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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메로 가는 길 - 177 조회 : 1,553




선연한 아침 해는 오늘도 어제처럼 변함없는 그런 모습으로 하늘 한가운데 자릴 잡고 있었다. 찬란한 모습을 송두리째 드러낸 해를 바라보는 내 마음은 평온의 굴레 속에서 아무런 탈 없이 머무를 수 있길 소원했다.
다소 거리가 먼 탓도 있었지만 읍내 하늘에 외로이 떠도는 작은 구름 조각들이 외롭다 못해 자꾸만 서먹하게 보였다. 낯선 소읍(小邑)의 한 모퉁이에 이방인처럼 홀로 서 있는 내 모습이 너무도 초라하게 보였다. 그래서인지 도시가 주는 생소함이 낮선 곳에 대한 어색함을 더욱 가중시켰다.

시가지로 들어서 서서히 달리는 차창 밖으로 스치는 도로변에 벚나무의 등피가 마냥 까칠하게만 보였다. 그러나 인고(忍苦)의 나날 속에 기다린 보상을 받으려는 것처럼 이제 막 새순을 터트리려 했다. 그렇게 노목(老木)은 사랑의 약동(躍動)을 내면 깊숙이 숨겨 숨 죽여 때를 기다린 듯싶었다.

전란 속에 미군들이 쓰다 남긴 노후된 군용트럭을 불하받아 개조한 낡은 버스의 성능이 그리 좋을 리는 없었다. 채 녹지도 못한 미끄러운 눈길을 조심스레 달려온 버스가 읍내 황산동 버스 정류장에 닿았다. 그러니까 면소재지 주막집 정류장을 출발하여 사십 여분이 지난 후였다. 그렇듯 그 시대 모든 생활상이 그토록 느릿느릿하여 답답키만 했다.

도시는 하나의 곧은 선으로 시작하여 또 다른 크고 작은 선들과 복합을 이루어 그 매체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강경 읍내는 비교적 규모가 그리 크지 않는 소읍이었다. 시내 황산동 사거리를 중심축으로 삼아 자침이 가리키는 방위각(方位角)에 따라 네 갈래로 길이 트여 있었다.

동쪽으로는 소화다리를 건너 강경경찰서와 강경여자중고등학교 그리고 중앙국민학교를 지나 강경상업고등학교로 이어져 금강둑 사주거리 다리로 이어졌다. 그리고 그 도로는 들녘 채운면을 거쳐 유일하게 군청 하나가 있는 논산 읍내로 뻗어났다.

그리고 서쪽으로는 금강이 질곡의 세월 속에 남겨진 숱한 애환을 속 깊이 아듬은 채 물줄기 따라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권위적인 서슬이 퍼런 만큼 더욱 음울하게 보이는 높다란 편백나무 울타리에 둘러싸인 법원과 검찰청건물을 지나면, 옛 자취가 서서히 지워져 가는 황산 나루터가 그리도 외로운 모습으로 가참하게 보였다.
금강을 건너면 세도 나루터에 부여와 이어지는 길목이 빼꼼하게 보였고 강줄기를 거슬러 조금 멀리 논산 읍내의 모습이 아드막하게 보였다. 그리고 낭청에 있는 강경중학교를 거쳐 나바위에 있는 고색창연한 천주교 성당을 지나 도경계를 넘어 얼마쯤을 달려가면 서해 군산 앞바다에 닿을 수 있었다

남쪽으로는 숱한 세월 묵묵히 자리한 채운산과 산 밑자락에 자릴 한 강경역을 비스듬히 돌아 오른쪽으로 도경계를 넘어 서면 전북 용안면에 닿을 수 있었다. 대리석으로 전국에 유명세를 떨치는 함열면을 거쳐 조금 멀리 황토색 고구마의 주산지인 황등면을 지나면 솜리(익산)로 이어졌다. 그리고 채운산을 왼쪽으로 끼고 돌아 남동쪽으로 가면 그 당시 군내에서 유일하게 하나 밖에 없는 채운산 밑 산양리에 있는 화장터를 지나 신영다리를 건너 들녘 길 이십 리를 더 달려가면 논산 훈련소가 눈앞에 바라다보였다.

