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글, 사진 등의 저작물에 대한 무단복제를 금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들메로 가는 길 - 154 조회 : 1,581




자연의 섬세함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작은 마을이 바로 들메인 듯싶었다. 허나 가진 것이 그리 넉넉지 못한 사람들이 모여 집단을 이룬 작은 마을이었다.
마을 사람들 저마다 처해진 환경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열약하다보니 영위하는 삶이 어렵기만 했다. 더욱이 겨울로 접어들자 추위와 더불어 그 고통이 더욱 심했다. 허나 하루하루가 처해진 환경에 따라 그저 평온한 가운데 소소한 일상이 지속되었다.
마을 우물가에 물을 길러 가려고 집을 나섰다. 여느 날에는 늘상 순덕이 어머니께서 어린 순덕이를 등에 업은 채 머리에 물동이를 이고 힘들게 물을 길어 날랐다. 하지만 방학 동안만큼은 가급적 내가 물을 길어 나르려고 마음먹었다.
그렇게라도 해야만 집안 살림을 돌보느라 애를 쓰시는 순덕이 어머니의 노고를 조금이라도 덜어드릴 것만 같았다. 텃밭을 지나 밭둑길로 걸어가는데 여름 장맛비에 빛이 바랜 원두막 지붕이 희읍스름하게 보여 마냥 쓸쓸하게 느껴졌다.
밭둑길을 걸어 폭이 그리 넓지 않은 도랑가에 닿았다. 도랑물은 더 없이 투명해 밑바닥이 훤히 들여다보여 기분이 한결 상쾌했다. 언덕바지로 이어진 오름길에 빛바랜 나뭇잎이 눈에 띄었다.
흙속에 묻혀 거무스레한 빛깔로 변한 나뭇잎은 덕지덕지 달라붙은 지난날의 기억들을 모두 지우려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 모습들이 너무도 초연(超然)하게 보였다. 무릇 사계(四季)의 변화를 새삼 깨닫게 되니 무엇이라 표현키 어려운 짙은 동요(動搖)가 마음속에 일기 시작했다.

푸석한 길 따라 방죽가에 있는 흥남이 아저씨네 집의 탱자나무 울타리를 돌아 사립문 앞에 닿았다. 흥남이 아저씨네 집에는 지난 장날 읍내 장터에서 강아지 한 마리를 사왔다. 하얀 바탕에 검정 무늬가 얼룩진 강아지가 꼬리를 흔들며 매달리자 두 분 내외가 그런 모습이 귀여우신지 강아지의 머리를 쓰다듬고 계셨다.
방죽가에 위치한 흥남이 아저씨네 집 역시 오가는 사람들의 발길 드물어 늘 쓸쓸하기만 하던 외딴집이었다. 변한 것이라고는 사람 숨결 하나 늘었을 뿐인데 집안 분위기가 점점 달라져 가는 것 같아 마냥 훈훈하게만 느껴졌다.

동구 밖 나무다리 위에는 무슨 말썽이라도 부렸는지 동네 아이들이 앞을 다퉈 방죽가 쪽으로 도망쳐 오고 있었다. 그 뒤를 따라 상수네 어머니가 부지깽이를 손에 거머쥐시고 버럭버럭 소릴 지르며 달려오셨다.

“야, 이놈들아! 그래 우리 집 장독하고 무슨 놈에 원수가 졌다고 무지막허게 그놈의 새총인가 뭔가를 그리 사정없이 쏴 대냔 말이여? 그러다가 재숫머리 없어 장독이라두 깨지면 누가 책임을 질 꺼여. 좌우지간에 내 새끼나 넘 새끼나 어찌 그리 극성맞은지 참 별나지 별나.”

뒤를 쫓으시다 아이들이 멀리 사라지자 분이 덜 풀리신 듯 길모퉁이에 한동안 서 계셨다.

동네 북쪽 끝머리 상수네 집 측백나무 울타리엔 햇살이 잘 들어 늘 참새 떼가 심심찮게 찾아들었다. 짓궂은 동네 아이들은 참새를 잡으려는 욕심이 가득 차 있었다. 동네 아이들이 ‘Y자’ 모양으로 갈려진 나뭇가지를 잘라 새총의 버팀목을 만들었다.
그리고 양쪽 윗머리에 탄력 있게 잘 늘어나는 납작한 고무줄을 매어 고무줄 끝 양쪽으로 달린 가죽 조각에 공기돌만 한 돌을 담아 고무줄을 당겨 새총을 쏘며 놀았다. 그러다 상수네 어머니에게 들키자 잽싸게 도망을 쳤다.

