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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메로 가는 길 - 16 조회 : 2,042




참으로 날씨가 너무 변덕스러워 한낯에도 소나기가 자주 내렸다.
이미 장마가 끝난 터인데도 하늘 끝머리에 거무틱틱한 구름이 몰려오면 어김없이 굵은 빗방울이 떨어졌다.
예법 세차게 몰아치던 소나기도 요란스러울 뿐이였지 그저 싱겹게 스치듯 지나갔다.
그래도 맑게 개인 날이 한 사날 지속되기에 지긋지긋한 장마가 뒤늦게서야 끝나는가 싶었다.
그런데 아침부터 날씨가 또 다시 하수상해지기 시작했다.
가뜩이나 전쟁으로 인한 불안감 속에 다들 신경이 극도로 예민해져 있는 상태였다.
그런데 날씨한질라 심란스러워 뒤숭숭한 마음을 더욱 부추기는 것 같았다.
그 해의 여름 날씨는 다른 해에 비해 참으로 유별나게 변덕을 부렸다.

그나마 한가지 다행스러운 것은 몇몇 분들의 헌신적인 도움으로 장례를 잘 마쳤고 삼우제를 지낸지도 벌써 열흘이나 지났다.
그렇게 큰 일을 다 치루고 나서 비가 오려는 것 같아 다행이라고 생각을 했다.
그러나 아직까지 봉분에 떼를 못 입혔는데 빗물에 젖으실 내 아버지 생각에 마음은 늘상 편칠 못했다.

그저 무심하게만 느껴지는 해는 우리들의 이 모든 시름들을 끝내 모르는지 이른 아침녘 마을 동쪽머리에 벌써 부터 떠올라 있었다.
그런데도 해는 두터운 검회색 구름의 장막과 짙은 비안개에 가려 그 자태를 밖으로 조금도 드러내지 못하였다.
그저 그쯤에서 답답하게 머물고 있는 것 같아 주위가 더욱 어둠침침 하였다.
그래서 가뜩이나 축 내려 앉은 동네 분위기를 더 침울하게 만들어 놓고 말았다.

뒤늦게라도 비가 멈춰 구름이 물러가고 물안개가 겉혀 맑게 개인 날이 되기를 정말로 원했다.
그럼 강경읍내 모습이 여느 날 처럼 아주 또렷하게 모습을 드러내 생경하게 보일 것 같았다.
그리되면 외롭게 홀로 계실 내 아버지께서 읍내 모습이라도 보시게 되면 덜 외로우실까 하는 작은 바람이었다.
내 마음이 그랬기에 그 정도로 날씨가 쾌청해지길 내심 바랬다.

또 다른 이유는 아직껏 미완의 단계에 있는 내 아버지의 산소 문제 때문이었다.

장례를 치룬지 열흘이 지났어도 어른들이 놈들에 눈치를 이리저리 살피느라 봉분도 제대로 만들지 못했다.
그저 벌건 황토로 둥그렇게 쌓아 올려 대충 다져 놓았을 뿐이었다.
그런데 만일 비라도 크게 내려 봉분에 흙이 쓸려내려 흐트러지면 어쩌나 싶은 근심 때문이었다.

그러나 하늘은 내 작은 기대마져 외면한 채 끝내 저버릴려는 것 같았다.

저 멀리 채운들녘 북쪽에 있는 포답마을 끝머리 지평선에 검회색 구름과 희뿌연 비안개가 가득 서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하늘이 빠른 속도로 흐려지니 아무래도 비다운 비가 한차례 올듯 싶었다.
그래서 가뜩이나 침울한 마음을 일부러 부추기나 싶어 그나마 남아있던 끝다리 정마져 다 떨어지게 하고 말았다.

검은 구름이 떼를 지어 거침새 없이 몰려오기 시작하였다.
분명 어제와 똑같은 대낮인데도 어제 날씨가 언제 그렇게 맑었느냐는 듯이 인정머리 없이 시침을 딱 떼고 나를 슬슬 약 올리는 것 같았다.

여법 빠른 걸음으로 몰려 온 검은 구름들이 등메산 능선 위에 몰려와 겹겹을 이루기 시작하였다,
더불어 히읍스름한 비안개가 이내 산 전체를 집어삼킬 듯이 자욱하게 깔려 있었다.

