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글, 사진 등의 저작물에 대한 무단복제를 금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들메로 가는 길 - 17 조회 : 1,914




차마 말로 다 표현키 어려운 비극임에 틀림이 없어 민족사에 영원히 지울 수 없는 일이였다.
아무리 전쟁이 남긴 상흔이라지만 그 정도가 극에 달해 차마 그 참상을 말로써는 다 할 수 없을 정도로 극에 달했다. 그 참혹함이란 옳바른 이성을 지닌 인간이라면 도저히 말로써 표현키 어려울 정도였다.
아니! 인간의 기본적 상식으로는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일들이 우리들 주변에 비일비재했다.
그런 광란들이 같은 핏줄인 놈들에 의해 이 땅에서 공공연하게 자행되었으니 어찌 통탄하지 않을 수 있을까 싶었다. 그런 천인공노할 놈들의 만행에 치를 떨 수밖에 없었다.
이는 절대로 용납될 수 없는 비극이었다.

작달막한 마을에 그간 실로 파란만장한 일들이 몇 차례씩이나 일어났다.
그 결과 인간의 고귀한 목숨을 두 차례씩이나 아무런 꺼리낌 없이 앗아갔다.
참으로 미쳐버린 놈들의 만행을 차마 말로써는 이루다 표현키 어려울 정도였다.
분노가 극치를 이뤄 치를 떨며 하늘을 저주했던 시간들이였다.
더불어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전혀 예견할 수 없는 불분명한 시간의 흐름이 초조와 불안 속에 진행되고 있었다.

계절은 어느덧 팔월 중순으로 접어들어 초가을의 입목에 이르렀다.
요 며칠 전까지만해도 푸르딩딩하던 수수목이 입추를 지나자 누런 빛을 보이기 시작했다.
허나 끈질긴 늦 더위의 여세는 좀처럼 수그러들줄 몰랐다.
더구나 놈들에게 강제 점령된 삶의 환경은 폭염의 광기보다 더 극심했다.
그 어느 것 하나도 우리들 마음대로 할 수 없어 행동반경이 여의치 못했다.
지난날 비록 궁하게 살았을지라도 나름 자유분망하게 살았던 터였다.
그러다 급작스레 변해버린 주위 환경에 그 어느 누구도 쉽게 적응할 수 없었다.
그런 저마다의 마음처럼 답답할 정도로 잔뜩 흐려진 하늘이 거무틱틱한 모습으로 널직하게 펼쳐저 있었다.
마치 어처구니 없이 억지로 변해 버린 세태를 마냥 비웃기라도 하는 듯했다.
불투명한 일들이 가득가득 드리워져 가뜩이나 뒤숭숭한 터에 날씨마져 얄굿게 잔뜩 흐렸다.
짜증스런 더위를 뒤늦게라도 멈춰보려나 후줄근하게 비가 내릴려는 것 같았다.
그런 징후가 여실하게 보인 것은 저녁 늦무렵부터 였다.

그저 평온을 유지했었던 여늬해 같았으면 마을 사람들이 텃밭에 김장 채소를 심기 시작할 무렵이였다.
허나 서둘러 피난길에 올라 마을이 텅 비워 있는 처지였다.
주인 잃은 크고 작은 밭들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잡초만이 무성하게 자라 흉물스럽기 그지 없었다.
그래도 전란이 일어나기 전이라 에년처럼 오월 초순경에 씨앗을 뿌렸던 것 갔았다.
드문드문 크고 작은 밭두둑 가장자리엔 뻘쭘하게 키가 큰 수수들이 긴 목을 쑤욱 내밀고 있었다.
돌아올 줄 모르는 주인을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는 그모습이 참으로 애절하게 보였다.

앞산으로 이어진 나즈막한 소릿재 윗턱에 검은 먹구름이 수월찮게 몰려들기 시작했다.
어둑발이 찾아들기엔 남은 시간이 아직은 먼듯한데 주위가 온통 어둠침침해져 스산하기만 했다.
비가 올 것만 같아 서둘러 비설거지를 하시는 어머니를 도와드렸다.

