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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메로 가는 길 - 168 조회 : 1,454




맹추위 속에 겨울이 더욱 길고 지루하게만 느껴지고 요동치는 혹한(酷寒)은 좀처럼 뒤로 물러설 줄 몰랐다.

한낮 햇살이 문풍지에 환히 비춰 어둠을 걸러내는 방 안에 아주머니가 금이 간 바가지를 굵은 바늘에 실을 끼워 조심스레 꿰매고 계셨다. 그 시절 열약한 환경 속에서 살았던 우리네 삶의 모습이 모두 다 그러했다.
찰거머리처럼 억척스레 달라붙은 가난 속에 깨어져 금이 간 항아리를 철사로 바짝 동여매고 삶의 때가 묻어난 쭈그러진 양은 세숫대야를 땜질해서 썼다. 그리고 밤이 되면 어둔 방 안에 등잔불 심지를 올려 흐릿하게라도 불을 밝혀 닳아 찢어진 아랫바지 무르팍에 색깔이 거의 비슷한 천을 오려 덧대었다. 그리고 뒤꿈치가 구멍 난 양말을 거꾸로 뒤집어 종지를 속에 넣어 밑바닥을 받쳐 들어 버릇처럼 머리에 바늘을 문대어 한 땀 한 땀 꿰매며 살았다

부엌 시렁 위에는 검정색 칠을 한 듯 연기에 그을려 손때가 묻어나 반질거리는 반쯤 닳아 잘록해진 밥주걱이 놓여 있어 참으로 썰렁하게 보였다. 그나마 썰렁한 기분을 달래 듯 검정 무쇠 솥 가장자리엔 거품 속에 퍼져 나는 뜨거운 김이 비좁은 부엌 안에 고루 퍼지고 있었다.

그런 열악한 환경 속에 어린 순덕이도 가지고 놀 장난감이 딱히 있을 리 없었다. 겨우 가지고 노는 장난감이라고 해봐야 며칠 전 면 소재지 염씨네 가게에 석유 기름을 사러 갔을 때 사다 준 말랑말랑한 작은 고무공이 전부였다. 고무 냄새가 지긋이 풍기는 공을 부지런히 입으로 빨아 무늬가 지워진 한 부분이 희끗희끗하게 보였다.

마당에 나서니 세찬 바람이 지붕 끝자락 볏짚을 들썩이고 벽기둥에 매달린 무시래기를 흔들어 너붓거리는 모습이 퍽이나 허해 보였다. 한쪽 발을 가볍게 오므려 한발을 내딛는 해묵은 암탉의 뒤꽁무니에 바람이 스쳐 부드러운 잔털이 소리 없이 들춰지니 그 또한 스산키만 했다. 황량한 들녘에 그래도 생기를 불어넣어 주는 것은 추위를 모르고 뛰어노는 동네 아이들의 웃음 섞인 목소리 뿐이었다.

어느메에서 연실이 끊겨 바람에 날아왔는지 갈참나무 가지에 걸린 채 누런색 비료 포대를 오려 만든 가오리연의 긴 꼬리가 바람에 마구 흔들리고 있었다.
동구 밖에 놓인 나무다리를 건너고 있었다. 동네는 물론 채화면내에서도 마당발로 불리는 병수 아저씨의 덕분에 주문이 그런대로 들어오는지 담뱃대를 만드느라 쇠붙이 두드리는 망치 소리가 끊임없이 카랑카랑하게 들려왔다. 나무다리 밑 개울가에는 썰매를 타고 있는 동네 아이들의 열기가 가득 차 있었다.

동네 고샅길 중간쯤에 이르자 종구네 집에선 종구네 아버지가 쇠등 언저리에 볏짚으로 두툼하게 엮은 덮석을 덮어 주고 있어 아마도 소달구지를 몰고 읍내에 가려는 듯해 보였다.

방앗간 대문 앞에는 지난번 학교 졸업 사진을 찍었을 때처럼 접었다 폈다하는 기다란 다리 세 개가 펼쳐진 삼각대 위에 검정색 보자기에 덮여진 주름진 네모난 사진기가 버텨서 있었다.

