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고향 들메는 위치상으로 금강들녁 동북쪽 가장 황산벌 끝자락에 자리매김 하고 있었다. 더할 나위 없이 드넓은 들녘 한켠 얕트막한 산기슭에 찰싹 들러붙은 자그마한 마을이었다. 그런 작달막한 모습을 조금만 멀리서 바라보아도 여늬 마을들에 비해 왠지 모르게 작게만 보였다. 그런 모습들이 외롭게 보이다 못해 끝내에는 측은한 느낌마져 잔뜩 자아냈다.
바로 이는 그만큼 취락구조도 작았을 뿐더러 그 모든 삶에 여건이 빈약했기에 물질문명으로 부터 멀리 동떨어져 있다는 반증일 수도 있다.
더욱이 외부와 교류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 대중교통 편의 수단이 극도로 낙후 되어 고립된 분위기를 더욱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그런 제반에 이유가 있어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주변에 있는 타부락에 비해 가구의 수가 현저하게 적을 수 밖에 없었다. 그에 비례하는 인구수 또한 턱없이 적어 말 그대로 적적하기만한 마을이었다.
짧게 표현을 하자면 어느 산간 오지에 버금 갈만큼 들녘의 오지 중에 한곳을 면할 수 없었다. 더불어 교육열 또한 빈약했다. 그저 세상 살아가는데 기본적인 겨우 "까막눈"이나 면하라는 뜻으로 국민학교(초등학교)을 졸업하는 것이 당연시 하게 인식화 되였던 시기였다. 그런 연유로 그토록 열망했던 양쪽(논산과 강경)읍내에 있는 중학교에 진학하는 일은 언감생심이였다. 그래서 우리 들메마을에 읍내 중학교에 진학을 한 사람은 철로 변 외딴집에 사는 기현이 아버지와 마을 우물가에 사는 은수 형을 포함해 겨우 두명 밖에 없었다. 그렇게 자기의 의사를 묵살 당하고 진학을 포기한 대다수의 아동들이 즐비했다. 어린 나이에 하는 일이라고는 농사철에는 일손 하나라도 늘려서 품삯이라도 줄여볼려고 농삿일이나 뼈빠져라 거들게 하였다. 더욱이 겨울 철이되어 땔감이 부족할 때는 등 뒤에 지게나 또는 어깨에 망태기나 둘러메고 산에 올라 땔나무나 해오라고 성화를 하는 일이 고작이였다.
그리고 중천에 떠있던 해가 서편 하늘로 움직이려 하면 저녁에 소에게 쑤어 먹일 쇠꼴이나 베에오라고 강요 아닌 강요를 당하며 살았다.
어디 그뿐이였을까? 짧게 말을 해 조물주로부터 주어진 운명이 너무 박복한지라 부모를 잘못 만나 견디기 힘든 고통 속에 살아야 하는 아이들도 더러는 있었다. 들메마을에서 그런 딱한 처지에 놓인 아이가 한명 있었으니 나보다 나이가 한 살 작은 개오동나무 집에 사는 강구의 입장이 그러했었다. 강구 아버지는 그저 허구헌날 술에 취해 겨의 중독 상태에 빠져 살았다. 여름 장마 철에 천둥에 번개가 치고 벼락이 떨어지고 혹한의 추이에 두 귀가 떨어져 나갈 듯이 추운 겨울 날 어두컴컴한 밤에도 어린 강구에게 술 심부름을 시켰다. 술에 굶주린 탓인지 마치 아편쟁이(마약 중독자)처럼 눈이 돌아가 어서 면소재지애 있는 도갓집에 가서 막걸리를 사오라고 냅다 소리를 버럭버럭 지르며 겁을 주었다.