그쯤 검은 비구름이 몰려왔던 포답마을에는 빗줄기 속에 온 들녘이 잔뜩 흐려져 거무튀튀하게 보였다.
그다지 멀지 않은 거리에 있는 장화리 마을의 초가집들도 내리치는 빗줄기에 가려 어슴하게 잘 보이지 않았다.

더불어 면소재지 화산리 마을에도 날이 어두룩해지면서 비가 흩뿌리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우리 마을까지 비가 사정없이 퍼붓기 시작했다.

그러한 현상이 이틀이 멀다하고 지속되었으니 장마 하나만으로도 극도로 신경이 예민해질 대로 예민해져 있었다.

그런데다 설상가상으로 인공난리까지 겹쳐 드디어는 놈들에게 면소재지까지 점령을 당해 버렸다.
마을 사람들 대다수가 피난을 떠나 집들이 텅 비워진 상태라 그때의 마을 분위기는 무엇이라 표현키 어려울 정도로 을씨년스럽기만했다.

세상살이 무엇이고 다 소중하겠지만 우선 사람들이 먹는 것이 급선무였다.
다른 여느 해의 장마철에도 늘상 그런 걱정은 했었다. 그래도 농사는 작년의 풍년에 이어 보리바심도 흡족치는 않지만 흉작의 꼴은 면했다.
그러니 수확 량의 많고 적음의 차이일 뿐이지 몇 해 전처럼 궁핍한 모습에 들녘으로 먹거리를 찾아 나서는 그런 처참한 꼴은 없었다.

그레서 두 번 다시는 절대로 되뇌이고 싶지 않은 최악의 춘궁기는 겨우 면했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전혀 뜻하지 않았던 인공난리가 터지고 보니 그로 인한 심리적인 압박과 고통을 피해갈 수 없었다.

그런 악영향에 처해 있어도 소와 염소 같은 초식동물을 를 키우는 농가에서는 아무리 장대 같은 비가 쏟아진다고 해도 풀을 뜯어다 먹여야만 했다.
때문에 비가 조금 주춤한 때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빗발이 조금만 약해지면 등지게에 바작을 얹어 낫을 들고 냇뚝으로 나가 풀을 베어다 가축들을 키웠다.
허긴 그 당시 마을에 소를 키우는 집은 단 두 집뿐이었다.
그 첫 번째 집이 마을에서 내로라하는 제일 부자인 종구네 집이였다.
'잘 사는 집이 짐승도 잘 된다'는 말이있었다.
종구네 소는 굵고 두툼한 목 둘레의 살과 큼직한 쇠부랄이 종구네 아버지 욕심만큼이나 아래로 축 늘어져 있었다.
마을에서 기르는 다른 소들에 비해 눈알이 얄미울 정도로 유난스레 큰 누런 황소였다.
그런데 종구네 아버지가 그 황소 때문에 머슴 일 하는 용만이 형을 어찌나 닥달 하였는지 모른다.
엉덩짝에 살이 두툼하고 양쪽 옆구리의 누런 털에 기름기가 반지르하게 아주 틈실하여 잘 키워 놓은 숫소였다.

그리고 그 다음 집이 논 닷 마지기를 경작하여 겨우 식구들 입에 풀칠할 수밖에 없는 순아네 집이었다.

원래 방대한 농토를 지니고 있는 종구네 집은 대부분의 농토를 마을 소작농들에게 임대로 주어 경작을 하게 하였다.
해마다 여름바심과 가을 추수가 끝나고 나면 소작료인 도지를 받아 들였다.
그래서 말 그대로 손에 흙 한 번 않 묻히고 사시사철 흰 쌀밥만 먹고 거들먹거리면서 아주 편하게 살았다.

마을 소작민들이 논,밭일이 고되면 모여 앉아 탁배기 한 잔씩 부어 마시며 푸념처럼 하는 말이 있었다.

