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마루에 오도카니 서 있는 철제 송전탑이 손가락 크기만큼 아렴풋하게 보여 다시금 의미모를 외로움이 슬며시 찾아 들었다. 산자락 가파른 벼랑에 곧 떨어져 내릴 것 같은 큼직한 바윗돌 사이로 애송목 머리끝이 파릇파릇하게 보였다. 그리 애태워 기다린 봄이 이제는 멀지 않은 곳에 와 있는 듯 했다.
시원스레 탁 트인 하늘에 구김살 하나 없이 당찬 모습으로 떠오른 아침 해가 푸름푸름하게 떨려오는 내 심장의 박동을 더욱 거세게 했다. 찬란하게 떠오른 해맑은 아침 해는 앞마당을 제집처럼 들어서 옹색하게 비좁은 쪽마루에 올라 방문 창호지에 새초롬히 들이비췄다.
샛터 마을에 사는 내 친구 영선이가 수채화 물감으로 곱살하게 그려 준 초가지붕 우리 집 모습의 그림 한 점이 방 벽에 다소곳하게 붙어 있어 선연한 빛을 받아 더욱 탐스레 보였다.
방 안 윗목 소반 위에 놓인 책들을 챙겨 가방에 담으려는데 소반 밑에서 고무 냄새가 물씬 풍겨나 바라보았다. 검정 코빼기 고무신 두 켤레가 가지런하게 놓여 있어 이번 선거에도 역시나 지난 국회의원 선거 때처럼 동네 고샅길에 동네 아낙네들이 신은 새 검정 고무신들의 모습이 한동안 끊임없이 보일 것 같았다.
가로세로 촘촘하게 짜놓은 두툼한 천막 천 조각으로 만든 보기에도 야물딱진 파란 군복색 책가방 가운데에 도시락을 넣고 다랭이밭 둔덕길을 지나 언덕 위에 올랐다.
엊저녁 늦게까지 발동기 소리가 들리더니 언덕 아래 큰길로 종구네 아버지가 수레 위에 예닐곱 가마니 정도로 보이는 쌀을 싣고 논산 읍내로 소달구지를 몰고 가셨다. 아마도 내일 모레로 바짝 다가선 종구 입학 등록금을 내러 가시는 듯해 보였다. 농경에 의존하고 살던 시절이라 농촌 마을에서 큰 목돈을 마련하려면 벼 방아를 찧어 읍네 싸전에서 돈과 맞바꿀 수밖에 없었다.
그런 모습에서 종구가 논산 읍네 후기 중학교에 합격한 것을 그제서야 알 수 있었다. 지난봄 그 일이 있고 난 후부터는 종구와 나 사이에 단 한마디 말이 오고 간 적 없어 종구에 대한 일은 더더욱 모를 수밖에 없었다. 한동네에서 같은 해에 서로 울음을 터트리고 태어나 같은 산자락 밭둑에 태를 묻었고, 지난 6년 동안 같은 학교에 같이 다닌 친구이건만 서로가 서로에게 스스럼없이 다가설 기회조차 없었다.
내 친구 주현이가 나에게 보여주었던 그런 아름다운 모습처럼 ‘합격을 축하한다.’ 그 말 한마디를 서로 주고받기 어려울 정도로 사이가 멀어졌다. 그리고 어쩌다 오고 가면서 눈이 마주쳐도 마치 낯선 곳에서 낯선 사람을 만난 듯이 어색하기만 했다.
서로의 내면에 깊숙하게 깔려 있는 크고 작은 감정의 응어리들이 얼마큼씩은 들어차 있었으니 퍽이나 바람직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 첫 단초(端初)가 우리들 윗세대인 부모님들로부터 발로(發露)된 실로 가슴 아픈 일들이기에 그런 크고 작은 가슴앓이가 들쑥날쑥 때 묻은 감성을 누르고 이젠 멈추기를 바랄 뿐이었다.
산자락 밑 도랑가엔 움푹움푹한 바윗돌 틈 사이로 물골이 트일락 말락 하게 질금질금 흐르고 있었다. 청초한 아침 이슬에 함초롬히 젖은 희뿌연 논 자락엔 겨울의 묵은 때를 털고 습생(濕生) 잡초(雜草)가 눈에 탁 띄는 푸른빛으로 앙증맞게 몸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논둑 가장자리 땅속에서 나와 잠이 덜 깬 개구리도 두 눈을 지그시 감고 조는 듯 마는 듯 하는 것 같았다.