그런 거치른 모습을 보다보다 못한 강구 어머니는 속이 터져 문드러져도 싫은 소리 한마디를 못하고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만에 하나 그런 요구를 거절할 수도 없었지만 그 뜻에 따르지 않으면 손에 지게 작대기나 몽둥이 또는 흉기를 들고 악을 쓰면서 그나마 꼴난 살림살이를 때려부수고 심지여는 자기와 평생을 함게 하는 생의 반려자인 아내에게 손찌검과 욕설을 당연하게 퍼붓고 살았다. 겁에 잔뜩 질린 강구 어머니는 큰 죄나 지은 것처러 강구의 눈치를 보며 사정에 사정을 거듭할 수밖에 없었던 아주 어둡고 무지한 삶을 살기도 했었다. 그리 어두워 사주의 식별이 잘 않되는데도 강구에게 닳고 닳아 다 찌그런 양은 주전자를 손에 쥐어주었다. 사는 형편이 그 지경에 이르다 보니 막걸리를 사서 들고 올 돈 조차 있을리 없었다. 강구네 어머니는 그저 하기 좋은 말로 다음에 준다고 해보라는 볼멘 소리를 하며 어린 아이의 등을 떠밀다 싶히 했다.
그런 우여곡절 끝에 강구는 그리 애가 터지려하는 어머니를 차마 더는 볼 수없어 "에이 씨" 들릴락말락하게 볼멘 소리를 내뱉고 싸리짝 문을 박차고 마을로 부터 오리길이 족히 넘는 면소재지를 향해 걸어갔다. 참으로 온 주위가 어둠에 잠긴 밤길이 그리 무섭기도 했지만 그라도 지서에서 밝혀주는 전등불빛이라도 있어 어린 강구에게는 그나마 큰 위안이되었다. 너무 무서워 늘상 다니던 길이라 눈에 익었던지라 주먹을 불끈 쥐고 앞만보고 뛰어가다 숨이 차오르면 그자리에 덥석 주저앉아 숨을 가누며 쉴려다 두 눈에 광기가 서린 자기 아버지의 얼굴이 떠올라 집에 있는 어머니와 어린 동생들이 안쓰러워 다시금 우마차 길을 마음 급히 서둘러 걸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러다 운이라도 좋으면 마을 사람들 중에 갑자기 환자가 생겨 응급처치를 하려고 구급약이라도 사러 가는 동네 사람이라도 만나게 되면 의지할 수 있는 길동무가 생겨 참말로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그리 걷다보면 호남선 철길 위를 오르내리며 세차게 달리는 증기기관차의 기적소리가 퍽이나 반가웠고 기관차의 앞머리에 달린 엄청스레 큰 전등에서 비춰주는 불빛이 온 주위를 대낯처럼 밝게 해주었다. 그 불빛이 멀리 면소재지 "메꼴뫼" 마을 전체가 환희 보일 정도로 밝아 바라보기에 그저 감격스럽기만 했다. 그리 가다보면 시간상으로 대략 이십여분이 지나서야 면소재지 면사무소 앞에 있는 전씨네 도갓집에 닿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이십여분이 어린 강구에게는 두시간여 보다 더 길고 두렵기만 했다.
마냥 구김살 하나 없이 천진난만하게 자라나야 할 터이거늘 어린 강구에게는 감당키 어려운 너무도 가혹한 삶의 형태였다. 그런데 "산너머 산"이라는 말처럼 강구가 술주전자를 들고 집을 나설 때부터 어두움에 대한 두려움 보다 더한 커다란 걱정거리가 늘상 존재했다. 가슴을 짓눌러 압박하는 그런 굴절된 삶에 무게를 그런 아버지 밑에서 자식으로 태어났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일부분이나마 감당하며 살 수밖에 없었다.