" 참 우라질놈에 시상이지 지나내나 똑 가치 인두껍 쓰고 태어났는디,아닌 말루 지놈은 즈그 에미 뱃속에서 부터 부랄 세 쪽을 가꾸 태어났나 쓰잘떼기 읍시 앉아서 헛기침이나 혀 쌌구, 내사 요로콤시루 죽을 둥 살둥 모르구 농사를 져서 거져 갖다 바치다시피 허니, 아무짝으루 생각을 혀봐도 기막맥혀 허파가 터질라구 허네 그려, 그려 지놈은 먼 넘에 팔자가 그리 좋아서 손 안대구 코 풀구, 똘깡치구 까재 잡는 꼴이네 그려.아이구 드러븐 늠에 시상.'

그리고 소작을 주고 남는 땅덩어리는 머슴인 용만이 형에게 새경( )을 주는 조건으로 일을 시켜 직접 농사를 지었다.
당시의 영농방법으로 농사를 지으려면 인력만으로는 힘이들었다.
그래서 노동력을 높이기 위하여 어쩔 수 없이 소를 사육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순아네 집 입장으로 봐서는 값이 예법 나가는 소를 영농의 목적으로만 키울 수는 없었다.
앞 들녘에 다섯 마지기 논농사와 뒷뜰에 두 마지기 밭농사 때문에 소를 사육할 목적이 아니였다.

그럼에도 순아네 할아버지께서는 무리를 하시면서 동네에 두 번째 부잣집인 영택이네 집에서 장리변을 내었다.
어린 송아지를 사 들여 애지중지하면서 어미 소로 키워 코뚜레를 하여 사육하는 이유가 나름대로 있었다.

해마다 보리바심과 벼농사가 끝나고 나면 어김없이 실시되는 공출미를 동네에서 면소재지까지 운반하는 일을 도맡아 그에 상응하는 운임을 받았다.

그리고 5일마다 하루 차이로 열리는 논산과 강경 장날에 마을 사람들의 장짐을 옮겨 주었다.
그리고 그에 대한 적당한 댓가를 받아 크게 흡족치는 않았지만 나름대로의 부수입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와 더불어 이따금씩 봄,가을로 마을에 혼사가 있을 경우에는 신혼살림인 장롱과 이불보따리, 솥단지를 비롯한 살림살이를 옮겨주는 일도 순아네 소달구지가 도맡아했다.

아주 교통이 극도로 불편했던 시절이라 면 전체를 통틀어 그 어느 한 사람도 소유하고 있는 자동차 한 대가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마을에 밤늦게라도 급한 환자가 발생하여 생명에 촌각을 다투는 일이 있을 때에는 어쩔 수 없이 순아네 소달구지라도 이용하는 방법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 무렵 들메마을은 문명에 지극히 뒤쳐져 있었던지라 시각이나 청각적으로 얻을 수 있는 문화혜택이 전무하였다.
그랬기 때문에 바깥세상과 접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오 일마다 열리는 두 읍내의 장날이 어쩌면 그리도 그리워잘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 당시 오죽했으면 어른들께서 농담 삼아 하시는 말씀이 있었다.

" 모처럼 장날에 나가 선지 핏국 한 그릇이라도 먹어야 촌놈 목구멍에 낀 때를 청소한다고 하니까, 내둥 가만히 있다가 사둔이 장에 간다고 하니까 그저 마음이 떠서 덩다라 장에 간다"는 말이었다.

또 한편으로는 전근대적인 생활방식으로 살아나가야 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모든 환경이 열약하기만 했었다.

그래서 마을에서 생산되는 곡물인 찹쌀과 쌀, 보리쌀은 물론 서리태 콩과 붉은 팥알 그리고 녹두,수수,좁쌀까지도 내다 팔았다.
더불어 야채와 푸성가리, 그리고 계란까지도 볏짚으로 묶은 꾸러미를 만들어 장보따리를 마련했다.
그리고 더러는 집에서 기르던 어미개가 낳아 젖을 뗀 강아지와 닭 심지어는 염소까지도 그 먼 길을 끌고가 내다 팔아 생계를 꾸려나갔다.

그나마 순아네 소달구지도 못타고 갈 형편에 처한 동네 사람들은 아침 일찍부터 집을 나섰다.
장날에 내다 팔 물건들을 머리에 이고, 손에 들고 철로 옆으로 난 좁다란 길을 따라 걸어서 다녔다.
가다 힘이 들면 수양버드 나무 그늘 아래 발길을 멈추고 다리쉬임을 하였다.

