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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메로 가는 길 - 182 조회 : 1,564




영롱하게 떠오른 아침 해는 오늘도 들녘 길에 발걸음 하려나 동편 산릉선을 가뿐하게 내려섰다. 그리고 우묵한 골짝 초가집을 살포시 보듬어 주고 내친걸음에 다붓다붓하게 늘어서 있는 마을 초가지붕을 실살스럽게 아듬고 있었다.

네 식구가 살기엔 턱 없이 비좁은 단칸방이지만 서로가 서로를 제 살점처럼 보듬고 살려는 뜨거운 정이 작은 방을 가득 메워 천장(天障)에 닿을 듯 꽉 차올랐다. 곱살하게 잘 자라는 순덕이가 물에 잘 씻은 작은 달랑 무 한 조각을 암팡지게 손에 꼭 쥐고 연신 입으로 빨며, 서툰 걸음으로 밥상 앞으로 달려들어 들었다.
이제 조금만 더 있으면 밥숟가락 부딪는 소리가 또 하나 늘 것만 같았다. 아침 밥상을 물리기 바쁘게 어머니와 순덕이 어머니는 볏가마니 위에 놋그릇들을 올려놓고 잘 빻은 기와 조각 가루로 정성스럽게 그릇을 닦고 계셨다. 그리고 밤새 물에 잘 불려 놓은 쌀을 담은 대나무 소쿠리를 나에게 건네주시며 동네 방앗간에 가서 가래떡을 빼오라고 하셨다.
무엇보다도 명절에 대한 흥취를 돋우는 일은 동네 방앗간에서 ‘쿵쿵쿵쿵, 쿵쿵쿵쿵’ 떡방아를 찧는 발동기 소리가 동네 안팎으로 퍼져나가는 것이었다.. 그에 뒤질 새라 앞마을 화산리와 뒤쪽 새터마을에서도 서로 앞 다퉈 내는 발동기 소리가 산자락에 부딪쳐 커다랗게 어울림 했다.

그리고 명절 임시 열차의 운행으로 동네 앞을 지나가는 기차의 기적소리가 여느 때와는 달리 빈번하게 들려왔다. 꿈에서도 늘 그렸던 남녘 고향 땅으로 내려가는 기차 안에 시루의 콩나물처럼 빼곡하게 들어찬 승객들이 원행(遠行)에 지치기도 하련만 고향 땅 동구 밖에 기다려 줄 가족들의 모습을 그리는 설렘으로 저마다 온통 들 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게 고향은 우리들 모두에게 편안한 안식을 주는 영원한 요람임에 틀림이 없는 듯했다.

빤히 바라보이는 면소재지로 길게 이어진 소달구지 길엔 설 대목장이 서는 논산 읍내 장터로 향하는 동네 어른들이 소달구지의 워낭 소리와 함께 어울려 가고 있었다.

하늘 향해 올곧게 머릴 쳐든 미루나무가 더 없이 외롭게 보이는 철로변의 기현이네 집에선 기현이 할아버지가 차례상에 올릴 제물을 준비하는 것 같았다. 손이 귀해 어렵사리 얻은 늦둥이 자식이 전란으로 숨을 거두자, 한 서린 아픔을 조금이라도 달래주려 제사상을 차리려는 것 같았다.
하늘땅 위에 홀로 남겨진 단 한 점 혈육인 손주 녀석 기현와 함께 그라도 나물 몇 가지뿐인 단촐한 제사상의 이밥(흰 쌀밥) 위에 열십자를 그어 밥숟갈이라도 꽂아 주시려는 듯했다. 입에 물고 계신 곰방대에서 뿜어 나오는 연기 따라 한 토막 아픔을 토하듯 밭은기침 소리를 내셨다.
지난봄 앞산에서 따온 고사리와 취나물, 그리고 한 여름부터 뙤약볕에 잘 말린 호박고지와 가을에 삶아 널어 잘 말린 고구마 줄기를 햇살이 실팍하게 깃드는 마루 위에서 꼼꼼하게 챙기셨다.

