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한(冷寒)으로 몸이 잔뜩 움츠러들었다. 본능적으로 따스한 한낮 햇살이 절로 그리워졌다. 뒤틀린 방문 틈새로 새어 들어오는 바깥바람이 꽤나 싸늘키만 했다. 토방을 내려서니 차가운 만큼이나 삭막한 겨울 하늘이 그지없이 무료하게 보였다. 기차는 술래잡기를 하듯 산모퉁이에 몸을 숨겼다 보였다 하기를 두어 차례 반복했다. 그리고 지축(地軸)을 울리는 진동과 함께 기적을 세차게 울리며 시원스레 트여진 들녘으로 가뿐하게 내려섰다. 논배미 바닥에 꼬릴 촐랑대며 볏낱 알갱이를 줍던 까치가 기적 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 산자락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저 산은 묵언 속에 좌선(坐禪)하는 수행자의 모습을 그리도 빼닮아 숙연한 모습으로 눈앞에 다가섰다.
가없는 하늘과 맞닿은 지평선에 그리움이 멈칫멈칫하면 버릇처럼 마음 깊숙이 넣어두었던 사연들을 하나둘씩 꺼내 들춰냈다. 반추(反芻)하는 그리움이 다시금 선연하게 떠올라 애써 태연한 척해도 그리 쉽게 잊을 수는 없었다. 끝내는 지울 수조차 없어 울먹여지는 마음을 가누려 사방을 둘러봐도 보이는 것은 끝 모르게 공허한 들녘뿐이었다. 그렇게 지나간 세월동안 사무치는 그리움은 슬픔의 볼모가 되어 참아내기 힘든 침묵으로 이어졌다. 이제 마음의 장지문을 활짝 열어놓고 내 아버지의 환영(幻影)을 떠 올리려 했다. 허나 만나지도 못할 아쉬움에 시름만큼 흐트러진 옷깃을 여미어 마음속으로 안부를 드리려 앞산을 바라보았다. 그런 내 머리 위로 슬픔을 다독이는 눈송이가 사붓사붓 내렸다. 둔덕 아래 개울가엔 이내 바스라질 것 같이 푸석해 보이는 마른 억새가 스산하게만 보여 계절의 무상함을 다시금 깨닫게 했다. 징검다리 돌머리에 옹골차게 달라붙은 고드름이 햇살에 비춰 찬란한 빛깔로 곱다랗게 보였다. 고요가 큼지막하게 자릴 잡은 텅 빈 오르막길은 무척이나 수척하게 보여 더없이 적막하기만 했다.
언덕 위 갈참나무는 냉엄(冷嚴)한 이별에 몸 바르르 떨던 나뭇잎들의 처절했던 모습을 맘속 깊이 담아 두고 있는 듯했다. 그리고 다시금 돋아날 새순을 애절케 기다리며 애처로운 만큼이나 침묵하고 있었다.
마을 앞 개울가에는 아직은 조금 이른 듯싶어 썰매를 타는 동네 아이들의 모습이 보이질 않았다. 동구 밖에 발길을 모으니 새로 이사 온 집의 초가지붕 굴뚝에 연기가 포실하게 솟아올랐다. 그리고 ‘땅땅땅땅’ 하는 소리가 멀리까지 들려와 아마도 곰방대와 장죽을 만들고 있는 듯했다.
둥구나무 아래엔 우현네 어미개가 두 눈을 희멀겋게 떠 혀를 반쯤 내밀어 네 다리를 쭉 뻗고 뻣뻣하게 굳은 채로 헌 가마니 위에 올려 있었다. 어이없으신 표정으로 우현이 아버지가 방앗간 일을 하시는 순태 아저씨와 그리고 삼식이 아버지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리고 두 눈에 눈물이 가득 고여 울먹이며 가파르게 떠는 우현이의 어깨 위로 하얀 눈이 살포시 내려앉았다.
얼마동안을 그렇게 서 계시던 우현이 아버지가 입을 여셨다.
“아, 글쎄! 놀라면 집구석 마당에서나 놀 일이지. 무슨 놈에 귀신이 불렀는가? 그렇게 지 새끼들 옆에서 잘 떨어질라고도 않던 것이 이렇게 허망하게 죽을라구 그랬는지, 뭣 땀시 기어나가서는... 그래 아무리 먹을 것에 눈이 뒤집혀도 먹을 게 따로 있지, 하필이면 넘네 집 쥐약 놓은 음식 찌꺽지를 먹고 뒤질 게 뭐랴, 내 원 참.”
그러자 남의 집일이지만 그도 안쓰러운 듯 우직하게 생기신 삼식이 아버지께서 우현이 아버지를 위로하듯 한 말씀하셨다.
“형님 맴인들 오죽하긋써유. 허지만 일이 이 지경된 걸 어떡하겠어유. 그저 저놈이 형님네집 모든 액을 다 때웠다고 맴 편히 생각하시유.”
말을 끝내신 삼식이 아버지께서 두 볼이 쏙 들어가도록 담배를 폐 속 깊이 빨아들여 입 밖으로 연기를 내뿜으셨다. 그러자 잠시 말을 멈추셨던 우현이 아버지께서 다시 말을 이으셨다.
