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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메로 가는 길 - 15 조회 : 2,009




그날도 여늬 날들과 별반 다를 바 없었다.
늘상 그랫듯 역동적으로 솟아오른 장엄한 해는 동쪽머리 그쯤에 듬직하게 떠올랐다.
그리고 다스한 빛을 온 만물들에게 고루 내리비추었다.

보편적 사고로 생각해보면 자연의 변화가 그지없이 준엄하게만 보인다.
허나 반추를 거듭하는 사계의 변화는 변덕스런 우리네 인간의 마음과 그다지 다를바 없는 듯해 보였다.

봄은 인동의 보상을 양껏 받으려는 것처럼 나뭇가지마다 움이 새롭게 터올라 온누리를 신록의 연녹색으로 물들였다.
다스함 속에 마음의 여유를 갖고 저마다 앞을 다퉈 피어나는 화사한 꽃들의 색감에 쉽게 도취되어 감흥을 느낄 수 있었다.
그즈음 봄은 어느 사이 찾아드는 성급한 여름에게 등 떠밀려기 전에 깔금하게 자리를 내어 주었다

여름은 조급하게 찾아와 찌는 무더위로 하절기답게 위세를 잔뜩 부렸다. 그리고 자발맞은 매미소리와 더불어 견뎌내기에 벅찬 심한 갈증을 유발시켰다.
그러다 지칠만 하면 줄찬 장맛비에 우뢰와 폭우로 지긋지긋하게 심술을 부렸다.
조석으로 서늘한 바람이 불었다.
가을을 알리는 한기에도 뜨거운 열기로 돌돌 뭉친 고집을 굽히지 않고 능글거렸다.
허나 끝내는 자연의 법칙에 순응하여 소멸되고 마는 변덕의 표본이었다.

가을은 끈덕지게 들붙으려는 늦여름을 서서히 달래려 했다.
그러다 그도 여의치 않으면 한기로 야별차게 떨쳐냈다.
그리고 여름이 한껏 달궈 결실을 이루워 놓은 곡식들을 넉넉한 품으로 아우러 안았다.
그리하여 저마다 름실하게 살을 찌워 풍요를 부르게 하였다.
끝내 떠남이 아쉬웠나 강변에 가득 들어찬 갈대가 서로
몸을 부벼 울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계절의 비애를 뒤늦게 깨달은 마른 잎들이 하나 둘씩 이별을 고했다

겨울은 느긋한 모습으로 서서히 다가왔다.
끄달림 없이 선하게 자리를 내어 주는 가을을 향해 머쓱하게 눈인사를 건넸다.
처연하게 남겨 진 흔적들이 그도 애처러운지 차분하게 하나 둘씩 지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해 동안 소임을 다한 만물들을 어미의 마음으로 받아 드렸다.
옷고름 풀어헤쳐 따뜻한 품을 내줘 침잠으로 이끌었다.그리고 긴 휴식 속에 동면의 사랑을 고루 베풀어 주었다.
자연은 그런 선한 마음에 화답하듯 온 대지에 은빛 찬란한 백설이 내렸다.

우리 인간들 모두는 주위로 부터 얻어지는 환경적 요인에 그토록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 같았다.
그 굴레 안에서 나름대로 여과를 하여 절제를 하며 살려고 바둥대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그런 생각에 삼스럽게 젖어드는 그런 아침이었다.

상혼에 부대낄대로 부대겨 푸석해진 얼굴에 부시시한 눈으로 잠에서 깨어났다. 하지만 참으로 내 두뇌의 인지능력을 의심할 정도로 혼미로웠다.
그 것은 비단 정신적이나 육체적으로 겹쳐진 피로 뿐만은 아니였다.
오히려 그보다는 내 아버지를 통탄스럽게 잃었기 때문이었다.
마음 속 깊히 응어리져 있는 상처가 차지하는 비중이 컷기 때문인 듯 싶었다.

옆에 당연히 보여야만 될 내 아버지의 모습이 보이질 않아 비록 잠시인들 바보스럽게 내 눈을 의심해 보았다.
더불어 늘상 아주 지겨울 정도로 친숙하게 맡으며 살아 온 내 아버지의 체취였다. 그래서 내 몸에 배일대로 배였는데 그 체취마져 소멸되어 버렸다.
그로 인해 더는 함께 할 수 없는 냉엄한 현실에 그리도 허전하다 못해 애석하기만 했다.