그새 중간에 전씨네 도갓집을 수시로 드나들며 외상거래를 한 금액이 수월찮게 누적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다시금 돈 한푼이 없어 넉살스럽게 외상거래를 해야만 하니 실로 난감한 일이었다. 전씨네 아주머니는 꽤나 까칠한 생김새에 말투도 저작거리에 굴러다니는 막돼먹은 일반 남정네에 버금 갈 정도로 거칠었다. 더욱이 상대방의 약점을 쪽집게 처럼 집어내어 들쑤시는 전씨네 아주머니 얼굴을 대할 일이 그 때의 상황으로는 그 무엇보다 가장 큰 걱정거리이자 곤욕스런 일이였다. 강구는 그런저런 생각에 몰두하면서도 걷고 또 걸어 드디어 천씨네 도갓집에 이르렀다. 그러나 사정이 그리 궁색하다 보니 여타저타 한마디 말을 건내지도 못하고 엉거주춤하고 있는데 강구를 먼저 알아보고 말을 건낸 것은 천씨네 아줌마였다.
"아니 이게 누구랴? 그러닌께 그 뭐시냐 들곷뫼 사는 이생원인가 하는 그 양반 큰 아들 아닌가벼, 어여 오너라 왜?느네 아부지가 또 술 심부럼 시키데. 그건 그렇타 치구 어째 이번 참엔 니네 엄니가 술 받을 돈이라두 쪼메 챙겨주던감?"
역시 천씨네 아주머니는 강구를 보자마자 술값 부터 물으니 가뜩이나 이 눈치 저 눈치를 살펴야 하는 강구 입장에서는 마치 고양이에게 쫏겨 막다른 골목에 몰린 생쥐 마냥 잔뜩 주눅이 들어 움추린체 그저 말 한마디도 못하고 아주머니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 아니 야가 갑자기 꿀먹은 벙어리가 됬는감? 어째 말이 음냐? 으른이 뭔 말을 물었으면 싸게싸게 대답을 혀야지."
"울 엄니가유 시방은 돈이읍슨께 담에 준다구 외상으로 달아 노래유"
그런가 하면 그 시절 우리들의 부모들은 자식들에 교육을 못 시키는 사유에 대하여 하나 같이 말을 너무도 쉽게 하였다. 그 이유는 단지 하나 먹고 살기도 힘들어서 죽을 지경인데 쓰잘데기 없이 뭔놈에 상급학교 진학을 꿈꾸냐고 큰소리를 쳤다. 때론 버럭버럭 소리를 질러 집안 분위기를 잔뜩 흐려 놓다 못해 공포스런 강한 느낌마져 어린 우리들에게 부과시켰다. 때론 그래도 그나마 상식선에 생각이 머무는 부모들은 부모로써 다하지 못한 의무에 대하여 일말에 양심을 느끼는 것처럼 얼굴에 미안스런 표정을 지으며 그에 걸맞게 변명을 하려고만 하였다.
그런 열약하기 그지없는 환경 속에서도 유교적 사상에서 유래되었는지 "남존여비"의 사상적 관습이 만연했다. 교육문제에서도 여자는 철저하게 배제되는 불이익을 당했다. 대다수는 으레 그러려니 하며 체념 아닌 강요에 의해 열학의 꿈마져 접고 그저 그날그날을 부엌 일이나 거들면서 살다. 그러다 나이가 차 중매쟁이로 부터 중매가 들어오면 단한번 얼굴도 본 적이 없는 혼기가 찬 총각에 대하여 부모랍시고 겨우 사진 한장을 뚫어지게 보고 또 보고 나름의 어림짐작을 하여 사주단자가 오고 간 후에 혼례를 치루고 말았다. 그러니 양측 당사자들의 의사와 사고는 전혀 도외시된 채 그저 집안 내 어른들의 의지에 따라 한 인간의 평생이 좌우되었다.
당시에 시대적 상황에서는 그 모두가 당연시 되었으니 참으로 모순 중에 모순이라 아니할 수 없는 일이 비일비재 하였다. 전후 사정이 가난을 근본적 이유로 내세워 선택의 자유가 없었던 어린 아이들은 교육마져 접어야 했다. 우스게 소리로 한 마을에 상급학교인 중학교 입학시험에 합격을 하게되면 "개천에서 용 낳다"고 이구동성으로 말을 했다. 그 진의가 자기가 가르치지 못한 양심적 자책감이였는지 아니면 진정으로 부러워서 하는 말인지는 당시의 상황으로는 정말 가늠키 어려웠다.
