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새껏 좁디좁은 방안에 꽉 들어차 있던 어둠을 서둘러 내몰려는지 문풍지에 새치름한 밝은 빛이 부옇게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비좁은 방 침체된 공간에 가득하던 어둑발이 서둘러 남긴 흔적을 주섬주섬 거두려는 새벽녘이었다. 뒤척이던 잠자리 눈을 떠 보니 밤사이 스쳐 지난 사사로운 사념들이 여명(黎明) 속에 상념(想念)으로 다시금 슬금슬금 떠오르기 시작했다.
방구석 한쪽에 외롭게 서있는 기름때 얼룩진 사기 등잔을 바라보니 각박한 삶 속에 잘 길들어져 가는 내 육신이 더없이 측은키만 했다. 깜냥에는 바동댄 기억 있어 나름대로 살고 있노라 어설픈 자위(自慰)를 애를 써 해 보아도 마음에 다가오는 느낌은 홀딱 벗은 듯 검츠레한 나목처럼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허나 처해진 내 삶이 고난할지라도 한 번의 흰 깔때기 꽃을 피우려 발밑에 밟혀도 결코 으스러지질 않고 다시금 줄기차게 머릴 드는 질경이의 끈질긴 삶을 답습(踏襲)하고만 싶었다.
방문 앞 한쪽엔 지난밤 이슥토록 어머니가 손끝 아프게 일하신 뜨개질 꾸러미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반쯤 오므린 작은 손을 위로 쭉 뻗고 천연스럽게 잠자고 있는 순덕이 얼굴을 바라보며 다음 세대를 살아갈 아기는 나처럼 가슴앓이를 내리물림하지 않도록 맘속으로 빌었다.
비록 가혹한 신의 형벌(刑罰)로 실어(失語)를 하여 힘들게 살아갈지라도 아주머니께서는 그리도 남다르게 부지런하셨다. 어렸을 적부터 몸에 밴 산골 생활에 익숙하신 탓인지 틈이 나는 대로 순덕이를 등에 업으시고 텃밭과 둔덕 밭을 부지런히 두루 돌아 살피셨다. 그리고 눈여겨 두었던 쑥과 냉이도 놓치질 않고 그리고 뽕나무 새순도 한 바구니 가득 뜯어 와 부족한 식탁에 깐깐한 성격만큼이나 정성을 들여 나물반찬으로 보태셨다. 잘사는 누구네 집처럼 윤기가 절절 흐르는 흰 쌀밥은 아닐지라도 뜨거운 정만큼이나 김이 무럭무럭 나는 보리와 고구마가 가득 섞인 잡곡밥에 짭짤하면서도 쌉쌀한 나물 반찬이 입맛을 돋우는 데는 제격이었다.
산자락 끝머리에 납작 엎딘 초가지붕 아래 저마다 주어진 몫에 성실하게 살아가려는 우리들의 숨소리가 생동(生動)할 수 있는 오붓한 기회를 준 하늘에 감사할 뿐이었다.
마른 흙먼지가 푸석하게 이는 교문 앞 대장간에는 시퍼런 겉불이 붙어 빨갛게 잘 달아오른 곡괭이 끝을 두드리는 무딘 쇠망치 소리가 세차게 들려왔다. 불길이 활활 타오르는 둥그런 화덕 아궁이 앞에서 겨울 추위를 잊은 듯 얇은 겉옷 하나만을 걸치시고 온몸에 땀을 흘려 풍구질을 하시는 아저씨의 모습이 활기차게 보였다. 문구를 파는 점방에는 학습 도구를 사려고 추위에 발을 동동 구르며 자기 차례를 서둘러 기다리는 아이들의 정겨운 모습도 눈에 띠었다.
무채색의 겨울이 끝자락에 매서운 각을 세우고 있었다. 삶의 여정 속에 새로운 도약을 위해 준비하는 분주한 2월이 겉으로는 느긋하게 보여도 졸업과 입학시험을 앞 둔 우리들에게는 분주한 달이었다. 교단에 서 계신 담임선생님이 한 사람씩 호명을 하여 중학교 입학시험 수험표를 나눠주셨다. 내 차례가 되어 설레는 마음으로 입학시험 수험표를 받으러 교단 앞으로 나가 서 있는데 선생님이 빙그레 웃으시며 말씀하셨다.