방죽가 흥남이 아저씨네 집엔, 두 내외분이 신혼의 정이 듬뿍 드신 듯 사이좋게 읍내에 장 보러 가시려나, 탱자 울타리 모퉁이를 돌아 나오는 아주머니의 코끝이 뾰족하게 올라 온 흰 고무신이 선뜻 눈에 띄었다.

바람에 푸석거리는 수수깡 울타리가 기다랗게 둘러진 새로 이사를 온 담뱃대 만드는 집에서는 노인이 혼신(魂神)을 다하는 소리처럼 편철(片鐵)을 두드리는 쇠망치 소리가 또랑또랑하게 들려왔다.

동구 밖 나무다리 앞에 이르자 기성이 어머니와 민균이 어머니가 함께 큰길로 걸어오고 있었다. 물론 조상님 차례도 모셔야하지만, 또 다른 면으로는 미우니 고우니 해도 눈 안에 넣어도 안 아픈 자식인지라, 그래도 명절에 사립짝 문 앞에서 슬며시 ‘엄니’하고 부르며 찾아올 것만 같아 그런 자식 입에 무엇 하나라도 더 넣어주고 싶어 읍내 장터로 나가시는 듯했다.

아주머니들과 눈이 마주쳐 인사를 드리자 기성이형 어머니께서 말씀을 하셨다.

“아이구 이게 누구랴! 이번에 알성급제한 도령이구먼, 그려 암튼 욕 많이 봤다 중학교 들어갈라구 니 엄니랑 그 고생을 하더니, 지성이면 감천이라구 합격을 해서 세상에 그 소리 듣구 내가 내 일처럼 기쁘더라. 가래떡 빼러 가는 모양이구먼 그려. 어여 서둘러 가봐.”

남의 집 자식 일이지만 그리 기쁘기만 한지 얼굴에 웃음을 듬뿍 담으시고 발길을 재촉하시어 장터로 가는 사람들의 뒤를 쫓아가고 계셨다.

고샅길 길목 입구 진식이네 집에서는 살이 통통하게 오른 돼지가 ‘꽤에엑 꽥 꽤에엑’하며 죽는다고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그래서 얼른 담 너머로 소리 나는 쪽을 바라보았다. 돼지를 잡아 설 대목에 쓰려고 삼식이 아버지와 경수 아저씨 그리고 천수 아버지가 모두 달려들어 죽어라 발버둥 치며 발악하는 돼지 앞다리와 뒷다리를 새끼줄로 야무지게 묶으셨다.
그리고 경수아저씨와 천수 아버지가 돼지의 다리 사이에 굵은 목도채를 끼워 어깨에 걸쳐 메셨다. 삼식이 아버지와 진식이 아버지가 기다란 나무막대 저울에 시커먼 쇳덩어리 추가 달린 저울의 눈금을 바라보시자 곁에 서 계시던 진식이 어머니께서 말씀하셨다.

“삼식이 아버지 저울 눈금이라두 좀 후하게 처 주세유. 그래두 그럭저럭 키우느라 정이 들어서 그런지 막상 팔려닌게 마음이 좀 그렇네유.”

저울 눈금을 찬찬히 바라보시던 삼식이 아버지가 입에 무셨던 담배를 땅에 떨어뜨려 발로 비벼 끄시면서 말씀하셨다.

“아 그런 걱정일랑은 붙들어 매세유. 내가 이걸로 무신 큰 이득 볼라구 장사하는 것두 아니구, 그저 명절에 동내 사람들 하고 사이좋게 나눠 먹을려고 하는 것이라, 저울 눈금은 후하게 처서 계산해 드릴께유.”

새끼줄에 묶이지 않으려고 한동안 몸부림을 쳐서 그런지 돼지의 두 눈이 벌겋게 충혈이 되었고 주둥이엔 허연 거품이 섞인 침을 질질 흐르고 있어 좀 딱해 보였다.

흥정이 끝날 때까지 한참이 지난 후 삼식이 아버지가 돼지를 몰고 가려는데 자꾸만 문밖으로 나오려 하질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진식이 아버지가 대나무 회초리로 좌우 턱을 가볍게 툭툭 치시며 살살 달래어 고샅길로 나섰다. 동네 아이들은 좋은 구경거리가 생긴 듯 저마다 종알거리며 뒤를 따라 우르르 몰려가고 있었다.