마을의 근간을 이루는 가옥이라고는 손가락으로 셀 수 있을 정도였다 마을 앞 동쪽머리에 있는 호남선 철로 옆에 자리를 잡은 가옥 두채와, 철로를 건너 등뫼산에 단작스럽게 들붙어 있는 반쯤 쓰러져 가는 일간 초가집까지 모두 끌어 모으다 싶히 합쳐도,기껏해야 가구 수가 겨우 이십여채 밖에 되질 않았다. 그에 걸맞게 문명의 혜택으로 부터 멀리 떨어져 원만한 마을이면 다 사용하는 (일반선)인 전기불도 들어오지 않했다. 그런 탓에 저녁 늦무렵 어둠살이 깃들 때부터 동녘에 먼동이 터올 때까지 말 그대로 온 마을이 어둠 속에 푹 파묻히고 말았다. 그저 이따금씩 석유 등잔불을 켜는 집에서 새어나오는 흐맅해서 더욱 가물거리는 불빛이 고작이였다.
그런 불빛조차도 마음껏 밝히고 살 수 없었으니 저마다 우선 먹고 사는 일에 급급할 정도로 제반의 형편이 여의치 못하게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어쩌다 들에 있는 논밭 일이나 집안 일을 하느라 저녁 밥이 늦어질 때를 제외하고는, 대다수의 집들이 저마다 석유 값을 아끼려고 일찍부터 불을 꺼버렸다. 그나마 그 석유 기름을 구하기 위해서는 한참을 걸어서 면소재지에 있는 염씨네 점방으로 가는 수 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었으니 유일한 생계수단이라고는 들녘에 있는 논과 꼴난 밭더기에서 얻어지는 농산물이 전부였다. 그래서 푼돈이라도 만들려고 하면 시오리 길 강경읍내 장날이나 십리 길 논산읍내 장날에 하다 못해 푸성거리라도 가지고 나가 팔아야만 그라도 돈을 구할 수 있었다.
그러니 말 그대로 원시적인 방법에 가까운 물물교환의 형식에 틀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렇게 얻은 돈으로 읍내 장터 석유도매상에서 석유기름을 사서 혹여 깨질까봐 마치 신주단지를 모시듯 조심스럽게 다뤘다. 그렇듯 석유는 마을 사람들에게는 필히 있어야만 될 생활용품이기에 불가분한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다. 그래서 마을은 다음 날 날이 희뜩희뜩하게라도 밝을 무렵까지는 말 그대로 칠흑 같은 어둠 속으로 푹 빠져 침잠에 들고 말았다. 그나마 달이 기울지 않을 때에는 마을 모습이 조금 멀리서 바라 보아도 히끄무리하게 윤곽을 겨우 드러냈다. 그래서 석유기름을 사려고 하면 마을에서 다소 멀리 떨어져 있는 면소재지 염씨네 점방으로 가야만 구할 수 있었으니 일상생할 그 자체부터 지극히 힘들었던 그런 시절이었다. 허나 그리 빈곤의 틀을 좀처럼 벗어날 길이 없어 힘들게 살았을지라도 하늘로 부터 충만한 은혜를 받은 곳임에는 틀림이 없으니.이는 태고적 부터 지고한 자연의 섭리에 따라 그리 이루워진 것 같았다.
그런 은햬로운 땅에 여명이 걷히고 나면 저 멀리 동녘 대둔산 봉두엔,아침 해가 운해를 걷어 제치고 장엄하게 떠올랐다.
그리고 미숙한 인간의 지혜로는 도저히 표현키 어려울 정도의,찬란한 빛을 온누리에 고루 펼쳤다. 그 빛은 언제나 채운 들녘의 작은 마을 들메를 두루 감싸 안으며 축복어린 정감이 가득가득 차올라 종내에는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넘쳐났다.
