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글, 사진 등의 저작물에 대한 무단복제를 금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들메로 가는 길 - 151 조회 : 1,596




이른 아침. 잠에서 깨어 마당에 나서니 어제 늦은 밤부터 내리기 시작한 첫눈이 산자락에 보기 좋을 만큼 고루 쌓였다. 초자연적인 앞산의 모습이 아침 햇살 속에 유아(幽雅)하게 다가서니 해말끔한 느낌으로 마음에 팍 와 닿았다.
날이 훤히 밝았는데도 멈출 줄 모르는 삭풍(朔風)은 섧게 우짖는 산짐승의 울음처럼 ‘우우’대며 더욱 세차게 불었다.

뒤뜰 갈참나무가지에 노닐던 산새들도 한 발짝 더 성큼 다가서는 추위에 화들짝 놀라 매우 부산스럽게 지저귀는 것 같았다.
나목(裸木)들이 길을 터놓은 신작로엔 감귤색 버스가 몸을 뒤뚱거려 느릿하게 읍내로 향하고 있어 그 모습 또한 쓸쓸하게만 느껴졌다. 젖어오는 뜻 모를 아쉬움에 앞을 바라보니 가파른 산언덕 밑으로 기찻길이 끝 모르게 이어져 있었다.
산모롱이를 끼고 도는 완행열차가 빨라 느린 듯 느려 빠른 듯싶게 달려가니 아무런 생각 없이 홀가분하게 기차를 타고 어디론가 무작정 떠나 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철로 인근에 사는지라 어릴 적부터 눈에 판이 박히도록 수도 없이 기차를 보며 살았다. 그런 기차를 처음으로 타 본 것은 사년 전쯤으로 기억된다. 전쟁의 참화가 무참히도 앗아간 아버지의 잘라져 나간 두 다리를 어떻게든 고쳐드리려 종구네 집에 서 마지기 논문서를 잡히고 장리로 빚을 내어 멀리 대전에 있는 큰 병원에 입원을 시키려고 갔을 때였다.
잽싸게 스쳐 지나는 기차를 바라보고 있노라니 돌아가신 아버지를 회모(懷慕)하는 아픔이 다시금 스멀스멀 되살아나 옹이가 되려 했다. 이는 그 무엇도 가로막을 수 없는 영원불멸(永遠不滅)의 천륜지정(天倫之情)이었으리라.

날이 추워지자 방 안을 조금이라도 훈훈하게 하려고 질화로를 들여 놓았다. 불씨를 다복하게 한데 모으려 ‘달그락달그락’ 쇠 부젓가락이 화로에 부딪는 소리가 방문 밖으로 가느다랗게 들려왔다.
뒷간 옆 다복다복 쌓인 두엄 가에선 햇살에 허연 김이 치오르고 부엌에서는 밥을 푸시느라 솥뚜껑을 여셨는지 허옇게 확 퍼져 나오고 있었다. 그 김 속에 밥 냄새가 부엌문 밖으로 새어 났다.
비록 보리쌀에 고구마 조각을 듬성듬성 섞고 쌀이 조금은 들어간 그런 밥이었지만 그라도 마음 편하게 배불리 먹을 수 있어 늘 마음속으로 감사하게 생각했다. 그리고 우리보다 더 어려운 처지에서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도 기억할 줄 아는 사람이 되라는 어머니의 말씀이 떠올랐다.
뜨끈뜨끈한 비지찌개와 잘 삭혀진 갈치속젓에 노란 배춧잎을 쿡 찍어 밥 한 그릇을 맛있게 비웠다. 남들 눈에는 우습게 보이는 비록 열 평 남짓한 작은 초가집이라도 마음은 한없이 부듯하기만 했다.

좁다란 밥상 앞에 머릴 맞대고 함께 식사를 하시던 어머니께서 내 얼굴을 바라보시며 말씀하셨다.

“상민아 니들 오늘 방학헌다면서? 방학하구 나면 내 세상이다 하구 놀지만 말구 틈틈이 공부 열심히 혀야 헌다, 니 놈 학교 보내는디 쌀 몇 가마니 들어가닌께 정신 바딱 차리구 혀야 한다. 그리구 생무 깎아 먹을 라구 허면 구덩이에서 무 꺼내고 나서 구덩이 입구를 지푸라기로 단디 잘 막아 놓아야 헌다 안 그러면 바람 들어가서 무에 바람 들면 하나두 못 먹구 죄다 버려야 허닌께, 알았지? "

어머니의 옷자락을 붙들고 넘어지지 않으려고 바동대는 순덕이를 바짝 끌어안으시며 다시금 말을 이으셨다.

