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글, 사진 등의 저작물에 대한 무단복제를 금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들메로 가는 길 - 155 조회 : 1,582




끄물끄물한 겨울 하늘이 시원스럽게 탁 트인 논산평야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득히 바라보이는 지평선은 하늘과 맞닿은 것 같이 아물아물하게 보였다.
동쪽 끝머리 산릉선을 타고 줄져 늘어선 철제(鐵製) 송전탑(送電塔)이 거리가 먼만큼이나 아득하게 자릴 하고 있었다. 다붓다붓한 검푸른 측백나무 울타리가 감싸고 있는 국민학교 건물은 언제나 단연(斷然)한 모습으로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아침으로 햇살이 봉창을 통해 깃들기는 했지만 방안은 습기로 다소 눅눅했다. 방벽 아랫부분의 굽도리에 검퍼렇게 번져난 쾌쾌한 곰팡이 냄새가 다소 거북할지라도 이미 몸에 배일대로 배었다.
매캐한 연기가 방벽 틈사이로 미세하게 스며드는 부엌에서는 ‘달그락달그락’ 그릇 부딪는 소리가 들려왔다.

잠자리에서 일어나 이불을 개키고 세수를 하려 방 문 밖으로 나섰다. 그래도 온기가 서리던 방안에 있다 밖으로 나와서 그런지 추위에 온몸이 으스스해 자연스레 부엌 아궁이 앞으로 다가섰다.
검게 그을린 아궁이의 불 속을 부지깽이로 들썩이니 ‘화르륵’ 파란 불줄기가 다시금 되살아났다. 그래서 불길을 살리려고 삭정이를 꺾어 넣었다. 잘려 나간 삭정이의 마디 끝으로 뿌연 거품이 끓어올라 진한 송진(松津) 냄새 물씬 묻어났다. ‘타닥타닥’ 소릴 내며 불길이 타올라 솥 속에 들어 있는 콩나물 줄거리가 익어가는 비릿함이 온몸으로 배어 왔다.
그렇게 산 밑 작은 초가집의 겨울 아침은 평온하게 시작되었다. 그런 순수한 모습들이 세월이 흘러 먼 훗날에도 내 마음속에 지워지질 않길 바랐다.

바람이 알맞게 불어 햇살은 눈 시릴 만큼 다스하게 비치고 언덕배기 갈참나무 우듬지 위에는 동네 아이들이 띄운 방패연 두서너 개가 단아한 모습으로 머리를 갸웃거리며 하늘 높이 떠올랐다.
그런 모습에 함께 신이 나는지 방죽가에 높다랗게 서 있는 두 그루 미루나무도 몸을 곧추세우고 있었다. 그리고 서로 뜻이 모아진 아이들은 연줄을 서로 얽어 기를 써 연싸움을 하고 있었다.
약삭빠른 아이들은 깨어진 하얀 사기그릇 조각을 모아 칠이 벗겨져 반질반질한 군용 철모 안에 넣고 망치로 곱게 빻았다. 그런 다음 두꺼운 종이 위에 뽀얗게 빻아진 가루를 올려놓고 아교(阿膠)를 끓여 녹인 물에 연실을 담가 연자새에 감아 두꺼운 종이 위에 뽀얗게 빻아진 가루를 올려놓고 연자새에 감긴 실을 풀었다.
바람 따라 풀려 나가는 연실에 곱게 빻은 사기그릇 가루가 묻어나 연싸움을 하게 되면 눈에 잘 보이지 않는 미세하게 조각난 날카로운 날에 상대방의 연실이 걸리면 적당히 밀고 당겨 연실을 끊어 놓았다. 실이 끊긴 연은 하늘로 너울너울 날아가 높다란 나뭇가지 위에 힘없이 내려앉아 걸렸다.

동구 밖 논두렁에는 아이들이 손에 몽둥이를 들고 쥐구멍에 불을 놓고 있었다. 연기가 구멍 안으로 가득 들어가게 한 후 구멍 앞에 바짝 다가서 연기에 호흡이 곤란하여 더 이상 견디질 못하고 굴 밖으로 튀어나오는 들쥐를 때려잡으며 놀고 있었다.
사람 먹을 것도 모자랐던 그 시절이었지만 번식력이 강한 쥐들은 그리도 많았다. 뒷간에서 볼일을 보고 있으려면 볏짚 거적사이로 쥐가 까만 눈을 번뜩거리며 약을 올리듯이 바라보다 몸을 조금만 움직이려 하면 후다닥 도망을 쳤다.

이제 본격적인 농한기 철로 들어서자 동네 몇몇 집에서는 부업으로 가마니를 짰다. ‘타그닥 타그닥’ 가마니를 짜는 소리가 좁은 고샅길로 심심찮게 흘러나왔다. 작업의 모든 과정을 사람의 손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그 시절이었다.
가마니틀에 두 사람이 매달려 볏짚으로 새끼를 꼬아 날을 만들고 짚을 씨로 하여 가마니를 짰다. 한사람은 가마니틀 앞에 앉아 바디와 연결된 나무 발판을 왼발로 밟아 바디의 날이 위로 올라가 날이 앞과 뒤로 벌어지게 했다.
그러면 옆에서 기다리던 또 한사람이 바늘 코에 재빨리 볏짚을 집어넣어 나무 발판을 밟아 바디가 세차게 떨어져 가마니를 짜는 그런 수동식 기계였다.