비록 미물에 한계를 벗어 날 수는 없지만 그에 화답하듯 동구 밖 미루나무에 둥지를 튼 까치는,나무가지 사이를 바지런하게 넘나들며 제 딴에는 그리 성심을 다해 찬연한 아침을 서둘러 불렀다
온고지순하기가 더할 나위 없는 마을 사람들의 순박한 심성만큼이나 가지마다 자유롭고 유연하게 내려 뻗은 가느다란 버드나무 줄기가 온유한 자태를 드러내고 있었다. 비바람에 씻겨 색이 점차 바래져 가는 초가 지붕 위에 닿을 듯 말듯 애를 잔뜩 태우면,세월이 흐른만큼 엇비스듬이 기운 물레방앗간엔,무자위가 끝내 힘에 버겨운 듯 삐그덕거렸다.
마치 마을 사람들 모두의 힘든 삶의 마디마디에 얽킨 설움 쏟아지는 눈물처럼,하얀 포말들을 쉴 사이 없이 쏟아부어 내렸다.
냇둑 건너 자드락 밭에는 소담스럽기 그지 없는 갓피어난 자줏빛 감자 꽃들이 즐비했다. 그리고 개울가에 올망졸망한 모습으로 갓 피어난 개망초 하얀 꽃들을 뉘몰래 손짓하여 살며시 불렀다. 늘 그럴때쯤이면 야트막한 둔덕에 홀로 피어난 참나리 꽃도,뒤질새라 발그레한 얼굴을 쑤욱 내밀었다.
솜털 구름 사이 가볍게 비집은 성그런 햇살이,감나무 잎사귀에 살포시 내려앉아 번득거렸다. 영롱한 햇살에 흠뻑 빠져버린 아침 이슬방울이,마을 앞 둠벙에 피어난 물옥잠 잎사귀 위에 탐스럽게 자리를 잡아 편히 쉬었다. 그럴라치면 시샘하는 햇빛의 얄미운 심술에 끝내는 도르르르 굴러 떨어지고 말았다.
풋내 비릿하게 나는 너른 들녘 논배미에 푸른 벼들이 저마다 바람 결에 살살랑거려 실로 장관을 이루었다. 그맘때쯤이면 계절을 각인시키려는 듯 울어주는 뜸부기 소리가 귓가에 은연하게 들려왔다. 그쯤엔 동구 밖에서도 좀 멀리 떨어진 우묵골 어디쯤에서 쑥꾹새도 처연하게 울어주었다.
산자락 음습한 곳에 돋아난 싸리버섯이 머리를 들라치면 그에 뒤질새라 도라지가 성급하게 꽃망울을 터트려 보라빛과 하얀 꽃들을 소담스럽게 피웠다.
단 칠일동안 박복하게 주어진 삶을 위해 그리도 애태워 기다렸던 매미가, 귀가 따갑도록 울어대며 성하를 재촉했다. 그럴라치면 때를 맞춘 노오란 달개비 꽃이 곱게 피어오르는 동구 밖 방죽가엔,어미를 따라 너댓마리 논병아리가 서둘러 자맥질을 배우고 있었다. 산딸기 앞다퉈 검붉게 농익어 가는 산기슭 아래에는 후한 마을 인심처럼 맑은 물이 넉넉하게 넘쳐났다. 도랑가 빨래터엔,동네 아낙네들이 오손도손 이야기꺼리를 나누며,두드리는 빨랫방망이 소리가 마냥 정겹기만 했다. 그런데,영문도 모른 채 후둘짝 놀란 개구리가 텀벙 소리를 내며,뿌연 흙탕물 속으로 서둘러 몸을 숨겼다.
어찌보면 지극히 보편적인 이야기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고향은 어느 누구에게나 참으로 아늑한 곳임에 틀림이 없다. 물론 저마다 밭두덕에 태반을 묻은 곳이기도 하지만 사노라 힘겨울 때면 언제나 서스럼 없이 달려가 덥석 안기고 싶은 곳이다. 그런 탓에 우리들 모두는 기회가 닿을 때마다 고향을 적극적으로 예찬 한다. 비록 내 두뇌에 담을 수 있는 지혜가 지극히 미력할지언정 나 또한 애향심에는 예외일 수는 없다. 내가 알고 믿는 고향은 늘 그랬다. 내가 거친 세파에 시달려 온갖 시험에 들어 여하한 환경에 처할지라도 언제나 기꺼히 받아줄 수 있는 그런 곳이자 심적으로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영원토록 변함없는 굳건한 반석이였기 때문이다.