끝내는 벅차오르는 감정을 추스리지 못한 탓에 멍청하게 다시금 울먹여질 수 밖에 없었다.

늘상 함께 하였을 때에는 으례 그렇게 될 것이라 믿고 살았다.
더불어 영원 속에 동고동락 할 것이라는 너무 안이한 생각에 쉽게만 젖어 들고 말았다.
그러나 막상 내 아버지께서 끝내 둘아 올 수 없는 귀천의 먼길을 가슴저리게 떠나시고 말았다.
그렇다 보니 이제서야 소중한 존재가치를 뼈 저림 속에 느끼게 되었다.
이런 우매함으로 빗어지는 뻔뻔한 빈덕스러움이 참으로 가증스럽게 느껴졌다.
그렇듯이 그 모두를 알면서도 나로써는 비애적인 감성이 그 무엇보다 앞 설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를 억울하게 잃었다는 상실감이 극에 달해 기를 써 애통했기 때문이었다.
그로 인해 심신이 지친만큼 무력감이 표출되는 것 같아 아픔을 뼈저리게 체험했다.

그로 인해 허한 가슴은 굵고 예리한 침이 꼽혀 있는 침봉(針峯)처럼 가누기 조차 힘에 겨운 통증을 아침부터 반복해서 느껴야만 했었다.

참으로 사람이 머물면서 남겨 놓았던 흔적의 힘이 이토록 지대할 줄은 미처 생각치도 못했었다.
그랬기에 내 스스로 감당키가 더욱 힘들었다.

그것은 인간의 한계로써는 버텨내기 힘들 수밖에 없는 아주 난폭한 폭풍우였다.
그 바람이 모두를 휩쓸어 갈기갈기 찟어 허트러 놓고 매정하게 지나갔기 때문이었다.

조금은 이른 듯 싶은 아침녘이었다.
부엌에서 달그락 달그락 그릇들이 부딛는 소리가 들려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마루로 나왔다.
아마도 어머니께서 이른 아침부터 아버지의 재우(再虞)를 준비하고 계신 것 같았다.
마른 보릿짚 타는 냄새가 코끝에 매캐하게 느겨지면서도 친숙하게 와닿았다.

마루에서 내려서려는데 활작 열려진 안방의 모습이 여실히 보였다.
그래서 잠시 발을 멈추고 착찹한 마음으로 자세히 드려다 보았다.

눈 안에 맨 먼저 들어 오는 것은 아랫목 바로 윗벽에 걸려 있는 액자 안에 소중하게 담겨 있는 내 아버지와 어머니의 결혼식 때 찍은 색이 바래져가는 사진이었다.
그 액자 아랫부분에 고추와 부랄을 시원스럽게 홀딱 내놓고 찍은 내 돌 사진이 작은만큼이나 곱살하게 담겨 있었다.

그 다음으로 보이는 것은 봉창문 앞에 놓여 있는 소나무 판자로 만든 책상과 걸상이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책상에는 설합이 하나도 달려있지 않았다.

그 이유는 목공예에 전혀 경험이 없으신 아버지께서 만드셨기 때문이었다.
강경 읍내에 있는 목재소에서 소나무 판자를 구입하시여 손수 만드신 책상이었다.
기술에 한계가 그쯤이라 설합은 아예 만드실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래서 어딘가 모르게 어설퍼 보이는 책상이었다.
내년 봄에 내가 국민학교에 입학을 하게 되면 선물로 물려주신다고 귀가 아프도록 말씀을 하셨다.

그랬던 아버지께서 그 약속을 지키기는 커녕 내 이름 석자도 부르지 못하고 눈을 감으시고 말았다.
그러니 다시금 생각을 해보아도 억장이 무너지고도 남을 일이었다.

아버지의 손 때가 묻어난 그 책상 위에는 불과 며칠 전에 몇 개비를 피우시다 놓고 나가신 샛별 담배 갑이 쓸쓸하게 놓여 있었다.