“아이구. 내 새끼 우리 순덕이두 이제 다 컸네. 밥 먹을라구 밥상으로 달려들구 그려. 어여 커라 쑥쑥 커야지.”

비록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순덕이가 그리도 귀엽고 사랑스러우신지 어머니는 순덕이를 무릎에 안고 식사를 하셨다.

온 동네 아이들이 그렇게 기다리던 방학이 시작되는 날이라 그런지 찬바람이 매섭게 불어오는 냇둑을 걸어 학교로 가는 크고 작은 발걸음들이 아주 가볍게만 보였다. 드문드문 토끼털에 고무줄을 끼워 동그랗게 만든 귀마개를 한 모습도 보였다.

교실 창문 밖 복도에 담임선생님이 인쇄 기름 냄새가 채 가시지 않은 겨울방학 책 한 뭉치를 두 손으로 가슴에 가득 안고 들어오셔 교탁 위에 올려놓으셨다.
그런 다음 학급 번호 순서대로 한 사람씩 앞으로 불러 방학책과 읍내 인쇄소에서 인쇄를 2학기 동안의 학습 성적 내용을 학과 별로 ‘수우미양가’로 구분하여 붓두껍에 빨간 인주를 묻혀 찍은 생활 통지표를 각자에게 나눠 주셨다. 국민학교 생활 중 마지막으로 받아 보는 ‘생활 통지표’였다.

반에서 성적이 우월한 아이들은 주위에 시선을 개의치 않고 힘차게 펴 보는데 성적이 부진한 아이들은 종이를 잔뜩 가린 채 살며시 자기 혼자서만 보고 있었다. 잘한 사람은 잘한 나름대로 아쉬운 눈빛이었고 못한 사람은 부끄러움에 얼굴이 달아올라 옆에 앉아 있는 다른 아이가 한번만 보여 달라고 하면 얼른 생활 통지표를 감추었다.

그렇게 겨울방학이 시작되었다. 아이들이 하나 둘씩 교문을 빠져나가 집으로 돌아가자 재잘대는 목소리와 티 없는 웃음소리 ‘쿵쾅쿵쾅’ 그리 분잡하던 발자욱 소리도 이젠 들리질 않았다. 텅 빈 교정은 스산하다 못해 추위 속에 메말라 붙는 듯 적막하기만 했다.

유난스레 추운 비석골 상여집 앞에 닿았다. 머리를 양쪽으로 곱게 땋은 쌍갈래 머리에 빨간 털모자를 눌러쓴 옥순이가 바람에 두 볼이 발그레하고 콧등이 시린지 벙어리 털실 장갑을 연신 입 언저리에 대면서 걸어가고 있었다.

상여집 앞 언덕배기를 내려서니 동구 밖 나무다리 위에 기현이 할아버지의 모습이 멀찍하게 보였다. 아마도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기현이 점심밥을 챙겨 주시려 집으로 오시는 것 같았다.
솜을 두툼하게 넣은 솜바지에 솜저고리를 입으시고 저고리 양쪽 소매 자락 속으로 두 손을 넣어 몸을 웅크리신 채 집을 향해 걸어오셨다.

집으로 돌아오니 어머니는 옥순네 집으로 뜨개질을 하러 가셨다. 순덕이 어머니는 배추꼬랑이를 입에 넣고 깨물면서 나와 어머니에게 주려는 듯이 예쁘게 깎아 그릇에 담아 놓으셨다.
방바닥에 방학책을 내려놓자 순덕이가 책 앞으로 슬슬 기어 오자 순덕이 어머니께서 방학책을 얼른 들어 반닫이 위에 올려놓으셨다. 그리고 부엌으로 밥상을 차리려고 나가시기에 순덕이를 보듬고 있었다.

어머니에게 은근히 자랑을 하고 싶은 마음에 어머니에게 한시라도 빨리 보여주고 싶어 생활 통지표를 가지고 동네 고샅길로 들어섰다.

집집마다 양지바른 마루엔 어른들이 아이들이 받아 온 통지표를 보고 계셨다. 그런대로 성적이 좋은 우현이는 우현이 아버지가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고 앞집 진수는 아주머니에게 한바탕 혼쭐이 났는지 훌쩍거려 울고 있었다.

마당에 공간이 넉넉한 경수 아저씨가 돼지새끼를 한 마리 사다 키우시려는지 굴뚝 밑 양지 바른 쪽에 앉아 입으로 손을 불으시며 돼지 밥그릇인 구유를 만드시느라 제법 큰 자귀로 둥그런 통나무를 길쭉하게 깊이 파내고 계셨다.

