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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메로 가는 길 - 163 조회 : 1,524




생동의 힘으로 고고히 떠오른 아침 해가 찬연(燦然)한 빛으로 다가와 차가움이 가득 도사린 텃마당에 머물고 있었다. 초가지붕에 쌓인 눈이 녹아내린 추녀 끝엔 길쭉길쭉 노르끄름한 고드름이 대롱대롱 매달렸다.
햇볕에 고드름이 서서히 녹아 내려 물방울이 툭툭 소릴 내어 떨어지고 더러는 무게를 못 견딘 고드름이 퍽 하고 떨어지는 소리에 추녀 밑에 어정대던 닭들이 놀랜 듯 가볍게 푸덕였다.

우뚝 선 산릉선을 넘어 선 찬바람은 텃밭에 다복 쌓인 눈을 가볍게 스쳐 지난 후 울타리에 세차게 부딪쳤다. 그리 의지하고 싶었던 생의 커다란 버팀목이었던 내 아버지가 저 산자락에 누워 계시니 얼마나 추우실까 하는 생각에 가슴이 쓰렸다.
무심한 삭풍이 소리를 드높이고 옹골진 그리움은 때도 없이 다시금 스멀댔다. 뼈가 시리도록 아려오는 아픔은 날짐승의 날카로운 부리에 찢겨 도륙(屠戮)난 살점 같아 처절한 아픔에 비명을 허공을 향해 힘껏 내지르고 싶었다.
그런 마음을 아는 것처럼 매섭게 휘몰아치는 바람이 그 아픔 모두를 다 쓸어 담으려 했다. 그나마 햇살이 또렷한 빛으로 하나의 떨림 없이 내 몸뚱이 정수리로부터 발끝까지 고루 비추었다.
온몸의 숨구멍을 활짝 열어 거짓 없는 햇살의 숨결 하나까지 놓치지 않고 받아드리고 싶었다. 하늘은 창백함이 극에 달해 허(虛)한 만큼 맨얼굴에 희뿌옇게 분칠을 하고 하품을 토해 데면스럽게 입을 벌리고 있었다. 애절함에 겨워 힘들어 하는 그런 마음을 끝내 모르는 채 하는 하늘이 더없이 얄밉기만 했다.

수복하게 쌓인 하얀 눈이 연민스럽게 보이는 들녘 너머로 강경 읍내 모습이 멀어 가까운 듯 오롯하게 보였다. 그곳은 삶의 도약을 위해 거쳐 가야 할 분기점(分岐點)이었다.
그런 읍내의 모습이 마냥 낯설었다. 읍내의 전경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또 하나의 새로운 만남을 앞두고 가끔은 걸쭉한 감동에 쉽게 젖어 설렜으나 감성의 문턱을 밟고 서성거리는 또 하나의 생소함에 조금은 혼란스럽기도 했다.
마치 고난의 계곡에 가녀린 몸짓하는 야생초가 눈물로 방울 맺힌 이슬을 먹고 함초롬히 피어나듯 더는 욕심 없이 투명하게 앞만 보고 가야할 것이니 이 모두 내가 피할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할 몫인 듯싶었다.
마음은 늘 잔잔하여 걱정이 없고 그리 조급하게 서둘지 않으니 욕심도 있을 리 없는 그런 삶을 갈구하건만 주어진 여건의 한계는 늘 그 턱에 머물러 더 부대끼며 살아가야 할 것만 같았다.

그래도 끈끈하게 달라붙는 우리 네 식구의 정이 살아있어 그해 겨울 매섭기만 한 산골 추위도 마음으로는 견딜만했다.

둔덕마루에 몸 움츠린 키 작은 소나무들의 솔잎 끝에 앙증스레 매달린 고드름이 햇살에 반사된 다색(多色)의 영롱한 빛을 보여 바라보기에 더할 나위 없이 탐스러워 허(虛)해지려 하는 마음을 채워주는 것 같았다.
개울물 가장자리부터 얼음 결이 번져나 삭풍이 몰고 오는 추위가 도랑물마저 얼리려 하니 느적느적 겨울 끝 무렵이 봄을 들척일 때면 제일 먼저 피어나는 냄새 매콤한 생강나무의 노란 꽃이 벌써부터 그리워짐에 인간의 심사는 늘 변덕스럽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

긴 시간 동안 먼 거리를 숨차게 달려온 기차는 여정(旅程)의 중반쯤인 채운역에서 잠시 쉼표를 찍듯이 여유롭게 멈춰 서 있었다. 넓은 들녘의 황량함을 더해 주는 듯 ‘원목다리’ 야트막한 언덕에 앙상하게 홀로 서 있는 아카시아 나뭇가지의 머리채를 거센 들녘 바람이 휘어잡고 마구 흔들어 애써 몸 가눔을 하는 모습이 그리도 애처로웠다.

