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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메로 가는 길 - 180 조회 : 1,510




끝자락 추위를 가득 아듬고 있는 만동(晩冬)의 하늘은 퍽이나 칙칙하게 보였다. 산마루턱에서부터 산기슭까지 운무(雲霧)가 자욱하게 드리워져 바라보기에 갑갑할 정도로 칙칙했다.
아직도 봄이 멀기만 한 탓인지 이따금씩 불어오는 소소리바람에 자꾸만 몸이 움츠러들었다. 오랜 겨울잠에서 깨어나려 뒤척이는 봄을, 끝자락 겨울 추위가 얄밉게 붙들고 있었다.
연초록 선연한 빛으로 움트는 여린 새싹이 태동의 숨을 크게 내쉬어 기지개를 켜기엔 아직은 좀 이른 듯싶었다. ‘졸졸졸’ 물소리 간지럽게 들리는 개울가에 버들강아지도 해맑은 아침 이슬에 겨울의 묵은 때를 씻고 함초롬한 모습으로 다가설 봄날을 마음 졸여 기다리고 있었다.
허나! 냉기 서린 찬바람이 시샘하듯 좀처럼 틈을 주지 않아 윤회(輪廻)의 길목에서 표정 잃은 계절이 멍한 모습으로 그쯤에서 주춤거리고 있었다. 그래도 해동을 부추기는지 부연 물안개가 산자락에 가득하게 머물고 나목들이 겨울잠에서 깨어나려 가볍게 몸 트림을 하는 것 같았다.

그토록 갈망했던 중학교 입학시험에 합격을 하여 그 기쁜 소식을 알리려고 아버지 산소에 가려고 했다. 이심전심(以心傳心)이라는 말처럼 어머니와 미리 주고받은 말 한마디도 없었다. 그러나 아버지 산소에 가려는 마음이 서로의 눈빛으로 전해졌다.
어제 읍내 양복점에서 교복을 주문하고 나오다 길모퉁이 나무 전봇대 앞에 과일 행상을 하시는 할머니에게 어머니가 알이 굵고 실한 사과와 배를 샀다. 그 과일을 마른 수건으로 정성스럽게 닦으시고 잘 말린 북어포와 병에 담은 막걸리를 조심스레 싸리 바구니에 담으셨다. 그리고 방안 윗목에 놓인 반닫이를 들춰 하얀 문종이 한 장을 꺼내셨다.

나염 냄새가 물씬 풍겨나는 새로 맞춘 검정색 교복 호주머니에 합격증을 구겨지지 않게 잘 챙겨 넣었다. 그리고 어제 사 온 중학교 교모에 가는 송곳으로 모자 앞머리 한복판에 구멍을 뚫어 中자로 만들어진 금빛 배지를 달아 깊숙이 눌러썼다.
그런 모습을 방벽에 걸려 있는 가운데 금이 간 거울에 얼굴을 비춰보니 처음이라 그런지 왠지 영 어색하기만 했다. 그래도 어릴 적 등짝에 업혀 늘 맡아왔던 잃어버린 내 아버지의 체취(體臭)가 그리워 사립짝 밖을 나섰다. 그렇게라도 아버지 산소에 꼭 가고만 싶었다. 아마도 그 것은 영원히 끊지 못할 혈륜에 정인 듯싶었다.
그리고 그렇게 달라진 내 모습을 보란 듯이 밖으로 내보임으로써 지난 세월 동안 종구 아버지에게 유형무형(有形無形)으로 짓눌려 살아온 아픔에 대한 무언의 작은 항거를 하고 싶었다. 그와 더불어 언젠가는 잃어버린 한 서린 그 땅을 기필코 되찾고 말겠다는 나 자신에 대한 두터운 약속을 했다.

전쟁의 포화(砲火)로 잃으신 두 다리를 목발에 기대어 사신들 어찌 탓할 수 있으랴! 남들이야 병신이라고 손가락질을 할지 몰라도 나에겐 살아 존재하시는 것만으로도 영적으로는 큰 버팀목이 되었을 것이다.
그리도 무책임하게 큰 짐을 어머니에게 홀로 떠넘기시고 먼저 세상을 뜨신 아버지에게 그동안 쌓였던 서운함을 모두 풀고 가슴 깊이 웅크렸던 못다 한 말들을 마음 편히 하고만 싶었다.

언덕배기 오르막길 등 벗은 나목 위에 아침 햇살이 탐스럽게 비추고 있었다. 산당화 덩굴 사이에 일찌감치 아침 나들이를 한 색깔 고운 멧새들이 귀엽게 몸짓을 하고 저 산도 내 숙연함을 아는지 침묵하고 있었다. 밑동 굵은 집목들 틈 사이를 비집고 오롯하게 트여진 좁다란 오솔길을 수많은 세월 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산나물과 삭정이 그리고 솔깔비(솔가리) 땔감을 구하려 길을 오르고 내렸을까 하는 생각을 문득 해보았다.
귓가에 들려오는 것은 드문드문 지저귀는 이름 모를 산새들의 울음소리와 바람에 부딪혀 흔들리는 마른 나뭇가지들이 서로 부대끼는 소리, 그리고 발자국 따라 스치는 어머니의 치맛자락 소리와 마른 풀숲이 발밑에 밟혀 오는 소리뿐이었다.