지긋지긋한 전란에 마을 사람들 거의 대다수가 연고지를 찾아 제가끔씩 피난을 떠나고 말았다.
그리고 이저도 못하는 사람들만 남아 이제 그 수를 헤아릴 수 있을 정도였다.

그무렵 저마다의 심정은 대다수가 그랬을 것이다.
이저리 심란하기 그지없고 가누기 힘든 고통 속에 마음 편히 말 한마디 못하고 사는지라 차라리 비라도 실팍하게 내려주길 바랬다.
더불어 그 비가 맹위를 떨치는 폭염의 더위를 잠시동안이라도 주춤해주길 저마다 바랬다.
그로 인해 혼란에 극을 이루는 세태에 순간적으로 다소 위로가 될련지는 모를 일이었다.

허나 이미 놈들의 잔혹한 만행에 직간접으로 정신적 피해를 과격하게 입은 터이라 그 또한 실없는 일임에 틀림이 없었다.
허나 힘 없는 민초들이 사방 어느 곳을 둘러보아도 구원 받을 길이 있을리 없었다.
놈들의 포악스러움에 진저리를 치며 이네 곧 터질듯한 답답한 심정을 텅빈 하늘에라도 하소연 하고 싶었을 것이다.
어린 나 또한 억지로 강요된 시간의 흐를 속에 그 모두를 다 빼앗기고 말았다.
공산점령군의 만행에 제대로 항거도 못하고 말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옥죄여 오는 강박한 마을분위기에 억지스럽게 빠져들고 있었다.
답답하기 그지 없는 속마음으로는 차라리 줄기차게 비라도 내려주길 바랬다.
그로 인해 음산한 마을분위기를 조금이라도 뒤바꿔놓았으면 하는 생각을 수차례씩이나 해보았다.

생각했던대로 검게 짙어진 하늘에 먹구름이 양껏 뒤엉켜 밤새 비를 후줄근하게 뿌렸다.
아울러 늦여름 극성을 떠는 소낙비는 그에 걸맞게 이따금씩 천둥과 번개를 동반하였다.
그럴적마다 평소에는 조금은 쑥쓰러워 어머니의 품에 잘 안기질 않았다.
아버지께서 세상을 떠나신 후에는 더더욱 그랬다.
그런데 그날 밤에는 좀 요란스런 천둥 번개소리를 핑계 삼아 어머니의 품에 안겼다.
그리고 이세상에 단 하나뿐인 내어머니의 체취를 듬뿍 맡고 느끼며 나름 편안함 속에 잠에 들었다.

그러다 여명이 틈실하게 빛을 모아 온누리를 밝히려 하는 새벽녁이 되었다.
그무렵부터 내리던 비가 제 풀에 지친 듯 차츰차츰 멈추고 말았다.
이어 날이 밝아오자 구름들은 무슨 잘못이라도 한 것처럼 슬금슬금 몸을 움추리기 시작했다.
미리 서로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하늘 한쪽으로 떼 지어 밀려가고 있었다.
얼핏 보기에도 이젠 그 여력이 모두다 소진된 것 같이 보였다.

엊저녁 늦무렵엔 밀려오는 구름이 저 산의 멱살을 야물딱지게 움켜쥐고 억세게 들붙으려 했다.
그런데 오늘 아침엔 저산이 구름의 심술에 밤새껏 시달리느라 마음이 상했나 실실히 흐터지려는 구름들을 쉽사리 놓아주지 않으려는 것 같았다.
성그런 아침 해는 숨이 막힐 정도로 겹겹을 이룬 구름사이를 어렵게 헤집고 구름 밖으로 나왔다.
아직까지는 덜 개인 하늘에 햇살은 마음에 쏙들게 완연하지도 못했다.
햇살은 나름대로 늦을새라 부지런을 떨며 온누리를 보듬으려 했다.
그리고 능청스런 아침 해는 동구 밖 그쯤에 어정쩡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그래도 뉘 하나쯤은 꼭 챙겨주고 싶은 마음인가 들메마을을 안쓰런 눈빛으로 내려다 보고 있었다.

