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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메로 가는 길 - 178 조회 : 1,657




비옥(肥沃)한 토양에서 한 알의 씨앗이 발아(發芽)되어 다스한 햇볕과 단비로 야무지게 성장을 하여 알찬 결실을 이루어내듯 내 삶의 시작인 태동(胎動)은 어머니의 모태(母胎)였다. 그 고귀한 양분은 내 어머니의 뼈아픈 고통의 눈물과 젓갈 냄새 가득 찌든 옷자락에 흠뻑 젖은 땀방울로 결집된 영원불변의 모정이었다. 그리고 그 햇살과 단비는 내 스승님의 은혜로운 가르침이었다. 그러니 이제 쉴 틈 없는 약동(躍動)으로 알차고 탐스런 열매를 맺는 일은 정녕 내 몫인 듯싶었다.

무릇 지나고 보면 그리 속절없이 빠른 것이 세월이지만 시험을 치루고 집에 돌아온 것이 겨우 삼일 전 일인데 벌써 합격자 발표가 내일로 다가왔다. 일제의 강점에서 해방된 그 이듬해 배고픔 속에서도 태어난 우리 또래의 아이들이 그리도 많았다.
그래서인지 입학시험 날 어머니가 교문 밖에 떠도는 소문으로 들으신 것처럼 응시 경쟁률이 예상보다 높을 것이라고 했다. 그 말을 들은 이후로 초조해지는 마음에 불안감이 극도로 가중되었다.

들녘 너머 시오리 길 읍내 모습들이 해말끔한 하늘 아래 선명한 모습으로 자태를 드러냈다. 엊그제 한번 눈동냥을 하고 온 곳이라 확연하지는 않더라도 읍내 군데군데가 새롯새롯 기억에 떠올랐다. 이제 합격을 하여 입학 수속을 마치게 되면 저 도심 속에서 앞으로 삼년 동안 또 다른 학문을 갈고닦아야 할 것 같아 뜻 깊은 의무감에 마음이 무겁기만 했다.

흔히들 말하길 산바람 바닷바람이 그리 드세다고 하지만 온 주위가 막힘없이 트여져 그 끝이 가물가물 잘 보이질 않는 드넓기만 한 금강 들녘에서 불어오는 바람 또한 거세기만 했다. 바람이 먼 들녘 길을 달려오며 탄력(彈力)을 받아 몰아치는 힘이 그리도 센지 뒷산 골짜기에 부딪쳐 크고 작은 산짐승의 비명처럼 들려왔다.
언덕배기를 올라서는 나를 힘껏 밀쳐 발걸음이 한두 발짝 저절로 앞으로 내딛어졌다. 마지막 겨울 추위 아직은 한두 차례 남은 듯싶건만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이 두 볼과 손등이 싸늘키는 하여도 지난겨울 혹한 때처럼 온몸이 아리도록 춥지는 않아 그냥 그럭저럭 견딜 만했다.

방죽가 물웅덩이에는 부는 바람 따라 잘랑잘랑하는 물결이 햇살에 비춰 반짝반짝 빛나 바라보기에 마음이 훗훗했다. 모처럼 나들이를 나온 오리들은 바람에 들춰지는 깃털을 가다듬으려 온몸을 자꾸만 흔들고 있었다.
동네 초가지붕들이 정겹게 보이는데 그중 한두 집 지붕의 이엉이 부는 바람에 군데군데 벗겨졌나 눈에 보이는 모습이 흉물스럽기만 했다.

동네 북쪽 끝머리 ‘우묵배미’ 논 가운데에 있는 큰 방죽에 동네 어른들과 몇몇 아이들의 모습이 보였다. 바깥날이 좀 풀리는 듯하자 담배 냄새 가득 배어나는 방앗간 사랑방이 싫증났는지 다른 소일거리를 찾으려는 것 같았다.
아마도 방죽에 고여 있는 물을 뿜어 올려 방죽 안에 갇힌 민물고기를 잡으려는 것 같아 논둑길을 달려 가까이 다가가 보았다. 경수 아저씨가 무자위 위에 두 발로 올라서 걸어가시듯 무자위 날개판을 밟으며 물을 방죽 턱 위로 뿜어 올리고 있었다.
동네 어른들은 아직까지는 추우신 듯 뒷산에서 주워 온 삭정이를 지게에 한 짐 가득 지고 와 오목하게 모닥불을 놓고 빙 둘러 앉아 막걸리 잔을 주고받으시며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눈길이 마주치는 순서대로 동네 어른들에게 인사를 드리자 동네에서 고추농사를 제일 많이 지시는 준섭이 아버지께서 맨 먼저 반가우신 듯 말씀하셨다.

“음, 그려 상민이왔구먼. 이번 참에 강경에 있는 중학교로 시험을 쳤다는 소리는 들었는디. 어째 합격은 했냐? 어쩌냐? 거기 들어가기가 수월치 않는 모양이던디.”