여법 굵은 나무의 밑둥지를 잘라 등걸의 가운데 부분을 둥그렇게 파서 만들어 놓은 나무재떨이도 빈 공간을 채워주고 있었다.
그리고 또 하나 그 당시에는 귀하기 힘들다는 미제 파카 만년필 한자루도 주인을 잃은 채 덩그라니 놓여 있었다.
그런 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지고 말았다.

밖으로 봉창문이 달려 있는 벽 위에는 두 게의 액자 안에 아주 소중하게 보관되어 있는 감사장 두 장이 들어 있었다.

그 감사장은 그 당시의 군수와 경찰서장으로 부터 받은 것이었다.
그리고 감사장의 하단에는 감사장을 수여한 날짜가 기록되어 있었는데 한 장은 '단기4280년 4월23일"이였고 또 다른 한 장은"단기 "4281년 9월25"일이었다.
좀 더 자세히 설명을 하자면 " 한국전쟁"이 단기4283년 6월25일에 일어 났다.
그러니 이 땅에 전쟁의 참화가 있기 한두 해 전에 수여 받은 감사장들인 셈이었다.

무슨 공로를 그리 크게 세우셨기에 또는 지역사회 발전에 무슨 헌신적인 기여를 하셨기에 그에 상응하는 감사의 표시로 받았는지는 정말로 모를 뿐이었다.

그 때는 그 것이 그리도 대단한 것처럼 보여 무슨 큰 힘이나 되는 것인줄 알았다.그래서 때론 또래들에게 은연 중에 자랑을 하여 뽐내기도 하였다.

그로 부터 세월이 흘러서도 감사장에 기록된 날짜를 기억하게 된 근본적인 이유가 충분하게 있었다.
내 아버지께서 그렇게 비운으로 운명을 달리 하시면서 내 어머니와 어린 나에게 남겨주신 유일한 유산 아닌 유산이였기 때문이였다.

막말로 어머니에 말씀대로 아버지께서 어머니에게 장가를 드셨을 때 검정 고무 줄이 든 옥광목 팬티 한장을 달랑 입고 오셨다고 하셨다.
아버지의 집안사정이 그렇게 간고하다 보니 아버지께서도 조상님들로부터 물려 받은 재산이 전무하였다.
그로 인해 나에게 물려주실 논과 밭떼기는 애초부터 아예 없어 나 또한 단 한 평의 땅도 물려 받질 못했다.
어디 그 뿐이랴 족보에 대한 이야기 조차 아예 들어보지도 못했다.
그 족보가 무엇이며 어떻게 생긴 것인지 보지도 못하고 컸다.

그저 동네 어른들이 아주 화가 단단히 나쎴을 때 '족보도 없는 상놈에 자식이다.' 라고 하시는 말씀을 가끔 들었다.
때문에 족보라는 것에 대한 생각을 아주 막연하게나마 해 본 적이 더러는 있었다.

그러면서도 어머니께서는 그 놈에 감사장이 뭐 그리 대단한 것이라고 아주 오랜 세월 동안 신주단지 모시듯이 보관을 하셨다.
심지어 어느 곳으로 이사를 가더라도 내 어머니께서는 제일 먼저 감사장이 들어 있는 액자 부터 챙기셨다.

그리고 타지역 사람들 앞에 그 감사장을 은연 중에 내세워 과시를 했었다.
그 때문에 아예 머리 속에 그 감사장에 기재된 날짜 까지도 영구히 입력이 되어 버렸다.

그 당시에 우리집에 어쩌다 손님이 오시면 내 아버지는 물론이었다.
심한 경우에는 내 어머니 까지 그 감사장을 내 아버지의 얼굴과 자존심으로 남들 앞에 곧 잘 내세우려 했다.

속된 말로 그 감사장이 기껏해야 지방자치 단체장과 지역의 치안을 담당하던 관할 경찰서장으로 부터 받은 것에 불과할 뿐이었다.
그래도 두 분 부모님에게는 그 자체가 큰 자존심이자 삶에 위안거리였던 것 같았다.

내 아버지께서는 외할아버지로 부터 물려 받은 앞 들녘에 기름진 논 서마지기와 병막터 부근에 약간 경사진 다랭이 밭이 조금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께서는 애시당초 부터 농삿일에는 별로 흥미가 없었고 주로 바깥 나들이에 열중하셨다.