오후 햇살이 포근하게 깃드는 우물가를 지나 옥순이네 집에 닿았다. 점심밥을 먹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듯 방 안에서 등잔불 끄름 냄새와 반찬 냄새가 뒤섞여 나오는 옥순이네 방안으로 들어섰다. 어머니에게 주머니에서 생활 통지표를 꺼내 드렸다.
어머니가 통지표 앞과 뒤를 꼼꼼히 살펴보시자 옆 자리에 앉아 계시던 옥순이 어머니께서 말씀하셨다.

“옥순이 너는 미국 학교 다니냐? 왜 통지표를 안 보여 주구 그러냐? 보나마나 성적이 영 엉망진창인 모양이구먼 얼른 가지구와 봐. 죽도록 갈켜 놓았으닌게 그래 얼마나 잘했는지는 알아야 할 것 아녀.”

그러자 다소 굳은 얼굴로 계속 머뭇거리던 옥순이가 쑥스러운 얼굴로 마지못해 통지표를 내어 놓으며 말을 했다.

“엄니만 슬쩍 보구 말어, 챙피허닌께. 별루다가 잘 허지는 못했지만 그래두 일 학기 때보다는 쬐끔 잘 했어.”

통지표를 내놓자 한참을 훑어보시던 옥순이 어머니가 말을 했다.

“음. 잘했네. 정말루 아주 잘했구먼 우리 딸이 공부를 엄청시레 잘혀서 눈물이 다 나올라구 허네, 뭐 23등이나 했으닌게 꽁찌보다는 영 낫구 중간보다 더 잘했으닌게 얼마나 힘들었을까? 아이구! 이래가지고 합격은 커녕 어디 중학교 문턱이나 만져 볼 수 있것냐? 자신 없으면 일찌감치 집어치우고 군산 고무신 공장일랑은 멀어서 못 보내구 논산 읍내에 있는 성냥공장이라두 가거라. 그럼 너는 힘 안 들이구 취직혀서 좋구, 나두 뼈 빠지게 농사진 쌀가마니 안 헐어두 되닌게. 너두 좋구 나 좋은 일 아니냐?”

그러자 옥순이가 잔뜩 부루퉁한 얼굴로 윗방으로 건너가면서 작은 소리로 말을 했다.

“뭐 어떻게든 중학교 시험에 합격만 하면 되는 거 아녀, 작년에두 등수가 나보다 낮은 애들두 다 들어갔다구 허닌게 걱정허지 말라구.”

내심 걱정이 되어 정신 바짝 차려 더욱 정진하라고 농담으로 하신 말이 옥순이가 듣기엔 나름대로 서운한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한 편으로는 옥순이보다 월등하게 좋은 성적을 낸 내 입장이 거북스럽기만 했다. 그래서 그 자리를 피하려고 서둘러 밖으로 나왔다.

맞은편 주현이네 집 뒤뜰에 있는 대나무 밭에서 바람결에 흔들리는 대나무 소리가 다소 큼직하게 들려왔다. 얼마 전 학교에서 주현이를 만났는데 서울에 계시는 아버지가 어제 서울에서 소포를 보내 받았다고 자랑을 늘어놓은 생각이 났다.
그 소포 속에 만화가 ‘김용환’의 (코주부 삼국지) 만화책이 들어 있다고 하여 무척이나 그 책이 보고 싶었다. 꼭 한번 보고 싶은 마음에 주현네 집에 가 보았다. 부지런하신 주현이 어머니의 모습처럼 마루 벽엔 잘 말려 놓은 옥수수, 수수, 차조 그리고 바가지도 두 개 정도 걸려 있었다.

한동네 살면서도 모처럼 만에 가 보는 친구 집이라 서먹하게 한구석에 앉아 방안을 살펴보니 방문턱에 뜻 모를 붉은 글씨로 써 있는 부적이 붙어 있어 서먹하기만 했다. 다른 집과는 달리 그저 글을 읽고 쓸 줄 알면 되고 무슨 기술 하나라도 빨리 배우면 된다는 생각이신지 자식들의 학업 성적엔 그다지 큰 관심이 없으신 것 같았다.

주현이 어머니께서는 방 안이 비좁을 정도로 이불을 활짝 펼쳐 놓고 꿰매고 계셨다. 그래도 모처럼 아들 친구가 왔다고 가마솥에 넣고 찐 고구마라도 주려고 부엌으로 가시며 이불에 꽂혀 있는 바늘을 조심하라고 몇 번이고 당부를 하셨다.
목록으로

 

Copyrigt By 들메로 가는 길 All right reserved.
Webpage Administrator doorisk@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