논산은 거리가 조금 먼 십리 길이며, 강경은 시오리 길이었다.
그 거리를 마다하지 않고 한여름 뙤약볕에 비지땀을 흘리면서 왕복을 해야만 했다.

속된 말로 아낙네들은 햇볕을 가릴 수 있는 양산 하나가 없어 한여름 그 강렬한 햇살에 연약한 얼굴을 생으로 태워야만 했다.

어쩌다 등에 젖을 물려야만 될 어린 아기라도 들쳐 없고 걸을려면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등언저리가 땀에 흠뻑 젖게 되어 꿉꿉해지면 아기는 덥고 갑갑하여 마냥 못마땅한지 자꾸만 보를 채기 시작했다.
그러면 길을 걷다 말고 어디 나무 그늘 아래에 잠시라도 앉아 퉁퉁 부른 젖이라도 입에 물려 달래었다.
얼마 후 다시 길을 걸으며 아기의 엉덩이를 다독거려 아우르면서 살아 갈 수밖에 없었다.

어찌 보면 그런 작은 부분 하나까지도 뒤처질 수밖에 없었던 그런 불행하기 짝이 없는 시대적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날이 하루 앞에 다가오면 이리저리 써야할 잔돈 푼이 아쉬워 온 집안을 앞 뒤로 둘러보고 잔돈푼이 될 만한 것을 내다팔려고 이 궁리 저 궁리를 하면서 살았다.

으레 장날에는 여느 날보다 아침을 일찍 서둘러 먹었다.
힘이 좋은 남정네들은 등지게 바작이나 또는 볏짚으로 엮어 만든 망태기를 어깨에 둘러메고 장터로 가기 위해 저마다 집을 나섰다.

그런 반면 마을 아낙네들은 은연중에 순아네 소달구지가 장터로 향하는 시점을 어림짐작하여 마을 둥그나무 앞에서 서성거리며 기다렸다.
그리고 순아네 달구지에 장보따리를 얹고 그 비좁은 소달구지에 모두 올라타 장터로 향했다.

당시 양쪽 읍을 연결하는 신작로의 사정은 열약하기 짝이 없었다.
그져 맨 흙바닥에 자갈을 덮어놓은 그런 형태의 도로였던지라 해마다 여름 장마가 지고 나면 빗물에 수없는 곳이 움퍽질퍽하게 파였다.
어쩌다 운행을 하는 화물자동차들은 물론 소달구지를 몰고 가기에는 너무나 길 사정이 좋지 않았다.

어쩌다 움푹 파인 곳에 수레바퀴가 빠지면 덜컹거리며 요동치는 소달구지의 심한 흔들림으로 엉덩이가 들썩거리기도 하였다.
그러다 이내 딱딱한 판자 위에 엉덩방아를 쿵하고 찧다 보니 내장이 심하게 요동쳐 그 통증이 심했다.
그래서 저마다 아픔의 소리를 지르면서 아랫배를 움켜쥘 수밖에 없었다.

그런 와중에서도 아픔은 둘째치고 혹시 장보따리가 소달구지 밖으로 뛰쳐나갈까 걱정스러워 저마다 짐 보따리를 챙기느라 정신들이 없었다.
특히 잘 키운 암탉이 줄에서 풀려 어디로 달아나나 싶고 온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리고 볏짚으로 정성을 들여 묶은 계란 꾸러미가 혹여나 깨질까봐 그 아픔을 참으면서 그 모든 것을 우선적으로 챙기려 했다.
그런 모습들 모두가 그 시대에 처했던 삶을 살아 간 우리들 모두의 숨길 수 없는 자화상이었다.

지금의 시대적인 관점에서 그때의 상황을 관찰해 본다면 참으로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의 미개한 삶일지는 모르겠다.
허나 그래도 그 시절에는 그 시대에 걸맞는 순수한 인간미가 오갈 수 있는 때 묻지 않은 정이 있었다.
그런 정으로 이루어지는 모듬살이가 있어 하나의 집합체인 마을을 이루며 살았다.