북쪽으로는 채운산을 마주 바라보고 있는 옥녀봉이 언제나 다정스런 모습으로 시가지를 내려 보고 있었다. 바로 옥녀봉 아래 서창동에 조금 낡아 보이는 목조 건물의 북옥 감리교회라는 작은 교회가 하나 있었다. 그리고 ‘딸가닥딸가닥’ 심심찮게 소리가 들려오는 배틀 공장을 지나면 회색빛의 낡은 콘크리트 건물에 활동사진을 돌리는 강경극장과 맞닿을 수 있었다.
읍내 상권의 중추를 이루는 시내 중앙동에는 회색 대리석 건물의 호남병원과 붉은 벽돌로 지은 3층 규모 정도의 높은 한일은행이 보였다. 맞은편 길목 안에는 유일한 통신매체인 우체국이 있었고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지붕에 기와를 올린 아주 고풍스런 건물의 낭일당 한약방이 있었다. 그 건물들 사이에 동네 어른들이 그리도 좋아해 오른손 두 손가락을 누렇게 물들여 놓는, 담배를 배급해주는 연엽초전매소가 있었다. 시내를 벗어나 금강둑을 건너는 성동다리를 지나면 성동면을 거쳐 역시 부여로 가는 길목에 들어설 수 있었다.

황산동 버스 정류장 앞 길모퉁이에 나무판자로 만든 간이 게시판에 밤새 내린 진눈깨비에 젖은 듯 눅눅해진 정부통령(正副統領) 선거(選擧) 벽보(壁報)가 울룩불룩 부풀어 올라 한 부분이 곧 떨어져 나갈 것만 같았다.

읍내에 두 대 밖에 없다는 시발택시 운전수들이 손님들을 부르는 소리가 도시의 상징처럼 들려왔다. 길 건너 정육점 가게 진열대 나무판 위에는 돼지머리가 우리들에게 시험을 잘 치루라는지 익살스럽게 웃음을 짓고 기름에 번질번질 질이 잘나 우악스럽게 생긴 쇠갈고리에 벌거벗은 돼지 넓적다리 한쪽이 투박하게 걸려 있었다.

채 쌓이지도 못한 눈이 녹아내리는 큰길은 꽤나 질퍽거렸다. 금강둑을 넘어온 바람이 소읍을 찾아 온 낯선 얼굴이 저 또한 서먹한지 슬며시 몸을 건드려 보는 듯 가볍게 스쳐 지나 도심 한복판으로 향했다.
모두가 그지없이 낯설기만 한데 그래도 어머니는 오랫동안 장사를 하시던 터라 그런지 전혀 개의치 않으신 듯해 보였다. 길가에 있는 상점 주인들과 평소부터 안면이 있으신지 이따금씩 반갑게 인사를 나누셨다.

하행선 남쪽으로 가는 열차가 잠시 멈춰선 역사 기관차가 ‘푹푹푹푹’ 소릴 내며 내뿜는 수증기에 섞여 나오는 누리척지근한 석탄 타는 냄새가 짙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사거리 길모퉁이 라디오방에서는 오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끌려는 듯 동네에서 어쩌다 귀동냥으로 들어보던 축음기 소리가 길거리로 힘껏 쏟아져 나왔다.

아직은 어려 그 뜻을 알 수 없는 한자가 쓰여진 붉은색 종이가 창문마다 마름모꼴로 붙어 있는 중국집에서는 춘장에 돼지고기를 넣고 양파와 함께 볶는 냄새가 은근히 군침을 돌게 했다. 오늘 입학시험이 끝나면 어머니가 짜장면이라도 사주실까 하는 기대감도 마음속으로 가져 보았다. 황산동 끝머리에 닿으니 삐까번쩍하게 윤이 나는 자전거가 이십 여 대 정도 천장에 일렬로 모양새 있게 걸려 있는 자전거포가 보였다.

신형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그렇게 부잣집 티를 내던 종구네 집이 엄청스레 부자인줄만 알고 살아왔는데 ‘시골 동네 부자가 읍내 큰 점방 주인만도 못하다.’는 말처럼 그제서야 내 자신이 너무 우물 안 개구리 신세를 면치 못하였다는 것을 조금씩 깨닫게 되었다.

들녘 논배미 너머 호남선 철로 옆에 사방이 높다란 포플러나무로 둘러싸인 제법 규모가 커 보이는 학교 건물이 보였다. 그곳이 바로 강경중학교이고 꼭 합격을 하여 앞으로 삼 년 동안 배움을 이어받을 곳임에 마음이 숙연해졌다.
신작로를 약 10분쯤 걸어 학교 교문 앞에 닿으니 교문 앞 양쪽으로 커다랗게 파 놓은 연못이 눈에 띄었다. 연못 한가운데 작은 동산에는 버드나무가 듬직하게 자릴 잡고 있었다.
회색 대리석을 깎아 세운 교문 앞에는 처음으로 대하는 얼굴들이라 낯이 많이 설은 수많은 또래 아이들이 중학교 선생님들과 왼쪽 팔에 ‘기율’이라는 글씨가 보이는 완장을 차고 허리에 차고 있는 하얀 가죽 혁대의 끈이 어깨로 둘러진 위엄 있게 보이는 3학년 학생 두서너 명의 안내를 받고 있었다. 그리고 어찌 그리 용케 소문을 듣고 찾아 왔는지 엿장수들이 합격 엿을 사라고 소릴 치며 몰려 있었다.

