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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메로 가는 길 - 159 조회 : 1,442




밤새껏 새하얀 눈이 푹신 내렸다. 백옥(白玉)보다 더 하얀 눈이 온 대지를 자애로운 어미의 품처럼 포근하게 껴안고 있었다. 흰 눈 속에 가지만을 앙상하게 드러낸 고목이 홀로 버텨 서 있는 산마루턱 너머 얼마큼 걸어가면 동화 속에 나올 법한 새하얀 눈 속에 작은 마을이 소담스럽게 모습을 드러냈다.
지붕위에 하얀 눈을 가득 이고 있는 초가집들이 오붓하게 머릴 맞닿고 있는 모습이 정감(情感) 어리게 눈 안으로 쏘옥 들어왔다. 징검다리를 건너 조약돌이 서로 몸을 부딪는 개울가를 건너서면 고요 속에 생소한 또 하나의 드넓은 설원(雪原)을 만날 수 있었다.
자연의 섭리는 그런 모습을 한 점도 놓치고 싶지 않았나 보다. 저만의 화폭(畵幅)에 가지런한 붓끝으로 섬세히 채색을 하여 점점이 뚜렷하게 드러나는 한 폭의 수려(秀麗)한 수묵화(水墨畵)를 그려 놓았다. 눈으로 보이는 그런 모습들의 경이로움에 나도 모르게 그만 푹 빠져들고 말았다.

윤회를 반복하는 계절은 그렇게 겨울의 한 가운데쯤에서 느릿하게 머물고 있었다. 소소(炤炤)하게 부는 바람에 몸을 떠는 마른 나뭇가지마다 내려쌓이는 눈으로 다붓한 산 밑 초가집 문창호지가 희다 못해 파르스름하게 보였다.
오후 한나절을 비켜선 해는 어제처럼 그 자리에 어눌하게 머물고 옴팡지게 내려쌓인 눈이 앞산과 온 들녘을 뒤덮어 피폐(疲弊)한 겨울 삶의 넋을 건지려는 듯했다. 숙연해지려는 마음을 애써 태연한 척 감추려 산모퉁이를 바라보았다.
기차는 눈 덮인 들녘을 동서로 가르며 세찬 질주를 했다. 달려가는 기차가 내뿜는 검은 연기가 흰 눈에 반사되어 여느 때보다 더욱 또렷하게 보였다. 그리고 밤새 굶주렸던 바람이 참았던 요동을 다시 쳐 세태에 찌든 온갖 시름 모다 쓸어안고 가려는 것 같았다.

내린 눈이 다보록하게 쌓여 지워 버린 밭둑길을 어림짐작으로 더듬더듬 살펴 걸었다. 발밑에 밟혀 오는 눈 소리가 ‘뽀드득뽀드득’ 들려오고 발목까지 차오르는 눈이 신발 속으로 서서히 젖어들어 발이 시려왔다.
냇가에 빼곡하게 들어차 몸부림치는 억새를 마구 휩쓰는 바람이 허한 가슴을 마음껏 적셔 주었다. 울퉁불퉁하게 돋은 둔덕쪽 으로 흐트러진 작은 짐승의 발자국이 보여 아마도 몸 빠른 족제비가 새살스레 지나간 듯했다.

눈발이 서서히 잦아들자 전신주 줄 위에 듬성듬성 쌓였던 눈이 바람에 힘없이 흩뿌려지고 마을 앞 둥구나무 가지들은 저마다 흰 눈을 한 움큼씩 움켜쥐고 선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고샅길 입구에는 동네 강아지들이 무엇이 그리도 신이 나는지 소갈머리 없이 뛰놀고 있었다. 골목길 땅 바닥은 햇살에 매끈매끈하게 보여 물동이를 이고 가는 아낙네들의 발걸음이 퍽이나 조심스러워 보였다.

동구 밖 길모퉁이에는 진식이 어머니가 정신 없이 도망치는 진식이를 향해 조금은 성난 어투로 소리를 지르셨다.

“참말루 내가 저놈 때문에 못살것네, 못살것어. 아 글쎄, 탕제 끓일 때하구 지 애비 두루마기 다릴 때 쓸라구 비싼 돈 주고 사다 놓은 숯을 뭐시냐 그놈에 눈사람인가를 만든다구 고망쥐 새끼마냥 훔쳐서 달아나니 저걸 죽이지두 못허구 살리지두 못허니 어쩌면 좋디야. 참말루 내 속으로 낳았지만 별종 맞지, 별종 맞어.”