자유는 목숨을 걸고 수호하는 자만이 누릴 수 있는 선택적권리인 듯 싶었다. 전쟁이 남긴 참상을 앞에서도 누누히 글로써 표현한바 있다. 민족사에서 천추에 한으로 남을 한국전쟁은 공산주의자들의 기습적인 남침으로 발발되었다. 이는 그 어느 누구도 결코 부인할 수 없는 주지의 사실이다. 그 전쟁의 화마가 그토록 탐스럽던 내 고향 들메의 초자연적인 환경과, 소중한 목숨조차 여지없이 빼앗고 그 모든 여건들을 초토화 시켜 송두리째 앗아가고 말았다.
당시 시대적 상황은 그랬다. 일제 치하에서 겨우 벗어나 열강들의 틈에서 자력의 첫발을 겨우 디디려할 때였다. 그렇듯 나라 전체가 혼미를 거듭하는 속에 사회질서는 실종되어 극히 문란해졌고 경제는 밑바닥을 쳤으니 말 그대로 나라의 앞날이 한 치 앞도 못 볼 정도로 위태롭기 그지 없었다. 그러자 그 허점을 호시탐탐 노리며 전쟁 준비를 암암리에 착실하게 했던 공산주의에 종주국임을 자처하는 쏘련(러시아의 옛 이름)에 추종하는 공산분자들에게 그토록 아름다웠던 이땅이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이를 두고 무능력한 우리의 위정자들을 탓하기엔 이미 늦어도 한없이 늦어버린 터였다. 그것이 우리가 받아들여야 하는 그리 혼란에 혼란을 거듭할 수 밖에 없었던 냉혹한 그시대적 실상이였다. 그시대를 살았던 우리들 모두는 모든 삶의 근간을 놈들의 야욕에 어이없게도 송두리째 빼앗기고 말았다. 어른들은 엉겹결에 당한 참담한 현실에 어찌 대처할줄을 몰라 그저 당황할할 뿐이었지 이렇다할 묘책이 있을리 없었다. 사정이 그 지경에 이르니 하루 아침에 급변한 제반의 상황을 조금이라도 터득할 방법이 없었다.
이는 바로 내 나이가 턱없이 어렸기 때문이었다. 무슨 이유로 주변 상황이 그렇게 급작스레 뒤바뀌게 되였는지는 극히 미세하게나마 알 수 조차 없었다. 그저 동네 어른들이 개탄스럽게 주고 받는 소리를 다소 멀리 떨어져서 조용히 귀동냥 할 뿐이였다. 그토록 사리를 구분함에 있어 어린 나의 생각은 지극히 미흡하였다. 그저 어른들이 이구동성으로 귀 아프게 하는 말이 있었다.