참으로 숱한 아픔의 세월 속에서도 계절은 어김없는 변화를 거듭하였다.
타들어 가는 늦더위는 인정머리 하나 없이 여름의 늦자락까지 앙당스레 막바지 기승을 부렸다.
그런 모지락스런 더위 속에 상혼이 엄청나게 깊었던 그 해 여름이었다.
그 여느 해에 비해 날씨가 고루지 못해 변덕이 그리도 심했다.
어머니께서는 그간 아버지의 장례를 치루시느라 심신이 지칠대로 지쳐 심할 정도로 피곤하게 보였다.
평생토록 믿고 의지하며 살아왔던 틈실한 정신적인 버팀목이였던 지아비를 하릇밤 사이 그리 무참하게 잃고 말았다.
그 슬픔이그리도 컸기에 능히 그러고도 남을만한 일이였다.
그러니 그 허탈함을 무엇에 견줄 수 있었을까 싶었다.
참으로 전혀 예견치 못한 불행을 몸소 체험한 터였다.
영원히 지울 수도 없는 상혼 속에 하루하루 그저 망연자실할 뿐이였다.
그런데 엊그제 아침부터 갑자기 심경에 변화를 일으키셨는지? 여늿날들과 달리 행동을 하셨다.
집안 앞뒤를 돌으시며 이곳저곳 부지런히 정리를 하셨다.
방문짝 문살에 붙어 있는 문종이가 내둥 멀쩡하기에 오는 추석무렵에나 문종이를 새 것으로 바르실 줄 알았다.
허나 그날 갑자기 방문짝들을 떼어 계절에 비해 좀 이른 듯 싶게 방문 문살에 문종이를 촘촘하게 바르셨다.
그리고 전혀 생각도 못했는데 닭장 문을 활짝 열고 닭들을 마당 안에 모두 풀어 놓으셨다.
그런 어머님의 모습이 너무 의아스러워 내 딴에는 조심껏 말을 건넸다.

" 아니 엄니는 뭣땀시 마당에다가 달구새끼들은 몽땅 풀어 놓는 당가요? 그러다 으디루 도망이라두 가번지면 으짤라구 그러는가 모르긋네"

"냅싸둬라,아 뮈시 그리 걱정이다냐 내둥 멀쩡허게 살아있든 사람두 하룻밤 사이에 허망허게 으디루 훌쩍 사라져 번지구마는 시상인디 조까지껏 달구새끼가 뭐그리 대단헌 거라구 그리 신경을 써 쌌는지 모르긋네 그려."

" 그래두 그렇치 공연히 넘네 남새밭에 들어가서 분탕질이라두 헐까봐서 그리지유."

" 야는 어제부터 내가 말할 때는 어디 서울을 갔다 왔는가? 아님 귓뭐시냐 귓구명에다 솜을 잔뜩 틀어 막았나? 내가 다 알아서 헌다구 안하더냐? 글구 그새 중간에 지눔들두 좁아터진데서 꽁꽁 같혀 사느라구 을매나 답답혔긋냐? 그래서 쪼까 콧바람이라두 쐬다 들어가라구 풀어준거닌께 그리 알고 냅싸둬라"

" 예, 무신 말인지 잘 알았으닝께 인자 엄니두 그만혀유"

어머니께서는 아버지의 장례가 끝난 후부터 말수가 현저하게 줄어드셨다.
그러나 말 수가 줄어 든 민큼이나 아주 작은 일에도 신경이 예민해지셨다.
그러면서도 겉으로는 지나칠 정도로 과묵하게 보였다. 그리고 마을 사람 그 어느 누구에게도 절대로 속 마음을 가볍게 들춰내지 않으셨다.
앞집 귀분이 어머니와는 지붕머리를 맞대고 친동기간처럼 숱한 세월을 더불어 살아왔다.
그런 막연한 사이인 딸고마니 어머니와도 깊은 대화를 논하지 않을려 했다.
하다못해 유일한 고향 친구 분이신 옥순이 어머니에게도 마실을 단 한 번도 가지 않으셨다.
그뿐만은 아니였으니 하루 삼시세끼 세식구가 모여 식사를할 때에도 외조부님과 그다지 말을 나누시지 않으셨다.
한편 외조부님께서도 특별한 볼일이 없으시면 방문 밖으로 나오시지 않으려 하셨다.
그리고 오랜 천식으로 잦은 기침을 하실 때도 어머니께서 신경을 쓰실까봐 예전과는 달리 무척이나 자제를 하시는 것 같았다.
어머니께서는 스스로 홀로 있는 시간을 가지려고 무단한 노력을 하시는 것 같았다.
그런 어머니를 대할려니 처음에는 나 자신도 적응키가 매우 난감하였다.
그래서 가급적이면 좋은 이야기라도 아버지에 대한 말은 절대로 꺼내지 않으려 무단히 애를 썼다.
내 나이 너무 어렸던 탓에 매사에 사고가 미흡해서 더더욱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것만이 어머니를 조금이라도 편안하게 해드리는 최선의 방법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였다.

