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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메로 가는 길 - 167 조회 : 1,448




오후가 되었는데도 여전히 바깥 날씨는 차갑기만 했다. 햇살은 인색하리만큼 단작스럽게 내리 비추고 극성스럽게 부는 바람이 문풍지를 제법 크게 울렸다.
마을 앞 냇가에 썰매를 타러 가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은데 추운 날씨에 막상 밖으로 나갈 생각을 하니 참으로 어설프기만 했다.

아직은 훈기가 가시지 않은 방 안에서 귀엽기 더할 나위 없는 순덕이의 몸을 일으켜 세워 두 손을 꼭 붙들고 한 걸음씩 어렵게 걸려 보았다. 아직은 덜 자란 탓인지 걸음걸이가 서툰 것 같았다. 겨우 한 발짝 어렵게 걷는 듯싶더니 그만 몸을 흔들다 쓰러져 울음을 터트렸다. 부엌에서 점심 밥상을 차리시던 어머니께서 뭔 일이라도 있나 싶어 걱정스런 얼굴로 성급하게 방으로 들어오셔 얼른 아기를 덥석 끌어안아 울음을 달래려했다.

냅다 울음을 터트리고 있는 순덕이가 걱정되었는지 순덕이 어머니께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밥상을 들고 서둘러 방 안으로 들어섰다. 밥이라고 해봤자 고구마가 절반 이상 섞인 밥이었다.
그라도 끼니를 거르지 않은 것만으로 만족해야 했다. 별다른 양념을 안 했는데도 손끝에서 우러난 정성으로 음식 맛이 맛깔스러웠다. 숙성이 잘된 납작한 무김치 조각을 젓가락에 꽂아 들고 아삭아삭 깨물었다.
잘 마른 무시래기에 굵은 멸치를 넣고 끓인 된장국에 밥을 먹으니 몸과 마음이 포만(飽滿)으로 가득 차올랐다. 비록 조촐한 삶이지만 그런 공간을 부여해준 하늘과 어머니에게 마음 속 깊이 감사를 드렸다.

몸을 잔뜩 움츠리고 싸리문 앞을 나서는데 우현이 아버지와 앞집 진식이 아버지가 지게 위에 삭정이를 한 짐씩 가득 지시고 비탈이 심한 오솔길을 내려오고 있었다. 추위에 숨이 차시는지 입 밖으로 내쉬는 거친 숨소리와 더불어 허연 입김이 두 분의 몸 밖으로 새어나왔다.
낯선 사람만 보면 여지없이 달려들어 크게 짖어대던 검둥이가 웬일인지 좀처럼 짖지를 않았다. 아마도 그 동안 우현이네집 누렁이에게 마음을 빼앗겨 틈틈이 마실을 다녔던 탓에 우현이 아버지와 낯이 익었는지 전혀 짖을 생각을 않고 토방 앞에서 뻘쭘하게 바라만 보고 있었다.

어머니가 방 벽에 붙여 놓은 빛바랜 달력을 바라보았다. 지난 새해 벽두에 나름대로 마음에 소망을 담아 굳게 다짐을 했던 것이 바로 엊그제만 같았다. 그런데 벌써 십이월의 끝머리에 동지두죽(冬至豆粥)을 먹은 지도 며칠이 지나 또 다시 한 해가 조용히 저물어가고 있었다.

동네 어른들 말씀에 의하면 제 3대 이승만 대통령과 ‘못살겠다, 갈아보자.’의 유명한 말을 남긴 장면 부통령의 임기가 끝날 때가 되었다고 했다. 그래서 오는 삼월 중순경에 제 4대 정 부통령 선거가 치러진다고 했다.
정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자유당은 단 한 표라도 더 긁어모아 이번만큼은 부통령 선거에서 야당인 민주당에 지지 않고 기필코 자유당 부통령 후보로 나올 이기붕을 당선시키려고 혈안이 되었다.
그 일환으로 기권을 미연에 방지하려고 행정 당국에서 무단히도 애를 썼다. 그래서 면사무소에서 도민증을 분실한 사람들에게 그 책임을 일체 묻지 않아 과태료를 물지 않고 도민증을 재발급해 준다고 했다.

그러자 지난 늦가을 읍네 장터에 마른고추를 팔려 나갔다 사람들로 온통 붐비는 복잡한 시장 골목에서 소매치기를 당해 마른 고추 판 돈과 도민증이 들어 있는 지갑을 몽땅 잃어버린 준섭이 아버지를 비롯하여 이런저런 사유로 도민증을 잃어버리고 차일피일하던 동네 몇몇 분들이 서둘러 도민증을 하려고 증명사진을 찍으려 했다.
그 증명사진을 찍으려고 동네사람들이 성균이형 아버지에게 부탁을 하여 재 너머 연무대 사진관에서 사진사 일을 하는 성균이 형이 증명사진을 찍으러 마을로 오기로 며칠 전부터 약속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오랜 병석에 누워계시는 종기 형네 할머니가 언제 큰일을 당하실지 몰라 영정 사진이라도 미리 찍어 놓으려 했다. 그래서 종기형네 아버지가 성균이형 아버지에게 부탁을 하시여 영정 사진을 찍는다고 했다.

냇가에서 썰매를 타다 추위에 몸이 떨려 밭에 주워 온 마른 고춧대와 콩대를 모아 모닥불을 피워 몸을 녹이고 있었다. 그때 성균이 형이 가죽 케이스에 담긴 카메라를 어깨에 둘러메고 방죽 앞을 지나 마을로 들어서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모닥불을 쬐이고 있던 아이들 중에 토끼털 귀마개를 한 상수가 맨 먼저 성균이 형을 보고 썰매를 타고 있는 민균이를 향해 소릴 쳤다.

