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오는 동안 마음은 늘 그랬다. 차분한 평온 속에 주위와 적절한 균형을 이뤄 큰 욕심 없이 마음 편히 살고만 싶었다. 그런 마음가짐에 언제나 듬직하게 자릴 잡고 있는 앞산의 과묵함을 답습(踏襲)하려 했다. 그러면서도 되바라진 소리를 실없이 내뱉는 바람의 가벼움은 버리고만 싶었다. 산마루엔 목화송이 같은 뽀얀 구름이 한가롭게 머물고 영롱한 해는 산허리 중간쯤을 벗어나 차분하게 마을로 내려서고 있었다.
산자락 아래 다붓하게 자릴 잡은 들메 마을엔 오묘한 자연의 섭리 속에 윤회를 반복하는 사계(四季)의 변화가 어김없이 찾아들었다.
동면의 긴 잠에서 깨어나 부스스한 눈을 뜨는 여린 고사리 순이 오므린 손끝으로 손짓을 하면 어김없이 마디 짧은 봄이 찾아왔다. 그맘때쯤이면 들녘 청보리 밭 위로 작은 산새 ‘포롱포롱’ 간지럽게 날고 샛노란 개나리꽃 머리 위로는 아물아물한 아지랑이가 가벼운 현기증을 일으켰다. 다스한 봄볕이 함초롬히 깃드는 산자락과 들녘 밭둑 여기저기 파릇파릇 풋내 서린 나물이 돋아나면 아낙네들은 들로 나와 나물을 캐어 동그란 싸리 바구니에 정성껏 담았다.
귀 따가운 매미 울음소리 따라 단추 알처럼 작은 하얀 개망초 꽃망울들이 앞 다투어 필 무렵엔 성급한 실잠자리가 어설픈 날갯짓을 했다. 동구 밖 앞 냇가의 반짝거리는 물결 위로 다리 긴 소금쟁이가 물 위에 솜씨를 뽐내듯 곡예를 하면 뒤따라 작은 물방개도 물옥잠 잎사귀 위로 아주 느릿하게 기어올랐다. 배부른 황소 나른한 울음소리 온 들녘에 잔잔하게 들려오면 홀라당 옷을 벗어 배꼽을 내민 동네 개구쟁이들이 성급하게 시냇가 물속으로 뛰어 들었다. 쨍쨍한 여름 해는 등 언저리에 따끔따끔하게 내려쬐었다. 고막이 얼얼하게 목 터져라 울어대는 매미소리는 서둘러 성하(盛夏)를 불렀다. 그럴 즈음엔 풀숲에 몸 숨긴 산딸기와 검은 목이버섯 그리고 싸리버섯을 찾아 순덕이 어머니는 앞산을 두루 살펴 바구니가 가득 차게 온갖 버섯을 골라 따셨다. 그러다 한줄기 소나기가 내리려고 온 산이 울리도록 천둥이 치면 서둘러 가지 많은 높다란 소나무 밑에 몸을 피했다. ‘쏴아쏴아’ 나뭇잎에 떨어지는 소낙비 소리를 들으며 한 줄금 더위를 식혔다.
햇살이 더할 나위 없이 자글자글해 마냥 여름인줄만 알았던 계절이 소리 없이 찾아드는 찬 서리에 후다닥 놀란 듯이 달아나고 서둘러 맞이하는 만추의 계절엔 가을의 표상(表象)처럼 놋황색 물결치는 호서평야의 들녘의 풍요로움에 마음을 가다듬었다. 한쪽 발로 서있는 허수아비를 벗 삼아 배부른 방아깨비가 풀숲을 이저리 뒤척였다. 불그스레하게 타오르는 저녁노을 등에 잔뜩 지고 황금빛 들녘을 두 쪽으로 가르며 꼬리를 길게 늘어뜨린 저녁 막차는 검은 연기를 하늘 위로 흩트리며 남쪽으로 달려갔다.
늦가을 부르는 귀뚜라미 울음소리가 처연하게 들려 심오한 마음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켰다. 늦가을 끝자락을 암팡지게 붙들고 겨울을 재촉하는 찬바람이 골짜기마다 불어와 알이 꽉 찬 밤송이가 ‘툭툭’ 소릴 내며 등껍질을 터트렸다. 길섶 따라 홀연히 서 있는 산국(山菊)들이 가녀린 머릴 흔드니 머리끝이 허연 억새도 서로 몸 부대껴 울음을 터트렸다. 처연한 기러기의 울음소리에 귀를 기우리면 발밑에 밟혀 오는 뾰족한 서릿발 소리에 턱밑에 다가온 겨울을 새삼스레 느껴보았다.