비교적 도로 사정이 좀 나은 부분을 지날 때에는 비록 비좁은 소달구이지만 서로 흉허물 없이 엉덩이를 바짝 붙이었다.
그리고 화기애애하게 정담을 나누며 좀 전에 엉덩방아를 찧었던 아픔을 애써 잊으려 했다.
그렇게 읍내 장터로 발걸음하는 순박하기 짝이 없는 민초들의 참모습이 있었다.

그런데 그런 순박한 삶의 범주 안에 악랄한 공산주의자들이 불법으로 처들어 와 면소재지가 강제로 점령되고 말았다.

이 땅에 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는 남로당 계열의 좌익 분자들이 한 동안 우리에 경찰과 국군들의 눈을 피해 숨어 사느라 어디가서 죽었나 살었나 가족들에게도 소식 마져 없었다.
그랬던 놈들이 고향 땅이 드디어 우리 인민군 전사들의 손에 의해 미제국주의자들로 부터 해방되었다고 하면서 여기저기에서 갑자기 나타나 큰소리로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그리고 저마다 놈들의 앞잡이 노릇을 충직하게 하여 향리 사람들을 음으로 양으로 그리 괴롭히고 다녔다.
마치 도덕불감증에 걸린 것 처럼 더더욱 살기가 등등 했었다.
피난을 채 떠나지 못한 지역민들 중에 과거 우익 단체에 조금이라도 관여된 사람들의 뒷조사를 할 수 있는 온갖 정보를 놈들에게 비밀리에 제공하였다.

막말로 누구의 제보로 언제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다는 상시적인 두려움 속에 시간을 보내야 하는 답답한 삶의 연속이었다.

돌아가는 사정이 그렇다 보니 이런 말이 나돌 정도로 민심이 지극히 흉흉했었다.

" 막말로 꿩이야 장기와 까투리로 수놈과 암놈이 구분되지만 까마귀는 전신만신이 다 새까맣기만 하니 어느 놈이 수놈이고 어느 놈이 암놈인지 구분이 되질 않다."

그렇게 서로가 서로를 의심하고 불신하며 경계를 늦추지 않고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생각할 수록 기가찰 정도로 한심하고 암울한 시기였다.

우리 외갓집은 선조대대로 들메 마을을 지키며 그 자손들에게 삶을 대물림하며 살았다.
외조부께서는 구학문을 익히셔 후학들을 위해 사랑채에 서당방을 여셨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물론 인근 부락에 사는 분들에게서도 훈장님 소리를 들으시면서 마을에 원로 대접을 받으시며 사셨다.

앞 들녘 물길 좋은 곳에 이십 마지기 정도의 논농사를 지으셔 나름대로 양식걱정 없이 사셨다.
그러나 오랜 세월 지병인 해소병으로 시달리시며 용하다는 한약방을 전전 하시느라 앞 들녘 논 여덟 마지기를 어쩔 수 없이 남에 손에 넘겨주고 마셨다.
그 기름진 문전 옥답을 강경 읍내에서 젓갈 도매상을 크게 하는 최씨라는 분에게 파시고 말았다는 이야기를 내 어머니와 동네 사람들로 부터 전해 들어 알게 되었다.

그런 탓에 늦가을 벼이삭을 헤집어 메두기를 잡고 겨울 철에는 텅 빈 논 물 속에 모습을 드러내는 우렁을 잡으려 들녘으로 나갔다.
그럴 적마다 외조부께서 농사를 지으셨던 논배미를 스쳐 지나가게 되면 잠시 발을 멈추고 바라만 보았다.
이런 저런 생각들이 떠올라 아쉬움에 가득찬 한숨을 내쉬었다.

당시 시대적 상황은 민족에 이념이 좌익과 우익으로 갈려 극도로 혼란스러웠다.
그런 가운데 자고나면 물가가 천정부지로 치 솟았다.
대도시의 서민들과 특히 노동력을 팔아 하루하루 근근히 연명해 나가는 도시 노동자들은 살기가 너무도 어려웠다.
또한 소작농들이 60% 이상을 차지하는 농촌지역에 까지 그 영향이 파급되어 모두 다 살기가 참으로 힘들었다.