“강상민! 너 수험 번호 한번 아주 좋구나. 아마도 좋은 결과가 있으려나 보다. 그러니 남은 기간 더 열심히 준비를 하여 좋은 성적을 내어 모교의 명예를 빛내주길 바란다.”
손바닥 크기만 한 수험표를 건네주시어 바라보니 내 수험번호가 4번이었다. ‘동네 어른들이 4자는 죽을 4자라던데...’하며 찝찝하게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그런 내 마음을 헤아려주시는 듯 선생님이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다. 그리고 강경여자중학교에 입학원서를 제출한 석란이는 69번이었고 옥순이는 수험번호가 231번이었다. 저마다 받은 수험표를 구겨지지 않게 책갈피 속에 조심스럽게 끼워 넣고 내일 있을 졸업식 준비를 하기 위해 선생님의 지시에 따라 한동네 사는 꼬마둥이 순아네 반인 1학년 1반 교실과 같은 학년 2반의 교실 사이를 가로막은 미닫이 문짝을 떼어내고 빗자루로 쓸어내고 걸레로 닦아 청소를 했다.
학교 선생님들이 언제 빈틈없이 준비를 하셨는지 학예회 때에 쓰는 검은 천을 교실 앞면에 널따랗게 걸쳐 한가운데에는 태극기를 계양하여 자못 분위가 근엄하게 느껴졌다. 검정 천 위에는 ‘제 17회 채운 국민학교 졸업식’이라고 멋있게 써진 글들이 담긴 종이조각들을 붙이고 계셨다. 교단 위에는 검정 옻칠이 번질거리는 네모난 나무 상자가 하나 놓여 있어 그 안에 졸업장과 상장을 담아 놓을 것 같았다.
삼촌이 학교 소사 일을 하여 학교 일에 대한 정보가 빠른 부반장인 영선이 말에 의하면 우등상을 두 반을 합쳐 8명 정도에게 준다고 했다. 나는 별다른 자신감이 없었으나 사람 욕심인지라 비록 ‘언감생심(焉敢生心)’이 될는지는 모르지만 마음속 한편으로 은근히 기대를 해보았다.
배구도 잘하시고 손재주가 많으신 4학년 2반 담임선생님은 확성기와 앰프를 점검하시며 마이크에 대고 자꾸만 ‘아아, 마이크 시험 중’ 이란 말을 싫증이 날 정도로 되풀이하셨다. 가끔은 음량 조절이 잘 안되어 두 귀가 따가울 정도로 파열음이 울려 퍼졌다. 그렇게 모두들 정신없이 준비를 하고 있는데 학교 소사 일을 하시는 양씨 아저씨가 임시 강당으로 들어오시며 잔뜩 놀란 표정으로 말씀을 하셨다.
“정선생, 소식 들었는감? 아침나절에 읍내 교육청에 공문서 가질러 갔었는데 읍내 사람들이 모여서 하는 소리를 들어보닌게, 아, 글쎄 어제 이번 대통령 선거에 민주당 후보로 나올려고 했던 ‘조병옥’ 박사가 미국에 있는 육군병원에서 암으로 사망을 했다고 나지오에서 오전 뉴스에 나오더라고 하면서 웅성거리던데, 참 아까운 사람 또 하나 어처구니없이 세상을 떠나버렸네, 그려.”
그러자 강당 안에서 일을 하시던 선생님들이 잠시 일손을 놓으시고 소사 아저씨 앞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넓게 트여진 강당에 의자를 배열하고 계시던 우리 담임선생님이 양씨 아저씨를 바라보시며 되물으셨다.