어머니께서는 틈만나면 양지 바른 앞마루에 앉으셔 깊은 한숨 속에 마을 앞 등매산 자락만 멍하니 바라보셨다.
그 이유를 다는 몰라도 조금은 알듯 하기도 했다.
바로 그곳엔 내 어머니께서 목메이기에 그리워하는 당신의 지아버지와 일찍 애석하게 숨을 거둔 어린 딸의 요람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더러는 텅빈 마당 빨랫줄을 받치고 뻘줌하게 홀로 서 있는 바지랑대를 두 눈이 시리도로 뚜러지게 바라보셨다.
그리고 하늘을 맴돌다 잠시 쉬어가려고 바지랑대 끄트머리에 살포시 내려 앉으려는 빨간 고추 잠자리에게 눈길을 모우셨다.
그렇게라도 해서 평생지기인 아버지를 잃어버린 아품에 울컥치밀어 오르는 설음을 억누르시려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 어머니의 모습이 걱정스러워 조심스레 바라보았다. 아직은 어려 뭐라 섬세하게 표현키는 어려웠지만 틀림 없는 것이 딱 한가지 있었다.
코끝이 찡해지고 가슴에 치밀어 오르는 뜨거움이 온 몸으로 번져나는 것이였다.
그리고 버릇처럼 어김없이 울컥 치밀어 오르는 설음에 겨워 억지로 참으려 입을 꽉 틀어 막을 수밖에 없었다.그리고 잽싸게 집모퉁이를 돌아 뒷켠에 몸을 숨겼다.
그제서야 어머니 모르시게 힘들게 참았던 울분을 나지막하게 소리를 내어 터트리고 말았다.
그런 어머니께서 요즘들어 큰 변화를 일으키셨다.
뽀도시 마음에 쌓인 설음을 서둘러 바꿔보시려는 것 같아 더할 나위없이 좋았다.
어렵사리 해가 떴다고는 하지만 하늘이 마음에 썩 들도록 맑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심술맞은 구름들이 속 시원하게 자리를 비워준 것도 아니었다.
그런 탓에 다소 우중충한 날씨인지라 햇볕 또한 실팍하질 못했다.
그래도 새로 바른 새하얀 문풍지에 얍실하게라도 부딪혔다.
그러자 햇살에 반사된 문풍지가 새하얗타 못해 시프름하게 보였다.
마치 내 어머니께서 요즘들어 더욱 자주 부르시는 노래 '백치 아다다'의 슬픈 얼굴처럼 보였다.
그런데 그 노래를 부르기만 하시면 거의 끝을 맺지도 못하고 울먹이셨다.
옆에서 바라보는 내 마음도 덩다라 울적해졌다.그래서 그런 분위기를 바꿔 보려는 심사에서 일부러 격에 맞지도 않는 말을 어머니에게 하였다.
그리 해서라도 잠시나마 그런 비애적인 감정에 흠씬 젖어있는 어머니의 마음을 멈춰보려 했었다.

"근디 엄니는, 낼모레가 가실인디 무슨 초여름이라고 노래를 자꾸만 불러댔쌌는지 모르긋구먼 그려, 글구 큰비녀 큰비녀를 자꾸만 혀싸닌께 내가 얼른 커가지구 울 엄니 큰비녀가 아니구 진짜로 금비녀 꼭 해줄틴께 그리 알어."

내가 그리 말을 하면 어머니께서는 울먹거리는 가슴을 억지로 쓰러내리시고 살며시 웃으시며 말씀을 하셨다.