“민균아! 저기 니네 형 온다. 빨랑 가 봐.”

그러자 썰매를 타고 있던 민균이가 무척이나 반가운지 얼른 썰매를 어깨에 둘러메고 저기 형을 향해 줄달음질하여 달려갔다. 동네 아이들도 동작을 잠시 멈춰 동네를 향해 발걸음 하는 성균이 형을 바라보고 있었다.

꽤나 오랫동안 정신없이 썰매를 타다보니 해가 벌써 오후의 중반을 넘어섰다. 늑장을 부리는 해가 흙먼지 가득 푸석거리는 동네 고샅길 끝머리에 서 있는 가죽나무 위에 머물고 있었다.
한차례 회오리바람이 불어 먼지에 휩싸인 모래알들이 눈언저리로 몰려와 눈을 뜨기에 조금은 거북했다. 그리고 집집마다 밖에 내어 놓은 양은그릇들이 바람에 서로 부딪쳤다. 세차게 부딪쳐 나는 그 소리 하나마저도 진솔(眞率)하게 살아가려는 우리 모두의 삶에 소리처럼 들렸다.

고샅길 한가운데 종구네 집 안방에서 ‘뎅뎅’ 오후 두시 정각을 알리는 괘종시계의 금속성 소리가 담 너머로 들려왔다. 늘 그 자리를 지키는 거위 한 쌍이 둔한 날갯짓으로 두어 번 푸덕이며 굵은 목을 앞으로 내어 밀며 시끄럽게 울어대고 있었다.

어른들 목소리가 고샅길까지 떠들썩하게 들려오는 방앗간 사랑방 앞에는 좀 오랫동안 그 아주머니를 찾으려 대전에 가셨던 영택이 아버지의 수척해지신 모습이 보였다.

진수네 아버지가 새끼를 꼬시려는지 바가지에 담긴 물을 입에 한가득 머금어 가지런하게 잘 추린 볏짚을 골고루 뒤척이며 물을 뿜으셨다. 아궁이 앞에는 동네 아저씨 두 분이 술안주를 하시려는지 석쇠 위에 노가리(명태새끼) 몇 마리를 올려놓고 불에 굽고 계셨다.

방앗간 뒷집 기성이형네 집에는 기성이 형 어머니께서 객지로 훌쩍 떠나버린 자식을 애태워 기다리는 마음으로 행여 뜨끈한 소식 한번쯤 올까 싶어 동구 밖으로 두 눈을 모아 은근히 우체부 아저씨를 기다리고 계셨다.

낮은 울 너머로 마당 안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영호네 헛간에는 반짝반짝 손질이 끝난 농기구들이 남쪽서 불어오는 따뜻한 바람 따라 넌지시 찾아올 봄을 기다리고 있었다.

주현이네 집에는 추워서 그러는지 배가 고파 그러는지 잘 알 수는 없으나 검정 돼지 새끼가 돼지막 나무 틈 사이로 작은 주둥이를 내밀어 쉴 새 없이 꿀꿀댔다. 설 명절이 턱밑으로 가까워 오자 복조리 만드는 일을 서두르시나 주현이 어머니가 두 아들에게 일을 시키려고 꼭 붙들어 놓았다.
그래서 주현이와 수영이는 그리도 좋아하는 썰매도 못 타고 일을 거들고 있었다. 그렇게 작업을 하느라 대나무를 잘게 잘라 베어 낸 가는 껍질들이 온 방 안에 가득 차 있었다. 그래도 아들 친구가 추위 속에 놀러왔다고 몸을 녹이라고 하시며 열이 잘 달아오른 질화로를 내 앞으로 밀어주셨다.
그리고 부엌으로 가셔 가마솥 안에서 남아 있는 고구마와 동치미를 한 그릇 가득 떠오셨다. 가뜩이나 출출하던 차에 새큼하면서도 시원한 동치미 국물 맛과 입에서 아삭아삭 씹히는 무가 아주 맛깔스러웠다.
좁은 방안에서 얼마 동안 이야기를 나누며 놀다 집으로 돌아오려고 썰매를 어깨에 둘러메고 주현이네 집을 나셨다. 동네 고샅길로 들어서자 집집마다 서둘러 저녁밥을 짓는 연기가 나지막하게 길 위로 흐트러지고 있었다.

오후 다섯 시만 되어도 눈 깜짝할 사이 금강 둑 너머로 해가 몸을 숨겨 어둠살이 찾아드는 낯 길이가 짧은 겨울이었다. 서편 들녘 읍네 봉화재 느티나무에 발길을 멈춰 똬리를 틀듯 나지막이 내려앉은 주홍색 저녁 해가 불그레한 노을빛으로 온 주위를 물들였다.

어둑발이 다복하게 내려앉아 기척이 사라진 들녘에 다시금 먹이를 찾아 남쪽으로 먼 길을 떠나려는지 기러기 떼가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마치 영문자 ‘V’를 옆으로 뉘어 놓은 것처럼 줄을 이어 성급하게 떠오른 희푸른 초저녁달을 벗 삼아 앞에서 무리를 이끄는 우두머리가 끼룩끼룩 먼저 소릴 내자 뒤따르던 기러기들이 추렴을 하듯 끼룩끼룩 소릴 내며 여유롭게 날아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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