“아니, 양씨 아저씨 말 들어 보면 그게 참말인가 보네. 참 그분도 국민들의 추앙을 받는 지도자 중 한분이신데 그렇게 허무하게 돌아셨구먼. 참 아까운 분인데... 그나저나 이승만 박사는 참 복도 많으신 양반이네 그려. 저번 대통령 선거에서는 역시 민주당 후보인 해공, 신익희 선생이 심장마비로 돌아가시는 바람에 운을 거머쥐더니 이번에도 강력한 상대인 조병옥 박사가 죽었으니, 대통령 선거는 해보나마나 뻔하게 되었구먼 그려. 그러니 남은 문제는 부통령 선거인데 자유당에 ‘이기붕’씨와 민주당에 ‘장면’박사하고, 두 사람 싸움인데 아마도 이번 선거 역시 불꽃이 튀길 것 같구먼.”
말씀을 끝내신 담임선생님께서 아랫주머니에서 은단을 꺼내시어 입에 넣어 깨물며 계셨고 두 분이 나누시는 이야기를 듣고 계시던 2반 담임선생님이 말을 이으셨다.
“그럼 대통령 선거는 하나마나 이승만 박사가 될 것이 뻔하고, 부통령 선거에서는 어차피 선거 끝나고 개표를 해 봐야 아는 것이라 내가 속단해서 뭐라고 말을 할 수는 없지만, 가만히 돌아가는 주변 민심을 살펴보면 여론은 이기붕씨 보다는 장면 박사가 더 유리할 것 같은데 어찌? 될련지 모르것네.”
그러자 좀 성격이 급하셔 학교에서 무슨 일이 있으면 교장선생님한테도 자기가 옳다고 생각이 들면 과감하게 의견을 내세우시는 마이크를 잡고 그리 씨름하시던 4학년 2반 담임선생님이 대뜸 자리에서 일어나셔 2반 담임 선생님 얼굴을 바라보시며 말씀을 하셨다.
“아이고 안 선생님 그건 삼척동자도 다 아는 일이고요 문제는 부통령을 누가 하느냐 하는 건데, 이승만 박사가 나이가 많아 노쇠하여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판국에 집권 자유당이 그런 급변스런 일에 대비를 하려고, 이번에는 자유당에서 어찌 됐던 이기붕씨를 부통령에 당선시킬려고 개나 소나 다 나서 지난번보다 더 설쳐댈 것 같아 아무튼 엄청 시끄러워 질 것 같은데, 막말로 우리들이사 누가 되면 별수 있것는가요 쥐꼬리만한 빽이라도 있는 놈들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더 설쳐대고 가진 것도 빽도 없는 민초들만 살기가 더 팍팍해져 돌아가는 나라 꼴이 이 모양인데 더 이상 무신 말을 한데유.”
우리 담임선생님하고 2반 담임선생님 두 분은 머리를 끄덕이시고 소사 양씨 아저씨는 거침새 없는 그 말에 조금은 당황스런 표정으로 말씀하셨다.
“아니, 최선생. 그거 다 맞는 말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탁 터놓고 그리 말하면 되는지 모르것네. 들리는 소문에 며칠 전에도 ‘들메’ 부락에 산다는 그 민주당 운동하는 사람도 붙들려 가서 하룻밤 동안 조사를 받고 다시는 그런 말 안 한다고 각서라던가 반성문인가를 쓰고 나왔다는데.”
양씨 아저씨가 선생님들의 눈치를 살피자 역시나! 젊은 나이에 성격이 급하신 최선생님이 조금 떨떠름한 표정으로 다시 말씀하셨다.
“아니, 가만히 보닌께 양씨 아저씨는 겁이 되게 나시는 모양이네 그려. 허기사 입이 있어도 말 못하고 귀가 뚫렸어도 듣지도 못하는 세상이니 더는 말할 필요도 없지만, 눈뜨면 학교 울타리에 갇혀 백묵(白墨)가루만 먹고 산다고 세상 돌아가는 것 모를 것 같지만, 조물주가 눈과 귀를 그리고 입을 주어서 보기 싫어도 봐야 하고 듣기 싫어도 들어야 하니 그렇다고 입을 열어 말을 할 수는 없어 그저 답답하네유. 그래서 순박한 민초들만 불쌍한 것이지요. 안 그런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