"오메 시상이나 오래살구 볼 일이구먼 그려 내 새끼가 금비녀를 해준당께 참말루 내사 부러울 긋이 읍내 그려 뭐니뭐니 혀싸두 내가 아들 놈 하나는 실팍하게 낳았능가 보네, 그려."

백치아다다의 노래는 하두 많이 들어 이젠 귀에 익을대로 익었다. 그저 흐물흐물하게 따라 부를 정도로 그 노래가 언제부터인지 친숙해지기 시작했었다.
허나 그노래가 음미하는 깊은 뜻은 알 수조차 없었다.
그져 어머니께서 내 아버지가 그리워 이따금씩 부르는 노래 정도로만 생각했을 뿐이었다.
더불어 뒤늦게라도 뽀도시 마음을 달래려하시는 어머니의 모습이 마냥 애틋하기만 했다.」

『초여름 산들바람 고운 볼에 스칠 때 / 검은머리 큰 비녀에 다홍치마 어여뻐라
꽃가마에 미소짓는 말 못하는 아다다여 / 차라리 모를 것을 짧은 날의 그 행복
가슴에 못 박고서 떠나 버린 님 그리워 / 별 아래 울며 새는 검은 눈에 아다다여
야속한 운명 아래 맑은 순정 보람 없이 / 비둘기의 깨어진 꿈 풀일 뽑아 잎에 물고
보금자리 쫓겨가는 애처로운 아다다여 / 산 너머 바다 건너 행복 찾아 어디 갔나
말하라 바다 물결 보았는가 갈매기떼 / 간 곳이 어디메요 대답 없는 아다다여』

「 내 사랑하는 아버지께서 살아 생전에 심심치않게 말씀하셨다.
비가 그친 뒤에 산과 들의 선연하고 정숙한 모습을 바라보라고 하셨다.
그리고 그렇게 깨끗한 모습의 삶을 살으라고 심심찮게 하신 말씀이 문득 떠올랐다.

여름내 진녹색으로 당글당글하게 매달렸던 청미래의 귀여운 알알들이 이제서야 불그스름한 빛으로 차분하게 변해가고 있었다.
내 고향 앞산은 짙게 묻어나는 신록의 운치로 계절의 민낯을 여실히 드러내었다.
그리고 어렸을 적 몸에 베이도록 맡으며 자랐던 어머니의 젖내음을 그리 빼닮은 비릿한 풀내음을 물씬 풍기고 있었다.
산마루에 빼곡하게 들어찬 참나무들도 한여름 뙤약볕에 검푸르게 잘 그을러져 꽤나 듬직하게 보였다.
산자락을 에워쌓고 있는 숲은 생기 발랄한 모습을 완연하게 드러내어 바라보기 더할 나위 없는 친밀감을 주었다.
그 숲을 양쪽으로 가르는 오솔길이 고갯마루까지 구불구불하게 이어져 그날따라 더욱 선연하게 보였다.
비가 그친 후에 하늘 아래 해말끔하게 펼쳐지는 산과 들이 그리도 탐스럽게 보였다.

산자락엔 가무스름한 크고 작은 바위들이 듬성듬성 보기 좋을 만큼 자릴 잡고 있었다.
그모두가 알맞게 조화를 이루워내니 보고 또 보게 되어 나름 안락함을 주었다.
그 바윗돌 사이로 술래잡기 하는 다복솔이 나즈막하게 몸 붙여 저마다 아담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다정다감한 채운들녘은 아주 오래 전부터 매화산의 크고 작은 비알진 산기슭과 오붓하게 맞닿아 있었다.
더불어 광활하게 펼쳐진 푸른 들녘의 꾸밈없는 자태는 자연이 남겨 놓은 가장 섬세한 걸작인 것 같았다.
그랬기에 더더욱 그랬다.
그 누구인들 자연 속 어느 것 하나라도 꼬집어 감히 경솔하게 나서 뭐라 말할 수 없었다.

소담스런 초가집들의 고태의연한 자태가 두 눈을 모아 보면 볼수록 가슴 뭉클하게 끈끈한 정을 자아내었다.
더불어 토담 위를 욕심껏 뒤덮고 있는 노란 호박꽃들이 고샅길을 수더분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렇듯이 그모든 것들이 적절하게 조화를 이뤄 아늑한
시골마을의 정취를 아낌없이 빚어냈다.