그러자 무자위 위에서 물질을 하시던 경수 아저씨가 밑을 내려다보시며 이내 말을 이으셨다.

“형님 그런 걱정일랑 붙들어 매도 될 꺼구만유. 그래도 상민이가 우리 동네 생기고 나서는 처음으로 우등상을 탓으닌게 별스레 걱정헐 필요는 없을 꺼구먼유. 그나저나 세월이 유수 같다더니 참 세월이 빠르지유. 어느 해 여름인가 상민이란 놈 코 질질 흘리고 우리 집 담벼락에서 숨어서 그 누구냐 중택란 놈하고 애호박 따다 들켜서 나한테 허벌나게 혼쭐난 게 불과 엊그제 같은디, 벌써 저맨치 커서 중학교를 들어가니...”

그렇게 두 분이서 말씀을 주고받으시는데 삼식이 아버지가 막걸리 한 사발을 건하게 들이키시고 소매 끝으로 입가를 쓱 문대시며 말을 거드셨다.

“그려 상민이 니가 이번에 큰일 치르는구나. 암튼 열심히 해서 니네 엄니 그 고생하는 것 딱해서라도 한번 보란 듯이 살어라. 우리들처럼 눈꼽만 떼면 똥지게 지고 들녘으로 달려가 죽을 둥 살 둥 모르게 땅만 파먹고 살지 말고 너희들랑은 보란 듯이 살어야헌다. 나두 동네 오고 가다 무심코 앞산 머리만 바라보면 죽은 니 애비 얼굴이 자꾸 떠올라 가슴 뭉클해지지만 어쩌것냐 다 팔자를 그리 타고났으니, 그나저나 뭔놈에 바람이 싹수머리 없는 읍네 주막집 여편네처럼 이리두 야박스럽게 불어댄다냐.”

경수 아저씨가 무자위 일을 교대하시려는지 상수 아버지에게 무자위 나무 발판 자리를 물려주시고 모닥불 앞으로 다가서시며 말씀을 하셨다.

“그러게유. 아 그래서 동네 노인네들이 겨울 들녘 바람에 벼동가리 날아간다고 안 하든감유. 그나저나 그기 주전자나 좀 주시유. 한참을 물을 품었더니 목이 마르네유. 그러구 형님은 나이 어린애헌티 그런 쓰잘데기없는 소릴해서 다 잊어번지고 살려는 어린애 속을 들쑤신데유.”

말을 끝마치신 경수 아저씨가 삼식이 아버지 얼굴을 바라보며 핀잔을 하듯 가볍게 눈을 흘기셨다. 그렇게 어른들이 술잔을 주고받으시는데 지난 가을에 장가를 간 기수 형이 말을 했다.

“그건 그렇구 아침나절에 동근이 아버지가 찾아와 오늘 저녁 먹고 밤에 방앗간 사랑방에서 얼굴 좀 보자고 그러던디, 뭔 일이라두 있는가 좀처럼 궁금허네유, 내사 참말루 잘못한 것은 읍지만서루.”

그러자 사람들 앞에 촐싹대며 나서길 좋아하시는 방앗간 일하시는 순태 아저씨가 말을 받으셨다.

“아따 이사람 눈치코치 없기는, 아! 지금이 무신 때인가 가만히 생각을 해보게나 척하면 삼척이구 툭하면 호박 떨어지는 소리지 똥인지 된장인지 꼭 찍어 봐야 아는감? 보나마나 그 머시냐 술동이 갖다놓고 이런저런 말을 잠이 오게 잔뜩 늘어놓다가 결국 끝에 가서는 그놈의 자유당 찍어달라는 소리를 하겠지 뭐, 내 말이 틀렸는감? 그리라도 해야 내년 봄에 그 뭐시냐 종구네 애비 동섭이허구 같이 동업으로 세울라구 하는 기와공장 허가라두 쉽게 따낼려고 하는 속셈이겠지 뭐.”

한동안 말씀을 늘어놓으신 순태 아저씨가 속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내려 하시자 옆에서 모닥불에 삭정이를 무르팍으로 꺾어 올려놓으시던 진식이 아버지께서 말씀하셨다.

“아 그래서 뭐시냐 동섭이가 지난번 대통령 선거 때는 대전 형무소에서 징역살이하는 지 동생 징역 좀 깎어 볼려구 그러더니, 이번에는 그 뭐시냐 동근이 애비하고 동업으로 기와공장을 차릴려구 그러니, 이번에두 어지간히 동네 설치고 다니것네 그려. 가뜩이나 돈 욕심 많은 두 사람이 아주 속궁합이 잘 맞았으니 날 새는 줄 모르고 뛰어다닐 것은 불 보듯 뻔한 거고, 허기사 손바닥만한 동네 운동이고 뭐고 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지만서루.”

진식이 아버지가 평소에도 종구네 아버지의 거만스런 행동 때문인지 거리감을 두고 지내시던 터라 얼굴을 악간 찌푸리시며 말을 마치셨다.

