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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메로 가는 길 - 186 조회 : 1,579




우여곡절 속에 참으로 힘들게 살아오는 동안 삶의 원동력을 두 번씩이나 잃고 말았다. 그 첫 번째가 전쟁의 참화(慘禍)가 앗아간 내 아버지였고, 그다음이 생명 줄과 같은 논 서마지기가 빚으로 남의 손에 넘겨진 것이었다.
어머니는 명절이 끝나기 무섭게 모질게 살아남아 버텨야만했기에 온몸에 통증이 심하도록 밤늦게까지 손뜨개질을 하셨다. 그런 어머니의 모습에 어린 가슴이 한없이 아려왔다. 자꾸만 쪼들리는 생활에 어머니께서 겉으로는 애써 태연한 척하시지만, 들녘 논 서 마지기 팔아 종구네 집에 진 빚을 갚고 남은 돈에서 중학교 입학 등록금 낸 후 이제 남은 돈이 얼마인지 어머니께서 굳이 말씀을 안 하셔도 훤히 다 알 수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그나마 어려운 살림살이에 큰 도움이 되었던 정부에서 주던 밀가루 배급마저 뚝 끊어져 더욱 심리적으로 위축되었다. 호롱 안에 담긴 석유가 거의 떨어져 가는지 심지 끝이 가물가물해져 가는 흐린 등잔불도 애처롭게 보이고, 마른 땅에 물이 스며들 듯 시간이 갈수록 차차 줄어만 가는 윗목에 놓인 쌀자루를 바라보니 근심으로 돌돌 뭉친 한숨이 절로 새어 나왔다.

사는 형편이 그렇다보니 지난 두 해 동안 지붕에 이엉도 못해 올렸다. 그 영향으로 방 한쪽 구석에 빗물이 새어 천장의 군데군데가 얼룩덜룩하게 배어나 바라보기에 지저분했다. 그리고 지난여름 장마 때는 삭은 볏짚 사이를 뚫고 나와 그리도 극성스레 들끓던 역겨운 누린내가 나는 노래기를 수도 없이 잡았던 좋지 않은 기억이 자꾸만 떠올랐다.
추녀 밑에 마루기둥을 타고 혐오스럽게 생긴 노래기들이 줄지어 내려오면 참으로 거북스러웠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그런 노래기를 퇴치하기 위해 종이를 자그맣게 오려 그 종이 위에 '노낙각시 속가 천리'라는 글을 써서 노래기들이 많이 나오는 곳의 벽 기둥에 붙혔다.

살아온 날들이 그리 험했던 만큼 앞으로 살아가야 할 날들도 순탄치만은 않을 것 같았다. 그런 불안감이 입학시험에 합격한 날 부터 마음이 온통 들떠 가득 차 있던 설렘을 가로막았다.
그로 인해 쉽사리 예단(豫斷)키 어려운 앞날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이 가중되었다. 그런 불안감이 가슴 깊이 옹이가 되어 커다란 파장(波長)을 온몸에 일으키니 쉽사리 잠이 들 수 없어 뒤척임으로 지새운 길고도 지루했던 지난밤이었다. 비좁은 뇌리를 파고드는 형언키 어려운 숱한 번민들이 거침없이 들락거려 감당키 어려운 아픔만을 남겼다

북상하는 새벽 열차가 어둠을 헤치고 삼라만상(森羅萬象)의 고요를 깨트렸다. 기적 소리를 온 산골짝에 날카롭게 내어 지르며 탱글탱글한 어둠의 조각들을 몸으로 걷어내려는 듯 들녘을 가르며 거침없이 내달리고 있었다.
너무도 답답한 마음에 마당에 나와 동쪽 산릉선에 점점 부옇게 터오는 여명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맑은 새벽 공기를 한껏 크게 들이마셔 심호흡을 크게 하니 폐 속 깊이 파고드는 찬 공기에 혼란스러웠던 정신이 조금이라도 맑아지는 것 같았다.