"오메 이를 어쩐댜.온 사방간디에 난리가 나분젓네 그려,"
그러나 사태의 흐름이 옳고 그름을 떠나 단 하나 분명히 뇌리와 뼈속 깊이 지울 수 있는 일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놈들의 손에 그날 밤 무참하게 학살 당하신 내 아버지에 대한 영원히 치유될 수 없는 상처였다. 한 가정의 중추를 잃었기에 그 여파가 실로 말로써 표현키 어려울 정도로 너무도 컸었다. 더불어 체감으로 느껴지는 상실감 또한 극에 달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가사를 혼자서 떠맡게된 내 어머니의 의지력이 그리도 강건했기에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신 후 그 빈자리가 무척이나 뚜렷하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집안의 크고 작은 일들을 처리함에 있어 어머니 혼자서 도맡아야 했기 때문에 어설프기만 하여 더더욱 그랬다. 그리고 그즈음에 더욱 어머니를 곤욕스럽게 만든 것이 있었다. 외조부께서 고령이신 몸에 병색이 점점 짙어지자 평소부터 유난스레 의지를 했던 외삼촌을 부쩍 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전쟁 중이라 어찌할 수 없었다. 외삼촌이 사시는 전북 진안군 주천면 운일암,반일암이라는 산간 오지 중에 오지인 그 먼 길을 도저히 갈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더욱이 연약한 아녀자의 몸으로 선뜻 나서 걷고 또 걸어 가기에는 정말 무리였다. 그러니 시도 때도 없이 애절하게 갈구하는 외할아버지의 요구를 단 한번도 들어줄 수가 없었다. 그런 탓에 어머니는 늘 죄의식 속에 무거운 부담감을 떠안고 애태우며 살 수밖에 없어 그 고통이 극심했으리라 믿는다. 당시에 전황은 그랬다. 하늘이 무심할 정도로 살기가 등등한 놈들은 설상가상으로 그 여세를 몰아 살기등등하게 남침을 거듭하였다. 대구와 부산, 그리고 제주도를 제외한 전 국토를 거의 다 점령하다 싶이 하여 참으로 놈들의 작태가 기고만장 하였다.
밀리고 밀려 퇴각을 거듭하던 우리 국군은 마지막 보루인 낙동강에 이르러 다시금 전열을 가다듬어 최후의 방어 전선을 구축하였다. 정말로 더 이상은 뒤로 물러 설 곳이 없어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촉 같았다. 이에 온 민족이 투철한 애국심과 결사 항전의 결연한 의지로 굳게 뭉칠 수 밖에 없었다. 우리 민족사에서 그 유래를 찾아 볼 수 없을 정도로 치열한 전투가 낙동강 강물을 젊은이들의 피로 물드리며 처절하게 지속되었다.
그런 위급한 상황에 하늘도 도우려했는지 뒤늦게나마 미국을 위시한 연합군들이 참전을 하고 막강한 화력을 지닌 신형 무기가 부산항으로 들어와 실전에 배치되기 시작 하였다. 그렇듯 국가의 앞날이 풍전등화와 같은 처지에 마지막 보루인 부산 땅까지 밀려 온 우리의 무능하기 이를 데 없는 정부는 막바지 보루인 부산에서 뻔번스럽게 천운을 기다리며 유엔군의 반격에 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 더불어 전쟁의 희생물이 되지 않으려 전국 각지에서 고향을 억지로 버리고 피난 길에 올라 그 먼 남쪽 부산으로 밀려 온 피난민들의 생활은 극도로 열약하기 이를데 없었다. 산자락에는 천막을 둘러 친 피난민촌이 무질서하게 들어섰다.
속된 말로 법은 둘째치고 먼저 주저앉는 사람이 임자 노릇을 하는 그야말로 무질서한 생태가 이루워지고 있었다.
그리고 유엔군의 주축을 이루었던 미군들이 주둔하는 부대 주변에는 미군 병사들을 상대로 처절한 삶을 이어가기 위한 생계수단의 일환으로 평상시에 전혀 들어보지도 못해 생소하기만한 기지촌이라는 곳이 들어섰다.
"미군 기지촌"
참으로 이 민족의 역사에 치욕으로 남겨질 단어였다.
기지촌 주변을 에워싸고 미군을 상대로 술과 웃음을 파는 크럽과 성매매를 하는 무허가 업소가 하나 둘씩 생겨났다. 그래서 그런 업소에 종사하는 부녀자를 일컬어 양공주 또는 양갈보라는 참으로 저급한 용어가 이 땅에 처음으로 등장했다. 미군부대 철조망 밖 도로변에는 미군들의 군화를 닦아주는 일명 슈샨보이 (구두딱이)가 생겨났다. 그 모두가 전쟁이 남긴 그곳에 처해진 실상이 그대로 였다. 그러니 막말로 그들의 눈에 극도의 위기에 처한 이 나라와 굶주린 대다수 국민들의 모습이 과연 어떻게 보였을까 역사에 질문하고 싶다. 그들의 눈에는 전쟁이 끝난 우리들의 참담한 모습이 한낱 구경거리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국가적으로는 크나큰 치부를 드러내는 비참한 꼴이 되고 말았으니 참으로 수를 헤아릴 수없아 땅을 치며 개탄할 일이였다.