그런 어려운 시대적 환경 속에서도 운 좋게 살아남은 계층이 있었다.
지난 날 일제 치하에서 온갖 충성을 다 했던 친일파들이 역사의 준엄한 심판을 받았어야 마당할진데 용케도 피 할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미군정청에서 막대한 국가 경영을 하려다 보니 친일파 출신들이 국가 공무분야에 주를 이루고 있어 그들을 배척할 수가 없어 그져 방관 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미군정이 사회 질서의 확림을 위한 치안유지가 급선무였기에 '일제 관리 체계 유지' 라는 특별법을 제정하였다.
그로 인해 일제 치하에서 조선인 출신으로 순사 노릇을 했던 자들을 그 이유 여하를 불문에 부치고 전원 기용하였다.
그래서 친일파들이 구사 일생으로 살아남을 수 있는 계기가 되고 말았다.

그로인해 친일파 순사 출신들은 지난 날 취득했던 각종 정보와 권한을 최대한 이용하였다.
미군정이 일제로 부터 몰수한 토지와 건물들을 일반에게 불하 할 때 직,간접으로 영향력을 과시하여 크고 작은 부를 남들 모르게 착실히 축적하였다.

그러나 민초들의 삶은 그와는 정반대였다.
구한말 시대부터 일제강점기를 거쳐 해방이 되기 까지 가진 자와 궁핍한 자 그리고 지주와 소작농들 사이에서 차마 겉으로 드러내지 못하는 골 깊은 감정이 필연적으로 형성되었다.
그런 좋지 않은 감정에 앙금들이 오랜 세월 동안 암암리 지속되어 왔다.

그러던 중 그 쌓이고 쌓였던 감정의 분출이 전쟁으로 인하여 이루어졌다.

한국 전쟁 초기 북한괴뢰도당들이 남한을 기습 침공하여 불법점령 하였을 때였다.
우익인사는 물론 그들의 사상에 동조하지 않는 반대급부(反對給付)에 속한 양민들과 지식층들 그리고 지주들을 반동이라는 미명하에 처형하는 만행을 서슴치 않고 저질렀다.

속된 말로 광분한 놈들은 미쳐 피난을 가지 못하고 전전긍긍 하는 양민들을 선별하여 그들의 계획된 만행의 제물로 삼으려 혈안이 되었다.
그러니까 그해 한 여름 이른 새벽에 내 아버지의 목숨을 앗아 갔음에도 또 무엇이 부족했던지 그 해 늦여름 어느 늦은 밤이었다.

내 외조부께서 병환 중이셨는데도 아랑 곳 하지 않았다.
붉은 완장을 팔뚝에 차고 죽창을 손에 거머쥔 종구네 삼촌과 인민군들의 총부리에 인민위원회로 끌려가셨다.

그 이유는 해방 이전 부터 마을에 원로로써 훈장 노릇을 하셨고 이미 숨을 거두신 내 아버지가 대한 청년단 단원이었던 철저한 반동 세력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아니 그보다는 그들이 우익분자들에게 열성적으로 협조한 자라고 두 눈들을 부릅뜨고 잡아드릴려고 하는 외삼촌을 숨겨놓은 자리를 대라는 이유 때문이였다.

그 후 며칠 동안 놈들로 부터 집요한 회유와 겁박에도 끝내 굴하지 않으셨다.
그러자 놈들의 생각에 더 이상 캐낼 정보가 없다고 판단하였는지 아니면 병에 드시고 노쇠 하신 탓에 아무짝에 쓸모가 없어 그랬는지 천지신명의 도움으로 풀려나셨다.

공산괴뢰도당들은 틈만나면 '새로운 세상 인민의 낙원 가진 자와 빈곤한 자의 배분의 균등 신분의 격차가 없는 사회를 이룩한다'고 떠들어댔다.
그런 허울 좋은 감언이설로 지능이 낮은 우매하고 순박한 소작농들을 대상으로 쉽게 현혹시키려 하였다.
그래서 밤마다 마을 사랑방에 마을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공산주의 사상교육은 물론 공산주의를 찬양하는 노래 연습까지 큰 소리로 박수를 치며 따라 부르라고 극성스럽게 강요를 했었다.

