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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메로 가는 길 - 169 조회 : 1,391




국토의 등줄기 태백산맥(太白山脈)을 갈라져 나온 차령산맥은 충청도를 향해 힘차게 내려뻗었다. 그 산맥은 계룡산을 품안에 보듬었다. 그리고 백제의 고도 공주를 살갑게 내려다보며 숨을 돌린 후 다시금 서남쪽에 자릴 잡은 칠갑산에 닿았다.
그런 후 산세(山勢)가 수려(秀麗)한 청양 땅을 두루두루 휘돌아 서해의 푸른 바다가 바로 눈앞에 바라보이는 금강 하구 끝머리 서천 땅, 작은 어촌 마을 완포 포구에서 발끝을 멈췄다.

그 차령산맥에서 다시금 뻗어난 계룡산 줄기는 형세로 보아 마치 어미 새가 둥지에 알을 품고 있는 듯 했다. 힘차게 내려뻗은 산줄기는 삼백 리 널따란 황산벌에 논산과 강경을 고루 다정스레 다독여 광활한 논산평야 들녘과 금강의 물줄기를 형성 했다. 언제나 유유히 흐르는 금강 물은 숱한 세월이 흐르는 동안 민초들이 남긴 애환의 상흔(傷痕)을 씻어 내리려는 듯했다.

가파르게 치솟은 산자락 언덕 위에 서 있는 두 그루 노송(老松)이 널따란 앞 들녘을 묵묵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봉긋하게 솟은 작달막한 초가집에 오래도록 고요가 깃들면 형언(形言)할 수 없는 외로움이 썩 달갑지 않게 가슴속에 와 닿기만 했다.
바람이 홀로 길을 쓸어 푸석이는 흙먼지만 간간히 날려 고적함만 더하니 무료한 겨울 외로움의 늪에 소리 없이 빠져들기만 했다. 언제나 그렇듯 저 산도 그런 나른함에서 벗어나려는 눈빛이 역력했다.

‘다들 그리 그리 살아가고 있는데...’라고 생각을 하면서 마음을 누그러뜨려 가다듬으려 해도 속 깊은 곳엔 한번쯤 일탈(逸脫)을 꿈꾸는 양면성(兩面性)이 불쑥불쑥 찾아드니 부질없는 심사(心思)를 애꿋게 탓 할 수밖에 없었다.
못내 아쉬운 얼굴로 버릇처럼 두 눈을 모아 들녘에 모아 보았다. 울 밖으로 보이는 끝 모르게 시원스레 트여진 신작로엔 제각기 갈 길을 찾아 내달리는 자동차들의 굉음이 들려왔다. 그 소리들이 기척 하나 없는 들녘의 적막을 깨트려 늘 마음보다 앞서 가려는 가벼움을 깨우쳐 주었다.

날씨가 추운 탓도 있지만 텅 빈 들녘 탱자나무 울타리 주막집 정류장에 차를 기다리려 서 있는 사람은 겨우 두서넛뿐 이었다. 먼지에 얼룩진 감귤색 버스가 스스럼없이 다가서 멈췄다. 그리고 사람들은 차에 오르고 낡은 시골버스는 다음 행선지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어찌 보면 그런 모습들이 퍽이나 한가롭게도 보일 수는 있으나 왠지 모르게 허전해 지는 마음을 채울 수 있는 방법은 끝내 찾을 수 없었다. 떨어진 낱알을 줍듯 빈 들녘 종일토록 촘촘히 헤집는 해가 허한 내 모습을 그라도 보듬어 주려 하니 일상의 무료함도 한때의 아주 짧은 찰나(刹那)인 것 같았다.

순덕이 어머니께서 오랜만에 무밥을 지으려 하셨다. 그래서 김장독 옆에 깊숙하게 파 놓은 무구덩이에 잘 묻어 놓았던 굵은 무 두어 개를 꺼내 보았다. 윗머리 잎사귀가 잘려 나간 부분에 샛노란 새순이 저마다 귀엽게 자라 올랐다.

