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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메로 가는 길 - 161 조회 : 1,501




햇살이 점차 가늘어지는 오후로 접어들었다. 드넓기만 한 들녘은 한적한 만큼이나 여유를 부리는 듯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가물가물하게 바라보이는 지평선 바로 그곳엔 그리움 한 자락이 연민(憐憫)으로 돌돌 뭉쳐 서성이고 있었다. 그런 그리움 속에는 이제는 다시 만날 수도 없는 내 아버지와 그나마 얼굴마저도 기억할 수 없는 내 누이에 대한 애틋한 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개울 건너 면소재지로 이어진 오롯한 오솔길은 길손 하나 없어 더없이 고적(孤寂)하기만 했다. 한나절을 벗어난 해는 산릉선 바위틈에 억척스레 몸 붙인 소나무를 제 몸처럼 다스하게 보듬으려 했다.

돌 틈사이로 푸른 이끼가 한줌 햇살에 빼꼼히 모습을 드러냈다. 둔덕에 외롭게 서있는 돌감나무 가지 사이로 싸늘한 바람이 ‘휘’하고 소릴 내며 스쳤다. 그러자 뭇 새들의 재잘거림도 잠시 동안 멈추는 듯했다. 구름 한 자락 느릿느릿 머무는 화산리 마을 초가지붕 머리 위로 오뚝 솟은 교회 십자가가 더욱 성스럽게 보였다.

눈을 돌려 집안을 살펴보니 처마 밑에 주렁주렁 매달린 누런 메주가 나름대로 작은 넉넉함을 말해주는 듯했다. 울 너머로는 사계의 변화를 묵묵히 받아들이는 유순하기 이를 데 없는 사람들이 서로 등 붙여 사는 마을이 사방으로 확 트이게 바라보였다.
그렇게 마을이 들녘 한가운데에 자리를 잡고 있어 어쩌다 낯선 사람 하나라도 동네로 오게 되면 그 모습이 멀리서도 환히 보였다.

동구 밖 나무다리 위에 검정 모자에 우체국 제복을 입고 커다랗게 누런 가죽 가방을 어깨에 둘러멘 우체부 아저씨가 신발에 묻어난 눈을 탈탈 털어내고 있었다. 그러자 엇누빈 겨울옷 흰 저고리에 기다란 검정 치맛자락을 위로 바싹 치켜 올린 기성이 형 어머니가 우체부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혹여나 기성이 형으로부터 무슨 기별(奇別)이라도 있나 싶은 애틋한 마음에 몸보다 발걸음이 앞서는 듯 우체부 아저씨를 향해 잰걸음을 하셨다.
애태우는 노모의 마음과는 달리 우체부 아저씨가 가방 속에서 마을로 오는 우편물을 꺼내 들척이다 고개를 가로저으며 배달될 우편물이 없다고 말을 하자 그늘진 얼굴에 못내 아쉬운 양 한차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리 애태우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이 세상 그 무엇이 그토록 애틋한 모정을 능가할 수 있을까 싶었다. 그와 더불어 숱한 날을 함께 살아오는 동안 서로 사이가 도탑고 행동거지가 성실하였던 동네 형이었기에 그런 노모의 모습이 남달리 애잔하게 보였다. 그리고 마음 한편으로는 기성이 형이 어느 하늘아래 어디에 있더라도 늘 건강하길 빌고 싶었다.

방죽가 언덕배기에는 동네 아이들이 모여 놀고 있었다. 한낮 햇볕에 겉 녹아내린 눈길이 더없이 미끄러워지자 저마다 기다렸다는 듯이 떠들썩하게 미끄럼질을 치며 놀고 있었다.
더러는 빙판 길이 미끄러워 어물쩍어물쩍 몸을 가누질 못하다 그만 넘어져 땅 위에 엉덩방아를 찧기도 했다. 그런 천진난만한 동생들의 모습이 그지없이 평온하게만 보였다.

이른 아침 시발역인 서울을 떠나 남쪽 끝머리 역 목포를 항해 내달려 가는 기관차가 우리들 앞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언덕 위에 있던 아이들이 저마다 반가운 듯 손을 흔들자 열차를 운전하시는 검은 모자 앞에 둘러진 끈을 턱밑에 바짝 졸라맨 기관사 아저씨도 가볍게 웃으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리고 이내 인색하지 않게 한번쯤 짧은 기적을 울려주니 아이들도 답례를 하듯 손을 더욱 높이 흔들어 열차가 시야를 완전히 벗어날 때까지 눈을 모아 바라보고 있었다.

들녘을 가로 질러 조금 멀리 주막집 정류장에 늘쩡거리는 오후 버스가 멈춰 섰다. 읍내 장터에 다녀오는 사람들이 버스에서 내려 큰길가로 발길을 옮기고 있었다. 그러자 놀이에 여념이 없었던 아이들이 멀리 보이더라도 옷차림새와 걸어오는 모습으로 자기들 어머니와 아버지인가 살펴보느라 놀이를 하면서도 핼끔핼끔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자기네 어머니나 또는 아버지 모습이 눈에 띄면 반가운 마음이 앞서 같이 놀던 친구들에게 온다 간다 말도 없이 냉큼 내달려 손을 흔들어 소릴 지르며 뛰어갔다.

