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도하게 떠오른 아침 해는 광연(廣衍)한 들녘을 고루 아우르며 중천에 듬직하게 그 자태를 드러냈다. 아직은 겨울 끝자락 추위가 두 서너 차례는 남아 있는 듯싶은데 초조한 마음은 벌써부터 다가 올 봄이 그리도 기다려졌다. 그런 봄이 엄동(嚴冬)을 넘겨 이제 머지않아 사뿟사뿟하게(사뿐하게) 도래(到來)할 것 같았다. 그때쯤이면 복수초가 샛노란 꽃을 앙증맞게 피울 것 같아 벌써부터 마음이 설? 그 무렵 하늘은 은혜로운 단비를 고루 뿌려 그 힘으로 잎새의 뻗어남을 도와 신록(嚴冬)의 청초한 빛깔로 온 산야를 다시금 물들일 것만 같았다. 허나 자연의 이치 속에 숱한 변모(變貌)를 되풀이한 고고한 저 앞산은 늘 과묵함으로 말을 대신하고 있었다.
며칠 전부터 면내에 나도는 소문에 의하면, 정월 대보름을 맞이하여 면민들의 단합을 도모하고자 척사대회가 면사무소 마당에서 열린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동네 이장님이 동근이 아버지와 종구 아버지 그리고 동네를 대표하여 나가는 선수들이 한데 어울려 면사무소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종구가 그 뒤를 따라 자전거를 몰고 가는 모습이 보였다. 윷놀이 구경을 가는 건지 아니면 그 새침때기 석란이와 교회에서 놀려고 가는 건지 조금은 궁금했다. 들려오는 소문에는 이번 척사대회에 1등 상품으로 돼지 한 마리를 걸어 놓고, 면내 8개 부락이 시합을 한다고 했다. 지난번 학교 가을 운동회 때는 부락대항 달리기에서 우리 동네가 꼴지를 하여 같은 반 다른 동네 사는 친구들 보기에 정말 부끄러웠다. 그래서 이번 윷놀이에서는 비록 1등은 못하더라도 좀 좋은 성적을 얻어 동네가 창피하지 않게 해 주길 마음속으로 빌어 보았다.
방문과 봉창을 통해 들어온 찬연한 햇빛은 방 안을 온통 환하게 했다. 방 벽에 조금 높게 걸어 놓은 액자 하나가 눈에 띄었다. 지난 설날에 동네 둥구나무를 배경으로 우리 집 네 식구가 함께 찍은 가족사진이었다. 환한 미소를 띤 식구들의 모습이 선명하게 바라보여 마음 흐뭇했다. 그렇듯 그 작은 사진 액자 하나가 방안 분위기를 한껏 훗훗하게 바꿔 놓았다. 어머니께서는 정월 대보름날을 그냥 넘길 수 없어, 그 동안 주섬주섬 모아 두었던 잡곡들을 챙겨 시루에 오곡 찰밥을 지으셨다. 그리고 순덕이 어머니는 나와 순덕이에게 주시려는지 지난 늦가을 뒤뜰 밤나무에서 턴 밤 껍질을 벗겨 정성스럽게 깎고 계셨다.
순덕이 어머니께서는 전라북도 운장산 기스락 싸릿골 귀틀집에서 태어나셨다. 평생 화전밭을 일구며 검정 숯덩이를 구워 내는 숯막에서 일하는 가난한 부모 밑에서 외동딸로 자랐다. 무심한 하늘이 내린 천형으로 농아로 태어나 가난한 집안 형편에 남들 다 다니는 그 흔한 국민학교 근처도 가보지 못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어찌됐던 간에 까막눈을 면하려고 겨우 글은 깨우치신 것이었다. 그리고 어려서부터 산 속에 살아 온 터라 산에서 꼭 필요한 것을 찾아내는 면에선 동네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남다른 눈썰미가 있었다.