“그래도 천만다행인 것이 새끼들 젖은 다 떼었으닌게 별걱정은 없지만서루, 그놈의 쥐약을 먹었으니 오장육부가 다 녹아내리느라 속인들 좀 탔을까마는, 그래도 말 못하는 미물이지만 저 죽을 곳은 찾아들어와 지 새끼 옆에서 몸부림치다 죽었으니, 못된 인간들보다야 백번 낫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말을 끝내신 우현이 아버지가 못내 안쓰러운 듯 한숨을 크게 내쉬자 곧 바로 순태 아저씨가 촐싹거리며 말을 이었다.
“그럼유. 짐승만도 못한 인간들 수두룩허지유. 인간의 탈을 쓰고 지 새끼 내버리고 뭇 사내놈허구 눈 맞아 야밤도주헌 여편네보다야 훨씬 낫지유.”
순태 아저씨가 그렇게 말을 끝내자 옆에 계시던 삼식이 아버지께서 마을을 떠나간 기현이네 어머니를 의식하시는 듯 가볍게 핀잔을 하셨다.
“이 사람아, 시방 우리끼리 있으니 다행이지만 당췌 그런 말 함부로 허지 말게나. 오다가다 누가 들을까 조심스럽네 그려.”
그러자 순태 아저씨가 물러설 줄 모르고 다시 말을 이었다.
“아니, 이 사람아. 내가 뭐 틀린 말 했는감? 안 그려? 그게 어디 사람이 헐 짓이던감? 그 어린 걸 내팽개치고 뱃놈 따라 훌쩍 떠나버렸으니...”
그렇게 순태 아저씨가 조금은 흥분된 어투로 말을 얼버무렸다. 그렇게 한동안 두 분이서 가벼운 말다툼을 하시자 우현이 아버지께서 다시 말씀을 이으셨다.
“그리고 미우나 고우나 내 손에 자란 놈이라서 그런지 쳐다보기에 영 마음이 안 좋네 그려, 그렇다고 어디 갖다 묻을라니 그렇고 해서 자네들을 불렀으닌께 자네들이 잘 알아서 처리하고, 앞으로는 절대로 내 앞에서 누렁이란 놈 얘기는 하지덜 말기로 하세. 그럼 날랑은 이만 들어가 볼테닌께.”
우현이 아버지가 매우 섭섭하신 모습으로 쓸쓸하게 집으로 걸어가시고 우현이는 계속 누렁이를 바라보며 울먹였다. 그러자 두 어른들이 그런 우현이의 모습이 애잔스러웠는지 똑바로 바라보질 않으려 하시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여 엉거주춤하셨다.
상수네 집에는 상수가 울타리 밖 둔덕에서 돼지감자를 캐려고 괭이로 땅을 파 헤집고 있었다. 바로 옆집 진식이네 집 헛간에는 새끼를 가졌는지 살이 토실토실하게 배가 불룩한 염소가 내 발걸음이 낯설었던지 ‘메에에’ 하며 방정맞게 울어댔다. 그리고 어느 집인지는 잘 모르지만 호박범벅을 하는지 누릇한 호박과 청태콩(푸르대콩)이 익어가는 구수한 냄새가 고샅길로 바람에 솔솔 풍겨왔다.
초여름이면 뒤뜰 앵두나무에 가지가 휘어지도록 앵두가 빨갛게 열리는 상두네 집이 눈에 띄었다. 상두 아버지가 나무 장작을 패시려는지 장작모태에 걸터앉아 숫돌에 도끼날을 깐깐한 성격만큼이나 야무지게 갈고 계셨다.
고샅길에는 민균이가 썰매의 바닥 가운데 부분의 틈새에 송곳자루를 끼워 어깨에 걸쳐 메고 냇가로 발걸음을 했다.
종구네 집에서는 종구가 거위가 낳은 커다란 알을 두어 개 손에 들고 방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담 너머로 보였다. 그리고 종구네 아버지는 어디로 출타를 하시려는지 하얀 두루마기에 밤색 중절모를 눌러쓰시고 검정 구두를 마른 걸레로 문대고 있었다.
동네 이장님 댁에는 아주머니께서 빨래를 한 속옷가지를 마루 기둥과 기둥 사이에 줄을 매어 놓은 빨랫줄에 널고 계셨다.
동네에서 유일하게 대문이 없어 집안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경수 아저씨네 집에는 막내가 밤사이 또 실수를 하여 오줌을 싼 것 같았다. 마루 위에 내놓은 이불에 누렇게 배어난 오줌자국이 마치 어느 나라 지도처럼 보여 내 어렸을 때 생각이나 피식 웃고 말았다.
며칠 전 썰매를 만든다고 나무를 잘못 잘라 그리도 혼쭐이 났던 인식이네 집에서는 인식이가 불고 있는지 하모니카 소리가 들려왔다. 이젠 제법 음률이 고르게 박자에 맞춰 아리랑을 부르고 마당에서는 인식이 어머니가 청국장을 띄우시려는지 누런 콩을 키질하고 계셨다.
우물터 고샅길에는 물을 길러 가시는 아주머니들과 물 길러 오시는 아주머니들이 옹기를 머리에 인 모습이 정갈스럽게 보였다.
함석 대문에 녹이 벌겋게 슬은 옥순이네 집에는 토방(土房 ) 위에 여자 고무신 몇 켤레가 널브러져 있었다. 그중에서도 제일 먼저 어머니의 신발이 눈에 확 띄었다. 방안에서는 귀에 익은 동네 아주머니들의 목소리가 도란도란 들려와 서로 나누는 정이 풋풋하게 묻어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