마을 앞 개울엔 맑고 께끗한 물이 저 멀리 동쪽 머리 은진면 상평 저수지로부터 고루 시원스레 흘러내렸다.
은빛 너울대는 개울물은 지칠새 없이 들메마을을 허리춤에 차고 유연하게 휘감아 돌았다.

그 개울 둑에 올망졸망한 하얀 개망초꽃들이 여름내 후드러지게 피어났었다.
그 모습이 마치 늦가을녁 뒷펀더기 정 영감네 너른 메밀 밭의 메밀꽃처럼 하얗게 장관을 이루웠다.
이제 폭염을 잘 버텨낸 개망초꽃들이 저마다 누렇게 빛바래져 꽃잎을 오무렸다.
지금처럼 막연하고 서럽지 않은 다음 해를 기약하려는 것 같았다.
더불어 더딘 발걸음하는 늦여름을 길동무 삼아 빨리 가자고 재촉하는 것처럼 보였다.

여름내 진저리나게 보았던 꽃들의 앙증맞은 모습들 조차도 이미 내 뇌리 속에는 잔인하게만 기억되었다.
어린 뇌리 속에 결코 지울 수없기에 잔인한 기억들로 가득 들어차 있었다.

거침새 없이 펼쳐진 들녘은 온 사방으로 시원스레 탁 트여 있었다.
그 들녘이 가슴을 힘껏 벌리고 있었다.
폭서의 계절이 너저분하게 남겨 놓은 흔적들을 욕심껏 끌어안아 치유하려는 듯했다.
그리고 차분한 마음을 모아 더디오는 가을을 듬직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 꾸밈없는 모든 모습들 그 어느 것 하나라도 놓치지 않고 싶었다.
그리고 내 마음 깊은 곳에 오래도록 담아 두고만 싶었다.
서편으로 널다랗게 뻗어난 들녘의 끄트머리쯤에 지평선이 아스라이 바라보였다.
검푸르게 꽉 차 보이는 논배미들의 생동적인 느낌들이 켜켜이 쌓여 아낌없는 환성을 자아내게 했다.
그렇듯이 그 모두가 자연이 섬세하게 빗어낸 걸작임에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허나 주위가 그리 아름다울지라도 면소재지를 점령한 공산주의자들로 부터 처절하게 유린당한 아픔의 상처가 송두리째 남아 있기에 모질고 모진 삶을 얼척없이 강요 당하며 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토록 짙게 몸에 와닿는 감흥 속에서도 저마다의 가슴 속에는 결코 치유될 수없는 크고 작은 아픔들이 소리없이 응고되어 가고 있었다.
어떨결에 뒤바뀐 세상을 개탄하며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끝모르게 뻗어난 들녁 군데군데의 논뻬미가 주인의 손길을 잃은채 텅 비워져 있어 그리 애처럽기만 하였다.
먹고 사는 문제보다 우선은 무지막지한 놈들로부터 목숨을 부지하려고 서둘러 피난 길에 나서다 보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전혀 물길이 닿지 않는 천수답은 일찍부터 모내기를 포기한 터였다.
이미 텅비워진채 잡풀들만 무성하게 자라나고 있었다.
거의 어린 우리들의 키 높이를 휠씬 능가할 정도로 자라 흉물스럽기 그지 없었다.
그래도 마을 사람들 모두는 주워진 여건이 험난할라도 작은 힘을 모아 더욱 참고 버텨낼 수 있기를 진정으로 바랬다.
그러기 위해 어린 나는 나름대로 서툴게나마 노력을 하려했다.
내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그 모든 진솔한 것들의 힘을 근원으로 삼으려 부단한 노력을 했다.
그리고 내 마음 속으로 갈구하는 그날이 올 때까지 억울하고 다시 억울해도 기다리며 살려고 했다.

모쪼록 바라건데 화창하게 갠 날들이 좀 오랫동안 이어지길 내심 바랬다.
그래서 불안함으로 어수선한 마을 분위기를 뒤바꿔 주었으면 했다.
내 진정코 바라는 그런 화창한 날들이 여느 해에 비해 그 해에는 턱없이 적기만 했었다.
그래도 하늘은 그리 인색하지 않게 얼굴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 보였다.