종구네 집에선 어두운 새벽에 집 버리고 뛰쳐나간 딸자식이지만 그래도 피붙이라고 무릇 생각이 나면서도 동네 사라들 보기에 자기 체면이 있어 그런지 종구 아버지가 직접 나오진 못하고 종구를 시켜 동구 밖으로 이어진 소달구지 길을 슬금슬금 살펴보고 있는 듯했다.

종구네 집 맞은편 이장님 댁에는 두서너 번쯤 얼굴을 본 듯싶은 면사무소에 다니는 젊은 직원의 모습이 보였다. 이장님에게 명절 인사도 드리고 영택이 누나와 중매를 잘 서달라고 부탁을 하려고 그러는지 색깔이 고운 종이에 ‘대구 능금’이라고 인쇄된 사과 한 바구니를 들고 마당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동네 방앗간에는 쉴 새 없이 돌아가는 발동기 소리와 떡가래를 빼려고 쌀 찌는 허연 김이 방앗간 문밖으로 가득하게 새어 나왔다. 순태 아저씨는 양쪽 팔목에 하얀 광목천(廣木)의 토시를 끼고, 네모난 함석 통 안에 들어 있는 밥알들을 나무공이로 밀어 넣으시며 함석 통을 두드리셨다.
그 옆에는 지난 가을 강경읍내로 딸을 시집보낸 종금이 어머니가 소일거리 삼아 푼돈이라도 벌어 보려고 그러는지 좁다란 구멍에서 뜨거운 김 속에 삐져나오는 먹음직스런 하얀 가래떡을 가위질하여 알맞은 크기로 자르고 있었다. 쌀이 담긴 소쿠리를 순서에 맞춰 놓고 차례를 기다려 밖으로 나오니 맞은편 고샅길에서 옥순이가 주현이와 함께 쌀 소쿠리를 들고 방앗간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옥순이에게는 무슨 말이고 격 없이 할 수 있었지만, 진학을 못하는 주현이 앞에서는 학교에 관한 이야기는 피하고 싶었다. 그저 쉽게 생각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 내 친구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덜 서운하게 할 것만 같았는데 의외로 주현이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상민아, 합격한 것 축하해!”

평소에는 통 안하던 짓으로 어른스럽게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해 의아스런 생각이 들기도 했다. 늘 환한 얼굴로 매사에 긍정적인 사고로 살아가려는 옥순이는 입학시험에서 얼마만큼의 점수를 얻었는지는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고 우선 합격을 했다는 안도감에 마냥 부풀어 오르는 얼굴이 그리도 해맑아 보였다.

방앗간 안에는 모두 낯익은 얼굴들인데, 그중에 새로 이사를 온 담뱃대 만드는 집의 금실이 누나가 함지박을 머리에 이고 문으로 들어오자 동네 아주머니들이 말문을 터 보시려고 했다.

“아이구! 우리 동네에 미쓰 꼬리아 감이 이사를 왔다구 해서 누군가 하고 무지하게 궁금했었는디 지금 보닌게 이 큰애기였구먼 참 인물이 곱기두 하지 어쩜 이리두 고울까? 아마 우리 면내에서는 인물이 제일 이쁠 것 같아 앞으루 좋은 신랑감들이 줄줄이 앞에 서겄네 그려.”

그러자 금실이 누나가 부끄러운지 얼굴이 붉어져 말을 못하고 입을 꼭 다문 채 머리를 숙여 방앗간 안쪽 다른 곳을 바라보았다.

그때 내가 옥순이 얼굴을 쳐다보며 말을 했다.

“야, 옥순아! 저 누나 얼굴 정말루 되게 이쁘지? 안 그려냐? 내 생각에는 우리 동네 누나들 중에서 제일인 것 같다.”

옥순이가 그 누나를 슬쩍 한번 바라보고 입을 삐쭉이면서 말대답을 했다.

“야, 뭘 그렇게 호들갑을 떠니? 그저 그렇구 그렇게 보통 정도로 생겼구먼, 상민이 니가 정말루 이쁜 사람을 못 봐서 그렇지. 야, 읍내 나가 봐라. 미끈미끈하게 잘생긴 여자들 쌔고 쌨다닌께.”