그러자 경수 아저씨가 한참을 무자위 위에 올라서 일을 하시느라 몸이 추우셨는지 불 앞에 바짝 다가서시며 다시 말씀을 하셨다.

“아, 형님 말 듣구 가만히 생각을 혀본니게 그 말이 맞는 성싶네유. 그래서 지난 늦가을부터 지금까장 벼랑바위 옆 자락에 있는 종금이네 밭떼기를 사서 공장인가를 지을라고 그리두 종금이네 집을 조석으로 바쁘게 들락날락했는가 보네유. 그러니 형님 말처럼 종구네 애비두 그놈에 허가증인가를 얻을려구 이제는 고삐로 맨 송아지처럼 동근이 아버지 뒤꽁무니나 졸졸 따라다니겠네유.”

그때였다. 한동안 부산에서 미장일을 하시다 겨울철 일거리가 뜸해 내려와 쉬고 계시는 천수 아버지가 한 말씀 거들고 나섰다.

“그러니 ‘굼벵이가 뒹구는 재주는 있다.’구 다 자기들 잇속 챙길려구 그러는 거지. 죽도록 운동해봤자 대통령은커녕 국회의원 손 한 번두 못 잡아보는 일을 할 일없이 허것는감? 나 같아도 맨입으로는 절대루 안 하것네 그려.”

말을 끝낸 천수네 아버지가 땅에 놓인 주전자를 흔들어 술 사발에 따르시자 동네 어른들이 주고받는 말씀들을 한참 듣고 계시던 우현이 아버지가 이어서 말씀하셨다.

“그러니 왜 아니것는가? 병수 애비 말마따나 술 몇 사발 얻어먹구 까막 고무신 한 컬레씩 얻어 신고 좋다고들 웃으면서 소갈머리 없이 막 찍어주는 사람들 보면 우습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딱 대놓고 말하기도 그렇더라구. 그건 그렇구 뭔 놈에 바람이 미친 년 속옷 뒤집듯 이리두 세게 부는지 모르것네 그려.”

거센 들녘 바람이 한껏 기승을 부렸다. 방죽이 좀 크기는 하지만 좀처럼 물이 줄어드는 것 같지 않아 겨우 반 정도도 밖에 못 퍼 올린 것 같은데, 저마다의 마음은 물밑에 웅크리고 있는 큼지막한 민물고기들을 벌써부터 기다리는 듯 했다.

동네 옥순이네 집을 거쳐 입학시험 때문에 주현이네 집에 한동안 가질 못해 한번쯤 가보려고 했다. 선거에 출마를 한 지체 높으신 양반들의 면면이 흙벽에 찰싹 달라붙은 선거 벽보가 보이는 동네 고샅길로 들어섰다. 집집마다 바람에 나뒹구는 양은그릇들과 양철통 소리가 고샅길로 심란하게 들려왔다. 그리고 빨랫줄에 매달려 바동거리던 옷가지들이 떨어져 마당 이곳저곳에 널브러져 있어 온통 스산스럽기만 했다.

어차피 그리 큰 힘을 들이지 않아도 들어갈 수 있는 후기 학교라 여유가 있어 태연한 건지 종구는 오늘도 면 소재지로 놀러간 듯 마당 안에 자전거가 보이질 않았다. 시무룩하게 집을 홀로 지키는 노란 혹부리 거위만 낯선 발자국 소리에 밥값이라도 하려는 듯 긴 목을 땅에 닿게 길게 늘이고 달려들며 울어댔다.

동네 방앗간 사랑방 문 앞에는 어른들이 들녘 방죽가에 물고기를 잡고 계셔서 그런지 그렇게 많던 신발들이 한 켤레도 보이질 않았다. 그래서 그런지 멋없이 덩치만 커다랗게 텅 비워진 방앗간 건물이 검은 연기에 잔뜩 그을려 커다랗게 입만 벌리고 있는 사랑방 아궁이와 함께 마냥 쓸쓸하게만 보였다.

흙 담장 너머 기성이 형네 집에는 방금 다녀간 우체부 아저씨가 전해 준 듯싶은 편지 한 통을 조상님 위패 모시듯 소중하게 손에 들고 방 안으로 들어가시는 아주머니의 모습이 보였다.

때 묻지 않은 하늘 아래 연자방앗간이 지난 세월의 애환을 말해 주려는 듯이 오롯하게 서 있었다. 텅 비워진지 이미 오래된 연자방앗간 안에서 외가닥 햇살이 기운 문짝 벌어진 틈 사이로 올곧게 새어 나왔다.
색 바래 기울어진 문짝 모서리에서 낮은 추녀 끝으로 촘촘하게 쳐 놓은 거미줄이 불어오는 무심한 바람의 심술에 구멍이 뻥 뚫려 마른 흙벽에 들러붙으려 하자 엉겁결에 놀란 거미가 추녀 밑으로 허겁지겁 몸을 숨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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