비가 그쳐 개인 날이 모두 그렿듯이 산마루턱엔 새하얀 구름들이 보기에 좋을만큼 머물러 있었다.
그로 인해 인색하지 않을만큼 친숙함이 묻어났다.
더불어 소원해지려는 하루의 일상이 조금은 덜 따분하게 느껴졌다.
솔직히 어린 마음에 미흡하게라도 점차 평온을 찾아가는 어머니의 모습이 그리도 보기 좋았다.
이는 곧 내가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정신적인 마지막 보루였기 때문이였다.
세상 어느 곳을 수없이 휘둘려보아도 믿고 의지할 곳은 오직 어머니 뿐이였다.
숱한 세월이 흐른 지금에 돌이켜 생각해보아도 그런 편협적인 생각은 그때나 지금이나 매한가지였다.
가장 신뢰했던 아버지께서 놈들의 의해 그리 어처구니 없게 세상을 떠나신 후 부터 더욱 그랬던 것 같다.

늘상 정신적인 보루는 언제나 따스하게 감싸 안아주려는 어머니의 자애로운 품안이었다.
삶이 힘들 때마다 넉살좋게 어머니의 넉넉한 품안에서 사랑의 힘에 끝없이 의존하고 싶었다.
그런 영원불변의 모성애에 대한 의존도는 철없던 유년시절이나 숱한 풍한의 세월이 흐른 지금이나 크게 다를바 없었다.
어찌보면 시차가 다를 뿐이지 이 세상 모든 부모들이 자식을 위해 평생동안 자아 헌신적으로 살아 온 삶이 그랫을 것이란 생각이 늘상 뇌리 속에 각인되여 왔다.

현시점에서 다시금 생각해봐도 헌신적인 어머니의 사랑은 연어의 삶을 빼닮은 듯하다.
연어는 비록 미물일지언정 종족번식을 위해 그 멀고 험난한 바다와 강을 거슬러 올라온다.
그리고 제자신이 어렵게 태어난 곳에서 산고를 치르고 숨을 거두고 만다.
그런 연어의 슬프디 슬픈 일생과 전혀 다를바 없었다.
스스로 먹이를 구할 수 없는 어린 새끼들에게 기꺼히 제 살점을 먹이로 내어주고만다.
끝내는 하얗게 뼈만 남기고 생을 마감하는 어미 연어의 눈물겹도록 가슴 아린 일생을 보는 것같았다.

어제가 그랬듯이 별다른 의미없는 하루 속에 정오 무렵이 되었다.
그 무렵부터 드러낸 하늘의 민낯은 얄미울 정도로 높고 푸르기만 했다.
허나 한가지 변화를 모르는 것이 언제부터인지 존재하게 되었다.
전란이 빗어낸 후유지만 어린 우리들 마음 속엔 늘상 커다란 아쉬움으로 남았다.
늘 그맘 때쯤이면 지척을 흔들며 우람하게 마을 앞을 반갑게 지났었다. 멀리서라도 눈에 팍 띄이던 검정색 증기기관차의 모습이 그리 살갑기만 했었다.
그러나 그날 그무렵까지도 기적 소리는 단 한차례 울리질 않았으니 욱중한 모습을 드러낼 일이 없었다.
그렇게 기차는 면소재지 외곽지역 산모롱이를 끼고 돌아 마을 앞으로 살갑게 제모습을 드러내질 않았다.
그래도 기다림에 겨워 긑내는 아쉬워 하고마는 그런 애틋한 어린 동심을 헤아려주는 것이 딱 하나 있었다.
이따금씩 웅장한 금속성의 프로펠러 소리를 내며 채운들녁의 하늘을 나지막하게 나르는 유엔군의 일원인 호주 공군의 쌍발 전투기였다.
언제나 그랫듯이 면소재지 앞 매화산 능선을 가파르게
너머 채운들녁으로 저공 비행을 하였다.
마을 어른들은 물론 나이가 고만고만한 어린 우리들까지도 그 군용기를 호주기라고 불렀다.
그리고 동네 어른들이 이구동성으로 하시는 말은 그랬다. 호주의 전투기가 놈들에 얶매여 고통 속에 신음하며 절망하는 우리들을 꼭 구원해준다고 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하늘 어딘가에서 프포펠라 소리가 들려오면 반가운 마음에 너나할 것 없이 소리가 나는 쪽으로 두 눈을 모았다.
그리고 마치 절망의 막다른 궁지에서 구세주를 만난 듯그리 반가워했다.
어린 우리들은 저마다 앞을 다퉈 하늘 위에 나르는 전투기를 향하여 두 손을 치켜들고 흔들어 댔다.
어찌보면 순탄하게 자라나야만 될 어린 동심이 놈들의 무차별한 비도덕적인 만행에 이미 짙뭉게져 버린 상태였다.
이미 글 속에서 누누히 열거했듯이 차마 말로는 이루 다 표현키 어려웠다.
놈들의 야만스러움이 저질러 놓은 비인간적인 만행은 이미 극에 달해 있었다.
그렇게 안하무인이였던 놈들에게도 아군의 전투기에 의한 공습은 절대적인 공포의대상이었다.
그래서 놈들은 멀리서라도 전투기의 폭음이 들려오면 점령처인 지서에 있는 싸이렌을 요란스레 울렸다.
저마다 안전한 은신처인 방공호를 찾아 피신하라고 온 사방에 아군기의 공습을 알렸다.