송진 냄새 끈끈이 묻어나는 산바람과 풋풋하고 상큼한 흙냄새를 가득 담은 들녘 바람이 서로 눈웃음으로 마주쳐 코끝에 와 닿았다. 무릇 자연의 고마움 속에 켜켜이 묻어나는 정이 저 산 만큼이나 가슴 가득 차올라 뿌듯하기만 했다.
정부통령(正副統領) 선거(選擧)의 투표일(投票日)이 며칠 앞으로 다가왔다. 그러자 앞뒤로 온통 검정 칠을 한 목조건물 면사무소에서는 투표일과 투표장소를 알려 주면서 투표일에 기권을 하지 말고 모두 주권을 행사하여 주길 바란다는 요지의 안내 방송이 온 들녘으로 울려 퍼져 투표일이 임박한 것을 새삼 느끼게 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옥순이와 나는 지난 6년 동안도 그리 어깨를 마주하며 눈비 속을 걸어 학교에 다녔다.
햇살 따스한 봄날엔 보리밭에 쉴 새 없이 지저귀는 종달새처럼 작은 입을 모아 아름아름 노래를 서툴게라도 함께 불렀다. 그리고 등짝이 햇살에 녹아내릴 듯 열기가 이글거리던 여름날엔 옥순이의 눈빛이 조금 무료해 보이면 납작 돌로 담방담방 물수제비를 떠서 함께 웃으며 놀았다. 그러다 느닷없이 소나기라도 한차례 줄기차게 퍼부으면 근처 큰 나무 밑으로 얼른 숨어들어 빗물에 젖어 찰싹 들러붙은 머리를 서로 바라보며 천진스럽게 웃었다.
‘또로로록 또로로록’ 귀뚜라미 섧게 울어 앞산 능선에 샛별 하나 또랑또랑 떠오르면 밤늦게까지 입시 공부를 하느라 배가 고플 수밖에 없었다. 허기를 꾹 참고 견디며 창백하게 하얀 달빛 아래 동네로 걸어오는 냇둑 길 위에서 옥순이와 나는 ‘오빠생각’ 노래를 몇 번씩 반복하여 불렀다.
그리도 길게만 느껴졌던 그 겨울 제 세상을 만난 듯 흰 눈이 밤사이 소복하게 내려 온 산과 들녘을 새하얗게 수놓으면 하얀 눈 위에 알찬 추억을 남기듯 작고 앙증맞은 발자국을 또렷또렷 남겼다.
이제 또다시 3년 동안을 울퉁불퉁한 신작로 위를 마냥 덜컹대며 달리는 버스를 타고, 눈비가 와도 함께 다녀야 될 것 같아 돈독한 부모들 사이만큼이나 우리들의 우정도 지나간 세월의 깊이만큼 소리 없이 두터워지고 있었다.
종구네 소달구지가 지서 앞 건널목을 건너려고 가파른 언덕 위를 오르고 있었다. 누런 소가 조금은 힘에 겨운 듯 발걸음을 더디하자 종구네 아버지가 소머리에 바싹 달라붙어 고삐를 우악스레 조이며 소릴 치셨다.
“이랴이랴, 이랴 소.”
그리고는 손에 둥그렇게 감고 있던 밧줄로 잔등을 내려치시며 고갯길을 넘어서려고 했다. 벼랑바위 앞에는 키 작아 몸이 약한 옥순이가 걸어가고 있었다. 국민학교 때보다 한참 더 늘어난 과목들의 책들로 가방의 무게가 만만치 않은지 가방을 들고 걸어오는 한쪽의 어깨가 조금 처져 보였다.
철길 건널목 오르막길 앞에서 한참을 기다리니 옥순이가 내 앞에 다가서며 말을 건넸다.
