슭에 몸 붙인 내 작은 초가집 하나가 희끄무레하게 맞바라보여 왠지 모르게 더욱 정감이 어렸다.

그토록 목메게 기다렸던 자식이 한시라도 빨리 보고 싶으신지 나보다 몇 걸음을 앞서 가시는 종열이 형 어머니의 발걸음이 꽤나 빨라 따라잡기에 힘이 들었다. 어찌나 발걸음을 서두시는지 저고리 겨드랑에 스치는 옷깃이 ‘사라락사라락’ 서둘러 걸어가시는 발길만큼이나 가쁘게 소릴 냈다.
그리고 빠른 걸음만큼이나 거무스레한 무명치마 끝자락이 검정 코빼기 고무신 콧등 언저리를 쓸고 있었다.

밤의 적막을 깨려는 듯 흥남이 아저씨네 집 누렁이가 짖어대는 소리가 한동안 카랑카랑하게 들려왔다. 더없이 드높아 더욱 차갑게만 보이는 겨울 하늘 구름 사이로 작은 별 무리가 새초롬하게 보였다.
밤이슬에 눅눅하게 젖은 등피가 달빛에 매끈매끈하게 보이는 사립짝을 서둘러 들어가신 종열이 형 어머니가 마루 앞에서 잠시 멈칫하셨다. 혹시나 누가 뒤를 따라왔는가 하는 염려스런 마음에 종열이 형이 신고 온 신발을 챙기셨다.
그리고 신발을 부엌 나뭇간에 검불로 덮어 감추셨다. 그런 다음 급한 걸음으로 방문을 여시고 들어가셨다.
그리고 윗목에 우두커니 앉아 있는 종열이 형을 와락 끌어안으시며 흐느껴 우시는 듯 파르르하게 떨고 있는 손이 등잔 불빛 너머로 애잔하게 보였다. 더는 못 참겠는지 울음을 터뜨려 종열이 형의 무딘 가슴을 두 손으로 사정없이 두드리시며 흐느끼셨다.

“야, 이 썩을 놈아 어쩔라구 그러냐? 어쩌라구. 나 죽어 나가는 꼴 볼라구 그러냐. 이 썩을 놈아 그리 늙어 빠진 이 에미 애간장 다 태워 놓고 어쩔라구 그러는기여. 어여 입이 있으면 빨랑 말을 혀봐. 내가 뚫린 이 두 귀로 똑똑히 들어 보랑께.”

그러자 말없이 우두커니 앉아 몸을 맡긴 듯 흔들리던 종열이 형이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을 했다.

“엄니 울지 마유. 울지 좀 말라구유. 내가 어디 죽은 것두 아니구 이렇게 멀쩡하게 살아왔으닌께 그만 울라구유. 넘 남새시럽게 울지말라구유.”

몸에 기대어 울고 계신 아주머니를 달래는 듯 떼어 놓자 아주머니가 소매 끝으로 눈물을 훔치시고 앞으로 바싹 다가와 앉으시며 다그치시듯 말씀하셨다.

“그래. 그동안 어디에 가서 뭐 해 처먹구 살았냐? 그리 죽자 사자 말렸는디두 내 말은 눈꼽맨치두 안 들어 처먹구, 내 애간장 다 태워놓으니 속이 시원허냐? 그놈에 승질머리는 죽은 지애비를 빼닮았는지 대꼬챙이처럼 고집을 부리니 내가 살 수가 있어야지, 그래 광다리 사는 삼장사 딸 그 성자라나 뭐시라는 가시내랑 새벽에 도망가서, 어디 가 죽었는지 살었는지 소식 한 장 없으니 날이면 날마다 앉으나 서나 니놈 걱정이구, 그놈에 지서 오순경인가는 고구마 퉁가리에 생쥐 드나들 듯 시두 때두 없이 찾어와 이것저것 시시콜콜한 것까장 다 캐물으니 내가 참말로 죽을 맛이구. 아직까정 예는 못 올렸지만서루 종금이 남편될 사람은 속두 모르구 자꾸만 니놈 어디 갔냐구 물었싸니, 얼렁뚱땅 그짓말하는 것두 한두 번이지 말대답하는 것두 사람이 할 짓이 아니더라구. 이 썩을 놈아!”