그런데 참으로 희안한 일이였다.
죄 지은 놈이 제일 먼저 겁을 먹느라 그런지는 모를 일이였다.
암튼 아군의 전투기가 채운들녁 상공에 출현이라도 하면 유독 놈들만이 혼비백산하여 그리 난리법석을 떨었다.
자유를 갈망하는 모든 민초들은 아군기의 장엄한 모습을 가슴이 터져나가도록 그리 반가워 했다.
더불어 어처구니 없이 빼앗긴 자유를 되찾을 수 있는 그날이 하루 빨리 돌아오길 학수고대 하였다.
그때쯤이면 아마도 잃어버린 채운들녁 땅 구석구석에 삶의 활기가 넘쳐나리라!
허나 처해진 현실은 잔혹하리만큼 너무도 냉엄했다.
그런 민초들의 간곡한 바램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했다.
꼭 축복 받아야할 이땅임에 일추의 여지가 없었다.
무능한 우리 위정자들의 무책임한 과오로 빗어진 엄청난 국가적인 재난이였다.

푸른 하늘에 걸맞지 않게 눈에 띄이는 것이 있었다.
바로 붉은 인공기가 저주스러울 정도로 나붓기고 있었다.
요즘 들어 뒷간 장독대 가장자리에 피어난 맨드라미가 그리 싫어지기 시작했다.
한 여름 뙤악볕에 꽃머리가 온통 붉디 붉게 윤기 도는 맨드라미가 그토록 예쁘게만 느껴졌었다.
곷머리의 생김새가 수탉의 붉은 벼슬을 빼닮았다 하여
일명 계관화라고도 불렀다,
허나 내 아버지를 무참히 빼앗아간 놈들의 인공기에 붉은 색깔을 볼 적마다 맨드라미가 그리 싫어졌다.

그래서 그해 칠월의 하늘은 푸르디 푸른만큼이나 늘상 천추에 한을 남길 짙은 아픔이 늘 존재했었다.
그러니 그보다 더큰 통한에 아픔이 이땅 그 어느 곳에 있을까? 하고 단장의 아픔이 역습할 때마다 매정스런 하늘을 향해 끝없는 반문을 거듭하고 싶었다.

피가 맺히도록 억울해도 참고 기다릴 수밖에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이 지구상에서 놈들이 영원히 괴멸되길 수없이 갈구했다. 그로 인해 얻어진는 자유가 보장되는 밝은 광명에 그날을 애타게 기다리며 살려고 마음을 다잡았다.
그 참된 자유를 구현하기 위해 뜨거운 심장의 고동소리가 멈출 때까지....




목록으로

 

Copyrigt By 들메로 가는 길 All right reserved.
Webpage Administrator doorisk@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