준섭이 아버지와 동네 어른 몇 분이 모여 빗으로 머리를 빗어 손으로 매만지시며 검추레한 방앗간 대문을 배경으로 증명사진을 찍으려는지 발재봉틀 동그란 의자에 앉아 차례대로 사진을 찍고 계셨다

순아네 할아버지도 순아의 귀여운 모습을 추억에 담고 싶으셨는지 차례를 기다려 옆에 서 계시고 군산 고무신 공장에 다니는 용순이 누나 어머니도 타관 객지에 나가 있는 딸에게 사진 한 장이라도 보내 주고 싶으신지 사진을 찍을 둥 말 둥 하시며 기웃거리셨다.

맞은편 연자방앗간 추녀 밑에서는 성균이형 아버지가 종이에 말은 담배를 피우고 계셨다. 없이 사는 게 죄라고 그렇게 잘 가르치지도 못해 읍네 중학교 문턱에도 못 보낸 큰아들이 늘 마음에 걸렸는데 그런 사진 찍는 기술이라도 배워 촬영하고 있는 모습이 대견스럽고 흐뭇한 듯 바라보셨다

변함없이 떠들썩한 방앗간 사랑방에는 동네 어른들이 다가올 설 명절과 정월 대보름날에 집집마다 돌며 무병장수 다복하라고 빌어주려 온 동네가 들썩들썩 풍물을 치려고 준비를 하고 있었다.
풍물 기구와 높다란 농기도 먼지를 털어 손질을 하시고 징과 꽹과리도 반질거리게 닦으시려는지 순태 아저씨가 쇠 절구에 깨어진 기와 조각을 곱게 빻고 있었다. 흥남이 아저씨는 농기 위에 꽂힌 깃털을 새것으로 바꾸려 금년에 잡은 꿩의 꼬리에서 뽑아 모은 예쁜 털을 한 움큼 손에 쥐고 방 안으로 들어가셨다.

방앗간과 바짝 지붕이 맞닿은 민균이네 집에서는 객지에 나가 있는 큰아들이 왔다고 암탉을 잡아 인삼을 넣고 푹 삶고 있는지 비릿한 냄새가 바람따라 솔솔 풍겨났다.

그런 모습이 마냥 부러우신지 옆집 기성이형 어머니가 낮은 담장 건너로 턱을 쑥 내밀어 바라보고 계셨다

며칠 전부터 동네에 새로운 소문이 떠돌기 시작했다. 그것은 바로 동네 이장님이 중례누나와 면사무소에 서기로 근무하는 젊은 총각인 서씨와 혼사를 이루려고 중매를 나선 것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면서기라고 하는 젊은 총각 서씨가 중례누나에게 관심이 있어 ‘풀 방구리에 쥐 드나들듯’ 우리 마을에 출장이 잦았다. 그 서씨가 이장댁에 잠시 다녀가는 길인지 이장님 댁 대문 밖을 나서 자전거로 화산리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옥순이네 집은 손뜨개질을 배우려고 동네 아주머니들이 한두 분씩 모여들기 시작하여 자연스럽게 동네 아낙네들의 쉼터가 되었다. 옥순이가 손짓으로 조용히 나를 불러 뒤뜰 장독대로 갔다.
항아리 뚜껑을 열어 속을 함께 들여다보니 잘 추린 볏짚 위에 홍시가 놓여 있어 그중 두 개를 꺼내 아랫방 뒷문으로 살며시 들어가 소리를 죽여 먹고 있는데 몰래 먹는 홍수감 맛이 아주 달아 입에 달라붙었다.

큰방에서는 뭔 일이 있으면 앞에 나서길 좋아하는 경수아저씨 부인이 말을 하고 있었다.

“아니! 성님들은 다들 알고 있는가 모르것네유, 우리 집 바깥양반이 그러는디 동네 이장이 중례를 면 소재지 사는 면 직원하고 중매를 서 혼삿말이 오고 가는 모양이던디, 어찌될란가 잘은 모르 것지만, 신랑될 사람이 중례를 더 좋아하는지 요새 정신없이 들랑거리고 있는 모양이더라고유, 잘되서 짝 이루고 잘살면 그만인디, 지 어미도 없는 집에 그 여편네 마져 그리 떠나서 누가 안살림을 꾸려 나갈려는지 걱정이 되게 되네유.”