성이 덜 풀린 듯 진식이 어머니께서 걸음을 멈추고 동네 아이들과 뒤섞여 논둔덕을 넘어 도망치는 진식이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계셨다. 정신없이 앞서 뛰어가던 아이가 눈길이 미끄러워 앞으로 넘어져 나뒹굴었다.
그러자 진식이 어머니께서 그리 말썽을 부려 그리 미운 듯싶으면서도 혹여나 내 자식이 넘어져 다칠까 봐 조심스레 바라보고 있었다. 아마도 그것이 감출 수 없는 진정한 모정인 듯싶었다.

아침나절 누군가 만들어 놓은 눈코 입도 없는 작은 눈사람이 토담 위에 앙증맞게 앉아 있었다. 사립문 앞에선 네댓 살 난 꼬맹이가 눈을 한 움큼 뭉쳐 차가운 듯 발그레해진 손으로 거머쥐어 입으로 슬쩍슬쩍 빨고 있었다.
논배미에서는 동네 아이들이 모여 커다랗게 눈덩이를 굴려 눈사람을 그럴듯하게 만들어 머리 위에는 철 지난 밀짚모자를 눌러 씌워 놓고 천진난만하게 웃어대며 서로 눈싸움을 하고 있었다.

‘발 없는 말이 천 리 간다.’고 했다. 이른 새벽 참에 마을을 그렇게 떠난 기성이 형과 정희 누나의 이야기를 온 동네 아이들까지 알고 있었다.
논배미 한 모퉁이에서는 전란 때 동네 이장 일을 보았다는 구실로 종구네 삼촌의 손에 붙들려가 희생된 아버지의 죽음으로 종구네 집을 그리도 원수처럼 알고 사는 인식이가 제 나이 또래들과 어울려 종구네 집을 비아냥거리듯 목청을 놓여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앵두나무 우물가에 동네 처녀 바람났네. 물동이 호미자루 나도 몰래 내던지고 말만 들은 서울로 누굴 찾아서 기성이 형 정희 누나도 단봇짐을 쌌다네.”

종구 누나를 비유하려는 듯 끝 소절 가사를 바꿔 노래를 커다랗게 부르고 있어 웃음이 막 나오려 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종구 아버지를 비웃는 것 같은 그 노랫소리가 종구네 집 식구들 귀에 들어가 또다시 동네가 골 깊은 싸움으로 번져 시끄러워질 것 같아 그쯤에서 멈춰 주길 바랐다.

그 놀이터 앞 밭 자락 한 모퉁이엔 버려져 흉물스럽게 변한 게양대가 있었다. 한국 전란이 한참일 무렵 면 소재지로 입성하는 북한 괴뢰군을 환영하려고 과잉 충성을 보이며 종구네 삼촌이 멀리서도 보이도록 인공기를 게양하려고 세워 놓았다. 그러나 게양대가 세월 지나 비바람에 쓰러진 채 썩어 반쯤 기울어져 있었다.
그런 비운의 역사가 남겨 놓은 참담했던 실상을 알 리 없는 동네 아이들이 어쩌다 숨바꼭질을 할 때는 술래의 자리 정도로 쓸 뿐이었다. 동네 사람들은 그들의 만행에 잔혹했던 지난날의 기억들을 되뇌기 싫어 그 앞을 지나려면 의식적으로 눈길을 피하려 했다.
그 게양대는 종구네 삼촌이 종구네 산에서 베어 온 굵직한 소나무를 베어와 잘 다듬어 세워 놓았던 것이었다. 그랬던 종구네 삼촌은 전쟁이 끝난 후 반공법으로 장기형을 받아 대전 형무소에 수형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러니 한 인간의 삶의 여정이 참으로 개탄스러울 뿐이었다.

그 게양대를 세울 때 기성이 형 아버지께서 서슬 퍼런 그들 앞에 나서 동네 이장 일을 보시던 진식 아버지와 함께 극구 반대를 하셨다. 그 일로 인해 기성이 형 아버지가 반동이란 허울 좋은 미명(美名)하에 강제로 끌려가 억울하게 처형을 당하고 말았다.
그러니 아무리 세월이 흘렀어도 기성이 형네 집과 종구네 집이 겉으로는 애써 참고 사는 듯했지만 그리 썩 달갑지 않은 사이였다.

그런 얽히고 얽힌 사연 때문에 종구네 아버지가 그리도 기성이 형과 정희 누나 두 사람의 결혼을 강력하게 반대를 했다. 그러나 그 무엇도 두 사람의 사랑을 가로막지는 못했다.
부모 세대들이 저질러 놓은 원한 관계를 떠나 진실로 사랑했기에 서로가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면서 살려고 애를 썼다. 허나 두 사람이 그토록 애절하게 사랑을 해도 고향 땅에서는 몸을 섞어 살아갈 수 있는 답을 끝내 구할 수 없어 여명(黎明) 속에 삶의 둥지를 버리고 그리 떠날 수밖에 없었다.