싸리울 너머로 가참하게 바라보이는 언덕배기에선 연을 날리고 있는 동네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가 제법 크게 들려왔다. 나도 윗목 구석방 벽에 걸어 놓았던 연자새와 연을 들고 언덕 위로 향했다. 언덕 위에 오르자 주현이와 서로 얼굴이 마주쳤다. 그래서 얼른 더위를 팔려고 ‘야, 주현아 !’하고 다른 날보다 일부러 목소리를 높여 크게 불렀다. 그런데도 그날따라 아무런 말대답 없이 그저 빙그레 웃기만 하면서 연을 날리고 있었다. 짐작하건데 내가 더위를 팔려고 하는지 이미 알고 있는 듯해 무척 싱겁기만 했다. 그래서 저녁나절에 옥순이에게는 꼭 더위를 팔려고 마음먹었다.
봄을 재촉하는 훈기가 조금씩 묻어나는 바람이 마지막 연날리기에 알맞을 만큼 불어왔다. 우리들 모두는 제가끔 부풀어 오르는 마음만큼이나 연자새에 감긴 실을 죄다 풀어 방패연을 하늘 높이 띠웠다. 티 없이 자라나는 우리들의 모습처럼 상층기류를 타고 하얀 연들이 창공에 드높이 떠올랐다. 그 무렵 들녘 멀리서 폭주하듯 달려와 언덕배기를 통과하는 요란한 기관차의 기적 소리와 함께 하늘로 내뿜는 검은 연기가 우리들이 띄워 놓은 연과 연 사이로 실실이 흩어지고 있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옆에서 연날리기를 구경하던 동네 꼬맹이들이 서로 앞 다투어 건널목으로 뛰어갔다. 그리고 기차를 향해 힘껏 두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검은 모자를 깊숙하게 눌러쓴 기관사 아저씨도 반갑다는 듯이 한 차례 기적소리를 힘차게 울리며 앞을 향해 내달렸다.
그해 1959년은 어린 나로서는 실로 감당키 어려운 일들이 많았던 한 해였다. 그중에서도 가장 잊혀지지 않는 것은 그해 봄 어느 날 비석골에서 있었던 종구와의 싸움 사건이었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는 종구와의 싸움 사건이 남긴 후유로 종구네 아버지가 버럭버럭 화를 내며 내 아버지의 분묘를 이장하라고 한 것이었다. 그 성화에 시달려 그날 밤 둥구나무 밑에서 어머니와 함께 서로 붙들고 울었던 아픔이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빚 독촉에 못 이겨 팔려 없어진 들녘 논 서 마지기가 주(主)를 이루는 요체(要諦)가 되었다.
그런 와중에서도 내 어린 삶에 한줄기 활력을 불러일으킨 것은 순덕이와의 만남이었다. 그로 인해 얻어진 가슴 따스한 정 또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변화였다. 그런저런 생각들이 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하늘 높이 떠오른 연을 바라보며 ‘똬리’처럼 가슴깊이 도사린 아픈 한(限)은 신이 모두 걷어 가길 바랐다. 그와 더불어 앞산 ‘물레치기’ 산비알에 잠들어 계신 내 아버지 하늘나라 좋은 곳에서 이제는 편히 쉴 수 있게 해주고 싶었다. 또한 어린 자식 키우느라 뼈마디 시리게 고생하시는 내 어머니를 더욱 건강하게 해 달라고 하늘에 빌었다. 그리고 산 설고 낯설어 사람들 눈빛조차 서먹한 낯선 곳에 그리라도 어렵사리 몸 붙여 살려고 어린 자식과 바동대시는 순덕이 어머니와 어린 내 동생 순덕이도 늘 아프지 말고 서러웠던 지난 날 만큼이나 구김살 없는 삶이 이루어지길 바랐다. 연자새에 가득 감긴 연실을 모두 다 풀어 더 멀리 더 높게 연을 하늘로 띄웠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늘에 더 한 번 빌며 케케묵은 가슴 아린 사연들을 모두 버리고 싶은 소망의 눈빛을 한데 모아 연실을 끊었다. 하늘에 두둥실 떠 있던 연이 바람 따라 너울너울 어디론가 떠 날려가고 있었다.