울타리 너머 먼발치에 오가는 차량의 행렬이 끊긴 신작로 가에 홀로 자릴 잡고 있는 주막집이 그리도 쓸쓸하게 보였다. 거뭇거뭇하게 아스라이 바라보이는 강경읍내엔 힘을 잃어 가는 누런 불빛이 하나둘씩 명멸해 가고 있었다. 그리고 떠나기가 서운한지 뒷산 산마루에 몸을 걸친 일그러진 달이 그리도 애잔스러웠다.

온 식구가 염원(念願)했던 입학식은 지난 6년의 세월 동안 나름대로는 소신껏 노력을 한 것에 대한 보상인 듯싶었다. 어머니께서는 입학식에 늦지 않게 아침 첫차를 타려고 서둘러 아침밥을 짓고 계셨다. 좁아터진 부엌에선 어머니와 순덕이 어머니가 부뚜막 아궁이 앞에 앉아 오붓하게 이야기를 나누시는지 순덕 어머니의 웃음 섞인 어눌한 목소리와 함께 밥 끓는 소리가 방문 너머로 들려왔다.
설 명절 전날 대목장에서 어머니가 오동통 살이 오른 조기 두 마리를 골라 오셨다. 그 중 한 마리는 설날에 아버지 제사 때에 쓰셨고, 남은 한 마리를 소금 간을 하여 독 안에 넣어 두었는데 그래도 하나뿐인 자식의 입학식 날이라고 먹이려 석쇠 위에 잘 구워 밥상 위에 놓아주셨다.

중학교 입학식에 참석하려고 서둘러 차비를 하시던 어머니가 횃대보에 소중하게 걸어 놓았던 교복을 꺼내주셨다. 그 횟대보의 하얀 옥광목 위에는 좌우 양쪽으로 두 마리 공작이 꼬리를 늘어뜨리고 있는 모습이 곱게 수놓아져 있었다.
밑창이 다 닳도록 신고 다녔던 검정 고무신이 중학교에 입학을 한 덕분으로 검정색 운동화로 변했다. 그리고 책을 쌀 때마다 천에 찌든 김칫국물의 시크무레한 냄새가 물씬 풍겨오던 청색 책보자기가 검정색 비닐 끈이 양쪽으로 달린 가방으로 교체되었다.
그리고 비닐 명찰 속 종이에 이름을 써 끼워 넣었던 마냥 촌스러웠던 이름표가 하얀 헝겊 위에 이름 석 자를 검정색 실로 맵시 있게 자수(刺繡)를 놓은 명찰로 바뀌었다. 새로 맞춘 교복에서 풋풋하게 나는 냄새가 새롯한 기분에 마음에 착 와 닿았다. 골이 조금은 좁은 듯싶은 운동화 안에 좁혀오는 발등의 감각처럼 좁은 가슴은 새로운 날들에 대한 기대감으로 꽉 차 올랐다.

사립짝문 앞까지 배웅을 나오신 순덕이 어머니께서 새롭게 변한 내 모습이 썩 마음에 드시는지 연신 웃으셨다. 그리고 내 모습이 둔덕 너머 내리막길로 사라질 때까지 서둘러 가라고 재촉을 하시는 듯 연신 손을 흔들어 주셨다.

전기 입학시험을 치룬 우리 학교가 논산, 강경 양쪽 읍내의 남녀 중학교 중에 제일 먼저 입학식을 했다. 그래서인지 생각보다는 차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지 않아 자리에 편히 앉아 갈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느긋해졌다.
그저 슬쩍 눈 한번 돌려보아도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눈으로 헤아릴 수 있을 정도로 적었다. 그래서 우리 학교가 군내에서는 명문교답게 경쟁률이 치열했던 것을 새삼스레 느낄 수 있었다.

아무리 작은 면이라고는 하지만, 여덟 개 부락에서 전기 중학교에 진학하는 학생 수가 겨우 열 명을 넘기지 못했다. 그만큼 경제적인 여건과 교육적인 여건, 그리고 그 모두를 뒷받침해 주는 사회적 구조가 턱없이 부족하기만 했던 삶을 살았던 우리들의 세대인 듯했다.
타고 내리는 승객들이 적어 넉넉하게 자리에 앉아 갈 수 있었고, 차 안이 번잡하질 않아 차내가 좀 쾌적했다.