주로 어룰리시는 계층이 면소재지의 기관장들을 위시해 애국 단체에 가담한 인사들 또는 의용소방대 대원들과 교류를 이루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마을에서는 물론 면내에서 까지 본인이 원했던 원하지 않했던 간에 실속 없는 유지 아닌 유지 행세를 하시게 되였다.

그렇게 대책이 없는 아버지를 대신하여 어머니께서 농삿일을 도맡아 하셨다.
어머니 나름대로는 연약한 여자의 몸에 힘이 부치셨다. 그런데다 아버지께서는 이따금씩 교제비라는 명목으로 크고 작은 금전을 요구하였다.
어머니께서는 동네 여기 저기서 돈을 빌리려고 혀 짧은 소리를 하게 되었다.
때론 제반 사정이 여의치 못해 상대방으로 부터 거절이라도 당하시고 나면 심하게 자존심이 상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 구구절절한 애가 터지는 속 사정을 아는 둥 마는 둥 하시며 그렇게 생활하시는 아버지가 어머니의 입장에서는 늘 불만스러웠다.

그런데 사람 마음이라는 것이 참으로 간사한 것이었다. 어머니께서 어쩌다 면소재지에 볼일이라도 있어 나들이를 하셨을 때였다.
행정 기관에 근무하는 공무원들은 물론 시쳇말로 어깨에 힘께나 주고 다녔던 지서에 근무하는 순사들까지도 먼저 알아보고 정중하게 인사를 했었다.

아닌 말로 지극히 평범한 일개 시골 아낙네에 불과 했다. 그 때 어머니님의 나이가 겨우 삼십 대 초반이었다. 그래도 면소재지에 나가면 사람들이 먼저 알아보고 사모님이라고 일커르면서 깍듯이 해주었다. 아마도 어머니의 마음 속으로는 그런 분위기가 다소 쑥스러우면서도 그리 싫지는 않으셨던 것 같았다.
그래서 언제쯤부터 였는지는 아버지의 그런 바깥 나들이를 암묵적으로 이해를 하셔 그냥 불만없이 받아드리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동네 어른들께서 하시는 말씀처럼 부부는 서로 미우니 고우니 해도 연을 맺고 살다보면 서로 닮아 간다 는 말이 맞는 것 같았다.

일제 강점기에서 해방이 된 격동기의 사회 분위기가 아주 혼란스럽게 조성되었다.
들메마을에도 사람들이 살아가는 곳이다 보니 크고 작은 다툼이 심심찮게 일어나기도 했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 대다수가 소작농들이라 너나할 것 없이 땔나무를 구하기가 그리도 어려웠다.
여름 철 보리바심이 끝나고 나면 남은 보릿짚으로 여름은 겨우 보냈었다.

그리고 가을 추수가 끝나면 새 볏짚으로 각자의 초가집 지붕을 새로 올리고 남은 볏짚으로 늘가을 부터 그 이듬 해 늦은 봄까지 땔나무로 사용하였다.
그런 가운데 몇몇 집은 겨울 농한기에는 가마니를 짜느라 그 마져도 사용하였다.

그저 겉으로 보기에는 채운들녘에 너른 논빼미들이 즐비하게 있어 자연스레 땔깜이 풍족할 것 같이 보였지만 실상은 땔감인 볏짚이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감시가 소홀한 국유림은 물론 심지어는 사유림까지 침범했다.
땅에 떨어진 솔가루를 망태기에 쓸어 담고 그도 량이 차지 않으면 주인 몰래 크고 작은 생나무 가지를 억지로 베었다.
그러다 들키면 산주인이 지서에 고소를 하여 그 일로 순사한테 끌려가게 되었다.

또한 극한 가뭄이 닥치면 채운들녘에 유일한 젖줄인 은진면에 있는 상평저수지의 수조 량이 줄어들었다.
그로 인해 방수량이 턱없이 모자라면 마을 사람들은 너나할 것 없이 논물 때문에 혈안이 되었다.
논에 물을 서로 먼저 대려고 말타툼을 자주 하였다.
그러다 격한 감정들을 자제하질 못해 멱살잡이를 하여 서로 몸을 다치게 되는 경우가 생겨났다.
그래서 크고 작은 송사가 자주 일어나게 되었다.