동네 길목 초입 진식이네 사랑방에서는 진식이 할아버지가 장죽에 담배를 피우시려는지 놋재털이에 담배통을 ‘탕탕’ 두드리는 소리가 봉창문 밖으로 날카롭게 들려왔다. 동네 방앗간 사랑방에는 방앗간 일을 보시는 순태 아저씨가 마른 장작으로 군불을 떼시어 불기로 불그레하게 달아오른 얼굴로 아궁이 앞에 앉아 있었다.
동네 어른들이 모여서 소일거리로 화투를 치며 놀고 계신지 검정색 고무신들이 너저분하게 늘어져 있고 드문드문 흰색 고무신도 눈에 띄어 제법 사람들이 많이 모여 노시는 것 같았다.
납작하게 눌려진 횟가루를 곱다랗게 색색으로 인쇄된 기름 먹인 종이로 잘 싸 바른 화투로 군용담요 위에 화투장이 ‘딱딱’ 서로 부딪는 소리가 짧은 추녀 끝에 누런 고드름이 매달린 봉창 너머로 들렸다. 그리고 평소 담배를 태우지 않으시는 성격이 깐깐한 광식이 아버지의 목소리가 커다랗게 들렸다.

“어이 다들 담배 필 만큼 피었으면 인제 그만들 피우라구 오소리를 잡을라구 그러나 뭔 놈에 담배연기가 방 안에 꽉 차서 숨을 못 쉬것네 그려. 어이! 경수 자네가 문 앞에 있으닌께 방문 좀 활짝 열어 버려 연기 좀 싹 빠지라구.”

연자방앗간 모퉁이에는 삼식이 어머니가 술심부름으로 머리 위에 안줏거리를 담은 함지박을 이어 손에 주전자를 들고 방앗간 사랑방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며칠 동안 그리도 요란스레 틀어 놓았던 영택이네 축음기 소리가 뚝 멈췄다.
아무런 말 한자리 없이 집을 나간 그 아주머니를 찾으려 수소문 끝에 멀리 대전까지 찾으러 가셨다는 영택이 아버지가 아직은 집에 돌아오지 않으신 것 같았다.

동네 한가운데 종구네 집엔 그리 며칠 동안 굳게 닫혔던 대문이 엇비스듬히 열려 있었다. 안방에서는 좀처럼 내왕이 없었던 수다스런 방물장수 할머니의 자발스런 웃음소리가 들려와 조금은 이상스럽게 느껴졌다.
정희 누나가 집을 떠나자 집안 살림을 꾸려 나갈 사람이 없어 혹시나 종구 아버지가 흥남이 아저씨처럼 새 부인을 맞이하려는가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호랑이 무늬를 쏙 빼닮은 고양이 한 마리가 누런 등을 잔뜩 구부려 마루 위에 졸고 있는 옥순이네 집에는 어머니가 일거리로 맡아 오신 읍내 사람들의 털옷을 뜨개질 하시고 옥순이 어머니는 옥순이에게 주려는지 긴 스웨터 바지를 뜨고 계셨다.
산 밑에서부터 동네 고샅길을 걸어 옥순이네 집까지의 거리가 먼 거리는 아닌데도 날이 무척 춥기만 하여 더욱 멀게 느껴졌다. 온몸에 한기를 느껴 두 손이 시려와 화롯가에 앉아 있는 옥순이 옆에 끼어 앉아 화롯불 위에 손을 녹이며 어머니에게 말씀을 드렸다.

“엄니! 시방 종구네 집 앞을 지나오는디 그 집에 잘 들어가지도 않던 방물장수 할머니가 종구 아버지하구 방안에서 무신 얘기를 하는지 그 할머니가 시끄럽게 웃고 있던디 왜 그런데?”

머릴 숙여 뜨개질을 하고 계신 어머니 얼굴을 바라보자 어머니께서 손길을 멈추시고 옥순이 어머니를 바라보시며 말씀을 하셨다.

“딸자식 그리 마음 아프게 해서 떠나 보내구 살림할 사람 없으닌께. 그 양반이 되게 급하긴 했던 모양이구먼. 그러닌게 평소에는 얼굴두 잘 안 마주치던 그 할매를 다 불러들였나 보네. 암튼 그 집두 큰일이여 그 큰 살림 꾸려 나갈려면 누군가는 들어와야 헐 건디. 그게 쉬운 일은 아닌께.”