모두는 그저 하늘을 탓하며 그래도 살아 남기 위해 하루하루를 처절하게 보낼 수밖에 없었다.
전쟁이 끝난 후 이렇듯 세월이 적지 않게 흘렀다. 그러나 그 곳 부산의 국제 시장 자갈치 골목과 영도 다리에는 지금껏 온갖 애환의 사연들이 숱하게 서려 있다. 그로 인해 실향민들 저마다의 가슴을 아프게 하는 추억의 장소로 영원토록 남고 말았다. 더불어 모두의 뇌리 속에 살을 찢는 아픔과 통분의 장소로 전해 내려오고 있다.
참으로 자유를 수호하는 길은 투절한 정신력과 심혈을 기울여 지켜내려는 굳은 의지가 동반되여야 할 것 같았다.
그새 중간에 드문드문 그랬지만 요즘들어 들녁의 하늘에 연합군의 전투기 (일명, 호주기)가 심심치 않게 그 위용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어린 우리들은 전투기가 저공비행이라도 하면 껑충껑충 뛰며 그리 좋아했다. 그리고 그 전투기의 뒷꽁무늬의 생김새가 사다리를 닮아 사닥다리(충청,전라도에서 흔히 쓰이는 사투리,)뱅기(비행기)라고 불렀다. 그런 현상을 두고 마을 어른들은 이제서야 좋은 징조가 서서히 보이는 것 같다고 조심스럽게 입을 모우기 시작했다.
그무렵 내가 세상에 태어나 배운 말이 또 하나 있었다. 이는 바로(참 하늘도 무심하지!)라는 개탄스러움이 가득 담겨진 말이였다. 마을 어른들은 험악하기가 극에 달하다 못해 넘쳐난 전쟁의 참담한 꼴을 몸소 신물나게 겪은지라 서로 모이기만 하며 저마다 입을 모아 개탄스럽게 하는 말이였다. 두말할 나위 없이 천별을 받아 마땅한 패륜에 극치로 온갖 만행을 공공연하게 자아냈던 놈들을 하늘은 어찌 그에 합당한 응징의 벌을 내리질 않는지 참으로 통분할 일이였다. 그런 우여곡절 속에서도 마을을 지긋한 눈빛으로 내려다 보고 있는 등뫼산은 그저 더할 나위 없이 지고지순하게만 보여 피페해진 마을 사람들에게 정신적으로 큰 버팀목이 되였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었으니 놈들이 면소재지를 점령한 이후 놈들의 뜻을 따르지 않고 불의에 항거하는 몇몇 사람들을 반목한다는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이유 하나만으로 반동으로 몰아세워 "인민의 적" 이라고 내몰아 종내에는 무참하게 목숨을 앗아가고 말았다.
그런 불행한 일이 바로 들메마을 안에서도 일어나고 말았다. 그 첫번째는 면소재지가 점령 당하던 바로 그날 밤 첨단의 무기를 소지한 놈들과의 교전에서 겨우 끝이 뾰족한 죽창을 들고 나섰다 억울하게 희생 당하신 내 아버지의 죽음이였고 바로 그 다음이 마을 구장 일을 보면서 음,양으로 인민을 착취했다는 턱 없는 구실로 끌려가 면소재지 마당에서 인민재판이라는 어처구니 없는 절차를 거쳐 종내에는 매화산 골짜기에서 총살을 당해 처참하게 죽음을 당한 비참한 일이였다. 그러니 이 어찌 땅을 치며 통곡 할 일이 아니겠냐고 온 만물들에게 목메여 소리치고 싶을 뿐이였다.