그런 일들이 자주 발생하게 되는 원인은 하나의 혈연으로 집성을 이룬 마을이 아니였기 때문에 더욱 심했다.
제각기 다른 성씨들이 여기저기에서 옮겨와 고루 섞어 사는 곳이다 보니 조금만 자기에게 불리하다 싶으면 이런저런 체면을 별로 가리지 않고 마구 다툼질을 하였다.

그럴때면 늘 처갓집처럼 서스럼 없이 찾아오는 곳이 바로 우리집이였다. 저마다 볼멘 소리로 각자의 의견을 개진하려고 하였다.
그래서 사건 자체가 그다지 중대한 일이 아니면 읍내 경찰서까지 가지 않고 지서에서 거의가 해결이 되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로 부터 자연스럽게 존경을 받게 되었다.

그런 점을 늘상 못 마땅하게 여기면서 은연 중에 불만을 품고 살아 온 사람이 마을에 있었으니 바로 종구네 아버지였다.

종구네 본향은 전라남도 무등산 자락 아래 대나무가 많이 나는 담양이라는 곳이었다.
맨 처음 우리 동네로 이사를 오게 된 계기는 종구네 어머니 때문이었다.

그때 당시 종구네 어머니는 그곳 담양 지방에서 생산되는 죽세품 중에서 농촌에서 가장 많이 소모하는 대나무 소쿠리를 파는 행상을 했었다.
그 곳 죽세품 공장에서 도매금으로 사서 광주 역까지 나와 호남선 열차를 타고와 강경역이나 논산역에서 내렸다.그리고 채운면과 인근 은진면내의 이 동네 저 동네로 발걸음 하여 소매를 하였다.
교통이 아주 발달되지 못햇던 그 시절 모두가 그랬듯이 행상이라는 것이 참으로 이를 악물고 고생길로 들어서는 그자체였다.

그저 하나라도 더 팔아 볼 욕심에 대소쿠리를 머리에 이고 양쪽 어깨에 둘러메고도 모자라 양손에까지 들고 이집저집을 찾아다니면서 팔았다.
그 무겁고 덩치한질라 큰 짐보따리를 풀었다 다시 싸는 동작을 진종일 반복하여야 하니그 번거로움이란 말로써 표현키 어려울 정도였다.

그런데다 끼니 때만 되면 밥 문제를 해결하는 일도 만만치 않했다.
어쩌다 운이 좋으면 남네 잔치집에서 배를 불리기도 했었다.
그러나 거의 태반은 마을에서 행세께나 하는 집안에 식사 때를 노려서 찾아가 머슴들 밥상에 끼어 식사를 해결하였다.
그도 여의치 못할 경우에는 그저 어렵게 사는 집에서라도 밥 한술을 얻어 찬물에 말아 먹는 것이 고작이었다.

더구나 해가 저물기 시작하면 수년 동안 그 숱한 동네 사람들이 피워댄 담배냄새와 꽤꽤한 발꼬랑내가 나는 사랑방에 잠자리라도 잡아야했다.
그래야 밤이슬을 피해 옹종일 고단했던 몸짝을 붙힐 수 있으니 그 또한 고생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장사를 해야 하는 거래처가 시골 동네다 보니 현금이 그리 흔하질 않아 거의 다 물물교환의 형식이나 외상 거래로 이루워질 수밖에 없었다.

그 시절 교통이 불편하고 통신 시설이 전무했기에 행상을 하는 사람들 중에 입답이 좋은 아낙네들은 그런대로 덕을 볼 수도 있었다.
장사를 하는 틈을 노려 혼기가 찬 집들을 일부러 찾아다니면서 혼삿말을 꺼내 상대로 하여금 환심을 사게하였다.
그래서 끼니는 물론 잠자리까지 아주 편하게 대접을 받았었고 더러는 혼사가 이루워지기도 하여 나름 답례를 받기도 하였다.

그런 힘든 환경에서 면내로 장사를 다니다 보니 그래도 사랑채가 비어 있는 우리집에 방을 얻으러 발걸음이 잦았다.
수년 동안 서로 왕래를 하다 보니 어머니와 종구네 어머니가 서로 막연하게 형님 동생 사이가 되였다.

