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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메로 가는 길 - 164 조회 : 1,748




아침 해는 여명(黎明)의 옷을 벗고 장엄한 빛으로 하늘을 가르며 높이 솟아올랐다. 중천에 떠오른 해는 소릿재 마루턱을 뒤로 밀쳐 더없이 넓기만 한 황산벌을 달려오며 음습(陰濕)하게 얼어붙은 들녘이 그도 애처로운지 묵묵히 내려다보았다.
삼한사온(三寒四溫)의 주기적(週期的))인 기후변화의 탓도 있었지만 혹독했던 추위는 밤사이 온 산야를 꽁꽁 얼려 동면의 늪으로 깊숙이 빠뜨렸다

봉창 틈새에 달라붙은 얼음발이 드문드문 보였다. 창문 밖에 머무는 햇살이 그리 탐스러웠다. 이젠 남의 손을 빌리지 않고도 제 스스로 몸을 가눠 앉을 수 있는 순덕이가 잠에서 깨어나 울지도 않고 다붓하게 앉아 있는 모습이 귀염성스럽게 보였다.
티 없이 맑은 얼굴에 꾸밈없는 아기의 웃음이 서서히 식어 가려는 방 안의 온기를 불러일으키는 듯했다.

쪽마루 한쪽에 놓였던 마루 걸레는 서로 엉켜 꽁꽁 얼어붙어 매서운 겨울 추위의 냉각(冷覺)을 실감케 했다. 아침이면 늘 얼른 문을 열어 달라 ‘꼭꼭꼭꼭’ 거려 보채던 둥그런 대나무 둥지 속의 닭들도 추위를 타나 너무나 조용했다.
검둥이도 마루 밑에서 좀처럼 나오려 하질 않았다. 잔뜩 웅크린 채 목만 내밀어 두 눈만 껌뻑거려 부엌 거적때기 밖으로 새어 나오는 김칫국물 냄새에 슬슬 배가 고파오는지 볼그레해진 콧등을 넉살스럽게 연신 벌름거렸다.

들녘 보리밭에는 까마귀 서너 마리가 헤쳐 놀아 퍽이나 한적하게 보였다. 추위 탓인지 마을 고샅길엔 오가는 사람 겨우 한두 사람뿐이었다. 연자방앗간 마당에도 동네 아이들의 모습이 그리 쉽게 보이질 않았다.
마을 앞을 세차게 지나간 기차가 남긴 희읍스름한 연기만 초가지붕 등 언저리를 맴돌다 실실이 풀어져 마을은 고요하다 못해 적적해 보였다.

동네 앞 냇가에 물이 꽁꽁 얼어붙자 동네 아이들은 마음이 온통 들뜨기 시작했다. 모두가 오랫동안 기다렸다는 듯이 헛간과 흙먼지 가득 쌓인 마루 밑에서 지난겨울에 타다 놓아두었던 썰매와 발등에 고무줄로 동여매고 타던 발 썰매를 찾느라 정신들이 없었다.
그마저도 없는 아이들은 썰매를 만들어 달라고 집안 어른들을 마구 졸라대었다. 헛간을 뒤져 나무 썰매를 찾아내어 양쪽 밑바닥 부분에 옹골지게 박힌 납작한 철사에 누렇게 녹이 슬어 마당가에서 꽂혀 있는 숫돌로 갈아 녹을 벗겨내고 얼음판을 찍는 두 개의 나무 자루에 깊숙하게 박힌 뾰족한 송곳 끝도 잘 갈아 놓았다.
한쪽 발등에 걸쳐 타고 달리는 발 썰매를 만들기로 주현이와 약속을 하여 동네로 가려고 동네 앞 개울가에 닿았다. 길게 이어져 얼어붙은 냇가 얼음판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마음껏 달려 볼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은 미끄러운 빙판 위를 벌써 저만큼이나 달려가고 있었다.

첫들머리 우현이네 집에는 우현이 아버지가 우현이에게 썰매 송곳을 만들어 주시려는 것 같았다. 불에 벌겋게 달아오른 철사를 펜치로 꽉 거머쥐고 둥그렇게 잘 깍은 나무 자루에 세게 힘을 주어 눌러 끼우고 있었다.
나무가 타 들어가는 매캐한 냄새가 가느다란 연기 속에 묻어나고 우현이는 마냥 좋은지 추운 줄도 모르고 앞에 쪼그려 앉아 구경을 하고 있었다.