감정을 추스리지 못한 채 한참을 말씀하시어 목이 타시는지 찬물 한 그릇을 달라고 하셨다. 아주머니의 야윈 손가락 마디에 조금은 헐겁게 끼워진 닳고 닳은 은반지가 등잔불에 비춰 번득였다.
풍한 속 모질게 살아온 지난 세월들을 말하여 주는 듯 반질반질하게 보였다. 그런 모습에 가뜩이나 묵직한 마음이 흐린 불빛보다 더 어둡기만 했다.

옆에서 묵묵히 두 모자의 이야기를 듣고 계시는 어머니가 순덕이 어머니에게 물을 가져오라고 손짓을 하시자 순덕이 어머니가 부엌으로 가셨다. 비좁은 방안에 잠시 동안 침묵이 흐르는 듯싶더니 잠시 말을 멈추셨던 아주머니가 속이 몹시 타시는 듯 물 한 그릇을 마시고 나서 다시 말씀을 하셨다.

“그려. 그새 중간 어디가 뭘 허구 살았으며 앞으루 어떻게 허구 살 건지 그리구 뭔 일루 아닌 밤중에 홍두깨같이 나타났는지 어여. 속 시원허게 말이나 좀 해 봐라.”

그러자 그런 입장에 처한 종열이 형 자신도 퍽이나 답답한지 주위에 들릴 정도로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냥. 여기저기 돌아댕기며. 막일두 허면서 둘이 그냥 살았구만유. 맨 처음엔 도회지라 바닥이 크구 넓어 사람두 많아서 해먹구 살 것이 많은 줄 알구 서울루 갔는디, 의짓간도 없다보니 생각보다 살기가 영 마땅치 않아 며칠 못 견디구, 기차 타구 다시 부산으로 내려와서 그때 가지구 간 돈으루 서면 옆에 있는 달동네 전포동이라는 산비탈 골목길에 있는 판자집에 방 한 칸 얻어 가지구, 나는 집짓는 공사판에서 막일을 허구 성자는 남에 집 식당에 일하면서 살았는디, 겨울철이라 그나마 일거리가 없어져서 나는 그냥 놀구 있구, 거기다가 양력으로 이달 초순에 성자가 애를 낳아서 둘 다 일을 못허닌게 산 설고 물 설은 타관에서 살기가 어려워서 어떻게 할 수가 없어서 엄니헌티 도와 달라구 찾아왔네유. 암튼 엄니 속 썩여서 무진장허게 미안허구만유.”

종열이 형이 하는 말들이 참으로 한심하다는 듯이 이야기를 들으시던 아주머니께서 책망을 하시 듯 말씀하셨다.

“그래. 제 몸뚱아리 하나도 간수 못하는 것이 꼴에 사냇값 한다구 덜커덕 애까지 낳는가 보네 그려 에휴. 그래 애는 머슴아여? 가시내여? 그리구 애는 튼실하냐?”

그래도 당신의 핏줄이 세상 밖으로 나왔다는 말에 반가우시면서도 애써 감추시려 하셨고 눈을 똑바로 뜨셔 종열이 형 얼굴을 바라보셨다. 그러자 종열이 형은 어머니와 내 얼굴을 번갈아 보며 쑥스러운 얼굴로 망를 이었다.