그러자 옥순이 어머니가 거들고 나섰다.

“왜? 아니래 새사람 맞아들이는 일이 어디 그리 쉬운감? 말이사 바른 말이지 총각 새장가가는 것두 아니구 헌 장가 가는 건디, 더군다나 그 양반 성질이 까다로워서 어디 입맛에 맞는 사람이 있을려나 모르것네 어느 집이구 매 마찬가지지만 여자 하나 잘 들어와야지 잘못 들어오면 뭐시냐 영택이 아버지 짝 날라. 에휴 그나저나 영택이 아버지는 그 여편네 찾을라구 대전까지 간지가 벌써 여러 날 지났는디, 아직까장 안 오는 거 보면 못 찾아 헤메고 다니는 모양이구먼, 이 추운 날에 을매나 고생을 할까 넘네 일이지만 참 걱정이 되는구먼 그려.”

그러자 화롯가에 두 눈을 껌벅거리며 두 분이 나누시는 이야기를 관심 있게 듣고 있던 옥순이가 말을 이었다.

“엄니! 그럼 잘만 되면 이번에 종구네 아버지두 장가를 드는 거여? 그렇게만 되면 동네 국수 잔치두 한번 벌리것네 종구는 새엄마 생겨서 좋겄네.”

이야기를 하시느라 뜨개질 일이 잘 안되시는지 고개를 갸웃거리시던 옥순이 어머니가 다시 말씀 하셨다.

“참! 내 정신 좀 봐 이야기에 정신 팔려서 뜨개질 코도 다 까먹어 버렸네. 그리구 옥순이 너는 종구가 뭐시 신바람 나게 좋다구 그러냐? 왜, 너두 이참에 새아버지 하나 얻어 줄까? 종구 부러워하는 거 보닌께 그래야 쓰것구먼 그려.”

그러자 옥순이가 부루퉁해진 얼굴로 조금은 토라진 듯 말을 했다.

“엄니! 시방 그걸 말이라고 혀? 난 그딴 거 정말루 필요 없으닌게 다신 그런 말 하지 마.”

어머니와 옥순이 어머니가 키득키득 웃으셔 나도 뒤따라 웃고 있는데 옥순이가 팔꿈치로 가볍게 툭 치며 약 올리지 마라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올가을에 새로 장가를 든 담 너머 기수 아저씨네 집에는 논산 읍내에 있는 성당에서 미국 신부님과 수녀님 두 분이 오셨다. 동네에서 얼마 전부터 성당에 다니기 시작한 옆집 사시는 기순이 누나네 어머니가 부엌에서 손님들이 드실 음식을 기수 아저씨 부인과 함께 준비하시는지 잔칫집처럼 기름 냄새가 바람에 솔솔 풍겨 와 식탐(食貪)에 슬슬 빠져들게 했다.

며칠 전에 빌려 온 ‘코주부 삼국지’ 만화책을 돌려주려 주현이네 집 마당에 들어섰다. 주현이 어머니가 지난 장날에 사 오신 돼지새끼가 너무 작아 춥지 말라고 돼지움막에 가득 넣어 준 볏짚 검불 사이로 돼지새끼가 파고들어가 모습을 감춰 잘 안 보이자 주현이 어머니께서 말씀을 하셨다.

“아니! 이놈의 돼지새끼는 추위에 얼어 죽었나 왜 이렇게 코빼기두 안 보이는가 모르것네 도대체 어디다가 대가리를 처박고 있는 기여.”

커다란 돼지우리 안을 대나무 작대기로 듬성듬성 뒤척이며 계셨다. 방 벽에서 나는 메주 뜨는 냄새가 가득한 윗방에서 주현이가 인식이 하고 손때 묻은 유리구슬들을 놓고 서로 내기를 하는지 마딘 대추나무로 토막을 내어 만든 작은 윷을 종지 속에 넣고 흔들어 던지며 윷놀이를 하고 있었다.

정오(正午)에 동네 앞을 지나는 화물열차의 진동이 방 문풍지를 울렸다. 점심식사를 하러 집에 가려고 주현이네 집 대문을 나섰다. 먹구름이 짙게 덮어 삼켜버린 하늘이 어두웠던 지나간 나날들처럼 침울하게만 보였다.
그래도 구름 사이를 비집고 얼굴을 빼꼼하게 내미는 해말끔한 한낮 해가 그토록 진저리쳤던 가난의 아픔이 또다시 도래(到來)될까 두려워하는 초조한 내 마음의 끝자락을 그렇게라도 보듬어 주려는 듯 그저 고마울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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