상수네 집에서는 상수가 제 동생과 함께 썰매를 만들려는지 널따란 송판을 마루 위에 올려놓고 알맞은 크기로 자르려고 톱질을 하고 있었다. 늘 텅 비어 있는 상수네 아랫집 마당엔 병수 아버지와 상수 아버지 그리고 낯선 노인 한 분이 서 계셨다.

상수가 만드는 썰매도 구경할 겸해서 옆으로 다가섰다. 훗날 동네 사람들의 소문을 들어 알게 되었지만 병수네 아버지의 고종사촌 형이라고 하는 처음 보는 낯선 노인이 병수 아버지, 그리고 상수네 아버지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동네 북쪽 끝머리 상수네 집 바로 아래에 오랫동안 비워 놓아 싸늘한 집을 앞뒤로 찬찬히 둘러보고 있었다.

그 집은 몇 해 전까지만 해도 나와 같은 학년이었던 용순이가 살았던 집이었다. 그리 크게 풍족하지는 못했지만 나름대로 자급자족 할 수 있는 토지를 가지고 있어 남들처럼 소작농을 하지 않고도 살 수가 있었다. 그러나 평소에 워낙 술을 좋아했던 용순이 아버지가 어느 해 한겨울 장터에서 할 일 없이 건들거리며 노는 얼치기 건달들의 꼬임에 빠져 들고 말았다.
읍내 저작거리의 투전판에서 가진 돈을 다 잃고 말았다. 그러자 이미 잃어버린 본전을 찾고 싶은 애절한 마음에 이성을 잃고 말았다. 그래서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논 여덟 마지기를 팔려고 내놓았다. 그 논 여덟 마지기 중 동네 앞 물길이 좋은 여섯 마지기는 영택이네가 사들였고 뒤 들녘 두 마지기는 주현이네가 사들였다.
도박에 눈이 뒤집힌 용순이 아버지는 논 값으로 받은 그 돈마저 모두 노름으로 다 날리고 말았다. 그런 후 실의에 빠져 겨우내 술로 세월 보내셨다.
그러던 중 뒤늦게 지각(知覺)이 들었는지 그 이듬해 이른 어느 봄날 연산면 개태사 근교에 있는 처갓집에 아주머니와 남매 둘을 맡겨놓고 강원도 탄광에 석탄이라도 캐러 간다고 하면서 집을 떠났다.
몇 년 동안 돈을 모아 고향에 꼭 돌아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고향을 떠났다. 방 두 칸짜리 초가집을 친구인 병수 아저씨에게 맡기고 떠났지만 몇 해가 지났어도 단 한 번 동네에 모습을 나타낸 일이 없어 빈집은 점점 흉물스럽게 변해 버리고 말았다.
그 집 앞을 지날 때면 매번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한 가정의 가장이 정신을 잃고 몸가짐을 바르게 하지 못하면 가정이 무너지고 남은 가족들마저도 흩어져 살 수밖에 없는 참담한 일이 버러지고 만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며 살았다.

그렇게 텅 빈 집을 병수 아버지가 관리를 했다. 처음 한두 해는 지붕도 볏짚을 엮어 올리는 듯싶더니 어찌된 일인지 그 후로는 그냥 방치하다시피 했다. 그런 탓에 한여름 철에는 집 앞뒤로 개망초 꽃이 우리들 키보다 더 자라 가득 들어찼다. 더불어 마당엔 잡풀이 수북수북 자라나 밝은 대낮에도 퍽 을씨년스럽게 보였다. 그러자 동네 철없는 어린 아이들은 그 집에서 몽달귀신이 나온다고 곧잘 거짓말을 했다.
오랜 세월을 비워 놓았던 탓에 마루에 뿌옇게 마치 눈이 내린 것처럼 흙먼지가 가득하고 방문 틈에도 먼지가 자욱한 방문을 병수 아버지가 닫으시며 말씀하셨다.

“형님! 집 꼬락서니는 이렇커니 그냥저냥 살만 한디 너무 오래 비워 놔서 두서너 군데 두루 손만 보면 지내실 만할 것 같은디 형님 보시기에 마음에 들란가 어쩔란가 모르것네유.”

담배를 얼마나 많이 피웠는지 몸에서 온통 담배 냄새가 배어났고 오른손 둘째손가락과 셋째 손가락 사이가 누렇게 담배 진이 묻어난 손에 담배를 한 개비 들고 피우시던 병수 아버지 형님이라는 그 노인이 말을 받으셨다.