동네 서쪽 놀이터 논바닥에서는 아이들이 공을 차며 놀고 있었다. 그 공은 훈련소 부대 앞 사진관에서 일을 하는 민균이네 큰형이 어딘가에서 가져온 튜브가 없는 빈 배구공이었다.
겉껍질이 좀 낡은 가죽 공속에 짚 검불을 꾹꾹 눌러 가득 채워 어설프게 공을 만들었다. 그리고 논바닥 가운데쯤에 중앙선을 그어놓고 서로 편을 갈라 공을 차며 놀고 있었다.
동네 아이들 모두는 땀이 흘러 더웠던지 윗옷을 훌떡 벗은 채 놀고 있었다. 비록 그렇게 낡은 공이였지만 놀이거리가 마땅치 않았던 그 시절엔 그런 공을 가지고 있는 민균이가 동네 아이들에겐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다.

그 이전에는 면소재지 점방에서 파는 고무로 만든 작은 공을 사서 가지고 놀았다. 그러나 크기가 아주 작은 공은 우리들의 욕구를 채워주질 못했다. 그래서 아주 드물게 돼지오줌보에 바람을 넣어 가지고 놀기도 했다.
일 년에 몇 번쯤 동네에 애경사가 있을 시에 늘 삼식이네 집에서 돼지를 잡았다. 그때 얻을 수 있는 오줌보에 바람을 입으로 잔뜩 불어넣어 가지고 놀았다. 그래서 돼지를 잡는 날에는 오줌보를 서로 차지를 하려고 애를 썼지만 오줌보는 삼식이 아버지 손에 의해 늘 삼식이 차지가 되고 말았다.

마을 우물가에 이르자 아주머니 몇 분이 두레박으로 물을 깃고 있었다. 주현이 어머니가 우물 턱에 물이 가득 담긴 물동이를 올려놓으셨다. 머리 위에 똬리를 얹어 이마 앞으로 한가락 내려진 짚 끈을 입에 물고 일어서 우물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우물가 왼쪽으로 트여진 작은 샛길에서 ‘드르럭드르럭’ 하는 쇳소리가 들렸다. 인식이가 굴렁쇠를 굴리며 샛길을 막 빠져나오려다 갑작스레 마주친 주현이 어머니 모습에 움찔하면서 그만 굴렁쇠를 놓쳐 버렸다.
굴렁쇠가 주현이 어머니 발끝으로 굴러가자 깜짝 놀란 주현이 어머니가 그 자리에 선 채 두어 번 움찔움찔하시다 그만 옆으로 넘어지셨다. 그 순간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물동이가 깨어지고 길바닥에 물이 사방으로 흘러 치마 아랫자락이 물에 흥건히 젖고 말았다.

잔뜩 화가 나신 주현이 어머니께서 어쩔 줄 몰라 겁을 잔뜩 먹고 있는 인식이 등짝을 세차게 때리시며 소리치셨다.

“야, 이놈아! 너는 눈두 없는 봉사냐? 사람이 가고 있는 것두 못보구 그나저나 이게 무슨 날벼락이라냐? 어쩐지 지난밤 꿈자리가 뒤숭숭하더니 이걸루 액땜하는가 보네 그려. 그건 그렇구 어쩔래? 멀쩡한 물동이 이렇게 박살 냈으닌게 니가 물어내야지. 안 그러냐?”

주현이 어머니는 화가 덜 풀리신 듯 목청을 높여 말씀하셨다. 그러자 울음을 터트리던 인식이가 물에 젖은 굴렁쇠를 들고 집으로 향해 뛰어가려 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시던 주현이 어머니가 다시 소릴 지르셨다.

“야! 저놈 좀 보라구. 어른이 말두 다 안 끝났는디 그놈에 구렁쇠만 소중헌가 뒤도 안 돌아보고 꽁무니 빼구 도망가는 것 좀 봐. 야! 이놈아 거기 안 설래? 참 애비 없이 큰 놈이라 하는 짓거리가 확실하게 틀리는구먼.”

그렇게 분이 덜 풀리신 모습으로 말씀을 하시는데 도망치듯 뛰어가던 인식이가 머리를 돌려 주현이 어머니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했다.

“지가유. 잘못했으닌게 울 엄니헌티 말해서 물동이는 새걸루 사 주면 되는 건디, 왜 돌아가신 우리 아버지까장 들먹이남유? 우리 아버지가 무신 잘못했다구.”