어머니에게 걱정을 말고 기다리시라는 당부를 드리고 아이들과 함께 학교 안으로 들어섰다. 화강암으로 석축을 쌓아 더욱 높다랗게 바라보이는 학교 본관 건물 앞 손질이 잘된 잔디밭에
마지막 추위를 버티고 있는 하얀색의 백엽상이 아담스레 보였다. 화강암으로 지어진 건물의 벽들에 서린 이슬에 햇살이 반사되어 마치 서릿발처럼 작은 빛을 발하여 무척이나 고딕하게 보였다.

그 당시 신입생 모집인원은 한 반에 50명 기준으로 6개 반의 인원을 모집했다. 수험번호 1번에서 50번까지 제1고사장으로 표시된 교실 안으로 들어가 책상 위에 수험표와 필기도구를 꺼내 놓고 두근거리는 가슴을 가다듬고 기다렸다.

얼마 후 ‘드르륵’ 교실 문을 여는 소리와 함께 둥그렇게 돌돌 말아 종이로 붙인 시험지 뭉치를 들고 선생님이 들어오셨다. 몇 가지 주의사항을 말씀하신 후 눈을 감고 두 손을 머리 위에 얹으라 하시며 줄을 따라 시험지를 나눠주셔 교무실에서 치는 종소리에 맞춰 제 1교시 시험문제를 풀기 시작했다.
지난 일 년 동안 그리 수도 없이 날마다 시험을 치러 아주 짜증이 날 정도였는데, 막상 입시 시험을 치르게 되니 다소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러나 시험지에 대한 큰 두려움 없이 익숙해지는 내 모습에 담임선생님의 속 깊은 뜻을 깨닫고 고마운 마음에 선생님 얼굴을 잠시 떠올려 보았다.

예상외로 국어 시험문제는 그리 어렵지 않아 수월하게 답을 기입하여 한차례 더 자세히 훑어본 후 시험지를 제출했다. 아마 기억으로는 그 교실에서는 제일 먼저 교실 밖으로 나온 듯했다.
추운 날 교문 밖에서 애태우실 어머니가 걱정되어 굳게 닫힌 교문 앞으로 걸어가니 수많은 학부형들이 추위에 발을 동동 구르며 서 있는데 교문 밖에서 어머니가 나를 바라보시며 말씀하셨다.

“야, 상민아! 너 벌써 그렇게 나오면 어쩌니? 애가 차분허질 못허구 차근차근하게 잘 보구서 그리고 또 틀린디는 없는가 살펴보구 하지 그렇게 뭐시 급하다구 얼른 뛰쳐나오구 그러냐? 기나저나 시험을 제대로나 쳤는지 통 모르것네 다음 시간에는 제발 덤벙대지 말구 찬찬히 혀 알어 들었냐?”

짧은 쉬는 시간이 지나고 제2교시 수학 시간이 되었다. 평소 흥미를 못 느끼던 제일 자신감이 떨어지는 과목이라 내심 겁을 먹었는데 역시나 출제된 문제들이 난해하여 무척이나 애를 먹었고 조금은 많이 틀린 듯싶아 뒤끝이 영 개운칠 못했다. 그런 개운치 못한 마음이 조금이라도 누그러진 것은 3교시 사회과목 시험시간이었다.
출제된 문제의 대다수가 지난 일 년 동안 요점 정리를 하여 징그럽게 반복에 반복을 거듭하여 머릿속에 암기한 과목이라 국어시험 못지않게 수월키만 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자연시간에는 수학시험보다는 덜 어려웠지만 한참을 끙끙댈 정도로 만만치 않았다.
그렇게 시험을 마치고 나름대로는 최선을 다했기에 어느 정도는 자신감을 갖고 합격 여부를 운명의 신에게 맡겼다.

처음으로 보는 얼굴들이라 더욱 낯이 설어 뻘쭘하게 서로 얼굴만 바라보며 우리들 모두는 교문 밖으로 나와 신작로 위에 긴 행렬을 이루며 소읍의 도심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길을 걸으면서도 방금 전에 치룬 시험 문제 중에서 난해한 문제를 몇 번씩이나 떠올리다보니 어느덧 시내 입목인 황산동에 닿았다.
딱딱한 등껍질에 속살을 쏙 오므려 감추는 소라처럼 언제나 사립짝이 활짝 열려 스스럼없이 마음껏 받아주는 내 작은 삶의 터 산골 초가집에 가려고 어머니와 함께 읍내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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