“뭐시냐 사는 것이사 이리 살던 저리 살던 뭔 탈이 있겄는가? 너나 내나 할 것 없이 방 벽에 흙가루 떨어지고 방바닥에 갈자리 깔어 등잔불 밝혀 몸 붙이면 그만이지 뭘 더 바라것는가? 나사 천만번 이런 의지간이라두 생겼으니 좋네만 내 딸 년이 어떨란가 모르것네. 그려 이젠 머리가 제법 굵어졌다구 지 할 말 다 할려구 드니 내 원참.”

조금씩 갈라져 틈새가 벌어진 벽을 눌러 보시던 병수 아버지가 다시 말씀을 하셨다.

“성님 그 애가 지금 몇 살이지유? 내가 본 지가 하두 오래되서 잘 모르것는디 올해 열아홉인가? 스무살인가? 잘 모르겄네유 그나저나 세월이 참 빠르네유 .요만하던 게 벌써 나이가 차 시집갈 때가 됐으니 지아무리 친척 친척 해두 멀리 떨어져 살았으니 말로만 친척이지 가까운 이웃만두 못하게 살았으니 다 지 잘못인 것 같네유.”

병수네 큰 아버지가 거의 다 타 들어간 담배를 옴팡지게 단모금에 깊이 빨아들이시며 말씀을 하셨다.

“뭔 말을 그리 하는가 자네가 무신 잘못이 있다고 자네두 잘 알고 있지만서루. 그해 그 여편네 그 몹쓸 병 얻어 병치레하는 것 뒷수발하다 보니 한 삼 년이 그렇게 훌딱 지나가 버렸고 결국에는 그 여편네 내 사람 안될라고 그리 먼저 세상 떠나보내고 혼자서 어린 것 하구 살어볼려고 온 사방간데 떠돌아다니며 이 짓 저 짓 다 하다가 겨우 배운 것이 노인네들 담뱃대 만드는 일인디 이 짓으로 입에 풀칠하구 사느라 눈코 뜰새 없어 내가 윗사람 노릇 못한 게 더 잘못이지 뭐.”

병수 아버지가 마루를 내려서시며 그런 모습이 보기에 딱해 보였던지 서둘러 말을 이으셨다.

“그럼 내일부터 라도 장정 두어 명 삯일로 사서 대충 치울 것 치우고 우리 집사람 시켜서 부엌하고 마루 청소도 시켜 놓고 벽 갈라진 디는 동네 사는 내 친구가 미장일허닌게 단디 부탁해 놓으면 알아서 잘해 줄 꺼 같구먼유 그리고 저는 읍네 장에 가서 도배지랑 문종이 좀 사고 바닥에 깔아 놓을 갈자리도 사 올 틴게 형님일랑은 그리 알고 어여 서둘러서 올라가셔서 이부자리 옷가지랑 그리고 형님 일하시는데 쓸 연장두 챙겨서 손 없는 날로 날 잡아서 내려오시면 되것구먼유 그리 아시고 어여 서둘러 들주막으로 차 타러 나가시지유.”

병수네 아버지가 서두르시자 노인 분께서 쓰고 있던 짙은 밤색 중절모를 벗으시고 상수네 아버지와 가볍게 인사를 나누셨다. 그런 후 병수 아버지와 함께 대문 밖을 나와 버스를 타려고 눈길을 걸어 화산리 주막집 정류장으로 걸어가셨다.

동네 사람들 저마다 마디마디가 아려 오는 사연들을 가슴속 깊이 묻고 조상의 뼈와 자신들의 태를 묻은 고향 땅에 머물러 살건만 일부 몇몇 집들은 그도 여의치 못한 사연으로 고향을 등질 수밖에 없었다.
마치 어두운 밤하늘의 작은 별이 어디론가 멀고 먼 유랑의 길을 떠나듯 그렇게 뿔뿔이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 아픔이 서린 빈자리를 다시 채우려는 듯 낯이 설어 서먹하기만 한 또 다른 사람들이 각기 다른 색깔의 사연들을 지니고 삶의 새로운 터로 삼으려 하나둘씩 마을로 찾아 들었다.

그렇게 만나게 되는 새로운 사람들과 먼 훗날까지 서로에게 상처를 주질 않고 함께 살아가는 삶의 둥지인 ‘들메’마을이 이루어지길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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