금강 둑에 올라 읍내로 진입하는 다리를 건너 종점인 황산동 정류장에 내렸다. 길가의 작은 라디오 수리점 앞에 놓인 둥그런 쇠붙이의 확성기를 통해 밖으로 울려 퍼지는 간드러지는 여자 가수의 노랫소리가 제법 크게 들려왔다.

학교로 가는 도중 재판소 앞을 지날 때였다. 검정색 정복에 어깨에 총을 둘러멘 순경 아저씨 두 명이 몇 명 정도의 죄수들을 포승줄(捕繩줄)로 묶어 순경 한 명은 앞에서 인도를 하고, 나머지 한 명은 뒤를 따라 경계를 하며 걸어가 있었다. 하얀 포승줄에 굴비처럼 묶인 사람과 사람이 끈으로 이어지고, 통발처럼 생긴 기다란 볏짚으로 만든 용수를 얼굴이 전혀 보이질 않게 푹 눌러쓰고 있었다.
그렇게 힘없이 걸어가는 모습에 입학의 기쁨으로 들떠 있던 마음이 갑자기 착 가라앉았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무슨 죄를 그리 졌는지는 몰라도 바라보기에 무척 안타까웠다.

학교 교문 앞에는 선생님 두 분과 왼쪽 팔에 기율이라고 자수가 놓아진 완장을 두르고 허리엔 가죽 혁대를 차고, 어깨에 가죽 줄을 둘러 양 손에 흰 장갑을 끼고 있는 삼학년 기율부 선배들이 퍽 위엄스레 보였다.

교문 안으로 들어서자 잿빛 석조 건물 교무실 앞에 검정색 지프차 한 대가 보였다. 입학식이 끝난 후에 알게 되었지만, 면에서 그리 높다고 하였던 석란이 아버지보다 한참 더 높은 경찰서장이 타고 온 관용차였다.
그리고 조금 뒤에 클랙슨 소리가 들려와 뒤를 바라보았다. 검은 지프차 한 대가 또 다시 들어와 그 차에 타고 온 분이 논산 군수님이란 것은 입학식이 끝나고 난 후였다. 입학식이 끝난 다음 학교 선생님들과 여러 내빈들의 인사를 받으며 지프차를 타고 나가는 모습을 보고, 그 자리에 모여 있던 어른들이 서로 주고받으시는 말을 귀동냥하여 알게 되었다.

눈앞에 그리 높지도 낮지도 않은 채운산의 모습이 보였다. 학교 운동장 규모가 내가 다녔던 모교보다 두 배 이상 더 커 보이는 운동장 울타리엔 미루나무가 미끈미끈하게 높다랗게 솟아올라 사각형의 운동장 모양 따라 빙 둘러 있었다.
운동장 가장자리엔 새하얀 페인트칠을 곱게 한 평행봉이 자릴 잡고, 푸른 잔디가 곱게 자란 교정엔 하얀색 백엽상(百葉箱)이 눈에 띄도록 곱살하게 보였다.

운동장으로 내려서는 돌계단 옆에 서 있는 플라타너스 나뭇가지 위에 걸쳐 놓은 확성기에서 울려 퍼지는 안내 방송에 따라 높다란 지휘대에 올라선 선생님이 호루라기를 부시며 지휘를 하셨다.
우리들은 신입생을 포함하여 전교생이 운동장에 모여 질서 있게 오와 열을 맞춰 서 있었다. 군내에 있는 각급 기관에서 오신 내빈들이 자리에 착석하자, 사회를 보는 선생님의 지시에 따라 맨 먼저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고 애국가를 힘차게 불렀다.
그런데 악대의 연주소리가 장엄하게 들려와 마냥 신비롭기만 했다. 그리고 태어나 처음으로 들어 보는 합주 소리에 깊이 빠져들었다.