찬바람에 몸을 녹이려 활활 달아오른 화롯가에 두 손을 모으며 생각했다. 밤사이 새하얀 눈이 옴팡지게 내려 온 누리에 설원을 이뤄 주길 애틋하게 빌었다. 그토록 청순한 어린 동심은 그해 겨울도 산 밑 어느 기점(起點)에 그렇게 머물고 있었다. 이 모든 기억들이 먼 훗날 그 언제까지라도 아니, 숨이 멈춰질 그날까지 영원히 지속되길 바랐다. 지울 수 없어 지워지지 않을 기억들이 뇌리 속에 겹겹이 포개져 각기 다른 색깔로 각인(刻印)되어 가고 있었다.
저마다 각기 다른 색깔의 옷을 입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학교에 가려고 냇둑 길을 걸어가고 있는 모습들이 눈앞에 친근하게 다가서 무릇 정겹기만 했다. 가을걷이 끝난 비석골 과수원 밭 자락에는 부지런 떠는 까마귀 몇 마리 촐랑거렸다. 야트막한 공동묘지 언덕 위에 유난스레 눈에 잘 띄는 비석들이 산머리 떠도는 하얀 구름을 조롱하는 듯 바라보고 있었다.
교문 앞 새로 생긴 문방구 앞에는 학용품을 사려는지 아이들이 웅성대며 몰려 서 있고 물건을 팔고 있는 단발머리 영선이 모습도 보였다. 흙먼지 푸석푸석 일어나는 학교 앞길 한복판으로 용꽃마을 주조장에서 술이 가득 담긴 둥그런 나무 술통 몇 개를 싫은 마차가 눈에 띄었다. 자색 말이 울려대는 초롱초롱한 말방울 소리가 추위를 부추기 듯 차갑게만 들려왔다. 늑장 부리는 겨울 해는 학교 울타리 측백나무 머리 위에 머물고, 하나둘씩 운동장 안으로 들어서는 우리들을 반기듯이 바라보는 듯했다.
장작 타는 냄새와는 판이하게 다른 비위를 거스르는 특이한 석탄 타는 냄새가 온 사방으로 번져났다. 석탄 연기 속에 배어 교실 안에 가득 차 환기를 시키려는지 교실 출입문과 유리창을 활짝 열어 놓고 있었다. 그래도 불길이 따뜻하게 퍼져나는 난로 옆이 좋은지 모두들 모여 떠들고 있었다.
아침 조회시간을 알리는 교무실에서 치는 종소리가 경쾌하게 울리자 양쪽으로 고리가 두 개 달린 누런 소가죽 가방과 출석부를 손에 드신 담임선생님의 슬리퍼 끄는 소리가 교실 안까지 들려왔다.
교실 출입문을 여시고 교단 위에 서시자 언제나 그렇듯이 모두들 자리에 일어나 검정 칠판 옆 유리 없는 사각 나무 액자 안에 쓰여 있는 ‘우리의 맹세’를 똑바로 바라보며 낭독했다. ‘우리의 맹세 하나, 우리는 대한민국의 아들 딸, 죽음으로써 나라를 지킨다. 둘, 우리는 강철같이 단결하여 공산 침략자를 쳐부수자. 셋, 우리는 백두산 영봉에 태극기 휘날리고 남북통일을 완수하자.’ 라고 교실이 떠나갈 듯 큰소리를 쳐서 낭독했다.
그런 후 선생님께서 우리들에게 잘 들으라고 하시며 ‘늘 점심시간 끝나고 다섯 번째 시간에 졸업사진을 찍을 것이니 그리들 알고 겨울 방학책값 아직까지 안 낸 사람은 방학도 며칠 안 남았으니 모레까지 꼭 가져오길 바란다.’고 하시며 첫 시간 국어 공부를 시작했다.
가끔씩 생각을 해보았지만 막상 졸업사진을 찍는다는 말을 듣고 나니 이제 얼마 안 있으면 학교를 졸업한다는 생각에 왠지 마음이 서운해졌다. 지난 세월 동안 그리도 정들었던 모든 것들을 놓치지 않으려 촘촘히 눈에 다시금 담고 싶었다.
코를 잔뜩 흘리던 철부지 어린 내가 어머니 손에 이끌려 왼쪽 가슴에 흰 손수건을 접어 달고 교무실 앞 태극기가 힘껏 펄럭이던 봄날에 입학한 것이 바로 엊그제만 같았다. 그런데 벌써 졸업소리가 나오니 그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참 세월이 빠르게 지난 것 같았다.
난로에 불이 활활 붙었는지 교실 안에 꽉 들어찼던 연기와 냄새가 어느 정도 사라졌다. 환기를 위해 활짝 열어 놓았던 교실 유리 창문을 닫아 교실이 조금은 덜 싸늘해졌고 난로에서 뿜어 나오는 열기로 교실 안이 서서히 따스해지기 시작했다.