그동안 장사를 하시느라 머리를 손질할 겨를이 없었던 어머니가 모처럼 시간적 여유가 생겨 읍네 미장원에 파마를 하러 가셨다. 집으로 돌아오는 시간이 늦으시는지 마을로 걸어오시는 동네 어른들 속에 어머니와 옥순이 어머니의 모습이 보이질 않았다. 아마도 두 분이 모처럼만에 오붓한 시간을 보내는지 느지막이 저녁 막차로 오실 것 같았다.
눈을 돌려 동네 고샅길 입구를 바라보았다. 평소에 성격이 좀 깐깐하고 말 수가 남달리 적어 농사일을 제외하고는 이상하리만큼 좀처럼 동네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를 않는 두툼한 솜바지를 입은 대추나무 집 상두 아버지의 모습이 보였다. 면소재지 염씨네 담뱃가게에서 산 풍년초 서너 봉지를 손에 들고 고샅길 빙판이 미끄러운 듯 주춤거리며 아주 조심스럽게 걸어가고 있었다.

우현이네 집은 내외분이 함께 장에 다녀오시나 우현이 아버지는 한 손에 아가미가 꿰어져 대롱거리는 생태 서너 마리를 들고 오셨다. 그리고 옆에 바짝 붙어 걸어오시는 우현이 어머니는 장짐이 푸짐한지 머리에 보퉁이를 이시고 한 손에는 누런 종이에 지푸라기로 묶은 양잿물 덩어리를 조심스레 들고 오셨다.

얼마큼 뒤에는 진식이 아버지가 어깨에 장짐이 담긴 망태기를 둘러메고 기침을 두어 차례 하시며 걸어오고 있었다. 언덕배기에서 냅다 달려온 진식이는 혹여 커다랗게 둥글고 딱딱하여 잘 깨어지지 않는 눈깔사탕이라도 사오는가 싶어 자꾸만 눈길을 망태기에 모으며 뒤를 따라 가고 있었다.

난로 연통에서 연기가 간질갑게 솟아오르는 지서 앞 철도 건널목을 넘어서는 순아네 소달구지가 보였다. 둥구나무 앞에 할머니 손을 잡고 마중을 나온 순아가 ‘할아버지 빨리 오세유.’하며 들릴락 말락 하게 소리쳤다.

방죽 앞에 이르렀다. 매년 그맘때에 있는 기현이 아버지 제삿날인 듯싶었다. 그래도 이웃에서 함께 살아온 정이 있어 흥남이 아저씨 부인이 부엌에서 제사상에 올릴 음식을 장만하시며 전을 굽고 있는 것 같았다.
알맞게 누른 기름 냄새가 허기를 재촉하여 서둘러 집으로 향하는데 앞산 자락에서 무엇에 쫓기는 듯 다급하게 울어대는 수꿩의 울음소리가 지질맞게 들려왔다.

사립문을 지나 마당 안으로 들어서기가 무섭게 눈에 젖은 축축한 두 발로 귀찮게 달려드는 검둥이를 가볍게 밀쳐냈다. 빛이 환하게 밝은 바깥에서 있다가 갑자기 어두운 방 안에 들어서니 잠시 동안 눈앞이 침침해 지는 것 같았다.
그라도 잠시 못 보았던 식구를 알아보는 듯 순덕이가 웃으며 앞으로 기어 오고 아주머니는 열심히 뜨개질을 하고 계셨다. 순덕이 어머니께서 어머니에게 열심히 배우셨는지? 겉으로 보기에도 이제는 줄을 맞춰 색깔도 넣으실 줄 알고 어느 정도 맵시 있게 뜨시는 것 같았다.

방 안 한쪽 바가지에 담겨 있는 찐 고구마를 한 움큼 입에 베어 물고 닭둥우리를 챙겨 보려 방문 밖을 나섰다. 들녘을 바라보니 마른 햇살이 서서히 어둠 속에 잠기려 하여 노을빛 짙은 만큼이나 막연히 무엇인가 그리워지는 저녁 무렵이 되었다.
형체 없는 막연한 외로움이 오늘도 지나간 어제처럼 허전한 마음으로 파고들어 가슴을 욱죄었다. 허한 마음은 길을 잃은 허깨비를 빼닮아 가려 해 궁색한 변명일지라도 그냥 스쳐간 추정(秋情)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아니 아닐지라도, 정녕 아닐지라도 그렇게만 생각하고 싶었다.

노을빛 아직은 불그레하게 남은 듯싶은데 뒷산 언덕 위에 성급하기 모습을 드러낸 초저녁달은 적막한 산골의 밤을 자발스럽게 서둘러 밝히려 했다. 시간이 흘러 온 주위가 한결 어두워지면 처마 밑에 등불 하나 소담스레 밝혀 내 어머니 돌아오시는 하얀 눈길을 그리 비춰 보고만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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