신입생인 일 학년생들은 교가를 채 배우지 못해 부를 수 없어 재학생인 이삼학년 선배들이교가를 다 부르도록 부자연스럽게 뻘쭘한 자세로 서 있었다. 그리고 저마다 처음으로 새롭게 듣는 우렁찬 밴드소리와 잘 닦아 빛이 번쩍번쩍하는 악기들을 연주하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며 잠시인들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입학식이 끝나고 며칠 전 예비 소집일 날에 얼굴을 보았던 담임선생님 뒤를 봄날 병아리처럼 따라 우리 반 교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키 순서에 따라 국민학교 때와는 달리 각각 혼자서 앉는 책상과 걸상의 자리를 배정 받았다. 그런데 같은 학교 출신인 동창생이 우리 반에 단 한 명도 배정이 되지 않았다. 모두가 처음 보는 낯선 얼굴들이라 무척이나 서먹하여 많은 거리감을 느꼈다.
같은 반에 배정된 같은 학교 출신인 읍내 아이들은 모두 저희들끼리만 어울려 그런 모습이 한편으로는 너무나 부럽기도 했다. 동창생 녀석들의 모습들이 하나둘씩 떠올라 벌써부터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담임선생님이 내일부터 학과 수업에 들어간다고 하셨다. 각자 시간표를 잘 보고 수업준비를 철저히 해 오라는 당부의 말씀과 학교생활에 꼭 필요한 중요 지시 사항을 듣고 교실을 나왔다. 그리고 각자 교문 밖에서 기다리시는 부모님들을 따라 읍내로 가는 신작로에 긴 행렬을 이루었다.

읍내 시가지로 향하는 입목인 황산동 사거리쯤에 이르자 어머니께서 내 얼굴을 바라보시며 말씀하셨다.

“우리 새끼, 중학교 입학하느라 욕 많이 봤으닌께 오늘 우리 아들 포식 한번 시켜줘야겠네.”

길 건너 편 역전 쪽에 있는 중국집으로 걸어갔다. 현관문에 쇠방울을 달아 놓은 듯 방울소리가 나는 중국 음식점 문을 열고 들어섰다. 그러자 카운터에 앉아 있던 키가 무척이나 작은 여자 한 분이 몸에 착 달라붙은 검정색 비단옷에 양쪽 귀에 동그랗게 금귀고리를 달고, 아주 작은 가죽신발을 신은 발로 아장아장 걸어와 우리 앞으로 다가서 말을 건넸다.

“어서 오세요.”

아직은 우리 말이 서툰 듯 발음이 무척이나 어눌하게 인사를 하여 직감적으로 동네 어른들이 말하던 중국 사람인 줄 알았다. 손님들이 음식 값을 치루는 계산대 윗벽에는 자유중국의 국부라 하는 장개석 총통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그리고 언젠가 주현이한테 빌려 본 코주부 삼국지 만화에서 보았던, ‘유비’, ‘장비’, ‘관우’가 칼과 창을 들고 있는 그림이 가게 벽에 큼직하게 걸려 있었다.

가게 안에 놓여 있는 나무의자에 앉으려 하자 어머니께서 방 안으로 들어가자고 하셨다. 짜장면 한 그릇 먹는데 번거롭게 무슨 방으로까지 들어가는가 하고 조금 이상하게 생각 했다.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는데 어머니가 짜장면 한 그릇과 무엇이라고 하는 중국 요리를 시키셨다.
얼마 동안을 방안에 앉아 기다리자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넓고 커다란 큰 접시에 튀김 같이 생긴 음식 위에 묽은 엿물을 부은 것 같은 미끈거리면서도 감칠맛이 나는 요리였다. 그 음식이 꽤나 비쌀 듯싶어 이 돈으로 차라리 식구들이 먹을 쌀을 샀으면 하는 생각을 언뜻 해보았다.
겉으로 드러낼 수 없는 부담감 속에 세상 태어나 처음으로 그런 음식을 먹어 보았다. 그토록 입에 착 들러붙던 맛있는 그 요리가 ‘탕수육’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알게 된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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