말을 마친 인식이가 다시 앞을 향해 뛰어가자 멍하신 모습으로 바라보시던 주현이 어머니가
더욱 화가 난 목소리로 말을 하셨다.

“와! 저놈 봐라 눈을 똑바루 뜨구 말대꾸를 다 허네 참 기가 막혀서 말이 안 나올려구 허네.”

주현이 어머니께서 분이 덜 풀린 모습으로 주섬주섬 깨어진 물동이 조각들을 주워 모으려 했다. 그러자 주현이 어머니가 넘어지실 때부터 나오려는 웃음을 억지로 참고 있었던 동네 아주머니들이 함께 거들어 깨어진 조각들을 줍고 계셨다.

그런 모습을 바라보는 내 판단은 그랬다. 모두 다 주현이 어머니의 말씀이 옳았지만 마지막 부분에 하신 ‘애비 없이 큰 놈’이라는 말이 그리 언짢다 못해 듣기에 한없이 싫어졌다.

그렇게 한동안의 소란이 조금 가라앉는 듯했는데 인식이가 전하는 말에 화가 잔뜩 나신 듯 인식이 어머니께서 여차하면 싸울 듯이 두 팔 소매를 걷어붙이고 우물가로 달려와 주현이 어머니에게 따지듯 달려드셨다.

“아니, 주현에미 나랑 말 좀 혀 보더라구. 그래 어린 것이 실수를 저질렀으닌게 물동이야 당연히 물어 줘야 허는 건데, 그걸 가지구 아무리 화가 난다구 혀두 할 말 못할 말이 따루 있지 그 어린것헌티 모지락스럽게 그런 말혀야 되는감. 뭣 땀시 죽은 지 애비는 들먹거리냐구?”

인식이 어머니가 화가 덜 풀리신 듯 목청을 높이시자 그릇 조각을 줍고 있던 주현이 어머니가 지지 않으시려는 듯 말을 받아치셨다.

“그럼, 화가 나서 저보다 어른인 내가 말을 하고 있는데 한마디 말대답두 않구 그냥 가버리는데, 누구라두 그 입장이 되면 화가 나서 그런 말이 나올 수두 있지유. 뭘 그걸 가지구 큰소리를 다 치시구 그런데유?”

그러자 인식이 어머니가 어이가 없으시다는 얼굴로 다시 목소리를 높이셨다.

“아니, 시방 그걸 말이라구 허는 기여? 그걸 말이라구 허냐구? 그려 자네는 운이 좋아 그때 난리를 잘 피해 가서 남편이랑 살고 있지만 나는 복두 지질허게 없는 년이라 지 에비 그렇게 죽어나가구 혼자 몸부림치면서 사는데 인간이라면 그런 말 함부루 허면 못쓰는 법이여. 그리구 자식 키우는 사람 넘 자식 흉보지 말랬다구 그 집 자식들은 살아 가면서 뭔 일을 저질를 줄 알구 그러는 기여?”

인식이 어머니께서 입 언저리에 침이 배어나도록 소리를 치시자 주현이 어머니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시며 말을 이으셨다.

“그럼 내가 사람이 아니란 말인감유? 그리구 내 새끼가 뭔 일을 저질른다구 허는디, 지금 나헌티 악담을 하는 거유?”

그렇게 점점 시끄러워지자 우물가에 울타리가 맞닿은 집들에서 어른들이 하나둘씩 나와 우물가로 모이고 삼식이네 집 마당에서 노시던 동네 어른들이 무슨 큰일이 있나 싶어 뛰어오셔 그중에 이장님과 삼식이네 아버지 모습도 보였다.
그렇게 밖이 소란하자 얼마 후 뜨개질을 하시던 어머니가 옥순이 어머니와 함께 오시고 그 뒤를 따라 옥순이도 걸어오고 있었다.

“그려. 그러니까 끝까지 그 말헌 게 아무렇지 않다는 말이네? 허긴 그리 뻔뻔허닌게 ‘봉이 김선달이가 대동강물인가 팔아먹었다.’는 말처럼 나라 땅에다가 내 배 째라 하면서 농사를 짓구 살지. 그런 짓두 보통 사람이 허는 건감 얼굴이 소가죽처럼 두꺼워야 허는 거여.”

인식이 어머니가 비아냥거리듯이 말씀을 하시자 기다린 듯 주현이 어머니도 뒤질 새라 큰소리로 말을 받아치셨다.