오전 마지막 넷째 시간이 되자 기다린 듯 서로 앞을 다퉈 도시락을 난로 위에 얹어 놓으려 부산을 떨었다. 열기가 마디게 달아오르는 난로 위에 올려놓은 도시락에서 흘러나오는 김칫국물 타는 냄새가 온 교실 안으로 가득 차올랐다. 맨 밑에 있는 도시락에서 밥이 누는 냄새가 나자 선생님이 당번을 불러 도시락을 뒤집어 놓으라고 하셨다.
이미 두 번 정도 되풀이하여 배운 수업 내용을 반복하여 주입하는 수업이라 알고 있는 내용에 그리 생소함이 없어 모두들 나른해졌다. 그때 설명을 하시던 선생님이 손가락을 세워 입에 대시어 모두를 향해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하셨다.
교실 뒷줄에 성태가 무엇이 그리 고단했는지 선생님이 가까이 다가서는 줄도 모르고 졸고만 있었다. 선생님이 책상 위를 지시봉으로 세차게 내려치셨다. 깜짝 놀란 성태가 벌떡 일어서려다 몸 균형을 못 잡아 책상이 미끄러져 교실 뒤편 마룻바닥에 넘어졌다. 그러자 웃음을 꾹 참고 있던 아이들이 깔깔대며 웃었고 선생님은 조용히 하라고 소릴 치셨다. 성태는 십 리에 가까운 학교 길을 걸어와 아마도 몸이 몹시 피곤했던 모양이었다.
점심시간이 끝나 오후로 접어들자 그래도 양지바른 쪽에는 햇살이 따스하게 비췄다. 군내에서 단 하나뿐이라는 사진관을 하신다는 턱밑에 검은 수염을 엄청 길게 기르신 아저씨가 예술인들이 쓰고 다닌다는 납작한 ‘빵모자’를 머리에 쓰시고 교무실 앞에서 사진기를 세워놓고 기계를 조절하고 계셨다. 기다란 나무다리가 삼각형 모양으로 세워진 받침대 위에 둥그런 안경알처럼 유리알이 달린 사각형으로 주름진 사진기가 올려 있었다. 그리고 사진관 아저씨는 검은 천의 커다란 보자기를 둘러쓰시고 자꾸만 교무실 앞을 바라보시며 배경을 잡으려 하셨다. 몇몇 아이들은 선생님의 지시에 따라 교실에서 걸상을 들고 와 촬영 장소에 놓았다. 아마도 맨 뒷줄에 서 있게 되는 학생들의 키 높이를 맞추려는 것 같았다. 그리고 또 다른 아이들은 담임선생님과 교장, 교감선생님이 전교 선생님들과 맨 앞줄 가운데 자리에 앉으실 의자를 교무실에서 밖으로 운반하고 있었다.
학교 건물이 일제강제점령기에 지은 낡은 목조건물이라 그랬는지 우리들 모두가 앉을 만한 계단이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해마다 졸업 사진을 촬영할 때는 맨 뒷줄에 서는 아이들이 발을 딛고 올라설 수 있는 의자를 교실에서 들고 나왔다.
학급 전체 육십 이 명이 키가 작은 아이들은 맨 앞줄에 앉았다. 그 다음 줄에는 조금 더 큰 아이들이 서고 맨 뒷줄엔 키가 아주 큰 아이들이 걸상을 딛고 균형을 맞춰 자리를 잡았다. 사진관 아저씨가 앞으로 나오셔 한참동안 이리저리 자세를 고쳐주시고 자꾸만 어깨를 쫙 펴고 앞을 똑바로 바라보라고 하셨다. 그리고 가죽 가방에서 도시락 크기만 한 네모 모양의 두껍고 거무스레한 유리판을 꺼내 사진기에 끼우셨다. 또한 검은 보자기 속으로 서너 번 반복하여 바라보신 후 한 손엔 빨간 고무줄 끝에 달린 동그란 고무공처럼 생긴 것을 쥐고 계셨다. 또 다른 한 손에는 분필통 크기만 한 납작한 용기를 들고 움직이지 말라고 두어 차례 말씀하시며 찍는다는 소리와 함께 ‘퍽’ 하는 소리가 화약 같은 냄새와 함께 사방으로 퍼졌다.
그렇게 육십 이 명이나 되는 코흘리개들의 얼굴 모습들이 둥그런 렌즈 알 속에 곱살하게 집광(集光)되어 영원히 기억될 추억의 한 장을 장식했다. 그런 모습을 앞으로 살아가야 할 나날 동안 꼭 잊지 않고 마음속에 담고만 싶었다.
그렇게 일반인 우리들이 촬영을 끝내자 옆 반인 이 반 아이들도 우리들이 하였던 것처럼 뒤따라 촬영을 끝마쳤다. 같은 고향 땅 밭머리에 태(胎)를 함께 묻은 종구와 주현이의 착한만큼 여린 모습도 곱게 담겨졌다. 그렇게 알콩달콩 담겨진 모습들이 먼 훗날엔 콧등 시린 그리움으로 남을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