그러자 이젠 손뜨개질 속도가 조금은 빨라지신 옥순이 어머니가 말을 이으셨다.

“어쩌긴 뭘 어쩔 것이여. 이빨이 없으면 잇몸으로 산다고 어찌 해결이 되겠지. 그렇다고 다 커서 넘치는 애를 보내야지 평생 데리고 있을란감. 안 그려? 그리고 모르면 몰라도 영택이 아버지 입장에서는 누구라도 데려와야 살림살이가 될 모양인데, 뭐시냐 저번 여자처럼 중례가 또 싸울까 싶어 혼삿말도 나오고 해서 겸사겸사 여울려고 서둘 것 같구먼 그려. 아이구 먼저 여자랑 이틀이 멀다하고 좀 많이 싸웠는감. 그러니 영택이 아버지도 새중간에서 진절머리 났을 꺼구먼.”

말없이 이야기를 들으시며 뜨개질을 하시던 어머니께서 신고산타령님이신 병수 아저씨 부인을 바라보시며 말을 거드셨다.

“아니. 그건 그렇고 이참에 그 빈집으로 새로 이사 온 그 양반은 뭐하시는 양반이며 어디서 살다가 왔다고 하던감. 그리고 들리는 말에는 다 큰 딸 하나하고 산다는 모양인디, 그럼 그 양반도 역시 홀애비구먼, 동네가 어찌 돌아 갈려고 그러는지 죄다 짝 잃은 기러기들만 모이네 그려.”

그러자 병수 아저씨 부인이 촐싹 나서며 말을 꺼냈다.

“그 어른유, 경기도 평택인가 하는 디서 살았는디 한 팔년 전에 자기 부인하고 사별하고 큰딸 애가 올해 스무살이구먼유. 뭐, 하시는 일은 노인네들 입에 물고 피는 기다란 담뱃대를 만드는 기술자라나 봐유. 그래도 그걸로 벌어서 어찌됐던 지금까장 먹고 살았으닌께 허구헌날 놀고먹는 우리 집 양반보다야 훨씬 낫지 않은 감유. 그나저나 그 어른 집 청소하시느라 죽어나는 줄 알었네유, 그동안 비어 있던 집이라 그렇다고는 하지만 세상에 집을 치울라고 하닌까 흙먼지가 밀가루처럼 수북하게 쌓여 딱고 딱아도 일이 끝이 없고 솥에 끓인 뜨거운 물로 걸레를 빨아 청소를 했지만 날씨가 그리도 추워 금방 걸레가 식어 손이 시려 죽는 줄 알었네유.”

옥순이 어머니가 아랫방에 앉아 있는 우리들을 힐끔 쳐다보시며 다시 말을 이으셨다.

“아이구 이번참에 동상이 고생을 엄청스럽게 했구먼 그려. 그렇게 고생한 것 그 양반도 다 알것지 뭐, 그나저나 상민이 에미야, 가만히 생각해 보닌께 이거 도저히 안되것다, 아예 이번참에 동네 홀아비들 하고 과부들 모여서 무슨 계라도 하나 만들자, 그래서 과부계는 니가 회장을 해라, 나는 연락병이나 할틴께 그 회장 아무나 하는 것 아니다, 그리고 누가 아냐? 회장 감투 쓰면 후다닥 시집가라고 중매라도 들어올란가?”

옥순이 어머니가 말을 해 놓고도 우스웠던지 크게 소리내어 웃으시자 방 안에 계시던 아주머니들이 모두 깔깔대며 웃으셨고 아랫방에 있던 옥순이와 나도 함께 따라 웃고 말았다.

작은 삶의 터에서 서로가 서로를 오붓하게 보듬고 격 없이 마음을 터 웃을 수 있는 풋풋한 정(情)이 그 시절, 그쯤엔, 그렇게, 함께 머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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