산은 그렇듯 묵언(默言)으로 고요하기 더없고 산허리를 가파르게 돌아 ‘물레치기’에 닿았다. 잡목 숲 사이에 자릴 잡고 턱 버텨 서 있는 큰 바위에 찰싹 달라붙은 거무스름한 이끼를 바라보니 세월에 흔적을 느낄 수 있었다.
산 아래로 억겁(億劫)의 세월 속에 숱한 애환이 서린 작은 마을이 고스란히 바라보였다. 더불어 마을 앞에 펼쳐진 들녘에 자그마한 서마지기 논배미가 눈 안에 그리도 쏙 들어오니 다시금 가슴이 아려왔다.
목멘 한일랑 산마루에 걸쳐 두고 들녘 논 서마지기에 온종일 허리 굽혀 피사리 하시던 내 어머니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어둑발이 찾아드는 늦저녁 어린 자식 허기진 배 달래주려 배급 받은 밀가루 물에 이겨 서둘러 밥주걱에 올려놓고 아궁이 밖으로 새어 나오는 불길을 등불 삼아 노란 놋숟갈 자루로 떼어내 끓인 손때 묻은 수제비 한 그릇에 눈물이 고였었다.

어느 해인가 봄엔 가뭄과 기근이 그리도 심했다. 뒷산 둔덕과 들녘 논둑엔 쑥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집집마다 모두 나서 논 가운데 자운영과 독사풀까지 뜯어 굶주린 배를 채워야할 정도로 삶이 절박했었다. 그리라도 배불리 먹을 수만 있었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은 그 시대를 살아왔던 우리 모두의 처절한 삶의 절규였으리라!

한여름 더위가 기승을 부리면 찬물 한 그릇에 어머니 몰래 훔친 일제 사카린을 두 알 정도를 넣고 숟가락으로 그릇 밑바닥이 닳도록 저어 마시며 달달한 그 맛에 마냥 좋아 웃었다. 어쩌다 운이 좋아 쑥을 넣고 밥솥에 찐 보리 개떡 한 덩이를 손에 드는 날엔 그 이상 더 바랄 것이 없었다.

그리 절절했던 지난 일들에 대한 생각에 젖어드는데 가파른 산비탈에 심술궂게 장난을 치는 듯 산허리를 감았다 풀기를 두세 번 하던 화물열차가 산모퉁이를 밀쳐내고 들녘 한복판으로 모습을 드러내며 힘차게 내달렸다.

밋밋한 산자락에 땅 한 평이 없어 남의 땅에 아버지의 유택(幽宅)을 모신 부담감으로 살아오며 가슴이 무거웠다. 더욱이 지난해 여름 땅임자이자 산주(山主)인 종구 아버지로부터 유택을 옮기라는 성화를 받고 말았다. 그 뒤로는 종구 아버지의 뒷그림자도 밟지 못할 정도로 가슴 졸이며 살아왔다. 세월이 흐르는 나날 동안 조여 오는 압박감에 본디 타고난 본성마저 타의에 의해 뒤바뀔 것만 같았다.

네모반듯한 상돌은커녕 그 흔한 비석 하나 없는 초라한 아버지의 분묘를 바라보려니 새삼스레 측은키만 하여 가슴이 답답했다. 하얀 문종이 위에 몇 가지 제물을 차려 놓는 어머니의 등 뒤로 가는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어머니께서도 말없이 누워만 계신 아버지에게 하시고 싶은 말씀이 여름 밤하늘에 촘촘히 떠있는 별들처럼 많았을 것이다. 내가 엎드려 절을 올리고 마음속으로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말씀 드리고 난 후에도 그때까지 어머니는 묵묵히 봉분(封墳)만 말없이 바라보고 계셨다. 그런 어머니의 숙연한 모습에서 강한 모성애만큼이나 감정에 동요되지 않으려 애를 쓰시는 강인함이 엿보였다.

비록 돌비석 하나 없이 찬바람만 매정스레 스치고 지나는 옹색한 유택이지만 저 산릉선에 아지랑이 눈 시리도록 아롱거리면 등이 굽은 할미꽃과 샛노란 민들레 그리고 자주색 제비꽃도 피어나 홀로 계신 내 아버지 조금은 덜 외로우실 것만 같았다.
마냥 슬퍼지는 마음에 자위(自慰)를 하듯 오래전 앞동산에서 병정놀이를 할 때 장난삼아 한두 번 정도 해본 기억이 나는 거수경례를 중학교 교모를 쓰고 어설픈 동작이라도 맨 처음으로 아버지께 경례를 했다.
또 오늘이 있기까지 이렇게 키워 주신 어머니에게도 경례를 올리니 그런 내 모습이 대견하면서도 어설프고 우습게 보였는지 모처럼만에 커다랗게 소릴 내어 웃고 계셨다. 어머니의 그런 여유로운 모습을 실로 오랜만에 보는지라 마음이 더할 나위 없이 흐뭇하기만 했다.

얼마 동안을 산소 주변을 차분하게 둘러본 후 어머니와 함께 산을 내려서려 했다. 인적이 끊긴 산자락에 홀로 계신 내 아버지에 대한 연민도 있었지만 언제나 마음은 산을 오를 때보다 내려설 때가 더욱 허전하기만 했다 그런 허전함이 쌓이고 쌓여 이루어진 애잔함이 마음속을 가득 채워 끝내는 두 눈자위에 진한 눈물이 어리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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