마을 앞 들녘 논과 밭두렁에는 동네 어른들이 모여 동네로 들어오는 액운을 막아 마을의 평온과 한 해 농사의 풍년을 기원하는 마음에 밤에 쥐불놀이를 하려고 준비를 하시는 듯했다. 지게에 볏짚을 한가득 지시고 논 두둑과 밭 두둑에 볏짚을 미리 흩뜨려 놓으셨다.
참으로 겨울 해는 더할 나위 없이 짧기만 했다. 우리들 모두가 연날리기에 열중하다보니 시간이 어찌 흘렀는지도 몰랐다. 두서너 시간의 간격을 두고 호남선 철길을 오르내리는 열차가 두 번쯤 지나가 오후 한나절이 그렇게 흘렀다. 검붉게 달아오른 저녁 해가 불그레한 빛을 온 사방에 드리우며 금강 둑 너머 세도 나루터를 향해 기울려 했다. 산릉선이 거뭇거뭇해지고 산그늘이 기다랗게 그림자를 남겼다. 들녘에도 거무스름한 어둠이 깔려 시야가 흐려졌다. 그러자 동네 아이들이 저녁밥을 먹으려 하나 둘씩 서서히 집으로 향했다. 주현이와 밤 불놀이 터에서 다시 만나기로 약속을 했다. 저녁을 먹으러 집으로 돌아오는데 검둥이가 밥값을 하려는지 착실하게 언덕마루까지 마중을 나와 마음 흐뭇하게 집으로 돌아왔다.
불빛이 꾸물거리는 호롱불의 심지를 돋아 올리고 식구들과 함께 산나물 반찬에 오곡밥을 먹었다. 포만감에 젖어 마당으로 나와 두엄 가에 다가섰다. 아랫바지 혁대를 풀고 오줌을 누는데, 오줌줄기에서 허연 김이 서려 아직도 작은 추위가 겨울 끝자락에 머뭇대는 것 같았다.
만월(滿月)은 휘영청 밝은 모습으로 쌍 소나무 위로 떠올랐다. 텅 빈 들녘이 보름 달빛에 훤하게 바라보였다. 동네 어른들이 농작물에 해를 끼치는 병충을 잡으시려고 불을 지르고 있었다. 자우룩한 연기와 함께 더러더러 환한 불빛이 온 사방으로 번져났다. 그러자 동네 아이들이 신바람이 나서 밤하늘을 향해 커다랗게 소리를 질러댔다.
앞마을 화산리와 뒷마을 새터마을에서도 짚불의 불길 높이를 더 크게 올려 서로 지지 않으려고 불을 지르고 있었다. 그야말로 온 들판이 불길에 싸여 장관을 이뤘다. 덩달아 신바람이 난 동네 아이들은 시끌벅적하게 떠들어댔다. 그리고 빈 통조림 깡통에 나뭇조각을 가득 채워 넣고 몸을 옆으로 조금 기우려 머리 위로 깡통에 달린 철사 줄을 뺑뺑 돌리고 있었다. 깡통 가장자리에 뚫어진 틈새로 새어 나오는 불꽃이 둥그런 불기둥을 이뤄 마치 폭죽처럼 밤하늘을 곱게 수놓았다.
한동안 그리도 요란스레 타오르던 들녘의 불길이 사그라지자 동네 어른들은 한두 분씩 집을 향해 들어가셨다. 그러자 동네 아이들은 이 때다 싶어 밤늦도록 불놀이를 하려는지 좀처럼 자리를 뜨지 않으려 했다. 장난기 심한 우물가 집에 사는 인식이와 영택이가 불을 더 놓고 싶은 욕심에 동네 동생 아이들 두서너 명을 데리고 동네 끝머리 집 상수네 볏짚 더미에 볏짚을 훔치러 가고 있었다.
다음날 날이 밝아 오면 가뜩이나 성질 급하신 상수 어머니께서 볏짚 도둑을 잡는다고 고샅길이 떠들썩하게 소릴 치실 것 같아 걱정이 되면서도 한편으로는 가벼운 웃음이 터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