종구네집이 그곳 담양 땅에서 경작하는 논은 한마지기도 없었다.
겨우 작은 밭떼기에 푸성귀나 조금 가꾸면서 살았다.
그런데다 어쩌다 남에 집 대나무밭 일이나 거들면서 사는 종구네 아버지의 수입이 일정치 않았다.
그나마 대나무밭 일꺼리가 그리 계속적으로 이어지질 못하는 단순 노동력에 의존하다 보니 여섯 식구의 식생활이 어렵기만 하였다.
그래서 종구네 어머니께서 어쩔 수 없이 대소쿠리 장사를 하게 되었다.
전후 사정이 어찌되었던 간에 그토록 처절한 가난을 면치 못하며 살았다.

그러다 일제 강점기 때 그곳 담양을 떠나 이곳 논산에 있는 우리마을로 이사를 오게 되었다. 가진 농토가 없다보니 처음에는 이집저집으로 품을 팔면서 살아오다 읍내 경찰서 사찰계의 간부로 근무했던 ' 마사오' 라는 형사 계장네 집의 농삿일을 거들며 집사도 아닌 머슴살이를 하게 되었다.

그랬었는데 일제가 패망을 하고 해방이 되자 그 많은 돈을 어디서 누구로부터 어떤 경로로 구했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더불어 그 많은 토지를 어떻게 불하 받게 되었는지 마을 사람들 어느 누구도 전후 사정을 전혀 알 수는 없었다.
그저 출처가 분명치 않게 떠도는 소문에 의하면 허겁지겁 본국으로 도망을 치던 일본인 경작주가 엄청나게 많은 금전을 주고 떠났다고 하였다.
그런가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본시 성품이 거칠어 읍내에서 건달배들과 어울렸던 종섭이가 일분인 마사오를 겁박하여 많은 돈을 갈취하여 그 돈으로 그 많은 농토를 사들였다는 말도 심심치 않게 들렸다.
어찌 되었던 간에 해방 이후 종구네 집은 삶에 변곡점을 맞이 하게 되었다.
남부럽지 않은 부농이 되어 삶의 형질이 반대급부적으로 변하고 말았다.
그렇다 보니 개구리가 올챙이 적 생각을 못한다는 속담처럼 자연스럽게 오만해지는 마음에 이제는 갖은 재산이 자기보다 월등하게 적은 내 아버지라는 실체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 같았다.

그런데다 우리 마을에 정착을 하려고 마음을 굳히고 처음 왔을 때였다.

그나마 작은 초가집 한 채라도 살 돈이 없어 오갈데가 없어 전전긍긍 하였다.
그 때 외조부님께서 부락에 구장님으로부터 그런 딱한 사정을 전해듣으시고 우리집 사랑채를 아무런 댓가성 없이 임시로 빌려 주어 살았다.
그런 면에서도 고맙게 생각하기는 커녕 사랑채에 살았을 때 조금은 자존심이 상하는 일도 있었던 같이 보였다.
지금은 사정이 뒤바꿔어 면내에서 내가 낸데 하고 살 정도가 되다 보니 어쩜 아버지의 특출한 그런 모습들이 영 눈에 가시처럼 보였던 것 같았다.

그보다 더 중요했던 것은 다소는 순진했던 소작농들 때문이었다.
어찌되었던 간에 지금껏 자기가 의도했던데로 잘 움직여주어 순탄하게 살고 있었다.
그런데 행여 내 아버지의 개화적인 말에 소작농들이 동요가 되어 반기를 들까 싶은 우려도 다분이 내재되어 있었을 것이라 믿어졌다.

한낮 햇살이 열기로 온 동네를 뜨겁게 달궈 놓으려면 아직은 시간이 좀 이른 듯 싶었다.
여름 한철의 짧은 삶이 그렇게도 애석했는지 동구 밖 느티나무 잎사귀에 몸을 숨긴 매미와 쓰르라미가 자지러지게 목청껏 울어댔다.

닭장 둥우리에서 알들을 꺼내려 하였다.
마루 아래로 내려서 가려는데 어머니께서 나를 부르시며 말씀 하셨다.

" 상민이 시방 계란 끄낼라구 그러지 내가 벌써 죄다 끄내 번졌으닌께 그리 알그라, 에이구 느그 애비 여름을 타는지 통 입맛을 일러버린거 가타서 으찌 겨란이라두 팔아서 서대라도 한 두릅 사다 말려 구워줄려 했는디, 니 애비가 저리 허망하게 가번지구 읍으닌게 말짱 허당이 아니냐,그건 그렇구 어여 느그 애비 지사 지낼 준비나 혀."