‘사람 훈김이 참 무섭다.’고 동네 어른들이 하신 말씀이 맞는 듯 정희 누나가 그렇게 떠난 종구네 집은 초조하리만큼 적막하기만 했다. 그리도 요란스레 울어대던 혹부리 거위도 눈이 내려 제집으로 들어가 웅크리고 있는지 소리가 나질 않았다.
검정 콜타르를 잔뜩 바른 양철 대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그리고 우직하게 보이는 기와지붕 머리엔 녹아내리는 눈이 듬성듬성 남아 있어 무거움을 더하는 듯 보여 아마도 두 식구가 조금은 먼 곳으로 외출을 한 것 같았다.

별다른 놀이거리가 없었던 그 시절 어쩌다 눈에 띄는 책장이 낡아 해진 만화책은 유일한 눈요깃거리였다. 주현이가 가지고 있는 코주부 삼국지 만화책은 그 인기가 대단하여 동네 아이들이 저마다 순번을 정하여 빌려다 보려고 기를 썼다.
푸른 대숲이 흰 눈에 무겁게 머릴 숙인 주현이네 집에는 안방에서 주현이 어머니가 정월 목전에 읍내 장에 내다 팔려고 대나무로 복조리를 만들고 있었다. 아랫목엔 볏짚을 간추려 열십자 모양으로 메주를 묶어 볏짚의 끝머리를 새끼를 꼬아 매달아 놓았다.
메주에서 나오는 시크름한 냄새가 온 방안으로 가득 배어났다. 아랫방 고구마 둥우리에서 고구마를 꺼내 칼로 깎아 먹고 있는데 아랫방을 바라보고 계시던 주현이 어머니가 우리들을 향해 말씀하셨다.

“야, 이놈들아! 고구마 껍데기를 그렇게 두껍게 깎아 먹으면 어쩌냐? 니들이 배고팠던 시절을 몰라서 그러는디, 옛날 우리들 어렸을 때는 그것두 아깝다고 깍지 않고 껍질째 다 먹었는디. 니들은 그래도 호강을 하고 사는 기여 그리들 알기나 혀?”

주현이 어머니께서 저녁 준비를 서두르시나 방벽에 걸려 있는 수건을 머리에 둘러쓰시고 윗방 쌀독에서 바가지에 쌀을 퍼 담아 부엌으로 나가셨다. 주현이에게 만화책 한 권을 빌려서 손에 들고 노을을 등져 동구 밖을 나섰다.
냇가에 빼곡하게 들어차 몸부림치는 억새를 마구 휩쓰는 바람이 허한 가슴을 마음껏 적셔 주었다. 눈이 쌓인 새하얀 지붕 머리로 아슴아슴 저녁연기 피어올라 해가 기울려 하면 골짜기에 숨어 있던 어둠살이 온 사방을 날름 삼켜 이내 어둠에 잠기려하니 고적한 산골의 밤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다소는 때가 이른 듯싶게 나타나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제가끔 깜빡거리는 작은 별자리 옆을 몇 발짝 비켜선 초저녁달이 선연(鮮然)한 모습으로 떠올랐다. 그런 풍광(風光)이 그리도 고왔지만 뒤척여 잠이 오질 않는 긴 겨울밤에 몸속을 파고드는 세찬 추위만큼이나 겨울밤하늘은 경청(輕淸)하게만 느껴졌다.
더불어 설한(雪寒)의 밤 추위는 빙점을 기점(基點)으로 턱밑으로 치달았다. 달빛 없어 별빛도 한 점 없는 칠흑 같은 밤 추위에 더욱 납작 엎딘 초가집들의 창문으로 새어 나오는 등불들이 쌓인 눈 사이로 새치름하게 빛을 밝혀 나름대로 시골의 정취를 한껏 자아냈다.

마당에서 빤히 바라보이는 언덕배기에 서 있는 갈참나무 머리 위로 복조리 같은 북두칠성의 모습이 선명하게 드러냈다. 홀연히 텃마당에 나가 초록빛 별자리와 무언 속에 교감(交感)을 해 보려 했다.
새하얀 눈에 뒤덮여 비스듬히 몸 기울인 사립짝과 싸리울에 내리는 눈송이 하나하나의 미세한 움직임도 놓치지 않고 눈에 담아 마음 추스르고 싶었다. 그렇게 사계의 끝자락 겨울이 남기는 여운(餘韻)이 나에게 주는 느낌이 왠지 모르게 새롭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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