그 결과 사상에 물들어 버린 자들을 골라 젊은 이들은 인민의용군이라는 허울 좋은 미명하에 치열한 전투의 총알받이로 내몰았다.

또 한편으로는 놈들에 앞잡이로 만들어 앞집의 아우가 뒷집의 형을 반동으로 몰아 공(功)을 세운 양 의기양양하게 웃음을 지으며 살았다.
면소재지에 있는 마을과 마을을 헤집고 다니며 온갖 감시를 하였다.
이미 테생적 부터 인간성을 상실한 놈들에게 잘 교육된 앞잡이 노릇을 하게끔 만들었다.

태연자약하게 돌아다니며 과거 우익인사들과 자별하게 지냈거나 협조를 한 사람들을 골라 내었다.
그래서 쥐도 새도 모르게 약점을 밀고하거나 또는 은익처를 신고하였다.
그러니 어제의 막연했던 친구를 사상이 다르다는 이유로 살육을 도행(倒行)하는 천벌을 받을 짓들을 공공연하게 자행했다.

내 아버지의 장례를 치뤘을 때부터 모든 동네 사람들은 물론 내 어머니게서도 설마설마 하셨다. 그리 노심초사 우려했던 일이 바로 우리 동네에서 현실로 자명하게 일어나고 말았다.

제발 우리 들메마을에 이제는 그런 피가 꺼꾸로 솟는 아픔일랑 내 아버지 하나의 희생으로 끝나주길 바랬는데 또 다시 광풍이 불어 닥치고 말았다.

내 아버지의 장례가 끝난지 불과 일 주일이 지난 후였다.
그해 7월 26일 강경읍내 서쪽 옥녀봉에 저녁 노을이 불그레 물들어 갈 무렵이었다.

구장님께서 하지감자를 섞어넣은 보리밥이라도 식구들과 둘러 앉아 도란도란 저녁 식사를 하던 중이었다.
그 때 마을 구장님 댁으로 찾아 온 인민군과 놈들에게 저녁 식사도 다 끝마치시지 못하고 끌려 가셨다는 이야기를 동네에 나도는 소문으로 알았다.
그 일도 모든 마을 사람들이 놈들의 눈과 귀를 의식해 각자 몸을 사리느라 겉으로 드러내놓고 말은 못했다.

그러나 내심 속으로는 저마다 걱정을 하였다. 그리고 다들 그렇게 생각들을 했었다.
부락에 구장 일을 보았다고 설마 그 분을 죽이기까지야 하겠는가 했었다.
그런데 놈들에게 끌려가신지 삼일 째 되던 날 밤에 총살을 당하고 말았다.
싸늘하게 식은 시신이 강제로 부역된 타동네의 소달구지에 실려 허망하게 마을로 돌아오고 말았다.

그렇게 처참한 모습으로 돌아온 싸늘한 시신을 팔순을 넘겨 병고에 시달리시는 노모와 남은 가족들이 붙들고 울부짖으며 몸부림쳤다.
하늘이 찢어지고 땅이 꺼져라 있는 여력을 다해 통분하며 목 놓아 울었다.

그리고 그 분들도 우리집처럼 난리 통에 제대로 장례절차도 못 갖추었다.
그저 방바닥에 깔아놓았던 거적때기에 둘둘 말아 등뫼산 자락 비석골 공동묘지에 묻히시고 말았다.
그렇게 한 분 또 다른 한 분씩 한에 맺힌 원혼들이 이념분쟁의 희생물이 되어 허무하게 묻히시고 말았다.

사정이 그렇게 되고보니 내 어머니께서 심적으로 느끼시는 부담감이 그리도 크셨던 것 같았다.
어머니께서는 자꾸만 울먹이시며 그날 밤부터 구장님의 시신이 인식이네 집 대문 밖을 나설 때까지 인식이 어머님 곁을 떠나지 않고 곁에 함께 있어주었다.

그러니 이 땅에서 언제까지 이런 엄청난 비극이 되풀이될련지 참으로 통탄할 일이었다.
불과 삼일 전에 비통한 마음으로 장례를 치룬 마을 이장님의 선하신 얼굴이 불쑥 떠올랐다.
그냥 나도 모르게 먹먹해지려는 가슴을 누르고 얼른 등뫼산을 바라보았다.