가뜩이나 작은 입을 삐쭉거리며 나와 주현이에게 강조하는 것처럼 힘을 주어 말하는 모습이 무척이나 귀여웠다. 평소 붙임성이 좋고 넉살맞은 주현이가 방앗간 안으로 들어가더니 동네 아주머니한테 얻어왔는지 김이 무럭무럭 나는 축 늘어진 가래떡을 한 줄 가지고 나왔다. 그리고 얼른 뚝 떼어 나와 옥순이에게 나눠 줘 먹고 있는데 옥순이는 먹지도 않고 손에 들고만 있자 주현이가 조금 못 마땅한 얼굴로 말을 했다.

“야, 옥순아. 사람 성의를 무시하는 거냐? 아니면 내 손에 똥이라도 묻었냐? 나는 그래도 니들하고 같이 먹을라고 얻어왔는디, 그전에는 동네 고샅길에서도 아무 꺼나 잘만 먹고 다니더니 인제는 중학교 들어갔다고 금방 어른 흉내를 낼라구 하는구먼, 증말루 웃긴다.”

그렇게 말하는 주현이 얼굴을 보고 옥순이와 내가 같이 웃자 주현이도 같이 따라 웃었다.

설 명절 조상님 차례 준비를 하는 섣달 그믐날답게 방앗간은 점점 사람들로 붐비기 시작했다. 동네 골목길은 집집마다 음식들을 장만하느라 아궁이에 불을 지펴 지붕 위로 솟아오르는 매캐한 연기와 튀김과 전을 부치는지 기름 익어가는 냄새로 점점 짙어 가고 있었다.
상수리나무집 삼식이네에서 돼지를 잡고 있는지 ‘쾌에엑 쾌에엑’하고 돼지가 요동을 치며 내어 지르는 소리가 조금 멀리 방앗간까지 들려왔다. 철없는 동네 꼬마 녀석들은 흙 속에 크고 작은 돌들이 촘촘하게 박혀 있는 담장에 기대어 어른들 눈치를 슬슬 보며 부엌에서 몰래 훔쳐 온 전과 튀김이 그리도 맛있어 아껴 먹으려는지 흘러내리려는 콧물을 훌쩍훌쩍 들이마시며 손으로 조금씩 떼어 먹고 있었다.

동네 입구 진식이네 담벼락 추녀 밑에는 멀리 객지에 나갔다 명절 쇠러 찾아오는 가족을 기다리는 동네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읍내 장에서 돌아오는 엄마 아빠를 기다리는 코흘리개들과 서울로 간 아버지가 돌아오시길 기다리는 주현이 동생 수영이가 두 눈을 껌뻑거리고 있었다.
그렇게 기다리고 따뜻한 품안에 푹 안길 수 있는 아버지라도 있는 수영이가 더없이 부럽기만 하여 버릇처럼 앞산에 잠들고 계신 아버지의 유택을 그저 묵묵히 바라만 보았다.

시간이 해질녘으로 다가서자 고샅길 입구에 제법 많은 동네 사람들이 모여 들었다. 모두들 하나같이 벼랑바위 쪽으로 눈들을 모아 객지에 나가 있던 가족들이 돌아오길 눈 빠지게 기다리고 있었다.
뜨거운 김이 나는 가래떡이 담긴 대소쿠리를 들고 방죽가를 지나 철길 건널목을 건너려니 산모롱이를 돌아 나와 남쪽으로 가는 하행선 완행열차가 세차게 달려왔다. 맨 먼저 기관사 아저씨에게 손을 번쩍 들어 흔들어 주니 기관사 아저씨도 웃으시며 같이 손을 흔들어 주셨다.
열차를 타고 고향으로 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던지 열차 안은 물론 그 추운 날씨에도 승강구 발판을 딛고 손잡이에 매달려 가는 사람들도 있어 설 명절을 실감케 했다. 열차의 끝머리가 가물가물하게 보일 때까지 손을 계속 흔들어 주니 그 수많은 사람들이 모두 다 손을 흔들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손을 흔들어 주는 사람들이 더 많아 모처럼 가벼운 마음에 기분이 무척이나 상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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