동네 고샅길 연자방앗간 앞에 이르자 마을 이장님의 모습이 보였다. 동네에 공동으로 사용하는 기물을 보관한 사랑방에서 혼례에 쓰는 기물들을 조심스레 하나 둘씩 꺼내고 계셨다. 아마도 내일 있을 종금이 누나 혼례식 때 쓸려는 것 같았다.
초례청 마당에 쳐 놓으려는지 널따란 차일과 혼례복인 신랑이 입는 청색의 단령과 사모관대, 신발인 목화와 신부가 입을 화려한 무늬의 활옷과 원삼 그리고 족두리를 조심스레 꺼내셨다.
호기심에 옆으로 가까이 다가서 바라보았다. 방안에는 풍물놀이에 쓰이는 장구와 북 그리고 징과 꽹과리도 있었다. 그리고 농사일 할 때 세우는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라고 쓰인 농기(農旗)도 보였다.
힘 좋은 기성이 형이 차일을 두 손으로 번쩍 들어 지게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맞은편 담 너머 종구네 집 마당에 종구네 아버지가 있는지 없는지 두리번거려 살펴보며 정희 누나가 보고 싶었는지 담 너머로 힐끔힐끔 쳐다보고 있었다.
남들은 하나 둘 혼례를 이루는데 늦가을은커녕 추위가 닥쳐오고 뱃속에 아기는 자꾸만 자라고 있는데 그놈의 종구 아버지가 황소고집으로 반대를 하여 아무런 대책도 없이 세월만 가니 기성이 형의 속이 마냥 타 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우물가에 가까이 다가서자 진식이네 집 울타리 너머로 진식이 어머니와 진식이가 다투는 소리가 들려 귀를 기울였다. 며칠 전에 주현이 어머니와 있었던 굴렁쇠 일로 진식이 어머니가 굴렁쇠를 집안 어딘가에 감춰 놓아 찾을 수 없자 진식이가 발을 구르면서 굴렁쇠를 달라고 떼를 쓰고 있었다.
아주머니는 또 사고를 저질러 생으로 남의 물동이를 물어 줄 것 같아 완강하게 거절을 하고 있었다. 그러자 진식이가 오만상을 잔뜩 찌푸리고 화를 풀듯 애꿎게 대문짝을 밀치고 밖으로 나서자 진식이 어머니가 진식이 뒤통수에 대고 소릴 버럭 지르셨다.

“저 주리를 틀 놈 허는 짓거리 좀 봐. 가뜩이나 똥구녁 찢어지게 읍시 사는 것두 서러운디, 그나마 쪼매 남은 복마저 몽땅 털어버릴려구 멀쩡한 대문짝은 차고 지라를 허는지 모르것네. 네 이 놈에 자식 난중에 집에 들어오기만 혀 봐라. 내 가만두는가!”

샘터 앞쪽 삼식이네 집에서는 종금이 누나 잔치에 쓸 돼지를 잡으려고 삼식이 아버지가 숫돌에 칼을 갈아 시퍼렇게 날을 세우고 있어 동네 어른들이 돼지를 잡는 구경도 할 겸 겸사겸사해서 마당가에 쌓아 놓은 볏짚 더미 양지바른 쪽에 모여 있었다.
우물가에선 삼식이 어머니가 잔칫날에 쓸 홍어를 다듬고 방앗간 일을 하시는 순태 아저씨가 미나리꽝에서 홍어무침에 넣을 미나리를 낫으로 가지런하게 베고 있었다.

동네 아주머니들은 종금이 누나네 잔칫집 일을 거들어 고샅길로 약속한 것처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걸어가고 있었다. 자못 궁금해지는 마음에 뒤를 따라 걸어가 종금이 누나네 집 울타리로 집안을 살펴보았다.
마당 한쪽에 흙벽돌을 쌓아 그 위에 검은 솥뚜껑을 뒤집어 올려놓고 장작불을 지펴 종지에서 숟갈로 기름을 떠 고루 흩트리며 넓적하게 전(煎)을 부치고 있었다. 구수한 기름 냄새가 길가로 물씬 풍겨 나와 입 안에 군침이 돌게 했다. 부엌에서는 두 개의 커다란 가마솥 위에 떡시루가 올려 있었다.
솥에서 김이 새 나가지 않게 시루와 솥이 닿은 부분에 쌀겨를 물에 이겨 발라 아궁이에 불을 때고 계신 아주머니들의 웃음소리가 꽤나 크게 담 밖으로 흘러나왔다. 그 어른들 중에는 잔치 일 거두느라 뜨개질을 멈추신 옥순이 어머니와 어머니의 모습도 보였다.
그렇게 동네에 잔치가 있으면 어른들은 물론 어린 아이들까지 모두들 마음이 잔뜩 들 떠있었다.

먹을거리가 그리도 귀했던 때인지라 동네 아이들이 모이면 시루떡과 인절미 그리고 납작한 절편에 노란색 달걀지단에 빨간 고춧가루와 촘촘하게 썬 쪽파가 들어간 보기에도 먹음직스런 국수가 먹고 싶어 누구네 집은 언제 제사를 지내는지 서로 묻고는 했다.
그리고 또 누구네 집 환갑, 진갑 잔칫날은 며칠 남았는지 따져보았다. 특히 볼거리가 많은 시집가고 장가가는 날은 더욱 손꼽아 기다려졌다.
목록으로

 

Copyrigt By 들메로 가는 길 All right reserved.
Webpage Administrator doorisk@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