그와 더불어 구장님 아들이자 한살 아래 터울이 되는 인식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저 또한 나와 똑 같은 아픔 속에 살아가야 한다는 생각에 가슴이 메어질 것 같이 몹시도 아파왔다.
이제 곧 인식이를 만나게 되면 다정하게 등이라도 다독여 한차례 쓸어 내려주고 싶었다.

나의 미약한 힘으로는 그런 방법 밖에 더 이상은 어찌 할 수가 없었다.
더욱이 그토록 처절한 아픔을 몸소 체험 했기에 섣불리 무엇이라 위로를 해야 좋을지 좀처럼 생각이 떠오르질 않했다.
아니, 떠오르지 않았다는 궁색한 변명 보다는 그 아픔 자체를 다시금 되뇌이는 것 자체가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그때도 역시나 나몰라라 하는 동네 어른들의 매정한 태도를 보고 말았다.
참으로 인간의 비정한 한 면을 내 아버지의 죽음 이후 두 번 째로 다시금 뼈가 시리도록 느끼게 되었다.
물론 시대적 상황이 그럴 수밖에 없었기에 아주 인색하게나마 이해를 해보려고 했었다.
허나 그 매정함을 이해하려는 마음보다는 급진적으로 들끓어 오르는 반감이 먼저 앞섰다.

그리고 마음속으로는 나 역시도 앞으로 험난한 세상을 살아가려면 남들을 생각하기보다는 우선 내 어머니와 나부터 챙기며 살아야만 되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그렇게 이기적인 사고 방식을 갖게 되었다.

광적인 전쟁은 어린 나에게도 영원이 망각시킬 수 없는 통한의 처절한 아픔을 남겨 주었다.
고로 아픈만큼 과격해지는 성격을 형성시켜준 것만은 사실임에 틀림이 없었다.
그리고 무심한 저 하늘은 또 다른 하나의 힘에 겨운 삶의 멍에를 강요하다 싶히 부여해 주고 말았다.

내 아버지와 마을 구장님의 장례를 치룬 후 어쩌다 동네 고샅길을 걷다 우연하게 종섭이와 눈이라도 마주치게 되는 경우가 있었다.
그 때엔 애써 피하려 않고 똑바로 쳐다 보고 걸었다.

그런 용기를 갖게 된 동기는 내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후 부터 줄곳 시작되었다.
어머니의 통한 서린 말씀대로 더 이상 잃을래야 잃을 것도 없으시다는 깊은 뜻처럼 당당하게 맞서려 했었다.
오히려 가능만 하다면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꾹 응징하고 싶었다.
물론 그 모두가 현실적으로는 어려운 일이라는 것도 자각할 수는 있었다.

그래서 내가 선택한 최상에 방법은 그져 때를 기다리며 마음 속으로 이렇게 되뇌이며 살았다.

"그래 저 하늘이 결코 변치 않는다면 그리 멀지 않는 훗날 내가 당신만큼 자랐을 때 기필코 처절한 복수를 하고 말 것이니 그는 너희들이 내 아버지를 비참하게 죽였듯이 나 또한 너희들에 목숨까지도 거두워 드릴 것이다." 라고 수없이 되뇌어 보며 마음에 다짐을 굳게 하였다.

저주스러웠던 그날 밤 내 아버지의 싸늘한 시신이 집으로 왔을 때였다.
그리 험악하게 생긴 얼굴에 아무한테나 버릇 없이 막말을 쏟아붙는 종섭이가 조금은 무서웠다.
따발총을 들고 턱 버텨서 있는 인민군과 더불어 두렵기도 했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더해 가는 비통한 마음에 울분이 짙어졌다.
그 강한 울분이 두려움과 무서움을 퇴화시켜 커다란 증오심을 키워냈다.
그런 마음은 강인한 증오심이 폭력적인 성격을 띄우며 급진적으로 변화되어 갔다.
더불어 아무런 꺼리낌 없이 극한 복수심으로 이글이글 타오르기만 했다.

공산괴뢰도당 놈들에게는 인과응보의 한계를 넘어 도덕적인 면을 운운할 필요가치 조차도 이미 상실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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