하늘 머리 바짝 달라붙은 해가 냉기 가득 찬 대지에 파고들어 얼어붙은 땅을 녹이면 하늘은 새파란 얼굴로 모습을 바꾸려 했다. 해는 눈이 시리도록 해말끔하게 빛나 긴 겨울의 터널을 뚫고 청초한 연초록 신록(新綠)의 생명들을 잉태하려는 몸짓이겠지 하는 성급한 마음도 가져 보았다.

지나간 장날이 엊그제 같기만 한데 벌써 또 오일장이 내일로 코앞에 다가왔다. 어머니께서 마무리가 끝난 털 옷가지들을 읍내로 가져가시려나 보자기에 싸 놓으시고 일거리를 주선해 주신 읍내 점방 조씨네 아주머니 댁에 고맙다고 드릴 것이 옹색한 집안에 그뿐이었으니 하루하루 주섬주섬 함지박에 모아 놓은 계란들을 잘 추려낸 볏짚으로 한 알 한 알 정성 들여 맵시 있게 묶고 계셨다.
그중 두어 개를 아주머니에게 주시며 순덕이 밥에 노른자를 넣고 비벼 주라고 하시니 고마운 듯 아주머니가 환하게 웃으시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셨다.

어머니가 오후를 훨씬 넘겨 초저녁 녘에 동네 옥순이네 집에 가시려 방문을 열고 나서려 하자 그래도 한 식구라고 정이 들었는지 순덕이가 울음을 터트리며 들붙으려 하자 차마 그냥은 못 가시는지 손에 들고 있던 뜨개질 가방을 내려놓으시고 순덕이를 끌어안아 등을 다독여 울음을 멈추려 하시며 말씀하셨다.

“오냐! 오냐! 아이구 내새끼가 기특도 하지 그려 이젠 컸다구 지 살붙이도 알아보고 큰에미가 그렇게 좋냐 그렇게도 좋아.”

그 작은 연약한 볼에 볼을 맞대어 솟아나는 정만큼 마구 부비셨다. 그런 구김살 하나 없는 순수한 모습이 혹독한 추위를 녹이며 살아가려는 우리 식구 모두의 삶에 원동력임을 깨닫고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가슴 아린 모정은 어미로 부터 물려받은 뜨거운 사랑을 고스란히 그 자식에게 다시 대물림하여 주는 미덕인 것만 같았다.

매캐한 부엌 연기가 좁은 방 안에 스며드는 초라한 삶일지라도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내 지향하는 길로 걸어가고 있다고 자위를 하며 살았다. 어처구니없이 잃어버린 내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에 잘 떠오르지 않는 어렸을 적 기억을 어렵게 하나둘씩 찾아내려 애를 썼다. 그래서 나만의 오붓한 최면을 걸어 보려고 밤마다 잠자리를 그리도 뒤척였다.

늘쩡거리던 구름이 몸을 가지런히 추스르니 햇살이 촘촘하게 빛을 내비춰 바라보는 시야가 선명하게 트였다. 저 멀리 들녘을 가르는 검은 기차의 모습이 더욱 또렷하게 눈앞에 다가서고 산 밑 마을 교회 높다란 십자가도 시린 하늘 아래 더욱 선명하게 보였다.

우묵 진 둔덕의 쑥대밭 자리에 추위를 견뎌 내는 쑥이 남모르게 하나 둘 곱살하게 움을 트려 때를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 그런 여린 몸짓이 더없이 애잔키만 하여 가던 걸음을 잠시인들 붙들었다.
그와 더불어 나 또한 다시금 찾아 올 봄이 은근히 그리워졌다. 그렇게 순수함을 바탕으로 참신한 인성 속에서 무탈하게 자라나고만 싶었다. 겨울방학이 끝이나 개학이 내일 모레인데도 아랑곳하질 않고 짧게만 느껴지는 방학이 아쉬운지 동네 아이들은 뒤질 새라 냇가를 가득 메워 썰매를 타고 있었다.

성급한 아이들은 쥐불놀이 깡통에 불을 붙여 어깨 위로 동그랗게 휘둘러 냇가 둑 잔디에 듬성듬성 불을 놓아 새까맣게 타 들어간 흔적을 흉물스럽게 군데군데 남겼다.