아침에 재우를 지내고 나서 어머니께서 '산짐승은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로 굶기지 않는 법이다' 라는 말씀이 생각났다.
그래서 아침 무렵 토끼풀을 뜯으려고 꼴먕태기를 어깨에 메고 동네 방앗간 앞을 지날 때 였다.
동네 또래 아이들과 딱지치기를 하며 놀던 종구가 나를 불러 세웠다.

“야, 상민아!”
“왜?”

별로 반갑지 않아 툭 쏘아붙이듯 대답을 하니 종구가 거들먹거리는 자세로 말을 했다.

“야, 느네 아부지는 인민군 헌티 따꿍총 맞구 죽어따메? 우리 아부지가 그러는디 느네 아부지가 무서워서 싸움두 한번 지대루 못 허구 냅다 도망가다 총 맞구 죽어분졌다구 허든디, 그게 참말이냐?"

종구로 부터 그 말을 듣는 순간 화가 치밀었어도 억지로 참고 종구를 힘껏 노려보며 말을 했다.

" 야, 이 무지렁이 같은 놈아. 내 말 똑바루 들어. 그래두 울 아버지는 우리나라를 위해 용감허게 싸우시다 돌아가셨지만 니네 아부지는 일본놈 종이였다메? 왜? 아니냐?”

그러자 종구도 나를 잔뜩 노려보면서 절대 지지 않으려고 말을 하였다.

“뭐라고? 너 시방 헌 말 책임져야 혀, 내가 울 아부지헌티 안 일르나 봐라!”
“그래 좋다구, 얼마든지 혀봐. 나, 니네 아부지 하나두 겁 안 나닌께.”

나를 노려보는 종구의 눈과 그리고 종구를 보는 내 눈에서 미움이 불꽃처럼 타올랐다.
그날 이후 나와 종구는 연자방앗간 놀이터는 물론 어쩌다 고샅길을 오가며 얼굴이 마주쳐도 고개를 싹 돌려 외면을 하기 시작했다.
겨우 삼십 가구를 넘을 둥 말 둥 한 작은 동네에도 사는 형편에 따라 빈부의 차이가 극심하기만 했다.
얽히고설켜 사는 모습들의 힘에 균형이 재산을 넉넉하게 가진 자에게 자연스럽게 쏠릴 수밖에 없었다.

어둡기만 했던 그 시절이였지만 가진 자들의 오만스런 모습이 받아드리기 거북스러웠다. 그러나 그때는 종구네 집에서 장리변을 얻어 쓰기 바로 직전이었다.
그러니 그들의 눈치를 보며 살 이유가 전혀 없어 암팡지게 행동할 수 있었다.

다시 말하면 두 집 사이에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어 종구를 대하기에 마음이 홀가분할 때였다.
동네에서 다른 집들이 빚에 억눌려 종구 아버지 눈치를 살펴가며 사는 것처럼 기가 죽어 살 일도 없었고 그 집 눈치를 볼 일도 전혀 없었다.

더불어 운동 신경도 종구보다는 월등하게 뛰어났기에 나름대로 긍지와 자부심을 갖을 수 있었다.
그런 탓에 종구와 말다툼 끝에 멱살잡이라도 하게 되면 있는 힘을 다해 실컷 두들겨 때릴 수 있는 자신감이 팽배해 있었다.
비록 처해진 환경이 극도로 열약했지만 정신력만큼은 강인해지고 싶었다.
그래서 종구뿐만이 아니라 그 어느 누구에게도 뒤지고 싶지 않았다.

물론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도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허전하게 텅 비워진 마음이나 늘 갈망하였다.
싱그런 아침 이슬처럼 깨끗하고 투명한 삶을 내 어머니와 더불어 오랫토록 살고만 싶었다.
척박한 땅 돌틈 속에서도 살아남으려 억척스럽게 뿌리를 뻗어 내리는 칡뿌리 보다 더 끈질기게 살아야만 했다.
아니 그렇게라도 버텨 살아남아야만 했다.
야멸찬 세속에 강요되어 주어진 열약한 환경 속에서 더이상에 별다른 선택이 있을리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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