“아들인디. 애는 나를 닮아서 그런지 무지허게 튼튼허구만유, 에미 젖두 팡팡 잘 나와서 큰 걱정은 없는디 집으루 오기 전에 용두산이라는디 올라가서 곰곰히 생각을 혀 보닌께 인제는 애두 낳았으닌게 그 집서두 그 전처럼 그리 심허게 반대두 못할 것이구 성자두 죽을 때 까장은 같이 살꺼라구 했은께 이번에 가서 성자랑 같이 내려와서 나두 깨끗허게 자수혀서 군대두 가구 몽땅 정리를 헐틴께 엄니가 성자 좀 데리고 있으면 좋겠네유.”

마음속으로 굳은 결심을 했는지 종열이 형이 말을 다부지게 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아주머니께서 말을 이으셨다.

“야, 이놈아. 그러닌게 내가 처음부터 뭐라구 허데 제발 열 일 제쳐두구 군대부터 갔다 오라구 내가 그리 신신당부를 안 허드냐? 가시내 집에서 머리 싸매구 반대를 허는디 어디 그 가시내 아니면 장가 못가는 줄 알구 나 잠든 사이 장농 속에서 돼지 판 돈 훔쳐 가지구 달아나더니 그 돈 다 까먹구 거지꼴에 손주새끼까지 하나 붙여 가지구 들어올려구 허네 그려. 참 넉살두 좋지. 그런 건 어떻게 빼먹지 않구 니 애비를 꼭 빼다가 닮았냐?”

모든 것을 깔끔하게 정리를 하겠다는 말과 태어난 손자 이야기에 마음이 안정이 되신 듯 종열이 형 어머니의 숨소리가 한결 부드럽게 들렸다. 두 모자의 말을 끝까지 듣고 나신 어머니가 종열이 형 얼굴을 바라보시며 조심스럽게 말씀하셨다.

“그려. 종열이 총각 아니! 이제는 애를 낳았으닌께 애기 아버지라고 혀야것네. 이참에 참 마음 한번 잘 먹었구먼. 그렇게 혀서 얼른 군대 갔다 와서 엄니 도와서 농사 열심히 짓구 각시랑 알콩달콩 살면 얼마나 좋겠어 그 덕분에 나두 국시 한번 얻어 먹을 것이구 그러닌께 아줌니두 인제는 마음 푹 놓구 잠두 편허게 주무세유.”
“참. 기나저나. 손주란 놈은 내 새끼닌게 천만번이라두 받아 줘야 허지만 결혼도 하지 않고 떡허니 들어와 살게 되면 동네 웃음거리 되는데 그게 걱정이네 그려. 이놈에 세상이 어찌 돌아갈라구 그러는지 요새 젊은 것들이 대책두 없이 지들끼리 만나 그냥 좋아해서 아무런 대책두 읍시 덜렁 애부터 낳으니 이제 내 얼굴에도 똥이 묻어서 남에 말을 못할 입장이 되었지만 그게 다 지들 부모 욕보이는 일이지 뭐.”

입에 침이 마르시도록 말씀을 하시던 종열이 형 어머니께서 아랫목에서 새근새근 잠을 자고 있는 순덕이 얼굴을 찬찬히 바라보시며 다시 말씀을 하셨다.

“나는 그냥. 동네에 떠도는 말만 들었지만 다들 이 험한 세상에 누가 그렇게 남을 돌보아줄 것이냐며 상민이 애미가 좋은 일 했다구 칭찬들을 하던구먼. 그러구 가만히 얼굴을 뜯어보닌께 애기가 콧날두 오똑허구 오목조목한 게 잘 키워만 놓으면 나중에 가서 한 인물 하겄구먼 그려. 암튼 이집에 복덩어리가 들어왔구먼 틀림없는 복덩어리여.”

어머니가 순덕이 몸 위에 덮어놓은 이불을 잘 덮어 주시며 쑥스러우면서도 싫지는 않으신 듯 웃으셨다. 작은 단칸방에 한꺼번에 여러 사람이 앉아 있어 비좁기만 했다.
그러나 모처럼 사람 사는 진정한 냄새와 정이 가득가득 묻어나는 열기로 길어 더욱 추운 겨울밤이 훗훗하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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