새로 이사 온 집 대문 앞에 순아네 할아버지의 모습이 보였다. 새로 맞추신 빈 담뱃대를 잘 빨리나 하고 입에 무시고 몇 번을 빨아 보신 후 마음에 드셨는지 담뱃대를 매만지시며 걸어오고 있었다. 그러다 면사무소에 볼일을 보고 오시는 이장님과 고샅길 앞에서 서로 마주치시자 순아 할아버지께서 먼저 말씀을 건네셨다.

“이장! 면사무소에 댕겨 오는감?”

그러자 이장님께서 손에 들고 있던 누런 서류 봉투를 들어 보이며 인사를 하셨다.

“예! 지난번에 사진 찍은 사람들 꺼 도민증이 나왔다고 찾어 가라고 해서 동네 사람들 하고 댕겨오는 길이구먼유. 그나저나 슬슬 선거철이 다가와서 그러는지 그 잘난 국회의원이란 사람 자리가 높아서 그런지 평상시에는 코쭝배기 한번도 안 보이더니, 오늘 면 소재지에 갑자기 나타나서 면장하고 지서주임은 물론 의용 소방대장하고 용꽃마을 양조장 주인까지 죄다 나와서 북새통을 떨드라구유. 뭐, 이번 선거에서 대통령한테 점수 좀 딸려고 그러나 참 그놈의 권력이 도대체 뭔지?”

그러자 순아네 할아버지가 담배를 한대 피우시려는지 새로 맞춘 장죽에 가루담배를 꾹꾹 눌러 담으시며 다시 말씀을 하셨다.

“아! 왜 아니것어 지난 번 선거 때도 좀 많이 시끄러웠는감? 그 난리를 쳤어도 ‘민심은 천심’이라구 대통령이야 그 아까운 사람 신익희가 솜리(익산)서 유세를 끝마치고 돌아오다가 기차 안에서 심장마비로 애석하게 죽는 바람에 까 볼 것두 없이 이승만 박사가 됐지만, 그 뭐시냐 부통령에 나온 이기붕이는 떨어졌으니 이번에는 어찌라도 당선시켜 볼라구 난리를 치구 다니것지. 뭐 그러구 보닌께 선거철두 얼마 안 남았네 그려.”

추운 바깥 날씨 탓인지? 이장님의 입가에서 번져나는 허연 입김과 순아 할아버지가 내뿜으시는 담배연기가 함께 어울려 가늘게 흩트려졌다. 두 분이 어깨를 마주하시고 사이좋게 동네 안으로 들어가셨다.

어스름 해가 기울어 가는 저녁녘이 되자 낮 동안 한산하던 동네 우물터가 갑자기 부산해졌다. 물동이에 물을 길어 머리에 이고 가시는 이주머니들의 발걸음 따라 ‘사르락사르락’ 스치는 치맛자락 소리가 들려왔다. 더러는 힘이 좋은 동네 남정네들이 양철통에 한가득 채운 물소리가 ‘찰랑찰랑’ 들려와 조금씩 밖으로 넘쳐나는 물이 흙먼지 푸석한 땅 위에 떨어져 동글동글하게 물 자국을 남겨 그마저도 바라보기에 정겹기만 했다.

물지게를 지고 언덕배기에 올라 차오르는 숨을 가누려 했다. 아침부터 구름자락을 붙들어 온종일 노닐던 해는 저녁이 되자 호들갑 떨며 잰걸음을 하는 것 같았다. 영롱한 빛을 허리에 잔뜩 두르고 우리네 시린 사연 붉게 덧칠하여 어스름 어둠 오는 둑 너머에 몸 숨기려 했다. 그런 속내를 아는 듯이 언덕 위에 갈참나무들이 말없이 저물어 가는 해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마다 잠자리를 찾아 떠나려는지 멧새들 울음소리가 하루해 기움을 알리는 듯했다. 금강 둑 너머 서산마루엔 선혈보다 더 붉은 끝자락 노을이 아직은 조금 남아 있는 자태를 드러내고 있었다.
그리고 뒷산 산마루엔 초저녁 냉기에 몸 추스르는 나를 닮은 듯 꼬리 끝이 휘어진 눈썹달이 산마루턱에 창백한 얼굴로 처연하게 떠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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