“야, 상민아! 지금 언더배기로 넘어간 소달구지가 종구네 꺼 맞지? 아까 참에 울 엄니가 우물가에 물 길러 갔을 때 보닌께 종구네 아버지가 평소에는 잘 열어 놓지도 않던 대문짝을 양쪽으로 활짝 열고, 소달구지에다가 쌀가마니를 잔뜩 싣고 나가더라구 하던디. 우리 엄니 말로는 그렇게 쌀가마니를 많이 싣고 가는 것 보닌께, 확실하게는 모르지만 종구가 후기 시험에서도 떨어졌는디, 다른 애들이 합격을 하고도 등록금이 없어서 못 들어가는 빈자리에 보결생으로 들어가는 것 같다고 말하더라. 그러니 그 집 식구들이 입 무겁고 동네 사람들하고 속 깊은 말을 잘 안 하는 사람들이라, 합격을 한 건지 떨어진 건지 도통 알 수가 있어야지.”
그렇게 말을 건넨 옥순이가 혹시나 종구에 대하여 뭐라도 알고 있는가 싶어 옆에 같이 걸어가는 내 얼굴을 바라보며 동그란 유리 어항 속에 금붕어처럼 눈을 껌뻑거렸다.
“음! 지금 니 말 들어보닌께 니 엄니 말이 좀 맞을 수도 있을란가 모르것다. 왜냐면 종구네 아버지가 싣고 가는 쌀가마니가 대여섯 가마니 정도는 되것던디. 아무리 등록금이 비싼 학교라도 그 정도까지는 안될 건디. 뭐 그렇다고 그 학교가 금덩어리로 지은 학교도 아니구 그건 쪼매 이상하기는 하지만 확실히는 모르닌게 뭐라고 말하기가 좀 그렇다. 혹시 종구 아버지가 영택이네 아버지처럼 새장가를 갈라고 그러는 가 나도 자세히는 모르겄다.”
내가 그렇게 말을 마치자 옥순이 딴에는 그래도 좀 색다른 말이 나올까 했는데 자기 기대와는 달랐는지 그저 싱거운 표정으로 달구지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지서 맞은편 약방집 앞에 이르자 국민학교 동창생들과 중학교 선배들이 큰길가로 걸어오고 있었다. 그래서 옥순이와 하던 말을 서둘러 멈추고 선배들에게 오른손을 번쩍 들어 모자의 챙 끝머리에 손을 대고 거수경례를 했다. 그러자 그런 내 모습이 우스웠는지 내가 옥순이 단발머리를 처음으로 보고 웃었을 때처럼 옥순이도 똑같이 웃고 있었다.
버스에 올라 잽싸게 자리를 잡을 수는 있었지만 공연히 선배들의 눈치가 보여 쉽사리 자리에 앉기가 서먹하여 주춤거리다 자리를 놓쳐버렸다. 그래서 그냥 차 안에 서 가는데 차 안을 빙 둘러보니 그래도 다행스럽게 옥순이가 자리에 앉아 있었다. 울퉁불퉁한 길바닥 모습처럼 이리저리 흔들리며 달리는 차창 밖으로 미끄러지듯 뒤로 밀려나가는 신작로 가에 서 있는 가로수를 바라보았다. 오가는 차량들이 내어 뿜은 흙먼지가 나뭇가지마다 온통 가득하게 쌓여 마치 흙으로 나무를 빚어낸 것 같았다. 그리고 달려가는 탱탱한 차바퀴가 땅에 세차게 닿아 그 압력으로 튀어 나가는 자갈들이 서로 부딪치는 소리가 차창 밖에서 또렷하게 들려왔다. 버스가 힘겹게 오르막 비탈길로 이어진 금강 둑에 올라서자 울뭉줄뭉한 시내 건물들이 눈앞에 성큼 다가섰다. 그리고 강경천을 건너는 높다란 다리에, 일제 강제 점령기에 세워졌다는 여섯 개의 커다란 나무 문짝이 둥그런 쇠 도르래에 감겨 아주 굵은 쇠줄에 매달린 수문이 퍽이나 위용스럽게 보였다.
강변의 누렇게 색 바랜 푸석거리는 갈대밭에는 한가로이 놀던 물새들이 시내 진입을 앞두고 버스가 울리는 경적소리에 놀란 듯 강을 건너 읍내를 잇는 짙은 밤색 페인트칠을 한 철교 위로 힘찬 날갯짓을 하며 높다랗게 솟구쳐 올랐다. 아마도 또 다른 놀 자리를 찾아 멀리 날아가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