“아니! 남이사 전봇대루 이빨을 쑤시던지 말던지 무신 상관이래유? 그해 가뭄에 굶어 죽지 못혀서 갈밭 일굴 때 성님이 흙 한 삽이라도 파 줬남유? 그리구 그때는 성님네두 먹구 살만 했으닌게 그런 말 쉽게 내뱉고 죽두 못 먹구 살은 사람 심정 몰랐것지만, 삼 일 굶어 도둑질 안 하는 사람 없더라구 참말루 그때는 눈에 뵈는 게 없더라구유. 그리구 성님만 그렇게 깨끗한 척 하지 마세유. 봉사가 눈감구 있어두 세월 가는 건 안다구 말이사 바른말이지, 성님은 그래두 기순이네가 동네를 떠나기 전까장은 미군부대서 나오는 깡통이랑 많이 얻어먹은 모양이데유? 나사 사람이 이렇게 못생겨서 따돌렸는지는 몰라두 동네 사람들 죄다 씹구 다니는 껌 쪼가리 하나 얻어먹은 것 없으닌게 하늘에 두구 맹세하는디 양심에 찔릴 것 하나 없구 이것저것 다 얻어 먹구나서 뒤에서 흉 보구 소문을 내구 다니닌께 기순이 에미가 동네 부끄럽구 챙피혀서 못 견디구 간거 아닌감유? 왜, 내 말이 틀렸남유? 그리구 가만히 말 들어보닌께 성님두 그집 흉께나 보구 다닌 모양이던디 절대루 않인감유?”

한동안 거침새 없이 내뱉는 주현이 어머니 말에 기순이 누나네와 연관성이 있었던 몇몇 사람들은 그 말 듣기가 영 거북한지 엉뚱한 곳으로 머리를 돌렸다. 사태가 더 거칠어질 것 같이 보이자 이장님이 앞으로 나서 말싸움을 말리려 하셨다.

“삼식이네 집에서 놀다가 하두 시끄러워서 막 달려오느라구 깊은 내막은 잘 모르것는디, 원만하면 두 분이 화를 푸시고 그만들 집으로 돌아가세유. 그 지나간 얘기들 서로 들춰내서 흉보면 뭐시 그리 좋은감유? 동네 애들두 다덜 두 눈들 뜨고서 쳐다보구 있는디. 뭘 보구 듣구 배우것시유. 그러니 어여 싸게들 집으로 들어 가시유.”

이장님이 조금은 화가 누그러지신 듯한 인식이 어머니와 함께 집으로 향했고 주현이 어머니도 한 손에 똬리를 들고 고샅길로 들어서 집을 향해 걸어가셨다.

혼자서 걸어가는 언덕길이 조금은 적적해 보였는지? 냉기 서린 초저녁 바람이 가볍게 어깨를 스쳐 지났다. 산마루에 우뚝 선 노송 한 그루는 저 혼자만 알고 있는 아득한 옛이야기를 하나쯤 들려주려는지 한동안 닫았던 입을 터 바람결에 소릴 내려는 듯해 보였다.
서둘러 밤잠을 준비하는 산새들은 둥지를 찾아 날고 짙은 밤색 줄무늬 선명한 다람쥐는 저도 급했는지 이끼바위 위를 방정스레 뛰어넘으니 그런 가벼운 몸놀림을 꾸짖듯이 산은 두 눈을 커다랗게 뜨는 듯했다.

기울어 가는 저녁 해 아쉬워하는 눈빛으로 애태우는 나들목엔 주춤거리는 발걸음 석양(夕陽)이 손끝으로 등을 밀어 발걸음을 재촉하는데 밀려오는 어둠살만 저만큼 앞서 가고 있었다.
눈에 익은 산들이 어둠에 가려 걷는 길이 흐릿했다. 문득 산을 바라보니 세상을 떠나신 내 아버지의 환영이 떠올라 아린 가슴 삭히려 오늘도 어제처럼 그 자리에 한참을 그리 우두커니 서 있고 말았다.
살아온 나날 속에 찢겨지고 조각난 아픔이 남겨 놓은 누덕누덕 묻어오는 크고 작은 시름들은 외눈박이 빨간 신호등 불빛이 흐릿하게 보이는 발길 뜸한 시골 작은 채운역에 넉넉하리만큼 멈춰 선 밤 열차에 실려 보내 훌훌 털어내고만 싶었다.
목록으로

 

Copyrigt By 들메로 가는 길 All right reserved.
Webpage Administrator doorisk@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